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공산당 선언≫ 읽기 (4)

르크스의 공산주의 생산양식에서 명확한 것은 ‘사적 소유의 폐지’ 뿐입니다. 마르크스의 공산주의 생산양식 기획 중 이것을 제외하고 명확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단 하나의 명확한 주장인 이 사적 소유의 폐지만큼 역사적으로 수많은 조롱과 야유를 받아온 주장도 없을 것입니다.

소유욕은 인간의 벗어날 수 없는 본성인데, 이를 부정하는 마르크스와 공산주의란 우매한 몽상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그것이 몽상이 아니더라도, 내가 열심히 일하여 취득하거나 정당하게 구매한 물건과 재산이 내 소유가 아니라니 말이 되는가? 그것이 내 소유가 아니고 모두의 공동소유라면 이것은 강도행위와 무엇이 다른가? 노동 윤리와 사적 소유가 폐지된다면, 누가 힘들게 노동을 하고 공동의 소유물을 누가 아낄 것인가? 결국은 인류는 나태와 낭비의 나락으로 떨어질 것이 뻔하지 않은가?

그러나 이러한 조롱과 야유가 우리의 무지와 왜곡에 기인한 것이라면 어떨까요? 오히려 마르크스는 우리가 열심히 일하여 취득한 물건과 재산의 소유권에 대하여 열렬히 옹호한 사람이었다면? 공산주의는 당신의 소유물을 빼앗기 보다는 오히려 당신의 빼앗긴 소유물을 정당하게 되찾아 주려는 것이었다면? 마르크스에 대한 조롱과 야유는 마르크스가 아닌 오히려 우리와 우리의 자본주의가 받아야 하는 것이었다면? 마르크스는 ≪공산당 선언≫에서 바로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

마르크스는 ‘사적 소유의 폐지’를 주장한 적이 없다 ?

공산주의의 특징은 소유 일반의 폐지가 아니라, 부르주아적 소유의 폐지에 있다. 그런데 현대의 부르주아적 사적 소유는 계급적대, 즉 소수에 의한 다수의 착취에 기초하고 있는 생산물의 생산 및 점유 형태 중에서 최종적이고도 가장 완전한 표현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공산주의자들은 자신의 이론을 ‘사적 소유의 폐지’라는 한마디의 말로 요약할 수 있다. 우리 공산주의자들은 자신의 노동으로 취득한 재산, 다시 말해 온갖 개인적 자유와 활동과 자립의 기초가 되는 재산의 권리를 폐지하려 한다는 비난을 받아왔다. 자신의 노동으로 정당하게 번 재산이라고! 당신들은 부르주아적 소유에 선행한 소부르주아적, 소농민적 소유를 두고 말하는가? 이러한 소유는 폐지할 필요가 전혀 없다. 공업의 발전이 이미 그것을 폐지해왔으며, 지금도 나날이 폐지되고 있으니까. 그렇지 않다면, 당신들은 현대 부르주아지의 사적 소유를 두고 말하는 것인가? 임금노동이 노동자들에게 재산을 만들어주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임금노동이 만들어내는 것은 자본, 즉 임금노동을 착취하는 재산일 뿐이다. 임금노동을 착취하는 이 부르주아적 소유는 새로운 착취를 위하여 새로이 공급되는 임금노동이 없으면 증식될 수 없는 소유이다……우리는 노동 생산물의 개인적 소유를 폐지하려는 것이 결코 아니다. 다시 말해 인간의 생활을 유지하고 재생산하는데 요구되는 개인적 소유, 타인의 노동을 지배할 수 있게 해주는 그 어떤 잉여도 남기지 않는 개인적 소유를 폐지하려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우리가 폐지하고자 하는 것은 소유의 비참한 성격이다. 노동자로 하여금 자본의 증식을 위해서만 생존하게 만들며, 지배계급의 이익이 요구하는 한에서만 생존을 허용하는, 소유의 비참한 성격말이다……공산주의는 그 누구로부터도 사회적 생산물을 소유할 힘을 박탈하지 않는다. 공산주의는 다만 소유에 의하여 타인의 노동을 자신에게 예속시키는 힘을 박탈할 따름이다.

