문명 세계에서 미국만큼 철학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나라는 아마 없을 것이다. 미국인들은 그들 자신의 고유한 철학 학파를 갖고 있지 않을뿐더러 유럽의 여러 학파에 대하여도 관심이 없다. 그렇지만 미국인들 거의 모두가 동일한 사고방식을 갖고 있고, 그 바탕의 법칙도 동일한 것에 의존하고 있다. 그들은 그러한 법칙에 어떤 정의를 내리려 애쓰는 일도 없이 전 국민이 공통되는 철학적 방법을 갖고 있는 것이다. 미국인들이 갖고 있는 철학적 방법의 특징은 이렇다. 제도나 관습, 가훈이나 계급상의 견해, 민족적 편견 등으로부터 탈피하고, 전통을 단지 하나의 정보수단만, 현실을 개선하기 위한 여러 참고할 만한 교훈중의 하나만으로 받아들이는 것, 수단이나 방법에 구애됨이 없이 결과를 추구하는 것, 그리고 형식을 통해서 본질
샤츠슈나이더(E. E. Schattschneider, 1892∼1971, 이하 그의 애칭인 샤츠로 표기)의 ≪절반의 인민주권≫의 부제는 ‘A Realist's View of Democracy in America'입니다. 샤츠는 현실주의자(Realist)입니다. 이상적인 민주주의는 어떤 모습이어야 하고 그러한 민주주의에 합당한 시민의 능력과 역할을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라는 시각이 아니라, 현실의 민주주의와 인민은 실제 어떠한가 라는 시각으로부터 민주주의 이론을 시작하여야 한다고 그는 주장합니다.샤츠의 현실 민주주의와 인민에 대한 태도는 슘페터(Joseph Schumpeter, 1883∼1950)의 그것과 유사합니다. 샤츠도 슘페터처럼 현실에서 대의․정당민주주의는 필연이며, 정치의 실질적 주체는 인민이
베버(Max Weber, 1864∼1920)와 슘페터(Joseph Schumpeter, 1883∼1950)는 19세기말 이후부터 바뀌기 시작하는 새로운 정치 양상을 예리하게 통찰하였습니다. 보통선거권의 확립으로 대변되는 민주주의 시대의 정치는 인민주권의 실질화나 시민들의 정치참여 확대를 가져올 것이라는 일반적 예상과 전혀 다르게 진행되었습니다. 선거권의 확대는 오히려 ‘직업정치인’과 그들의 결사체인 ‘정당’의 등장을 가져왔고, 이는 대중의 정치적 무관심과 소외, 전문적 정치집단의 정치과정 주도, 정당에 대한 신임투표적 성격으로의 선거의 변질, 상업적 정치경쟁이라는 이전에 없던 새로운 정치 양상을 가져왔습니다.이러한 정치 양상의 변화는 그들에게 기존의 인민자치적(고대적) 또는 자유주의적(근대적) 민주주
경제학 용어 중에 ‘과점( 寡占, oligopoly)’이라는 용어가 있습니다. 외형적으로는 완전경쟁 시장처럼 보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소수의 상품 판매자나 공급자가 시장을 지배하고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고전파 경제학자들은 시장을 완전경쟁시장과 독점시장으로 구분하여 이의 특징과 장단점을 비교 설명하였지만, 사실 완전경쟁시장과 독점시장은 경제학자들의 머릿 속에만 있는 교과서적 구성물에 불과하거나 현실적으로는 극히 예외적인 상황에서만 존재합니다. 현실에서는 특히 현대의 주요한 시장에서는 과점형태가 보다 일상적입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몇몇 재벌들이 분점하고 있는 가전제품, 휴대폰, 통신서비스 시장 등이 대표적인 과점시장입니다.이런 과점기업과 과점시장은 몇 가지 특징이 있다고 합니다. 과점기업들은 통상 새로운
경제고전의 하나로서 ≪자본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1942)에 담겨져 있는 슘페터(Joseph Schumpeter, 1883∼1950)의 주장은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우선 그는 경제성장과 사회발전의 원동력으로 ‘기업가 정신((Entrepreneur)’과 ‘혁신(Innovation)’을 강조합니다. 자신의 제국을 건설하려는 영웅적 기업가들이 모험적으로 새로운 상품․기술․조직 등을 도입하여 혁신에 성공하면, 기존의 기업들과 시장 판도는 일대 혼란에 빠져 뒤쳐진 기업들은 도태되고, 혁신 기업가는 새로운 거대기업을 구축하고 막대한 독점 이윤을 취득하게 되고, 이러한 기업가의 선도적인 혁신은 여타 기업과 산업에 전파되어 전체 자본주의의 비약적 성장을 이끈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를 ‘창조적 파괴(Crea
