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른슈타인의 ≪전제/과제≫와 로자의 ≪개혁/혁명≫읽기 (5)

마르크스에게 사회주의는 개인적 도덕이나 사회 정의 차원의 문제가 아닙니다. 비록 그의 사상의 첫 출발은 착취에 대한 반감이나 평등에 대한 선호에서 비롯된 것일지라도, 그는 사회주의를 개인이나 대중의 도덕적 선호나 정의감각과 연계시키는 것을 거부하였고, 그렇게 연계시키려는 시도에 대하여 계속적으로 경계하고 있습니다.

마르크스는 ≪공산당 선언≫에서 자본주의를 그대로 둔 채 그 폐해만을 치료하려는 인도주의자․노동개혁가․자선사업가 등을 부르주아적 사회주의자로 규정하여 배격하고, 대중에 대한 도덕적 설득을 통한 이상주의적 합의로 사회주의를 달성하려 했던 생시몽․푸리에․오웬을 공상적 사회주의자로 규정하여 이 또한 배격하고 있습니다.

또한 마르크스는 생전에 라살레주의자들과도 격렬히 투쟁하였습니다. 라살레(Ferdinand Lassalle, 1825∼1864)는 독일의 노동운동가이자 사회주의자였는데, 그는 중립적인 국가의 중재하에 자본가계급과 노동계급간의 합리적 타협으로 사회주의를 실현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러한 라살레의 노선은 나중에 마르크스주의와 더불어 독일 사회민주당의 또 다른 주류를 형성하게 되는데, 마르크스에게는 라살레주의는 부르주아적 사회주의와 공상적 사회주의의 잡탕으로만 보였습니다.

베른슈타인(Eduard Bernstein, 1850~1932)의 개혁적 사회주의는 마르크스주의적이라기 보다는, 부르주아적․공상적․라살레적 사회주의를 닮았습니다. 실제 베른슈타인은 개혁적 인도주의자들이 좌파의 주류를 이루던 영국에서 10여년간 망명 생활을 하였고, <과학적 사회주의는 어떻게 가능한가>(1901)라는 논문에서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을 예찬하고 있으며, 라살레의 글들을 모아 그의 전집으로 직접 발간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유(類)의 사회주의는 현대에도 반복되고 있습니다. 현대에 하나의 정치(학)적 흐름으로 등장한, 사회민주주의․신사회 운동․68혁명․참여 민주주의․풀뿌리 민주주의․포스트 마르크스주의 등도 이러한 사회주의의 현대적 변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비록 이러한 현대의 변형적 사회주의 이론과 노선들은 베른슈타인을 직접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그들의 많은 이론적․실천적 단초는 베른슈타인으로부터 직접 또는 베른슈타인을 매개로 과거의 부르주아적․공상적․라살레적 사회주의로부터 전승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부르주아적․공상적․라살레적․베른슈타인적․현대의 변형적인 사회주의는 치열한 이론적 분석과 성찰의 결과로 나타난 것은 아닙니다. 이러한 사회주의는 보다 나은 세상은 어떠해야 되고 그러한 세상은 어떻게 실현할 수 있는가 대한 대중적인 상식과 희망에 근거한 것입니다. 마르크스는 이러한 비(非)마르크스주의적 사회주의는 계속적으로 다시 등장할 것이라고 예견하였는데, 그 이유는 바로 이러한 사회주의가 대중적인 상식과 희망에게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베른슈타인.

마르크스적 사회주의 vs 대중적 사회주의

학문하는 방법에서부터 역사와 미래에 대한 통찰에 이르기까지 베른슈타인의 인식은 철저히 대중적인 상식과 희망에 근거해 있습니다. 그는 여러 분야에 걸쳐 마르크스적․마르크스주의적 인식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비록 그가 자신만의 인식을 체계적으로 정립하는데 성공하였다고 보기는 어렵고, 그의 인식이 완전히 새로운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그의 인식은 공상적 사회주의부터 현대의 변형적 사회주의에 이르기까지 반복되는, 그만큼 대중적인 인식에 기초한 것이게 이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베른슈타인은 마르크스의 권위를 빌려 조심스럽게 자신의 인식의 정당성을 내보이고 있지만, 그는 마르크스주의에 내재된 또는 내재될 수 있는 이론적 독선과 실천적 反민주성을 폭로하고 이를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는 어떠한 이론도 선험적 진리나 유일한 과학이라고 주장할 수 없으며, 오히려 교조적․독선적 태도를 버리고 현실의 변화와 다른 이론에 개방적일 때 그 이론은 진리에 가까워지며 보다 과학적일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가 비판하고자 하는 것은 마르크스주의만이 진리라고 인식하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의 독선이었습니다.

