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른슈타인의 ≪전제/과제≫와 로자의 ≪개혁/혁명≫읽기 (2)

베른슈타인은 ≪사회주의의 전제와 사회민주당의 과제≫(1899)에서 마르크스가 주장하는 자본주의 붕괴와 사회주의 도래의 필연성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또한 그는 사회주의로의 평화적․점진적 이행의 가능성과 오히려 그러한 이행의 바람직함을 주장하면서도, 마르크스의 권위를 빌려, 즉 마르크스의 저작 중에서 그러한 이행 가능성을 부정하지 않는 표현들을 인용하는 방식으로 이의 타당성을 강변하고 있습니다. 베른슈타인은 자신의 주장이 마르크스의 특정한 경향을 강조한 것이거나 새로운 현실에 적응하는 마르크스주의로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베른슈타인의 <<사회주의의 전제와 사회민주당의 과제>>와 로자의 <<사회개혁이냐 혁명이냐>>.

로자, “베른슈타인은 마르크스적인가?”

폴란드 출신의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자인 로자 룩셈부르크(Rosa Luxemburg, 1871∼1919)는 이러한 베른슈타인의 태도가 기만적이라고 말하고 베른슈타인주의와의 논쟁은 마르크스주의 내지는 사회주의 미래의 존망이 걸린 문제라고 말합니다. 그녀는 ≪사회개혁이냐 혁명이냐≫(1899)에서 서문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베른슈타인이 제기하는 사회 개혁이냐 혁명이냐의 문제는 사회민주주의로서는 곧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이다. 베른슈타인 및 그의 추종자들과 벌이는 논쟁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이러저러한 투쟁 방식이나 전술 사용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민주주의의 운동의 전체 실존에 관한 것이다. 베른슈타인의 이론을 피상적으로 고찰할 경우, 이러한 이야기는 과장된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베른슈타인은 가는 곳마다 사회민주주의와 그 목표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지 않은가? 그 스스로 여러 차례에 걸쳐 거듭 분명하게 자신은 사회주의의 최종 목표를 단지 다른 형태로 추구하고 있을 뿐이라고 되풀이하지 않는가? 또 현재 사회민주당의 실천을 거의 완전히 인정하고 있다고 확고하게 강조하지 않는가? 물론 이 모든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옛날부터 이론과 정책의 발전에서 새로운 노선은 비록 내적인 핵심에 있어서 옛것과 완전히 반대될지라도, 옛것에 의지하여 만들어지고, 우선 기존의 형식에 적응하며, 기존의 언어로 말하는 법이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서 비로소 새로운 핵심은 과거의 껍데기를 뚫고 나오며, 새로운 노선은 자신의 형식과 언어를 발견한다……베른슈타인은 자신이 바로 마르크스의 추종자임을 선언하고, 마르크스 이론 안에서 이 이론을 극복하기 위한 발판을 추구하며, 이러한 투쟁이 마르크스 이론의 발전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겉모습에 현혹되지 말고, 베른슈타인의 이론에 숨겨진 핵심을 밝혀내야 한다.

여기서 로자가 말하는 ‘사회민주주의’란 ‘마르크스주의’와 거의 동일한 의미입니다. 현대의 우리는 마르크스주의와 사회민주주의를 분별하여 사용하나, 19세기말에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자신들을 사회민주주의자라고 불렀습니다.

로자는 ≪사회개혁이냐 혁명이냐≫에서 베른슈타인의 자본주의 경제 현실 분석, 정치적 이행 전략과 사회주의 구상을 조목조목 비판하고 있습니다. 먼저 그녀는 자본주의가 붕괴되기는커녕 보다 안정화되고 있다는 베른슈타인의 주장을 반박합니다. 로자는 베른슈타인이 말하는 기업연합, 금융, 신용, 주식제도 등은 자본주의의 생산력과 소유관계, 생산과 교환간의 모순 등을 심화시키고, 종국에 자본주의의 위기를 증폭시킬 뿐이라고 주장합니다. 예컨대, 기업연합과 신용체제는 자본주의의 일시적 위기 흡수 수단이 될 수 있지만, 연합이 모든 기업들을 대상으로 일반화될 수 없고, 신용에 따른 확대재생산은 과잉생산과 무정부성의 위기를 더욱 증폭시킬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베른슈타인에게 민주주의란?