오늘날 당신들(부르주아지)는 공산주의자들이 사적 소유를 폐지하려고 하다고 경악한다. 그러나 당신들 사회에서 이미 사회 성원의 10분의 9에게는 사적 소유가 폐지되고 있다. 소수에게 사적 소유가 집중되어 있는 것은 이들 10분의 9에게는 사적 소유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당신들은, 사회의 압도적 다수가 아무런 소유물도 갖지 않는 것을 필수조건으로 하는 그런 소유형태를 폐지하려 한다고 우리를 비난하는 셈이다. 한마디로, 당신들은 우리가 당신들의 소유를 폐지하려 한다고 우리를 비난하는 것이다. 바로 그렇다. 우리는 실제로 그렇게 하려고 한다……사적 소유를 폐지하면 일체의 활동이 정지되고, 전반적으로 게으름이 만연하게 될 것이라는 비난이 있다. 그렇다고 한다면, 부르주아 사회는 이미 오래전에 게으름 때문에 멸망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부르주아 사회에서는 일하는 사람들은 아무 것도 얻지 못하고, 무엇인가 얻는 자들은 일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계급은 기본적으로, 생산에 필요한 기계와 도구 등 생산수단을 소유한 부르주아 계급과, 생산수단을 소유하지 못한 그래서 노동력을 판매할 수밖에 없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으로 나누어지는데, 부르주아는 생산수단을 독점한 것을 빌미로 생산과정에 투여된 노동의 잉여물인 잉여가치를 착취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생산수단을 독점적으로 소유함으로써 타인의 노동의 생산물을 착취할 수 있는 관계가 바로 ‘전유(專有, appropriation)’관계입니다.

공산주의가 폐지하려는 것은 일체의 소유 자체가 아니라 바로 이러한 부르주아 계급의 착취를 가능케 하는 전유관계(부르주아적 소유․생산관계)뿐이고, 이것은 결국 노동자 계급에게 그들의 노동 산물을 본래의 권리자인 노동자에게 정당하게 돌려주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이처럼 공산주의의 기본적 발상은 혁명적 인식 전환이나 非상식적인 궤변에 기초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노동의 산물은 노동한 자의 것이다’라는 인류의 보편적 도덕률을 재확인하는 것뿐입니다.

누군가 마르크스의 공산주의 기획이 인간의 소유욕을 무시한 우매한 몽상이라거나, 인류 사회를 타인의 노동에만 기댄 게으름꾼들과 타인의 노동 댓가를 빼앗는 강도들의 왕국으로 만드는 기획이라고 조롱할 때, 마르크스는 몽상에 빠진 것은 오히려 당신이며 바로 지금의 사회가 게으르고 도둑질하는 자들이 지배하는 세상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적 소유 폐지 이후는 어떠한 ‘소유’인가

그렇다면 부르주아적 소유․생산관계를 폐지한 이후 도래하는 공산주의는 과연 어떠한 소유․생산관계를 가질까요? 공산주의에서도 누군가 힘들게 만들거나 정당하게 취득한 물건과 재산은 그 개인들 각자의 소유임은 명백합니다. 그러나 기업이나 공장은 어떠할까요? 기업이나 공장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착취의 도구이기에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이것에 대한 부르주아 계급의 소유권은 더 이상 유지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공산주의 사회에서 기업이나 공장은 누구의 소유가 되는 것일까요?

우리는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모든 기업이나 공장 등의 생산도구를 국가가 소유하는 사회라고 알고 있습니다. ‘공산주의 = 국유화‘라고 알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맞을까요? 물론 ≪공산당 선언≫에서 “부르주아지로부터 모든 자본을 빼앗아 모든 생산도구를 국가의 수중에, 즉 지배계급으로 조직된 프롤레타리아트의 수중에 집중시킨다”고 말한 것처럼, 마르크스가 여러 저작에서 공산주의 실현을 위한 결정적 계기로서 국유화를 제시하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마르크스에게서 국유화는 공산주의로 향하는 과도기적 소유형태이거나 공산주의적 소유의 한 태양일뿐입니다. 마르크스가 자본주의적 ‘사적 소유’와 대비되는 소유 개념으로, 공산주의적 소유의 기본 양식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은, 바로 ‘사회적 소유’입니다. 개인도 국가도 아닌 ‘사회’가 소유한다? 도대체 ‘사회가 소유한다’는 것은 어떠한 의미를 갖는 것일까요? 그리고 그것은 현실적으로 어떠한 형태로 실현될 수 있을까요? 놀랍게도 이에 대한 마르크스의 설명은 더 이상 없습니다. 마르크스는 공산주의적 소유의 추상적 원리로써 사회적 소유를 반복하여 말할 뿐입니다.

사실상 소유란 기본적으로 처분과 사용․수익 권능 함축하는 것이지만, 그 이외에 경영과 통제 권능을 포함하는 것입니다. 특히 소유가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공동적인 것이라면 소유의 권능에서 중요한 것은 그 소유물에 대한 경영과 통제의 권능입니다. 그 소유물의 처분과 사용, 수익이 공동에 귀속될 때 남는 핵심 문제는, 소유물에 대하여 실제적으로 경영하고 관리하는 자가 누구인가 그리고 이 경영 관리를 감독하고 통제하는 자가 누구인가 하는 것입니다.

