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의 ≪대의정부론≫ 읽기 (3)

첫 회에 지적한대로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 1806∼1873)은 최초의 온전한 민주주의 정치사상가입니다. 그는 모든 시민들이 자신의 권리와 이익을 스스로 옹호하고 대변할 수 있고, 또한 공적․정치적 일에 참여를 통하여 지적․윤리적 발전을 도모할 수 있는 대의제 민주주의가 가장 이상적인 정치체제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민주정체도 정치적 무지와 횡포(모든 시민들과 공동체의 이익을 외면한 채, 자신들만의 이기적․당파적 이익을 관철하기 위하여 권력을 남용하는 것으로, 밀은 이를 ‘계급입법’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의 위험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고 보았고, 오히려 민주정체에서는 하층민들의 ‘무지’와 ‘다수’로 인하여 그러한 위험성은 더욱 크다고 보았습니다.

그러한 무지와 계급입법의 횡포의 위험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그가 제시한 것은 민주주의에 ‘지적․윤리적 탁월함’을 구현할 수 있도록 제도적․실천적 제약을 부과하는 것입니다. 그는 그러한 방안으로 선거권 조정부터 국가기구의 개편과 도덕적 계몽 운동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것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의 지적․윤리적 탁월함이라는 가치에의 집착은 상상 이상입니다. 그의 인생과 신념, 철학 전반이 지적․윤리적 탁월함에 대한 집착으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그러한 집착이 그를 때론 이상주의적인 여성해방론자와 사회주의자로 만들기도 하였고, 때론 反민주적 편견으로 복귀하게 만들기도 하였고, 심지어 때론 전체주의자로 만들기도 하였습니다. 즉 그러한 집착은 그로 하여금 모든 시민들이 정신적 발전과 성숙을 위해서는 사회경제적 평등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게 하기도 하고, 무지한 시민들의 선거권을 제한하거나 똑똑한 사람들에게 훨씬 더 많은 투표권을 주어야 한다고 주장하게도 하고, 무지한 시민들이 선거권 행사를 올바로 행사하는지 감시하여야 한다는 주장에 이르게까지 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혼돈, 잡탕, 궤변은 그가 구상하는 최상의 민주정체인 ‘숙련(skilled) 민주주의’,  즉 지적․윤리적 탁월함으로 지도되는 민주정체 구상에서도 존재합니다. 이러한 최상의 정체를 위한 ≪대의정부론≫에서의 그의 여러 제안들은 서로 극명히 상충되기도 하고, 자신의 기존의 기본 신념과 이율배반적이기도 하고, 억지와 궤변만으로 정당화되기까지 합니다(여기서는 ≪대의정부론≫에 산재되어 있는 그의 여러 대안들을 ‘대표’와 ‘책임’의 원리에 따라 재구성하여 보겠습니다. 

여성참정권을 주장하는 밀을 풍자하는 당대의 만화.

탁월함에의 과도한 집착, 혼돈․잡탕․궤변을 만들다

최초의 온전한 민주주의자였던 밀은 민주주의의 폐해를 막기 위하여 기존의 정치사상가들과 정치인들이 주장하였던, 신분과 재산 자격기준에 기초한 선거․피선거권의 제한 방식은, 불의한 것이며 지속가능성도 없으며 시민들의 지적․윤리적 발전도 기할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 바로 뒤에 밀은 선거권의 제한은 일정한 경우에 정당화될 수 있다고 주장하며, 읽고 쓰거나 계산 능력이 없는 자, 국가에 세금을 낼 경제적 능력이 없는 자, 구호금으로 연명하는 자, 타인의 빚을 갚지 않은 파산자 등은 선거권을 부정하거나 일정 기간 제한하는 것이 정당하고 또한 바람직하다고 주장합니다.