오류가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한 때 범한 것이라고 해서 그것을 계속 견지해야 할 이유는 없으며, 반면에 진리의 중요성이 그것이 反사회주의 경제학자나 완전히 사회주의적이지 않은 경제학자가 먼저 발견하거나 서술했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저작 가운데 무엇이 계승할 만한 것이며 또 계승되어야 할 것인지, 그리고 무엇이 버려져야 하는 것이며 버려질 수 있는 것인지를 확실하게 가려줄 바로 그 정신은, 비록 출발점은 오늘날 우리가 보기에 바람직한 것으로 보이지 않지만, 그 목표는 사회민주당이 무엇을 위해서 싸워야 하는지를 정확하게 보여주는 그런 일들에 대해서 우리가 편견 없는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이다. - <과학적 사회주의는 어떻게 가능한가>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당연히 그렇지 않다고 하겠지만, 마르크스주의는 이론적 권위의 독점자가 될 가능성이 충분합니다. 마르크스 주장의 핵심은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을 통한 사회주의의 실현입니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이러한 과정은 개인이나 대중의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역사적 필연이라고 말합니다. 물론 이는 단지 적(敵)을 향한 정치적 수사(修辭)일 수도 있지만, 이러한 레토릭은 아군(我軍)에게는 종교적 도그마가 될 수 있습니다.

선지자가 미래를 예언하고 이것이 예정된 필연이라고 말했을 때, 그 추종자들에게는 그러한 역사과정이 유일하고 객관적인 진리가 됩니다. 그리고 이에 반하는 주장과 실천은 사소하고 무의미하거나 명백한 허위에 불과한 것이 됩니다. 동등한 자격을 가져야 하는 주장과 실천이 이제 선지자에 의하여 주어진 진리에 부합하는가 여부로 위계적으로 편제되거나 전부 인용/전부 배척되는 것입니다. 非종교인의 입장에서는 A, B, C, D 종교가 모두 동등한 자격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A 종교인의 입장에서는 진리인 A 종교와 反진리인 B, C, D 종교가 있을 뿐입니다. 물론 A, B, C, D 종교가 공존할 수 있지만, 그것은 현실의 강제와 필요에 의한 것이지, 종교 자체의 논리에 의한 것은 아닙니다.

베른슈타인이 비판하고자 하는 것은 이처럼 도그마화 된 마르크스주의입니다. 누군가는 이렇게 반박할 수 있습니다. 마르크스는 물론 로자․레닌과 같은 혁명적 사회주의자들도 마르크스주의를 도그마화 하는 교조주의를 비판하고, 변화된 현실과 새로운 이론에 개방적이었다고. 그러나 그들이 가진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을 통한 사회주의의 실현이라는 마르크스의 제1의 가르침은 절대 포기하고 타협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론적 독선에서 반민주주의로

