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의 ≪자유론≫ 읽기

2012년을 전후하여 청주지방법원에서 기이한 재판이 계속 열렸습니다. 강 아무개는 인터넷에 북한을 찬양하는 글을 수차 올려 국가보안법을 위반하였다는 혐의(‘국가의 존립․안전이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위태롭게 한다는 정을 알면서 반국가단체인 북한을 찬양․고무․선전․동조 하였다’는 혐의)로 구속 기소되어 청주지방법원에서 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는 유죄로 인정되어 실형을 선고받았습니다. 문제는 그 이후에 있습니다. 강 아무개는 이와 같이 유죄를 선고하는 법정에서 (그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북한 만세’를 외쳐 다시 국가보안법위반으로 추가 기소가 되었고, 강 아무개는 이후에도 유죄를 선고하는 법정에서마다 북한 만세를 수차 반복하여 8개월에서 10개월까지 대여섯 번의 실형이 추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계속되는 이 황당한 재판에 사람들은 거의 관심을 갖지 않았습니다. 일부의 지역 신문에 소개가 되기는 하였지만 가십거리로 소비될 뿐이었습니다. 주민의 최저생계도 책임지지 못하면서도 3대째 세습을 하고 있는 북한체제를 찬양하고, 반성은커녕 신성한 법원의 판단을 조롱하는 듯한 그의 행위는, 이 재판에 대하여 알고 있던 사람들에게도 불쾌하고 혐오스런 무지와 오기의 발로로만 비춰졌을 것입니다.

필자는 당시 지역 신문에 이를 비판하는 칼럼을 썼습니다. 그러나 비판의 대상이 강 아무개가 아니라, 강 아무개를 처벌하는 우리의 국가보안법과 사법기관 그리고 이 재판에 무관심한 시민들이었다는 게 문제였습니다. 이 칼럼으로 인하여 저는 주변으로부터 강 아무개와 똑같은 종북(從北)주의자라는 의심의 눈초리를 받아야 했고, 평소 저와 가까웠던 지인들로부터 자신과 아무런 관련도 없는 일에 끼어들어 왜 괜한 의심을 자초했냐며 질책을 들어야 했습니다.

그때 제가 칼럼에서 저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인용하였던 책이 바로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 1806~1873)의 ≪자유론(On Liberty)≫입니다. 자유란 무엇일까? 자유란 어떠한 가치를 갖는가? 자유의 옹호자들은 어떠한 이상을 추구하여야 하는가? 우리 사회에서 스스로를 자유주의자라고 추켜세우는 사람들은 진정으로 이러한 자유의 옹호자들일까? 그렇지 않다면 진정한 자유의 옹호자는 현실에서 어떠한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 이러한 자유의 의미와 가치에 가장 탁월한 필치로 가장 분명하게 설명하고 있는 정치고전이 바로 ≪자유론≫입니다.

밀의 <<자유론>>과 이사야 벌린의 <<자유론>>, 이사야 벌린의 <<자유론>>은 <자유의 두개념> 등 그의 자유에 대한 여러 논문을 모은 것입니다. 밀의 <<자유론>>은 자유에 관한 최고의 에세이로, 벌린의 <자유의 두개념>은 자유에 관한 최고의 논문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자유론≫, 자유에 관한 최고의 정치고전

‘자유’라는 관념은 비록 고대에서부터 있어왔던 것이지만, ‘자유주의(Liberalism)’는 근대적 관념입니다. 고대 아테네와 로마에서 자유는 일반적으로 노예가 아닌 상태 즉 노예 신분으로부터 벗어난 상태를 의미하였고, 중세에서 자유는 군주나 봉건영주의 조세‧통행료‧사법권으로부터의 면제를 의미하였습니다. 고중세의 자유는 신분적‧특권적 의미를 갖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반하여 근대적 의미의 자유(자유주의)는 보편적‧평등적 성격을 갖는 것입니다. 즉 자유주의는 모든 개인들이 신분적․계급적 차이를 불문하고 그 자신의 사적 영역에서는 마음대로 사유하고 처신하고 추구할 자유를 지니고 있다고 보고, 그러한 자유를 최고의 가치로 삼는 신념 체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자유주의는 집단이나 권위보다 ‘개인’을 우선시하고, 그러한 각각의 개인을 위한 ‘자유’를 중시하며, 그러한 개인들의 자유를 서로 존중하는 ‘관용’을 강조합니다.