슘페터(Joseph Schumpeter, 1883∼1950)는 1883년 옛 합스부르크 제국(지금의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났습니다. 1883년은 경제학사에 의미 있는 해입니다. 그 해에 사회주의 경제학자 마르크스(Karl Marx, 1818∼1883)가 죽었고, 정부에 의한 적극적인 관리 경제를 주장한 케인즈(John Maynard Keynes, 1883∼1946)가 태어났습니다. 경제학사에서 한 획을 그은 인물들이 같은 해에 운명을 달리하였던 것입니다.그들의 우연한 운명처럼, 슘페터의 대표 저서로 오늘 살펴볼 ≪자본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1942)도 마르크스와 케인즈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위 책의 절반은 경제 이야기인데, 그 중 절반은 마르크스주의 경제이론에 대한 비판으로 나머지 절반은 케
마르크스에게 사회주의는 개인적 도덕이나 사회 정의 차원의 문제가 아닙니다. 비록 그의 사상의 첫 출발은 착취에 대한 반감이나 평등에 대한 선호에서 비롯된 것일지라도, 그는 사회주의를 개인이나 대중의 도덕적 선호나 정의감각과 연계시키는 것을 거부하였고, 그렇게 연계시키려는 시도에 대하여 계속적으로 경계하고 있습니다.마르크스는 ≪공산당 선언≫에서 자본주의를 그대로 둔 채 그 폐해만을 치료하려는 인도주의자․노동개혁가․자선사업가 등을 부르주아적 사회주의자로 규정하여 배격하고, 대중에 대한 도덕적 설득을 통한 이상주의적 합의로 사회주의를 달성하려 했던 생시몽․푸리에․오웬을 공상적 사회주의자로 규정하여 이 또한 배격하고 있습니다.또한 마르크스는 생전에 라살레주의자들과도 격렬히 투쟁하였습니다. 라살레(Fe
마르크스주의는 민주적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민주주의를 보는 시각에 따라 극명하게 달라질 수 있습니다. 입헌주의, 시민의 자유, 언론의 자유, 보통선거권, 대의 정부, 권력분립, 경쟁적 정당체계...... 우리는 어떠한 국가가 민주적이냐 비민주적이냐를 따질 때, 이러한 원리와 제도가 실제로 실시되고 있느냐를 확인합니다.이러한 원리와 제도들은 현대 민주주의의 근간을 이루는 자유주의적․절차적 기본 전제들입니다. 이러한 전제들에서 바라본다면 마르크스주의는 이론적․실천적으로 충분히 만족스럽지는 못합니다. 흔히 현대의 우리가 민주주의의 기본적 전제라고 알고 있는 이러한 원리와 제도에 대하여 마르크스와 그의 후예들은 한편으로 비웃고 한편으로 무관심했습니다. 20세기 전반기의 마르크스주의자중 이에 대한 유일한
1899년에 출간된 베른슈타인(Eduard Bernstein, 1850~1932)의 ≪사회주의의 전제와 사회민주당의 과제≫와 로자 룩셈부르크(Rosa Luxemburg, 1871∼1919)의 ≪사회개혁이냐 혁명이냐≫는 개혁적 사회주의와 혁명적 사회주의의 역사적 분기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이후 사회주의자들은 개혁적 / 혁명적 사회주의자로 나뉘어 부르주아 정부에의 참여, 부르주아 정당과의 협력, 노동자 총파업, 제국주의와 식민지 정책, 전쟁(제1차 세계대전) 대응 등의 문제를 놓고 이론적․실천적 다툼을 벌이게 됩니다. 서로 공존하며 대립․경쟁하던 두 세력이 결정적으로 서로 분리되어 적대적 관계가 된 것은 제1차 세계대전에 대한 대응과 러시아 혁명의 성공이었습니다.임박한 세계대전에 대하여 개
베른슈타인은 ≪사회주의의 전제와 사회민주당의 과제≫(1899)에서 마르크스가 주장하는 자본주의 붕괴와 사회주의 도래의 필연성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또한 그는 사회주의로의 평화적․점진적 이행의 가능성과 오히려 그러한 이행의 바람직함을 주장하면서도, 마르크스의 권위를 빌려, 즉 마르크스의 저작 중에서 그러한 이행 가능성을 부정하지 않는 표현들을 인용하는 방식으로 이의 타당성을 강변하고 있습니다. 베른슈타인은 자신의 주장이 마르크스의 특정한 경향을 강조한 것이거나 새로운 현실에 적응하는 마르크스주의로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로자, “베른슈타인은 마르크스적인가?”폴란드 출신의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자인 로자 룩셈부르크(Rosa Luxemburg, 1871∼1919)는 이러한 베른슈타