베른슈타인의 이러한 이론에 대한 자세는 그의 정치적 태도와도 연계됩니다. 이론의 선험적․독점적 권위를 부정하고, 모든 이론이 서로 자유로운 비판과 증명을 통하여 진리를 현출하고 과학성을 제고하는 것처럼, 인간 사회에서도 서로 다른 정치적 이상과 신념들이 자유롭고 평등하고 공정한 정치 무대에서 경쟁을 하고, 서로 간의 비판․설득․타협을 통하여 보다 바람직한 합의에 도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베른슈타인은 이러한 취지에서 ≪사회주의의 전제와 사회민주당의 과제≫에서 마르크스주의자나 사회주의자는 독선과 편견을 버리고 개방적이고 관용적인 정치적 태도를 가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오늘날 노동운동이 필요로 하는 사람은……자기 묘판이 아닌 다른 곳에서 자라난 식물도 감싸안을 수 있을 만큼 생각이 넓어야 하며, 사회주의 사상의 영역에서 왕이기 보다는 따뜻한 마음씨를 가진 공화주의자이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非독선적․개방적 정치를 가능하게 제도화한 것이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입니다. 사회주의는 이러한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라는 무대에서 도덕적 선전과 설득, 물질적 유인과 보상 등을 통하여 대중적 지지와 공감을 확산하고, 점진적으로 대중의 윤리적․정신적․문화적 성숙을 도모함으로써 가능하다는 것이 베른슈타인의 주장입니다.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을 통한 사회주의의 실현을 역사적 필연이고 유일한 정의로 간주한다면,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는 역사와 정의를 지체시키는 사소하거나 거추장스러운 것에 불과하게 됩니다. 그리고 사소하고 거추장스러운 과정을 회피하여 권위적(反민주적)으로 역사와 정의를 앞당기는 것이 오히려 바람직하게 보입니다. 그 결과는 최악의 공산 독재체제였습니다. 베른슈타인이 경고하는 이론적 독선과 실천적 反민주주의 사이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습니다.

베른슈타인은 “나에게 최종목표는 아무 것도 아니다, 나에게는 운동이 전부이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프롤레타리아트 혁명과 사회주의를 역사적 필연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는 마르크스나 마르크스주의자들과 정반대로, 사회주의의 ‘이상주의’적 성격을 되살려 냅니다. 그가 사회주의와 정치에서 이미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과거의 유물로 폐기처분하였던 이상주의를 복원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하나의 정치적 신념으로서 사회주의 혹은 사회주의 운동은 베른슈타인에게는, 선험적․절대적 진리가 구현되는 과정이 아니라, 예정되지 않은 미래를 집단적․실천적으로 만들어가는 과정입니다. 즉 그에게 사회주의는 독선적․자기완결적․결정론적인 것이 아니라, 경제적․정치적․도덕적․문화적 선전, 설득, 유인, 보상 등을 통한 대중의 상식과 희망의 점진적 상승으로 실천적으로 창작되는 것입니다.

운동으로서의 사회주의를 추동하는 우선적인 동기는 바로 이해이다. 그러나 여기서 명확히 언급해야 할 점은, 이때 이해라는 것이 오직 개인적인, 즉 경제적인 사적인 이해만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도덕적․이상주의적 이해 역시 존재한다. 이러한 이해가 없다면 어떠한 사회적 행동도 나타날 수 없다는 인식에 바탕을 두고 있다……계급투쟁은 이러한 이해의 투쟁이다……계급투쟁은 언제나 우선 한 계급이나 정당의 이해 관철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투쟁이지 인식상의 명제에 관한 투쟁이 아니다. 그것이 설령 그러한 인식과 관련해 전개된다고 해도 이는 단지 그러한 인식이 이해와 일치하는 한에서이다……교의로서의 사회주의는 이러한 투쟁의 이론이다. 상태로서 파악되든, 학설로 파악되든, 운동으로 파악되든, 사회주의는 그 안에 이상주의적 요소╺ 이러한 이상 자체이든 그 이상을 향한 운동이든╺ 를 포함하고 있다……운동으로서의 사회주의는 자본주의 사회질서를 집단적으로 규제되는 경제로 변혁한다는 특정 목적과 관련된 투쟁의 결집이다. 그러나 이 목적은 이론에 의해 미리 규정되어 있어 그 실현이 숙명론적으로 기다려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투쟁이 이루어지는, 높은 수준에서 소망되는 목적이다. 그럼에도 사회주의는 그러한 미래상을 목적으로 설정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현재의 행동을 이러한 목적의 고려에 기초한 것으로 본다는 점에서 유토피아적 이상주의의 한 부분에 필연적으로 결합되어 있다. - <과학적 사회주의는 어떻게 가능한가>

결국 베른슈타인은 사회주의를 대중적 상식에 기초 지움으로써 사회주의를 현실의 민주주의라는 토대 위에 근거 지우고, 사회주의를 대중적 희망으로 기초 지움으로써 현실의 민주주의의 지평을 넓히고자 한 것입니다. 이처럼 베른슈타인은 민주주의에 기초한 사회주의, 사회주의적 지향을 가진 민주주의를 그렸던 것입니다.