그는 조금이라도 세금을 내는 자에게는 선거권을 부여하고, 시민들의 지적 능력의 향상을 위한 무상의 의무교육을 실시할 것을 주장하고, 이러한 지적 능력에 따른 선거권 제한은 일시적인 것이라고 한정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기존의 反민주주의자들의 주장보다는 진일보한 것이지만, 그의 이러한 선거권 제약은 그 자신의 확고한 민주적 신념을 배반하는 것임은 분명합니다.  

밀은 이렇게 선거권을 제한하더라도 정치적 탁월함을 추출하기에는 한계가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는 민주정체는 종국에 하층민들과 노동자들이 다수 선거인이 될 수밖에 없고, 그럴 경우 그들을 대변하는 정치인들만이 정치적 대표가 되고, 사회내 소수인 교양인들은 정치적 대표가 되지 못하여, 결국 정치는 무지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어렵다고 보았습니다.

지적․윤리적 탁월함을 갖춘 사회내 교양계층이 보다 많이 정치적 대표가 되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그는 그 제도적․실천적 방안으로 여러 가지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첫째 사회내 저명인사들의 당선을 도모하기 위하여 지역구 후보와 무관하게 투표할 수도 있는 투표권을 부여하는 제도, 둘째 지적 능력면에서 자격을 갖춘 자들에게 여러 장의 투표권을 부여하는 제도(밀은 전문직 종사자, 대학졸업자들에게 여러 장의 투표권을 부여하고, 공평을 위하여 지적 능력의 판단을 위한 국가시험제도도 실시할 것을 제안), 셋째 계급적‧당파적 이익에 따라 투표하지 못하고 사회적 저명인사에게 투표하도록 심리적 압박을 가하기 위한 기명 · 공개투표 제도, 넷째 가난한 교양인도 당선될 수 있도록 선거비용을 못 쓰게 하는 제도, 다섯째 하층민들이 대표가 되고자 하는 욕망을 꾸지 못하도록 의원에게 보수를 지급하지 않는 제도, 여섯째 상원 혹은 원로원을 설치하되 그 의원 자격을 고위직 공직자, 군 사령관, 국립연구소의 장년 교수 출신 등으로 제한하여 통치자가 임명하거나 하원에서 간접선출토록 하는 제도 등을 제안하고 있습니다.

“무지한 자들은 감시 하에 투표해야”

위 제도들은 모두 밀의 지적․윤리적 탁월함에 대한 집착에서 기인한 것이지만, 위 제도들 중 특히 기명․공개 투표의 제안에서 밀의 이러한 과도한 집착의 황당한 결과를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정치적 선거든지, 심지어 보통선거라고 하더라도, 투표하는 사람은 자신의 개인적 이익이 아니라, 공익을 먼저 고려해야 할 절대적인 도덕적 의무를 안고 있다……오늘날 유럽의 선진사회에서는, 특히 영국과 같은 곳에서는 유권자에게 강압을 행사하는 일이 점점 드물어졌다. 이제는 유권자가 다른 사람의 압력을 받아 잘못된 투표를 하는 것보다 그 사람 자신 또는 그가 속한 계급의 사악한 이해관계나 근거 없는 감정에 휘둘리는 것을 더 염려해야 한다. 후자를 차단하는 것이 더 급하기 때문에, 전자를 방지한다면서 더 중차대한 폐단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사람들은 비밀투표를 할 경우, 그저 돈이나 악의, 불쾌감, 사적인 경쟁심리 심지어 계급적․당파적 이익 또는 편견에 따라 정직하지 못하거나 비열한 방향으로 주권을 행사할 수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사실 생각보다 더 자주 일어나는 일이지만) 대다수 정직하지 못한 사람들을 견제하는 유일한 방법이 그들의 뜻과 상관없이 정직한 소수 사람들의 생각을 강제로 따르게 하는 것일 수도 있다……아무리 좋은 환경 아래에서도 무기명투표가 빚어내는 해악을 방지할 수가 없기 때문에 보다 강력한 조치가 불가피하다. 그저 지금처럼 그 필요성을 외쳐서는 될 일이 아니다……투표용지에 투표하는 사람의 서명이 꼭 들어가야 하며, 그것도 공공 투표 장소 같은 곳에서 현장 책임 공무원이 보는 가운데서 날인해야 한다.