지난 세기에 좌파 혹은 사회주의에는 크게 두 가지 모델이 있었습니다. 구소련과 동유럽의 ‘국가사회주의’와 서유럽의 사회민주당․노동당 계열의 ‘사회민주주의’ 모델이 그것입니다. 전자의 모델은 지난 세기말에 종말을 고하였습니다. 되돌아보면 구소련과 동유럽의 국가사회주의 몰락의 근원에는 즉 권위주의적인 정부와 상명하복식의 통제경제 체제 즉 ‘민주주의’의 부재 혹은 부족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그렇다고 하여 그 경쟁자였다고 할 수 있는 사회민주주의 모델이 유일한 대안으로 부상한 것도 아닙니다. 서유럽의 사회민주주의 계열의 정당들도 1970년대를 전후한 복지국가의 위기 속에서 그 정체성을 잃었고, 급기야 지난 세기말의 세계화와 신자유주의의 급부상 속에서 우파에 투항해 버렸습니다. 사회민주주의 모델의 추락의
르크스의 공산주의 생산양식에서 명확한 것은 ‘사적 소유의 폐지’ 뿐입니다. 마르크스의 공산주의 생산양식 기획 중 이것을 제외하고 명확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단 하나의 명확한 주장인 이 사적 소유의 폐지만큼 역사적으로 수많은 조롱과 야유를 받아온 주장도 없을 것입니다.소유욕은 인간의 벗어날 수 없는 본성인데, 이를 부정하는 마르크스와 공산주의란 우매한 몽상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그것이 몽상이 아니더라도, 내가 열심히 일하여 취득하거나 정당하게 구매한 물건과 재산이 내 소유가 아니라니 말이 되는가? 그것이 내 소유가 아니고 모두의 공동소유라면 이것은 강도행위와 무엇이 다른가? 노동 윤리와 사적 소유가 폐지된다면, 누가 힘들게 노동을 하고 공동의 소유물을 누가 아낄 것인가? 결국은 인류는 나태
현실 사회주의(구 소련이나 동구권을 의미)는 명백히 실패하였습니다. 그것은 지난 세기말 파산선고를 받기 이전에도 명백히 실패한 모델입니다. 공산당 일당 독재, 일체의 언론의 자유 등 정치적 자유의 말살, 단독 입후보와 공개투표 등 민주적 절차의 형해화, 관료들의 복지부동과 비효율, 국가가 생필품을 받기 위하여 길게 줄어선 줄, 생산과 분배과정에서의 관리․감독자들의 부정부패……이것이 현실 사회주의의 모습이었습니다.그러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이러한 현실 사회주의 실패의 책임을 마르크스에게 묻지 않습니다. 그들은 이의 책임을 구 소련 권력자들의 개인적․실천적 결함으로 돌리거나 20세기 중반의 적대적인 자본주의 세력에 의한 고립과 대결로 돌리기도 하고 혹은 그보다 훨씬 더 멀리 20세기 초반 혁명기 러시아의
마르크스에 의하면, 고대 노예제는 중세 봉건제를 낳았고, 중세 봉건제는 다시 근대 자본주의를 낳았습니다. ‘낳았다’는 것은 기존의 생산양식 속에서 새로운 생산양식의 토대가 잉태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토대는 기존의 생산양식 하에서 생산력의 성장을 주도하고, 그 성장이 일정한 발전단계에 이르면 기존의 생산관계나 소유관계는 생산력의 성장을 촉진시키기는커녕 그 성장을 저해하는 질곡으로 변하게 되고, 종국에 기존의 생산․소유관계는 분쇄되고 그 생산력의 성장에 맞는 새로운 생산․소유관계가 정립된다는 것입니다.그러나 고대 노예제, 중세 봉건제, 근대 자본주의 생산양식은 모두 계급과 소유가 존재하는 사회라는 점에서 공통됩니다. 그런데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이후의 사회는 계급과 소유가 사라진 공산주의 사회가 될 것이
마르크스(Karl Marx, 1818∼1883)가 그의 친구이자 후원자였던 엥겔스(Friedrich Engels, 1820∼1895)와 함께 쓴 겨우 50쪽 정도의 팜플렛에 불과한 ≪공산당 선언≫은 물론 그들의 수많은 저작들 중 단 1편도 읽지 않았어도, 심지어 그들의 사상에 대한 아주 작고 조잡한 해설서조차 읽지 않았어도, 우리들은 이미 마르크스와 공산주의에 대한 탁월한 비판자들입니다.음담패설과 구타 등 反윤리적 행동을 일삼던 중고교 윤리선생으로부터,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시위대를 마뜩치 않게 바라보며 ‘데모하는 놈들은 모두 군대를 보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던 대학교수로부터, 위에서 주어진 교재만을 달달 외워 녹음기처럼 풀어놓던 정훈장교로부터, 우리는 마르크스와 공산주의에 대한 능숙한 비판자로 양
2012년을 전후하여 청주지방법원에서 기이한 재판이 계속 열렸습니다. 강 아무개는 인터넷에 북한을 찬양하는 글을 수차 올려 국가보안법을 위반하였다는 혐의(‘국가의 존립․안전이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위태롭게 한다는 정을 알면서 반국가단체인 북한을 찬양․고무․선전․동조 하였다’는 혐의)로 구속 기소되어 청주지방법원에서 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는 유죄로 인정되어 실형을 선고받았습니다. 문제는 그 이후에 있습니다. 강 아무개는 이와 같이 유죄를 선고하는 법정에서 (그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북한 만세’를 외쳐 다시 국가보안법위반으로 추가 기소가 되었고, 강 아무개는 이후에도 유죄를 선고하는 법정에서마다 북한 만세를 수차 반복하여 8개월에서 10개월까지 대여섯 번의 실형이 추가 되었습니다.그러나 계속되