베른슈타인의 저서와 논문집.

베른슈타인 이후의 베른슈타인주의

베른슈타인주의는 독일 사회민주당과 제2 인터내셔널내의 정통파와 혁명파들에 의하여 공식적으로 배척받았습니다. 그러나 사회주의자들과 마르크스주의자들 내부에서 그 지지자는 계속적으로 늘어 갔고, 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사회민주주의’ 노선으로 정립되어 전후 서유럽에서 지배적인 좌파 정치노선이 되었습니다. 베른슈타인은 이러한 사회민주주의 노선의 선구자라고 할 것입니다.

일찍이 로자는 ≪사회개혁이냐 혁명이냐≫에서 베른슈타인주의는 마르크스주의로부터 벗어난 것임을 명쾌하게 규명하고, 이러한 베른슈타인주의는 사회주의의 포기로 연결될 것이고, 이는 오히려 민주주의의 쇠락과 사회경제적 개혁의 후퇴를 가져올 것이라고 경고하였습니다.

선행되어야 할 노력(정치권력의 장악과 사회주의적 목표)을 운동에서 단절시키고 그리하여 사회 개혁을 목표 자체로 설정한다면, 그러한 사회 개혁은 사회주의의 최종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나아가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정반대의 방향으로 우리를 이끌 것이다……직접적인 실제 결과가 가장 중요한 목적이 되자마자, 화해를 거부하는 날카로운 계급 관점은 점점 더 부정적인 장애물로 보이고, 따라서 여기에서 나오는 직접적인 노선은 보상정책과 유화적인 정치가의 기민한 태도다……만일 베른슈타인이 한 것처럼 자본주의의 객관적 모순과 사회 변혁을 통한 자본주의의 철폐라는 목표를 부정하고 배격한다면, 운동은 머지않아 단순히 동업조합 운동이나 사회 개혁 운동으로 축소될 것이며, 결국 마치 무엇이 끌어당기기라도 하듯이 계급의 관점은 포기하는 것으로 이어질 것이다.

사회주의 운동의 운명이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연결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민주주의 발전의 운명이 사회주의 운동에 연결되어 있다. 또한 민주주의는 노동자 계급이 해방 투쟁을 포기하는 경우가 아니라, 반대로 사회주의 운동이 세계 정책과 부르주아의 이탈이 가져오는 반동에 대항해 강력히 투쟁할수록 생명력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 민주주의를 강화시키고자 하는 사람은 사회주의 운동이 약화되는 것이 아니라 강화되기를 바래야 하며, 따라서 사회주의를 위한 노력을 포기한다는 것은 노동운동뿐만 아니라 민주주의도 포기하는 것이다……기본 목표 없이는 실천 투쟁도 모두 無가치하고 無목적적으로 되며, 최종 목표를 포기하는 순간 이와 함께 운동 그 자체도 소멸한다.

지난 세기 후반기에 로자의 경고는 실제 역사적 사실이 되었습니다. 서유럽의 사회민주주의 계열의 정당들은 1960년대를 전후하여 그들의 강령에서 마르크스주의적 전제와 사회주의적 지향을 삭제하였습니다. 그리고 1970년대를 전후한 복지국가의 위기 속에서 그 정체성을 잃고 급기야 지난 세기말의 세계화와 신자유주의의 급부상 속에서 우파에 투항해 버렸습니다. 사실 지난 세기말 구소련과 동구권의 현실 사회주의가 패배를 선언하였을 때, 서유럽의 사회민주주의 노선도 명백히 실패하였던 것입니다.

그 결과는 어떠한가요? 지난 세기말부터 세계 각국의 민주주의는 급속히 쇠락하고, 사회경제적 불평등은 계속적으로 증대되어 왔습니다. 아무런 명분도 없거나 아무런 민주적․합법적 절차를 거치지 않고 이라크․아프간 침공, 테러 혐의자에 대한 암살․억류, 외국노동자와 난민에 대한 인권침해 등이 자행되고 있고, 국가 안보와 테러 대비를 명목으로 反민주적․反인권적 법령과 조치가 계속적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또한 기업과 시장의 중시, 노동 유연화(노동자 해고의 자유), 노동권익과 서민복지 축소, 공적 영역의 사영(私營)화, 정부규제 완화 등은 우파정권만의 언어가 아니라 좌파정권과의 공통언어가 되었고, 사회경제적 불평등 구조는 좌파정권이 들어서도 별반 개선되지 않았습니다.