마르크스 사후 많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이러한 사회적 소유가 과연 무엇을 의미하고, 그것은 어떠한 방식으로 현실에서 실현되어야 하는지, 그리고 그 사회적 공유물을 경영하고 통제하는 것은 누가 되어야 하는지에 대하여 논쟁을 거듭해 왔습니다. 그것은 국가가 모든 기업이나 공장을 소유하고 경제 관료들이 이를 관리하고 통제하는 방식으로 표현되기도 하고, 기간산업이나 대기업만 국가 소유와 국가의 통제하에 두고 나머지 중소기업이나 소상공업은 개인들의 소유와 자율경영에 맡기는 방식으로 표현되기도 하고, 노동자들이 기업이나 공장을 소유하고 자주적으로 결정하고 관리하는 방식으로 표현되기도 하고, 노동자뿐만 아니라 소비자․경제관료․지역주민․관련업체 관계자들이 관여하여 공동으로 결정하는 방식으로 표현되기도 하고, 생산자들이 협동조합을 구성하여 이 조합체를 통하여 결정하고 관리하는 방식으로 표현되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논쟁은 마르크스로부터 비롯된 것입니다. 이들 주장의 단초들은 마르크스의 저작들 이곳저곳에 모두 존재합니다. 공산주의 사회의 소유와 경영․통제양식에 대한 마르크스의 여러 표현들을 보면 대체로, 미시적 수준에서는 노동자나 생산자(또는 노동자들이나 생산자들의 연합체)의 소유와 자율에 방점을 두는 경향이 있고, 거시적 수준에서는 국가나 사회의 소유와 관리에 방점을 두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러한 점은 기업이나 공장에 대한 소유와 경영 관계를 넘어 사회 전체의 교환․분배관계의 문제에서도 드러납니다.

공산주의 사회에서의 교환․분배관계는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교환․분배의 핵심적 도구인 화폐와 시장의 폐지를 주장합니다. 그리고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국가의 계획과 통제가 화폐와 시장을 대신할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마르크스에게서 화폐는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소외’와 ‘착취’를 실현하는 수단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인간 노동의 산물이 시장을 통하여 오직 화폐로 수량화되는 상품으로 전환됩니다. 이러한 전환 과정을 통하여 노동자는 자신이 노동 과정이나 노동 산물 등이 더 이상 자신의 것이 아닌 오히려 그것들로 인하여 자신이 속박당하고 억압당하는 소외에 이르게 되며, 자본가는 착취관계를 지속할 수 있게 됩니다. 따라서 마르크스는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소외와 착취를 폐지되기 위하여 화폐가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는 ≪고타강령 비판≫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생산수단의 공동소유에 기초한 집단주의 사회 내에서는 생산자들이 자신의 생산물을 교환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여기에서는 생산물을 생산하는데 지출된 노동이 이 생산물의 가치로서, 즉 그 생산물에 붙어 있는 어떤 물적 속성으로서 나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자본주의 사회와는 달리 여기서는 벌써 개인적 노동이 더 이상 간접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직접적으로 노동 전체의 구성부분으로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각자가 투여한 노동을 표시한 ‘증서’가 화폐를 대신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화폐가 폐지된 세상을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상상을 하더라도 그것은 오히려 봉건 시대로 역행하는 것으로만 보입니다. 공산주의하에서도 화폐가 유통수단으로 필요하지 않을까요? 마르크스의 말대로 화폐가 소외와 착취의 수단이라면 그가 대안으로 제시하는 노동증서도 단지 교환수단이 아니라 소외와 착취의 수단으로 전환될 가능성이 없다고 할 근거는 무엇일까요? 공산주의 자체가 그러한 전환을 방지한다면, 구태여 화폐를 폐지할 이유가 있을까요? 이러한 질문에 마르크스는 답변을 주지 않고 있습니다.