이처럼 로자는 현실의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보는 시각에서 베른슈타인과 전혀 다를뿐더러, 현실의 자본주의 정치체제 특히 현실의 민주주의를 보는 시각에서도 베른슈타인과 전혀 다릅니다. 이러한 현실의 자본주의 정치경제를 보는 시각 차이에서 사회주의로의 이행전략의 차이가 나온 것입니다.

로자가 자본주의 정치체제를 바라보는 시각은 기본적으로 1848년 ≪공산당 선언≫에서의 마르크스와 같습니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국가는 계급지배의 수단에 불과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한 자본주의 국가의 이념이자 구성원리가 되는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란, 그 토대인 자본주의에 포획된 것으로 기본적으로 사회주의 혁명으로 전복하고 폐기될 대상일 뿐입니다.

대공업과 세계시장이 형성된 이후 부르주아지는 현대 대의제 국가에서 마침내 배타적인 정치적 지배권을 장악하였다. 현대의 국가권력은 부르주아 계급 전체의 공동업무를 관장하는 위원회에 불과하다. 부르주아지는 역사에서 극히 혁명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부르주아지는 자신들이 지배권을 획득한 곳에서는 어디서나 모든 봉건적․가부장적․목가적 관계들을 파괴하였다. 부르주아지는 사람들을 타고난 상하관계에 묶어놓았던 온갖 봉건적 속박들을 가차 없이 토막내버렸으며, 그리하여 사람과 사람 사이에 노골적인 이해관계, 냉혹한 현금계산 이외에는 어떠한 관계도 남겨놓지 않았다. 부르주아지는 종교적 광신, 기사적 열광, 속물적 감상 등의 성스러운 황홀경을 이기적 타산이라는 차디찬 얼음물 속에 집어넣어버렸다. 부르주아지는 사람의 인격적 가치를 교환가치로 해체시켰으며, 특허장에 의해 보장되거나 투쟁을 통해 얻어진 수많은 자유 대신에 단 하나의 파렴치한 자유, 상거래의 자유를 내세웠다. - 마크르스와 엥겔스의 ≪공산당 선언≫

이에 반하여 19세기 말의 많은 수정․개량주의적 마르크스주의자들(말년의 마르크스를 포함하여)은, 현실의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는 사회주의를 달성하는데 유용한 도구나 수단이 될 수 있다고 사유하였습니다. 베른슈타인도 그러한 사람 중에 한명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 이상을 사유하고 있습니다. 그는 사회주의를 현실의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진화의 최고형식으로 사유합니다. 즉 그에게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는, 사회주의로 ‘폐기’되어야 하는 혹은 사회주의로 가는 ‘수단’임을 넘어, 오히려 사회주의의 진정한 ‘목적’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유주의를 세계사적 운동의 관점에서 본다면 사회주의는 시기적으로도 그것의 뒤를 계승할 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내용에서도 그것의 적법한 상속자이기도 하다……자유로운 인성의 형성과 보장은 모든 사회주의적 수단의 목적이며……실제로 자유주의 사상 가운데 사회주의 이념적 내용에 속하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다……완고한 신분제도로 이루어져 있던 봉건제도는 거의 어디에서나 폭력에 의해 폐기되어야 했다. 근대 사회의 자유주의 제도는 그것이 유연해서 변화 가능하고 또한 발전 가능한 것이라는 점에서 봉건 제도와 구별된다. 따라서 자유주의 제도는 폐기될 필요가 없으며 오히려 계속 발전시킬 필요가 있을 뿐이다.