사실 밀이 제안하고 있는 대부분의 제도는 고대 아테네의 지독한 反민주주의 사상가였던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제안하고 있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면 민주주의자였던 밀은 이러한 자신의 기본 신념과 이율배반적인 反평등적 제도를 어떻게 정당화할까요? 그가 내세우는 것은 하나는 ‘민주적 논리’이고 다른 하나는 ‘反민주적 궤변’입니다. 전자는 이전까지 정치철학에서 인식하지 못했던 전혀 새로운 문제 제기이었고, 후자는 플라톤 이래 지속되었던 전통적인 억지입니다.

그의 이율배반, 논리 vs 궤변

밀은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인 ‘다수결 원칙’에는 근본적인 모순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민주주의란 기본적으로 다수건 소수건 그 수에 비례한 만큼 대표자를 내는 것인데, 단순히 다수결에 의존한다면 하층민과 노동자들의 대표자들만으로 대표기구가 충원될 뿐이라서 대부분의 소수파는 전혀 대표되지 못하고, 특정한 소수파만 과대 대표 되어(전체를 기준으로 하면 소수파에 불과한 다수파 중의 특정한 소수파가 권력을 독점) 결국은 민주주의의 본래의 의미에 어긋나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입니다.

민주주의라는 말 속에 두 가지 완전히 상반된 개념이 통용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순수한(pure) 의미의 민주주의는 평등하게 대표되는 전체 인민에 의한 전체 인민의 정부를 지칭한다. 반면 사람들이 보통 생각하는 민주주의 그리고 지금까지 존재했던 민주주의는 특정 집단만을 대표하는 그저 다수파 인민에 의한 전체 인민의 정부에 불과했다……소수파가 다수파의 뜻에 따라야 한다는 것은 매우 익숙한 사실이다. 그래서 이 문제에 관한 한 더 이상 신경 쓸 필요가 없다고 미리 단정해버린다. 소수파 사람들도 다수파와 마찬가지로 권력을 행사할 수 있어야 한다는 사실과 소수파의 뜻은 아예 무시해도 된다는 사실 사이에 그 어떤 중간 지점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진정한 의미의 평등 민주주의에서는 모든 구성원 또는 그 어떤 구성원이라도 반드시 그 수에 비례하여 대표자를 내야한다……그렇지 않다면 평등한 정부가 아니라 불평등과 특권이 지배하는 정부만 존재할 뿐이다. 그 결과 인민 중의 일부가 나머지 인민을 지배하는 형국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의 대의 과정에서는 자신의 정당하고 평등한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하는 일이 봉쇄된 사람들이 생길 수밖에 없는데, 이것은 모든 형태의 정의로운 정부와 배치되는 것이다.

밀의 민주주의에 대한 문제 제기 혹은 새로운 정의는 논리적으로 타당하고, 그의 말대로 이것이 진정한 의미의 민주주의입니다. 소수파의 이익과 의견이 사회적으로 제대로 보호되지 못하고 정치적으로 제대로 대변되고 반영되지 못한다면, 그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라 다수의 독재일 뿐입니다.