≪자유론≫의 근간에 있는 신념도 바로 이러한 자유주의입니다. 밀은 ≪자유론≫에서 인간의 '개별성(individuality)'을 최우선합니다. 밀이 자유를 강조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인간의 개별성 때문입니다. 각자가 자신의 생각과 취향에 따라 자유롭게 살 수 있어야만 개별성이 진정으로 발휘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밀은 자유를 그 이전의 근대 사상가들처럼 자연권과 같은 추상적 원리에 의하여 정당화하는 것을 거부합니다. 그가 자유를 강조하는 맥락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도구적․공리주의적 측면에서이고, 다른 하나는 본유적․목적적 측면에서입니다. 그는 우선 공리주의에 입각하여, 각자의 삶은 그 스스로가 설계하고 그 마음대로 추구할 때 그 당사자를 위한 최선의 결과를 낳고 나아가 사회 전체를 위해서도 최선의 결과가 낳게 될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공리주의에서 자유는 최대한의 효용을 증진시키는데 있어서 하나의 수단으로 선택된 것에 불과합니다. 만약 자유를 반대하는 것이 더욱 효용을 증진시킨다면, 反자유도 가능한 대안입니다. 자유주의자인 밀은 이러한 공리주의의 치명적 결과에서 벗어나, 자유 그 자체의 가치를 강조합니다. 자유는 그 자체로 인간 행복의 본질적 요소이기에, 그 결과에 상관없이 그 자체로 소중한 것이라고 그는 강조합니다. 여기서 밀은 전체 사회의 효용보다도 각자에의 효용에, 각자에의 효용보다도 각자의 자유 그 자체의 가치를 우선시하고 있습니다.

효용(utility)과 무관한 추상적 권리에 관한 생각이 이러한 나의 주장에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었다. 나는 효용이 모든 윤리적 문제의 궁극적 기준이 된다고 생각한다. / (그러나) 당사자에게 더 좋은 결과를 가져다주거나 더 행복하게 만든다고, 또는 다른 사람이 볼 때 그렇게 하는 것이 현명하거나 옳은 일이라는 이유에서, 본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무슨 일을 시키거나 금지시켜서는 안된다. 이런 선한 목적에서라면 그 사람에게 충고하고, 논리적으로 따지며, 설득하고 간청하면 된다. 그러나 말을 듣지 않는다고 강제하거나 위협을 가해서는 안된다 / 누구든지 웬만한 정도의 상식과 경험만 있다면, 자신의 삶을 자기 방식대로 살아가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그 방식 자체가 최선이기 때문이 아니다. 그보다는 자기 방식대로 사는 길이기 때문에 바람직하다는 것이다.(인용문의 순서는 필자의 임의임)

민주주의, 우리의 자유를 위협할 수 있다

밀이 ≪자유론≫에서 특히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사상․종교 등의 양심의 자유와 언론․출판․집회․결사 등의 표현의 자유입니다. 밀은 전통적인 혹은 현재의 지배적 것과 다른 의견․종교․취향․선호․이상 등을 표현하고 추구할 수 있는 자유와, 그것에 대한 국가와 사회의 관용을 주문하고 있습니다.