민주주의는 수단이자 동시에 목적이기도 하다. 그것은 사회주의 투쟁의 수단이면서 동시에 사회주의의 실현형태이기도 하다……이글의 결론은 민주주의의 쟁취, 정치적 경제적 민주주의 기구들의 완성이 바로 사회주의의 실현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전제조건이라는 매우 평범한 명제이다.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베른슈타인은 의회주의 운동이나 노동조합 운동을 통한 자본주의로부터 사회주의로의 점진적 진화를 주장한 것입니다. 그는 자신에게는 ‘최종목적’이 아니라 ‘운동’만이 전부라고 말합니다. 선험적․추상적 목표나 지침에 따라 현실을 재구축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민주주의와 이를 통한 개혁활동의 확대와 누적을 통하여 이상을 추구하자는 것입니다.

로자 룩셈부르크, 그녀는 풀란드 출신으로 혁몀적 마르크스주의자로 독일 사민당내의 수정주의와 개량주의 흐름에 맞서 싸웠을 뿐만 아니라, 레닌주의에 대한 비판자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1919년 1월 베를린에서 혁명을 기도하였으나 실패하였고, 체포후 극우주의자들에게 넘겨져 살해되었다.

로자에게 민주주의란?

그러나 로자는 현실의 민주주의는 자본주의라는 토대 위에 서 있는 것이기에, 그것이 아무리 민주적이라고 할지라도 기본적으로 계급지배의 한 형태에 불과하고, 그것이 아무리 개혁적이라고 할지라도 계급적 한계를 넘어설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베른슈타인이 주장하는 자본주의 체제하에서의 의회주의 활동이나 노동조합주의 운동으로 사회주의로의 진화는 불가능하고, 오직 그 토대인 자본주의를 근본적으로 전복하는 혁명을 통해서만 사회주의를 달성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녀가 현실의 민주주의와 그를 통한 개혁 활동이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녀가 주장하는 것은, 현실의 민주주의와 개혁활동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치권력 장악과 사회주의적 목표의 한 계기로 포함될 때만 진정한 가치를 갖는다는 것입니다.

민주주의가 발전하면 최선의 경우, 국가권력의 장악 또는 정치권력의 탈취를 의미하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필요 없거나 불가능하게 되는가? 베른슈타인은 이러한 문제를 법률 개혁과 혁명이 가지는 장점과 단점을 충분히 비교하는 식으로 결정하는데, 이는 소비자 연맹에서 계피와 후추를 달아보는 식의 안이한 태도다……실제로 우리는 역사 속에서 법률 개혁과 혁명은 이들 각각의 방법이 가지고 있는 장점과 단점보다 더 심오한 근거에 따라 기능한다는 것을 본다. 요컨대 역사의 진행에서 법률 개혁은 항상 상승하는 계급이 정치권력을 탈취하고 기존의 모든 법체계를 충분히 전복시킬 수 있을 정도로 성숙했다고 느끼게 될 때까지 점진적으로 세력을 획득하는데 이용했다……계급사회가 존재한 이래, 또한 이 사회의 역사를 만드는 본질적 내용이 계급투쟁인 이래, 정치권력을 장악하는 것은 항상 상승하는 모든 계급의 목표였을 뿐만 아니라, 또한 각 역사적 시기의 출발점이며 종착점이었다……(오히려) 모든 법률 헌장은 혁명의 산물이다. 혁명이 계급 역사의 정치적 창조행위라면, 법률 제정은 그 사회의 정치적인 존속을 표현하는 것이다. 법률 개혁 작업의 내부에는 혁명에서 독립된 독자적인 추동력이 없다……이것이 바로 문제의 핵심이다. 법률 개혁 작업을 단순히 넓은 혁명으로, 또는 혁명을 응집된 개혁으로 생각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며 완전히 非역사적인 인식이다. 사회 변혁과 법률 개혁은 시간의 지속성이라는 면에서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다른 계기다.