나아가 마르크스는 시장과 경쟁의 폐지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마르크스는 시장과 경쟁이 ‘자본주의의 無정부성’이라는 폐해를 낳는다고 보고,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시장과 경쟁을 자리를 국가의 계획과 통제가 대신할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국가가 사회적으로 필요한 물품과 수량을 계산하여 그것의 생산을 각 생산단위에 위임하고, 국가가 이렇게 생산된 물품을 모아 각 소비단위에 배분한다는 것입니다. ≪공산당 선언≫의 초안격으로 그보다 몇 개월전에 쓰여진 ≪공산주의의 원칙≫에서 엥겔스는 공산주의 사회의 경제질서에 대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새 질서는 무엇보다도 산업과 모든 생산부문의 경영 자체를 서로 경쟁하는 개인들의 손에서 빼앗아 전체 사회를 통해, 다시 말해 공동 책임하에 공동의 계획에 따라 사회의 전 구성원들의 동참 아래 경영되도록 해야 한다. 다시 말해 새 질서는 경쟁을 없애고 그 자리에 연합을 내세울 것이다……모든 생산수단의 공동 이용 그리고 공동 합의 또는 이른바 공유재산제에 따라 모든 생산품의 분배가 실행될 것이다……사회가 총 생산력을 사용하고 교통수단이나 생산품을 교환하고 분배하는 권한을 자본가의 손에서 빼앗아 기존의 수단들과 전체 사회의 욕구에서 도출되는 계획에 따라 관리함으로써, 무엇보다도 특히 현재 대규모 산업의 경영과 연관된 공황 등 모든 나쁜 결과가 제거된다.

과연 국가 보다 현실적으로는 국가의 경제관료가 그 사회의 존속을 위해 기본적으로 사회 전체가 필요로 하는 물품이나 각 생산단위가 필요로 하는 자원의 양이나 각 가구가 필요로 하는 물품의 종류와 양을 합리적으로 적정하게 계산해 낼 수 있을까요? 생산력의 극단의 발전을 전제한 공산주의 사회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가능할까요? 가사 가능하더라도 결국은 기존의 욕구와 필요의 충족만으로 반복되어 오히려 사회와 경제 발전에 역행하는 결과를 가져오지 않을까요? 이러한 의문에 마르크스는 역시 답변을 주지 않고 있습니다.

중국의 대약진 운동, 중국의 모택동은 공산 혁명 후 1958년 공산사회로의 급속한 진전을 위하여 집단농장화를 추진하고 노동강도를 증대시켰다. 그러나 현실을 무시하고 오직 노동수탈에 의존한 대약진 운동은 3,000만 명에 이르는 사상 최악의 아사자를 내고 실패로 끝이 났다.

아래로부터의 자치와 자율 vs 국가 주도

그러나 마르크스는 미시적 수준에서는 노동자나 생산자, 노동조합이나 생산자연합 등의 생산․교환․분배현장에서의 자치와 자율 결정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마르크스는 ≪공산당 선언≫에서 공산주의 사회를 “각자의 자유로운 발전이 모두의 자유로운 발전의 조건이 되는 연합체”라고 표현합니다. 마르크스에게 ‘모두의 자유로운 발전’의 필수적 전제조건은 ‘각자의 자유로운 발전’입니다. 개인 → 연합 → 전체이지 그 역은 아닙니다. 흔히 오해하는 것과 달리, 마르크스의 출발점은 개인․자유주의이지 집산․권위주의가 아닙니다.

특히 마르크스는 이러한 자치와 자율을 통하여, 자본주의 생산과정에서의 폐해 즉 노동의 소외․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의 분리․노동분업(단순노동의 반복)에 따른 노동의 역겨움․장시간의 노동이나 강도 높은 노동․억압적인 노동 감시와 통제 등이 사라질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마르크스는 ≪고타강령 비판≫과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그런 이상 사회를 다분히 유토피아적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공산주의 사회의 보다 높은 단계가 되면, 즉 개인이 노예처럼 분업에 예속되는 상태가 사라지고, 이와 함께 정신노동과 육체노동 간의 대립도 사라지고 나면, 노동이 생황을 위한 수단일 뿐만 아니라 그 자체가 삶의 제1차적인 욕구가 되고 나면, 개인들의 전면적인 발전과 더불어 생산력도 성장하여 집단적 부의 모든 원천이 흘러넘치고 나면, 그때 이후에야 비로소 부르주아적 권리의 좁은 한계가 완전히 극복되고 사회는 자신의 깃발에다 다음과 같이 쓸 수 있기에 될 것이다 — 각자는 그의 능력에 따라, 각자에게는 그 필요에 따라

아무도 하나의 배타적인 활동의 영역을 갖지 않으며 모든 사람들이 그가 원하는 분야에서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으며, 사회가 전반적 생산을 규제하여,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오늘은 이일을 내일은 저 일을 하는 것, 아침에는 사냥하고 오후에는 낚시하고 저녁에는 소를 치며 저녁 식사후에는 비평을 하면서도, 사냥꾼으로도 어부로도 목동으로도 비평가로도 되지 않는 일이 가능하게 된다.