자유의 기본 영역으로 다음의 셋을 생각할 수 있다. 첫째, 내면적 의식의 영역이 있다. 이것은 우리가 실제적이거나 사변적인 것, 과학 도덕 신학 등 모든 주제에 대해 가장 넓은 의미에서의 양심의 자유, 생각과 감정의 자유, 그리고 절대적인 의견과 주장의 자유를 누려야 한다는 말이다……둘째, 사람들은 자신의 기호를 즐기고 자기가 희망하는 것을 추구할 자유를 지녀야 한다. 각자의 개성에 맞게 자기 삶을 설계하고 자기 좋은 대로 살아갈 자유를 누려야 한다……셋째, 이러한 개인의 자유에서 이와 똑같은 원리의 적용을 받는 결사의 자유가 도출된다……어떤 정부 형태를 가지고 있든 이 세 가지 자유가 원칙적으로 존중되지 않는 사회라면 결코 자유로운 사회라고 할 수 없다. 이러한 자유는 절대적으로, 무조건적으로 누릴 수 있어야 완벽하게 자유로운 사회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자유에 대한 밀의 태도는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의 관념과 유사합니다. 각자에게 최선인 이기심이 시장경쟁과 가격기구를 통하여 전체적인 조화와 공공의 이익을 낳게 되는 것처럼, 밀은 각자의 자유로운 의견․종교․취향․선호․이상 등이 사회적 자유와 관용의 무대에서 상호 논박을 통하여 어우러져 개인적․전체적 조화와 성숙을 이루게 된다는 것입니다.

전체 인류 가운데 단 한 사람이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 사람에게 침묵을 강요하는 일은 옳지 못하다. 이것은 어떤 한 사람이, 자기와 생각이 다르다고 나머지 사람 전부에게 침묵을 강요하는 일만큼이나 용납될 수 없다……어떤 생각을 억압하는 것이 심각한 문제가 되는 가장 큰 이유는, 그런 행위가 현 세대뿐만 아니라 미래의 인류에게까지 강도질을 하는 것과 같은 악을 저지르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만일 그 의견이 옳다면 그러한 행위 는 잘못을 드러내고 진리를 찾을 기회를 박탈하는 것이다. 설령 잘못된 것이라 하더라도 그 의견을 억압하는 것은 틀린 의견과 옳은 의견을 대비시킴으로써 진리를 더욱 생생하고 명확하게 드러낼 수 있는 대단히 소중한 기회를 놓치는 결과를 낳는다.

밀은 민주주의 시대에 이러한 자유는 더욱 위협을 받게 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민주주의에 내재되어 있는 평균주의․획일주의적 경향으로 인하여, 다수가 여론이나 관행을 앞세워 소수의 이질적인 의견 등을 억압하고, 이에 위압당한 소수는 침묵하게 될 가능성의 증대된다는 것입니다. 그는 특히 지적․윤리적으로 탁월한 소수의 사회적 명망 인사들이 이러한 민주주의의 폐해에 맞서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제 정치영역에서 다수의 횡포는 온 사회가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될 큰 해악 가운데 하나로 분명히 인식되고 있다. 다른 권력의 횡포와 마찬가지로, 다수의 횡포도 주로 공권력의 행사를 통해 그 해악이 처음 목격되었으며, 지금도 다르지 않다. 그러나 주의 깊게 관찰해보면, 사회 자체가 횡포를 부린다고 할 때 -다시 말해 사회가 개별 구성원들에게 집단적으로 횡포를 부린다고 할 때- 그것은 정치권력 기구의 손을 빌려 할 수 있는 행위에만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사회는 스스로의 뜻을 관철시킬 수 있고 실제로도 그렇게 한다. 이처럼 사회가 그릇된 목표를 위해 또는 관여해서는 안 될 일을 위해 권력을 휘두를 때, 그 횡포는 다른 어떤 형태의 정치적 탄압보다 훨씬 더 가공할 만한 것이 된다. 정치적 탄압을 가하는 사람들과 달리, 웬만해서는 극형을 내리지 않는 대신 개인의 사사로운 삶 구석구석에 침투해, 마침내 영혼까지 통제하면서 도저히 빠져나갈 틈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는 개인이 군중 속에 묻혀버린다. 정치적인 측면에서 볼 때 이제 여론(pubric opinion)이 세상을 지배한다는 말은 진부하기까지 하다. 대중(masses)만이 권력자라는 말에 어울리는 유일한 존재가 되었다. 정부도 대중이 원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을 챙겨주는 기관이 되고 있다. 공공영역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고, 개인들의 도덕적․사회적 관계에서도 똑같은 현상이 목격된다……그저 그런 정도의 능력밖에 갖지 못한 다수 보통 사람들의 주장이 점점 압도적인 힘으로 온 세상을 지배하는 요즘 같은 때에는, 널리 통용되는 의견의 잘못을 지적하고 시정할 수 있도록 뛰어난 사상을 지닌 사람들의 개별성이 더욱 발휘되어야 한다……여느 시대 같으면, 그들이 대중과 다르게 행동하는 것 자체는 별 의미가 없고 오로지 더 나은 행동을 할 때만 긍정적인 평가를 받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시대에는 획일성을 거부하는 파격, 그리고 관습을 따르지 않는 것만으로도 인류에게 크게 봉사하는 셈이다. 오늘날에는 무언가 남과 다른 것을 일체 용납하지 않을 정도로 여론의 전제(專制)가 심하다.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색다르게 행동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밀의 민주주의의 폐해에 대한 이러한 인식은 토크빌과 유사합니다. 토크빌은 ≪미국의 민주주의≫에서 향후 민주주의 체제에서의 다수의 횡포는 정치적․폭력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적․심리적일 것이라고 주장하고, 이것이 민주주의의 진정한 문제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과거 군주의 권한은 사실적인 것으로 사람들의 행동을 통제하지만, 사람들의 의지는 억제할 수 없었다. 그러나 (민주주의 체제에서)다수는 사실적인 동시에 윤리적인 권력을 가지고 있는데, 그 권력은 행동뿐 아니라 의지에도 작용하고 모든 도전뿐 아니라 모든 토론까지도 억압한다……그(소수의 다른 의견을 가진 자)를 비난하는 사람들은 큰소리로 비판하고 그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입을 다물고 용기 없이 멀어져간다. 매일 기울여야 하는 노력에 짓눌려서 그는 마침내 굴복하고 진실을 말했던 것을 후회나 하는 것처럼 침묵 속으로 가라 앉는다……(군주정과 반대로) 민주공화정에서는 신체는 자유스럽게 내버려두지만 영혼은 얽매인다.……이런 나라들에서는 다수의 권력이 너무나 절대적이고 막강하기 때문에 개인이 다수가 규정해놓은 궤도를 이탈하려 한다면, 시민으로서의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고 또한 인간으로서의 자질을 거의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 토크빌의 ≪미국의 민주주의≫