정치권력 장악과 사회변혁 대신, 그리고 이에 대립해서 법률 개혁의 길을 찬성하는 사람은 실제로는 같은 목표에 이르는 더 조용하고 확실하고 시간이 걸리는 길을 택한 것이 아니라, 다른 목표를 택한 것이다. 요컨대 새로운 사회질서를 도입한 것이 아니라, 과거 사회질서 속에서 단지 양적 변화들만을 택하는 것이다……기본적으로 베른슈타인의 정치적 견해는 사회주의 질서를 실현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자본주의 질서를 개혁하는 것, 또는 임금체계가 아니라 크고 작은 여러 착취를 부정하는 것이 목적이다. 한마디로 자본주의의 종양을 제거하는 것이 목적이지, 자본주의 자체를 제거하는 것이 아니다.

자본주의 계급 지배의 기본 관계들은 부르주아의 토대 위에서 법적 개혁을 통해 변혁되지 않는다……(오히려) 자본주의 질서 속에 들어 있는 미래 사회를 위한 모든 요소는 자본주의 질서가 발전함에 따라 사회주의에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회주의에서 멀어지는 형태를 취한다는 것이 자본주의 질서의 또 다른 특성이다. 생산에서는 사회적 성격이 점점 더 많이 나타난다. 그러나 어떤 형태인가? 주식회사, 카르텔의 형태로 표현되며, 여기에서 자본주의의 대립, 착취, 노동력의 종속은 최고조에 이른다……(이와 동일하게) 정치적 관계에서 민주주의의 발전은 그 바탕이 허용한다면, 모든 계층의 국민을 정치생활에 참여하게 한다. 말하자면 국민국가로 이끈다. 그러나 이것의 부르주아적 의회형태에서는 계급대립과 계급지배가 없어지지 않으며, 오히려 발전하고 폭로된다. 따라서 전체 자본주의는 모순 속에서 발전하기 때문에,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사회주의 사회의 핵심에 모순되는 자본주의의 껍데기를 벗겨내기 위해서는 프롤레타리아가 정치권력을 장악하고 자본주의 체제를 전체적으로 해체해야 한다……민주주의가 부르주아에게 반은 쓸데없고, 반은 방해물이 되었다고 한다면, 노동자계급에게는 필수적이며 또 없어서는 안된다……한마디로 민주주의가 반드시 필요한 이유는, 그것이 프롤레타리아트가 정치권력을 장악하는 것을 불필요한 것으로 만들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로 이러한 권력 장악을 필수적이며 동시에 유일하게 가능한 것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베른슈타인 vs 로자, ‘사회주의’란?

베른슈타인에게 사회주의 정치체제는 현실의 자유주의와 민주주의가 확대․심화된 상태에 불과합니다. 그렇다면 그가 그리는 사회주의 경제는 어떠한 것일까요? 마르크스에게 사회주의는 사적 소유(보다 정확히는 부르주아적 소유관계)의 철폐를 기본으로 합니다. 그러나 베른슈타인의 사회주의에는 이러한 사적 소유의 철폐라는 관념이 없습니다. 그는 사회주의를 단지 사적 소유의 해악과 부정을 제약하고 교정하는 것으로 한정합니다.

이는 그가 사적 소유를 자유와 민주주의의 근간이라고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사회주의 경제체제를 기본적으로 ‘연대성(solidarity)’의 가치에 기초한 체제로 이해합니다. 그에게 연대성의 상태란 여러 계급․계층 간의 차별․억압․착취가 사라져 각 개인과 집단들이 온전한 자유를 누리고, 그러한 자유로운 구성원의 동동한 사회경제적 권리를 바탕으로 민주적으로 운영되는 상태를 말합니다.