21세기의 사회주의는 어디서 시작하여야?

‘민주주의가 전제되지 않는 사회주의는 독재로 귀결될 것이다’는 베른슈타인의 경고나 ‘사회주의 목표의 포기는 민주주의의 후퇴를 가져올 것이다’라는 로자의 경고는 역사적 사실로 입증되었습니다. 물론 이것이 베른슈타인이 사회주의를 포기하였다거나 로자가 反민주주의적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베른슈타인은 비록 혁명 노선을 포기하였지만 마지막까지 사회주의 이상과 신념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로자는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자이면서도 혁명은 민주주의에 기초해야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다만 사회주의의 민주성 문제를 구체적으로 고민하기에는 그녀의 삶이 너무 짧았습니다.

1백여 년전의 세기 전환기에 세계는 보다 나은 세상에 대한 희망과 열정이 넘쳐났다면, 지나 세기 전환기는 좌절과 절망이 세상을 뒤덮었습니다. 그러나 21세기에도 사회주의는 또 다시 등장할 것입니다. 보다 평등하고 정의로운 세상에 대한 인류의 희망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다시 시작한다면 우리는 어디서부터 시작하여야 할까요? 사회주의를 다시 시작한다면, 이론적․선험적 정의가 아닌 대중적․실천적 정의에서, 독선적 신념이 아닌 개방적 신념에서, 소수의 음모가 아닌 대중의 참여와 지지에서, 혁명적 독재와 전제가 아닌 민주주의적 바탕에서, 권위적 기획이 아닌 민주적 합의에서 출발하여야 할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민주적 사회주의, 베른슈타인주의입니다.

그동안 베른슈타인과 그의 노선은 우파에서는 좌파적 사상이라고, 좌파에서는 사회주의의 배신으로 외면 받아 왔습니다. 최근에 나온 책 중 이러한 베른슈타인주의를 재평가하는 것이 있어 눈길을 끌었습니다. ≪정치가 우선한다≫의 저자인 세리 버먼(Sheri Berman)은, 지난 세기말 사회민주주의 노선의 실패의 원인을 사회주의 이상의 포기에서 찾고 있습니다. 그녀는 21세기의 좌파는 오히려 100여년전 세기 전환기의 베른슈타인주의, 즉 민주주의에 기초한 사회주의, 사회주의적 이상을 가진 민주주의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세리 버먼의 <<정치가 우선한다>>.

오늘날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의 가장 큰 실패는 애초부터 운동의 기반이었던 이상주의를 상실했다는 데 있다. 세상을 바꾸겠다는 의지나 이데올로기에 대한 열망을 분명히 보이지 않고서도 선거에서 승리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정당은 시간이 흐르면서 사형장에 끌려가는 죄수와도 같은 처지가 되어 동기와 열정, 어려움을 극복해 내는 능력을 잃어버리고 말 것이다. 이는 정확히 오늘날 유럽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베른슈타인에서부터 헨드리크 드망, 카를로 로셀리, 페르 알빈 한손에 이르기까지 진정한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언제나 특정 정책을 대할 때 그것을 그저 그 자체 목적인 것이 아닌, 좀 더 나은 미래를 향해 가는 발걸음이라고 생각했다……이들 위대한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인식하고 있었듯이, 정치가 제공할 수 있는 가장 소중한 것은 가능성에 대한 믿음이다. 그들은 사람들이 함께 노력하면 어떤 장애물이라도 극복해 세상을 좀 더 나은 곳으로 만들 수 있으며, 또 그렇게 해야만 한다는 생각에 기반을 둔 정치적 이데올로기를 발전시키자고 호소했다. 그 결과 탄생한 것이 20세기 동안 가장 성공적이었던 정치운동, 즉 사회민주주의였다. 21세기의 문제들 또한 그 형태는 다를지 모르나 그 성격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사회민주주의가 거둔 성취가 다시 반복되지 못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 세리 버먼, ≪정치가 우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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