시중에서 구할 수 있는 자유주의의 의미와 역사에 관한 설명하고 있는 책들.

어떠한 경우에 자유는 제한될 수 있는가?

밀은 모든 인간은 자신의 의사를 마음대로 개진할 수 있고 자신의 의사와 취향에 따라 마음대로 삶을 살 수 있지만, 그러한 그의 자유로운 행위가 ‘다른 사람에게 해(害)를 끼칠 때’는 제약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인간 사회에서 누구든 다른 사람의 행동의 자유를 침해할 수 있는 경우는 오직 한 가지, 자기 보호를 위해 필요할 때문이다. 다른 사람에게 해(harm)를 끼치는 것을 막기 위한 목적이라면, 당사자의 의지에 반해 권력이 사용되는 것도 정당하다고 할 수 있다. 이 유일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문명사회에서 구성원의 자유를 침해하는 그 어떤 권력의 행사도 정당화될 수 없다……당사자에게 더 좋은 결과를 가져다주거나 더 행복하게 만든다고, 또는 다른 사람이 볼 때 그렇게 하는 것이 현명하거나 옳은 일이라는 이유에서, 본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무슨 일을 시키거나 금지시켜서는 안된다.

그러나 인간은 사회적 구성원의 하나이기에, 인간의 행위는 거의 모든 경우에 타인에게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고 그러한 영향의 많은 경우는 타인에게 불이익한 것일 수 있습니다. 밀은 여기서 이렇게 타인에게 해를 끼치는 경우를 무한히 확장되는 것에 반대하고, 특정한 기준을 내세웁니다.

어떤 행동이 다른 개인이나 공공에게 명백하게 해를 끼치거나 아니면 해를 가할 위험성이 분명할 때, 그 행동은 자유의 영역에서 벗어나 도덕이나 법률의 적용 대상이 된다. 이런 경우는 어떨까? 사회생활을 하다보면 공공 의무를 조금도 위반하지 않고, 또 자신을 제외한 어느 누구에게도 눈에 띌 만한 손해를 주지 않는 행동이지만, 그럼에도 이른바 불확정적(contingent) 또는 추정적(constructive) 피해를 사회에 끼칠 수 있다. 이 정도의 불편은 자유라는 좀 더 큰 목적을 위해 감수할 수밖에 없다.