로자는 베른슈타인이 말하는 사회주의는 마르크스가 말하는 사회주의와는 전혀 다른 것임을 명확히 규명합니다. 사적 소유를 그대로 두고 단지 그 해악과 부정만을 시정한다는 것은 단지 분배 정의적 차원에서 사회주의를 접근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문제에 대한 마르크스의 접근법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이전에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 읽기에서 이야기 했듯, 마르크스에게서 계급이나 착취는 경제적․구조적인 개념입니다. 그에게 계급은 재산이나 소득의 많고 적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생산과정에서 각자가 차지하는 지위 즉 생산수단을 소유하였느냐 그렇지 못하여 노동력을 팔 수 밖에 없는 위치에 있느냐에 따른 개념입니다. 착취는 그러한 생산수단의 소유 여부에 의하여 생산과정에서 구조적으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처럼 계급과 착취의 문제는 생산과정과 연계되어 있기에, 마르크스에 의하면 계급과 착취가 종식된 사회주의는 그러한 생산과정 자체 즉 자본주의 자체의 폐지를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바로 이점이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자를, 수많은 여타 사회주의자들이나 유사 마르크스주의들과 구별시켜 주는 점입니다. 그들은 대체로 자본주의의 불평등과 착취는 분배과정의 조정이나 도덕적 실천으로 극복될 수 있다고 보는데 반하여, 마르크스에 의하면 이러한 계급과 착취의 종식은 오직 그것을 구조적으로 재생산하는 생산과정의 전복 즉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파괴를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마르크스는 ≪공산당 선언≫에서 사회주의를 단지 분배의 조정이나 도덕적 실천의 문제로 보는 자들은 부르주아적․속류적․ 몽상적 사회주의자로 규정하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로자가 베른슈타인의 사회주의 구상을 비판하는 것도 바로 이와 같은 맥락입니다. 결론적으로 로자는 베른슈타인주의는 마르크스주의가 아니라, “마르크스가 이미 수십년전에 짓밟고 박살내고 경멸하고 별 볼일 없는 것으로 만든” 부르주아적․속류적․몽상적 사회주의에 불과하다고 주장합니다.

베른슈타인은 자본가라는 개념을 생산관계에서 소유관계로 옮겨놓고, 기업 대신에 인간을 말하고, 또한 사회주의의 문제를 생산영역에서 재산관계 영역으로 즉 자본과 노동의 관계에서 빈부의 관계로 옮겨놓고 있다……사회주의 개혁을 위한 베른슈타인의 두가지 수단인 협동조합이나 노동조합은 전혀 자본주의의 생산양식을 변화시킬 수 없다. 베른슈타인 자신도 모호하게나마 이것을 인식하고 있으며, 이러한 두가지 수단이 단지 자본주의의 이윤을 잘라내 이것으로 노동자를 부유하게 하려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베른슈타인은 이런 식으로 자본주의적 생산에서 대한 투쟁을 포기하고 자본주의적 분배에 반대하는 투쟁으로 사회민주주의 운동을 이끈다……대중을 사회민주주의 운동으로 이끄는 가장 직접적인 자극이 자본주의 질서의 불공정한 분배라는 것은 당연히 맞다. 사회민주주의는 경제 전체를 사회화하기 위해 투쟁하고, 또한 당연히 이를 통해서 사회적인 부를 공정하게 분배하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정 시점에서의 분배는 단지 각각의 생산양식에 따르는 자연법칙적 결과에 불과하다는 마르크스의 통찰에 의거하여 고찰해본다면, 사회민주주의는 단순히 자본주의적 생산의 틀 안에서 이루어지는 분배가 아니라, 오로지 상품 생산 자체를 지양하는 것을 목표로 투쟁한다. 한마디로 사회민주주의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을 폐기함으로써 사회주의적으로 분배하고자 한다. 그러나 베른슈타인의 방법은 이와는 노골적으로 반대된다.

베른슈타인.

민주주의 vs 사회주의

마르크스주의라는 기준에서 본다면, 명백히 로자의 한판승입니다. 그러나 민주주의라는 기준에서 보면 어떨까요? 베른슈타인과 로자간의 논쟁의 근간에는 현실의 민주주의의 가치와 의미, 미래의 민주주의의 모습에 대한 서로 다른 인식이 있습니다.