그러나 생산․교환․분배현장에서의 노동자․생산자나 노동조합․생산자연합 등의 자치와 자율은, 국가에 의한 계획․교환․분배와 개념적으로 분명히 대립적이고, 현실에서 서로 충돌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러한 대립과 충돌시 무엇을 우선할 것인가? 양자를 혼용할 경우 국가와 생산단위간 대립과 알력의 가능성은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국가나 사회가 결정 권한을 독점할 경우 현실 사회주의에서처럼, 국가와 관료에 대한 생산단위와 노동자들의 종속의 문제를 어떻게 예방할 것인가? 오히려 그것은 국가의 사멸이 아니라 국가권력의 과도한 집중화와 권위주의화를 초래하지 않을까? 노동자․생산자와 그들의 연합체가 결정 권한을 독점할 경우 그들의 조직적․집단적 이기주의를 어떻게 예방할 것인가? 각각의 생산단위간 대립과 알력은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공산주의는 극도로 발전된 생산력을 전제하는데 생산력의 발전과 노동분업의 폐지간의 괴리는 없을까? 효과적인 노동분업 없이 어떻게 효율적인 생산의 발전이 가능할 것인가? 생산현장에서의 노동자간의 직위․직무상 차이에 따른 대립과 알력은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국가관료처럼 생산현장에서의 관리 감독자의 통제도 권위적․억압적으로 귀결될 가능성은 없을까?

마르크스의 공산주의 경제학에는 이에 대한 아무런 언급이 없습니다. 그는 사적소유의 폐지로 모든 경제적 분쟁이 모순적․대립적 성격을 갖지 않게 되고, 정치체계와 마찬가지로 생산현장에서의 자치․자율과 피라미드식의 상향식 의사결정 구조를 갖추고 있기에, 개인별․생산단위별․사회내 여러 경제적 이해와 의견의 갈등은 충분히 해소 가능할 것으로 간주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순진하고 편의적인 생각이라고 비판을 받는다면, 마르크스를 위하여 이렇게 도 변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르크스는 ‘미래의 부엌을 위한 조리법’을 작성하는 공상주의자가 아니다. 미래 사회의 생산양식은 단지 기존 체제를 타도하는 투쟁과 미래를 위한 실천 과정 속에서 정해질 뿐이다. 이것이 현실주의자와 실천주의자로서의 마르크스다”라고.

레닌과 스탈린.

“국가를 천국으로 만들려는 자가 국가를 지옥으로 만든다”

사회주의(혹은 공산주의)와 민주주의의 상관관계에 대하여 탁월한 철학적․역사적․정치적 분석으로 유명한 이탈리아의 정치사상가 보비오(Norberto Bobbio, 1909∼2004)는, 확신에 찬 어조로 “마르크스의 현실 비판은 옳았지만, 그의 이상 설계는 잘못되었다”고 말합니다.

마르크스의 공산주의 기획은 잘못되었다? 마르크스는 다수의 지배라는 관점에서만 자신의 정치적 이상인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옹호할 뿐, 정치적 자유․경쟁적 정당체계․소수자 보호 등 민주주의 기초에 대하여 충분히 고려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의 경제적 이상도 사적 소유의 폐지와 국유화 테제 이외에 생산현장의 민주적 조직화와 전체 경제의 민주적 운영에 대하여 충분히 고려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의 이상이 보다 이상적일수록, 민주주의의 문제는 이미 해결된 문제나 충분히 해소될 문제로 추상적․환상적 수준에 머물 뿐입니다.

또한 그 이상에 대한 추종(追從)의 정도가 높을수록, 그 이상의 실현은 민주주의와 더욱 멀어집니다. 레닌은 “마르크스의 학설은 정당하므로 전능(全能)하다. 그것은 완전하여 어떠한 미신이나 반동과도 타협하지 않으며, 부르주아적 압제를 옹호하는 어떠한 것과도 전혀 융합되지 않은 전일적(全一的) 세계관을 사람들에게 준다”고 말합니다. 어떤 하나의 이론과 이상만이 완벽한 정의이고, 다른 이론과 이상은 미신과 반동에 불과하고 이들과 전혀 타협할 수 없다면, 민주주의는 불가능할뿐더러 그것은 정의의 실현에 대한 장애물이나 방해물에 불과한 것으로 여겨지게 됩니다.

“국가를 지상의 지옥으로 만드는 것은 바로 국가를 천국으로 만들려고 하는 인간의 시도였다”라는 독일의 시인 횔덜린의 말처럼, 현실 사회주의의 패악과 실패는 민주주의에 대한 성찰을 결여한 마르크스의 이상과 레닌의 실천 속에 이미 내재되어 있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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