어떠한 경우가 타인이나 공공에 명백하고 분명하게 해를 끼치거나 끼칠 위험성 있는 경우이고, 어떠한 경우가 그러한 위험성이 불확정적이고 추정적인 경우에 불과하여 우리가 감수할 수밖에 없는 경우일까요? 밀은 그 적절한 예시로 다음과 같은 것을 말합니다.

어떤 사람이 곡물중개상들이 가난한 사람들의 배를 곯린다거나 사유재산은 강도짓이다 라는 의견을 신문 지상에 발표한다면, 이런 행동을 방해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곡물중개상의 집 앞에 흥분한 폭도들이 모여 있고 그 폭도들을 상대로 그런 의견을 개진하거나 그러한 벽보를 붙인다면, 그런 행동을 처벌하는 것을 불가피하다.

이러한 밀의 철학은 20세기 초반 미국 사법부에 의하여 ‘명백하고도 현존하는 위험의 원칙(rule of clear and present danger)’으로 정립되었고, 이는 전 세계 문명국가에서 표현의 자유를 제한할 때의 필수적 준수 요건이 되었습니다. 언론, 집회 등의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기 위해서는 국가나 사회에 미치는 해악이 명백하고 현존해야 하고(“다른 개인이나 공공에게 명백하게 해를 끼치거나 아니면 해를 가할 위험성이 분명할 때” 또는 “곡물중개상 집 앞의 흥분한 폭도들을 상대로 선동할 때”), 단지 국가나 사회에 위험을 줄 수 있다는 가능성만으로(“불확정적 또는 추정적 피해만이 예상될 때” 또는 “신문지상에 곡물중개상이 가난한 사람들의 배를 곯린다고 주장할 때”) 제한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맨 처음 이야기 했던 강 아무개의 사건은 어떤가요? 강 아무개의 인터넷에서의 북한 찬양과 법정에서의 북한 만세 외침은 우리의 상식에 어긋나고 불쾌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혹은 재판관과 방청객에게 불쾌감을 주는 것을 넘어, 과연 그의 글과 외침이 국가보안법에 규정된 대로 대한민국의 존립과 자유민주적 질서 자체를 위태롭게 하는가요? 그의 글과 외침으로 우리들과 재판관의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이 흔들리게 되었는가요, 아니 그렇게 될 최소한의 가능성이라도 있는가요? 우리의 자유민주주의의 체제와 신념이 강 아무개의 글과 외침만으로 흔들릴 정도로 근거 없고 박약한 것이었다면, 그런 체제와 신념은 차라리 없는 것이 낫지 않을까요? 자유민주주의의 진정한 위대함은 그러한 글과 외침마저 허용할 정도의 관대함과 유연함에 있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에게 자유와 자유주의는 있었는가?

밀이 말하는 양심과 표현의 자유는 현대 민주주의 기본권중 제1의 기본권입니다. 이러한 양심과 표현의 자유가 인정되지 않는다면, 민주주의는 원초적으로 불가능합니다. 그러하기에 우리의 헌법도 제헌 때부터 양심과 표현의 자유를 다른 모든 권리나 가치보다 우선하여 보호한다고 명시하고 있고, 우리의 사법부도 양심의 자유는 절대 제약할 수 없고, 표현의 자유도 엄격한 원칙에 따라 극히 예외적인 경우만 이를 제약할 수 있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 우리의 현실을 어떠할까요?