베른슈타인의 생각은 현실의 민주주의적 가치와 제도에 대한 확고한 믿음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러한 민주주의에 기초하여 사회주의라는 목표와 그것을 위한 이행방법 등이 재성찰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는 이러한 민주주의에 기초한 재성찰이 없는 사회주의 목표와 혁명적 이행전략이란 일방주의적 독단과 폭력적 독재에 불과하다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제도(자유주의적․민주주의적 제도)들 없이는 이른바 생산수단의 사회적 소유는 아마도 생산력의 엄청난 황폐화, 무의미한 실험들, 목적 없는 폭력행위 등과 같은 것만을 빚어낼 것이며,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지배는 사실상 혁명가 클럽의 폭력적 독재에 의해 지탱되는 혁명적 중앙권력의 독재 형태를 통해서만 달성될 수 있을 것이다.

로자는 민주주의와 사회주의의 관계를 베른슈타인과 정반대로 사유합니다. 현실의 민주주의는 자본주의적 계급 지배의 한계를 결코 벗어날 수 없고, 사회주의 혁명을 통해서만 ‘진정한’ 또는 ‘이상적’ 민주주의가 가능하다고 주장합니다. 또한 현실의 민주주의도 이러한 사사회주의라는 목표로의 급진적 인도가 없다면 쇠락할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선행되어야 할 노력(정치권력의 장악과 사회주의적 목표)을 운동에서 단절시키고 그리하여 사회 개혁을 목표 자체로 설정한다면, 그러한 사회 개혁은 사회주의의 최종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나아가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정반대의 방향으로 우리를 이끌 것이다……직접적인 실제 결과가 가장 중요한 목적이 되자마자, 화해를 거부하는 날카로운 계급 관점은 점점 더 부정적인 장애물로 보이고, 따라서 여기에서 나오는 직접적인 노선은 보상정책과 유화적인 정치가의 기민한 태도다……만일 베른슈타인이 한 것처럼 자본주의의 객관적 모순과 사회 변혁을 통한 자본주의의 철폐라는 목표를 부정하고 배격한다면, 운동은 머지않아 단순히 동업조합 운동이나 사회 개혁 운동으로 축소될 것이며, 결국 마치 무엇이 끌어당기기라도 하듯이 계급의 관점은 포기하는 것으로 이어질 것이다.

사회주의 운동의 운명이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연결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민주주의 발전의 운명이 사회주의 운동에 연결되어 있다. 또한 민주주의는 노동자 계급이 해방 투쟁을 포기하는 경우가 아니라, 반대로 사회주의 운동이 세계 정책과 부르주아의 이탈이 가져오는 반동에 대항해 강력히 투쟁할수록 생명력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 민주주의를 강화시키고자 하는 사람은 사회주의 운동이 약화되는 것이 아니라 강화되기를 바래야 하며, 따라서 사회주의를 위한 노력을 포기한다는 것은 노동운동뿐만 아니라 민주주의도 포기하는 것이다……기본 목표 없이는 실천 투쟁도 모두 無가치하고 無목적적으로 되며, 최종 목표를 포기하는 순간 이와 함께 운동 그 자체도 소멸한다.

베른슈타인은 민주주의가 전제 되지 않는 사회주의는 한 계급․한 정당․한 분파의 독재로 치달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로자는 사회주의라는 목표가 없는 민주주의는 상승과 하강의 무의미한 반복이나 퇴보를 가져올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놀랍게도 이들의 예견은 이후 실제 역사가 되었습니다. 구소련과 동유럽의 권위주의적 공산주의 체제와 점점 우경화로 퇴보 하는 서유럽의 사회민주주의 체제가 그것입니다. 이들이 말하는 양극단의 폐단에서 벗어나, 이 둘간의 논쟁에서 우리는 보다 나은 민주주의 모델에 대한 해답을 얻을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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