밀(John Stuart Mill, 1806∼1873)의 시작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적입니다. 그에게 정치의 근본 목적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와 마찬가지로 모든 시민들의 지적․윤리적 탁월함을 증진시키는데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처럼 밀도 그러한 정신적 탁월성을 생산할 수 있도록 정치제도가 주조․재편되고, 그러한 탁월성으로 시민들이 지도되고 강제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그들은 정신적 능력에 따라 정치적 지위와 권리를 차등 배분하는 ‘탁월성 원칙’은 오직 정신적 능력(타고난 지적 능력과 후천적인 학업․훈련에 따른 지적 성취)만을 기준으로 정치적 자원과 가치를 배분하므로 정치의 근본 목적에도 부합하고, 신분과 계급의 고하(高下), 소유와 재산의 과다를 불문하므로 모두에게 공평하고 공정한 정치원칙이라고 생
첫 회에 지적한대로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 1806∼1873)은 최초의 온전한 민주주의 정치사상가입니다. 그는 모든 시민들이 자신의 권리와 이익을 스스로 옹호하고 대변할 수 있고, 또한 공적․정치적 일에 참여를 통하여 지적․윤리적 발전을 도모할 수 있는 대의제 민주주의가 가장 이상적인 정치체제라고 주장하였습니다.그러나 그는 그러한 민주정체도 정치적 무지와 횡포(모든 시민들과 공동체의 이익을 외면한 채, 자신들만의 이기적․당파적 이익을 관철하기 위하여 권력을 남용하는 것으로, 밀은 이를 ‘계급입법’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의 위험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고 보았고, 오히려 민주정체에서는 하층민들의 ‘무지’와 ‘다수’로 인하여 그러한 위험성은 더욱 크다고 보았습니다.그러한
≪대의정부론(Considerations on Representative Government)≫의 서문에서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 1806∼1873)은 “보수주의자와 자유주의자 사이에서 보다 나은 원리를 찾는 일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양쪽 주장 사이의 차이점을 떼내어 버린 채 단순히 절충을 꾀하는 차원이 아니다. 기존의 것보다도 더 포괄적이고 탁월한 내용의 대안이 제시된다면, 그래서 그들이 진정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요소들을 포기하지 않아도 된다면, 자유주의자와 보수주의자 모두 그 대안을 받아들일 수가 있을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자신의 ≪대의정부론≫은 상반되는 계급, 정치세력, 이론 간의 타협적인 절충이 아니라, 진리 내지 정의에 입각하여 양자 간의 ‘조화’를
우리의 교과서에 등장하는 소크라테스부터 시작하는 수많은 저명한 정치사상가들 중 최초의 민주주의 사상가는 누구일까요?고대 아테네는 민주정체였습니다. 현대의 우리의 대의제 민주주의와 다르게 민회와 추첨에 기반을 둔 민주정체였지만,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인 정치적 평등의 원칙에 우리보다 더 충실히 입각해 있었습니다. 그리고 소크라테스․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를 제외하고 아테네의 많은 철학자들은 그러한 민주정체를 지지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 중 자신들의 민주정체의 의미와 작동원리를 체계적으로 설명하며 이를 정당화한 사람은 없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학≫에서 그러한 민주정체의 의미․기본 원칙․작동원리에 대하여 누구보다도 정확하게 설명하고 있지만, 그는 민주주의를 지지하지는 않았습니다.근대의 로크․몽테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