우리 사회에 도입된 자유주의는 반공을 위한 이념적 슬로건 이상의 구실을 하지 못했다……민주주의를 지지하는 세력들 역시 냉전반공주의와 결착된 자유주의에 대한 부정적 인식 때문에, 낭만적 민주주의나 사회주의와 같은 집단주의적 열정을 담는 이념을 추구했다……요컨대 한국에서 자유주의는 보수 세력에 의해 왜곡되고 민주 세력에 의해 버려진 것이 되고 말았다. 그러므로 한국에서 자유주의는 특별한 역사적 계기와 그로부터 탄생한 철학적․도덕적 의미를 지니지 못한 채 기껏해야 민주주의를 수식하는 말, 즉 자유민주주의라는 말에서 ‘자유’는 내용적으로 불필요한 수식어에 지나지 않거나, 민주주의의 의미를 보수적으로 제한하는 것이 되고 말았다 - 최장집,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최장집 교수의 위의 말보다 우리 사회에서의 자유주의의 현실을 보다 정확히 표현한 것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 사회에서 자유주의는 보수에 의해 냉전반공주의를 위한 치장 도구와 민주주의 요구를 기만하기 위한 선전 도구로 왜곡되어 왔고, 보수에 의한 그러한 부정적 도구화 때문에 자유주의는 진보에 의해서도 외면을 받아 왔습니다.

1970년 김 아무개는 철거반원들에게 “김일성 보다 더 한 놈들아”라고 하였다가 반공법위반으로 구속되었고, 아시안게임이 열리던 1986년 만취한 한 승객은 버스기사와 요금 시비중 “나는 공산당이다. 공산당이 뭐가 나쁘냐”고 외쳤다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되었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역사를 보며 ‘막걸리 보안법’이라며 표현의 자유를 짓밟은 군사정권과 이에 동조한 당시 사법부를 조롱하였습니다.

단지 과거에만 그러하였을까요? 우리는 3-40년 뒤 이러한 조롱에서 자유로울까요? 최근에 집회에서 태극기나 대통령의 초상을 불태우거나, 2010년 천안함 사건에 대한 정부의 발표에 대하여 특정 시민단체가 의문을 제기하는 서신을 국제사회에 제출하거나, 2011년 G20 정상회담에 반대하는 시민이 이를 조롱하는 쥐 그림을 내거는 등 정부 정책이나 행사를 반대하여 적극적․소극적으로 항의를 표시하는 일이 자주 일어납니다. 이러한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보수여당 의원들, 종편 언론에 등장하는 이데올로그들, 보수적 관변단체의 구성원들은 국가정체성을 부정하는 종북행위라거나 국격과 국가이익을 훼손하는 범죄행위라며, 反국가적․反사회적 범죄로 구속수사하거나 특별법을 제정하여 엄벌해야 한다며 목소리를 높입니다.

자유주의, 보수주의, 사회주의, 무정부주의 등 정치이념을 설명하고 있는 책들.

자유에 명백하고도 현존하는 위험을 주는 자는 누구?

보수주의가 기본적으로 어떠한 원칙을 ‘보수(保守)’하는데 있다면, 현대의 보수주의자들이 수호하여야 최고의 원칙은 무엇일까요? 제헌 이래 우리 헌법은 자유주의에 입각하였음을 선언하여 왔고, 대부분의 우리의 보수주의자들은 자신들이 그러한 헌법 상의 자유주의의 진정한 수호자라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우리 헌법과 보수주의자들의 근간이 되고 있는 자유주의가 보호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국기도 국격도 국가이익도 국가보안법도 아닙니다. 오히려 자유주의가 진정으로 보호하고자 하는 것은 국기를 밟고 국가의 위신을 훼손하고 국가이익에 반하고 심지어 우리의 적대 국가를 이롭게 할지라도, 그것을 허용하는 자유와 관용의 정신입니다.

우리 사회에서 자유에 ‘명백하고도 현존하는 위험’은 강 아무개도, 국기를 짓밟는 시위대도, 국격을 조롱하는 시민도, 국가이익에 반하게 행동하는 시민단체도 아닙니다. 진정으로 우리의 자유에 ‘명백하고도 현존하는 위험’을 주는 것은, 오히려 그런 정도의 자유마저 용납하지 못하는 우리의 법과 재판, 겉으로 자유주의를 내세우면서도 자유주의를 전혀 이해하지도 못하고 오히려 자유주의를 억압하고 질식시키는 보수꼴통들, 그런 법․재판․보수적 담론이 우리의 자유를 위협함에도 단지 남의 일로 생각하고 이에 무감각한 우리들의 이성에 있는 것입니다.

≪자유론≫은 150년 전의 영국 사회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현재의 우리 사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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