여기서 밀은 다수를 하층민과 노동자, 소수를 사회내 엘리트와 연계시켜 설명하고 있습니다. 다수인 하층민과 노동자들의 무지와 횡포로부터 벗어나고, 소수의 엘리트들이 갖고 있는 지적․윤리적 탁월함을 보다 많이 정치적으로 추출하기 위하여, 앞서와 같이 反민주적인 선거권의 제한, 복수 투표제, 차등 투표제, 기명‧공개투표를 통한 도덕의 강제, 하층민 대표를 배제하기 위한 의원 무보수제, 상층 계급만 자격을 갖춘 상원 제도 등을 제안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밀의 다수=하층민과 소수=엘리트의 연계는 은유적일 뿐, 논리적이지도 충분하지도 않습니다. 그의 ‘순수한’ 민주주의론은 사회내 소수인 똑똑한 신사들도 그 수에 비례하여 대표자를 내고 대표자가 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증명할 뿐, 그들이 그 비례를 넘어 오히려 정치적 다수가 되어야 한다는 그의 희망과 그것을 위한 그 자신의 위 反민주적 제안들을 정당화 시켜주지는 못합니다. 그렇다면 사회내 소수인 똑똑한 신사들이 그 수 이상으로 정치적 다수가 되어야 하는 근거는 무엇일까요? 여기서 밀은 억지와 궤변으로 나아갑니다.

각자 의견은 언제나 일정한 몫으로 계산될 수 있다. 다만 사람에 따라 투표의 값어치를 다르게 산정하는 것이 옳다. 그렇다고 이 제도에서 낮은 값어치에 매겨진 사람이 불쾌하게 생각할 이유는 없다. 공동 관심사에 대해 자기 의견을 반영할 기회를 전혀 가지지 못하는 것과, 공동체 일은 더 잘 처리할 능력이 있는 사람이 더 많은 발언권을 가지게 양보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다. 이 둘은 그저 다른 것이 아니고, 차원이 다른 문제이다……바보, 그것도 아주 구제불능의 바보라면 모를까, 사람들 중에는 생각이나 그 이상의 희망사항에 이르기까지 자기의 것보다 더 큰 배려를 받아야 마땅한 예외적 존재가 있다는 것을 누구나 인정할 것이다.

홉스는 ≪리바이어던≫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지배에 적합한 사람이 따로 있고, 남을 섬기는데 적합한 사람이 따로 있다고 주장하고 이런 불평등을 자신의 학설의 기초로 삼았다……그러나 그의 이런 주장은 이성에 위배될 뿐만 아니라 경험에도 위배된다. 왜냐하면 자기가 주인이 되기보다 차라리 남의 지배를 받는 것이 낫다고 생각할 바보는 세상 어디에도 없기 때문”라고 말하였습니다.

밀은 지금 “대학을 졸업하거나 똑똑한 사람들이 나보다 더 많은 투표용지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구제불능의 바보뿐”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밀의 지적․윤리적 탁월함에 대한 집착이 얼마나 끔찍스러운 정도인지, 그 스스로가 황당한 바보론을 펼치는 ‘구제불능의 바보’가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우리의 국회내 회의 모습, 우리의 정치의 문제가 과연 똑똑한 사람들을 의원들로 선출하지 못하여 그러한 것인가?

‘구제불능의 바보’가 된 가장 똑똑한 정치사상가

밀의 선거권의 제한, 복수 투표제, 차등 투표제, 기명 · 공개투표를 통한 강제, 하층민 대표를 배제하기 위한 의원 무보수제, 상층 계급만 자격을 갖춘 상원 제도 등의 제안은, 결국 민주적 ‘대표’ 원리를 수정하고 왜곡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대표 원리의 수정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느꼈습니다. 그는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인 정치적 평등의 원리를 수정하여, 똑똑한 사람들이 보다 많이 투표권을 갖고 그들이 보다 많이 대표자가 되도록 하는 것만으로는 정치적 탁월함을 달성 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여기서 민주주의의 또 다른 근본 원리인 ‘책임’ 원리의 수정으로 나아갑니다. 그것은 대표 원리의 수정․왜곡을 통하여 선출된 똑똑한 사람들(의원이나 공직자)이, 오직 그들 자신의 능력과 판단에 따라 공적인 일을 처리하도록, 바꾸어 말하면 무지한 인민들이 그러한 똑똑한 사람들의 일 처리에 되도록 관여하지 못하도록 민주적 통제의 의미와 범위를 수정하고 왜곡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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