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른슈타인의 ≪전제/과제≫와 로자의 ≪개혁/혁명≫읽기 (1)

지난 세기에 좌파 혹은 사회주의에는 크게 두 가지 모델이 있었습니다. 구소련과 동유럽의 ‘국가사회주의’와 서유럽의 사회민주당․노동당 계열의 ‘사회민주주의’ 모델이 그것입니다. 전자의 모델은 지난 세기말에 종말을 고하였습니다. 되돌아보면 구소련과 동유럽의 국가사회주의 몰락의 근원에는 즉 권위주의적인 정부와 상명하복식의 통제경제 체제 즉 ‘민주주의’의 부재 혹은 부족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하여 그 경쟁자였다고 할 수 있는 사회민주주의 모델이 유일한 대안으로 부상한 것도 아닙니다. 서유럽의 사회민주주의 계열의 정당들도 1970년대를 전후한 복지국가의 위기 속에서 그 정체성을 잃었고, 급기야 지난 세기말의 세계화와 신자유주의의 급부상 속에서 우파에 투항해 버렸습니다. 사회민주주의 모델의 추락의 근원에도 ‘민주주의’의 문제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 스스로 새로운 좌파적․급진적 민주주의 모델을 창안해 내지 못하였기에 그러한 결과를 가져오게 된 것이라고 할 것입니다.

어찌되었든 위 두 모델은 20세기말이 도래하기 전까지는 좌파 혹은 사회주의 내에서 경쟁적인 확고부동한 대립 모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위 두 모델은 어디에서부터 비롯된 것일까요? 그것은 1세기전인 19세기말부터 20세기초반까지 진행된 이른바 ‘수정주의․개량주의 논쟁’이라고 불리는 개혁적 사회주의와 혁명적 사회주의 노선간의 논쟁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러한 두 노선간 논쟁의 시작점이자 양 노선을 대표하는 정치고전이 바로 오늘 살펴볼, 1899년 같은 해에 출간된 베른슈타인(Eduard Bernstein, 1850~1932)의 ≪사회주의의 전제와 사회민주당의 과제≫(이하 ≪전제/과제≫)와 로자 룩셈부르크(Rosa Luxemburg, 1871∼1919)의 ≪사회개혁이냐 혁명이냐≫(이하 ≪개혁/혁명≫)입니다. 결국 이 두 저서는 20세기에 경쟁하고 대립하였던 좌파의 원형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간 이 둘 간의 논쟁은 단지 마르크스주의적 시각에서만 조명되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민주주의’라는 시각에서 재조명하고자 합니다. 이 둘간의 논쟁의 근원에도 사실상 민주주의라는 주제가 있었습니다. 새롭게 등장하기 시작한 현실의 민주주의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새로운 민주주의 체제하에서 사회주의를 위한 올바른 이행전략은 무엇인가, 새로운 민주주의 체제에서 취할 수 있는 혹은 취해야 할 진보적 가치가 있는가, 현실의 민주주의 체제와 대비되는 미래의 사회주의적․마르크스주의적 민주주의 모델은 어떠한 것이어야 하는가, 대안의 민주주의 모델의 예상되는 민주주의의 부족과 결함은 무엇인가라는 문제를 둘러싸고 이 둘은 서로 논쟁하고 실천하였던 것입니다.

100여년 전에 마르크스주의 내부에서 있었던 이 둘 간의 논쟁을 민주주의라는 시각에서 재조명하는 이유는 단순한 학문적 호기심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의 현실에 대한 고민과 성찰, 미래를 위한 분투와 실패를 살펴봄으로써, 좌파 혹은 진보세력이 해체되고 사회주의적 대안이 붕괴되고 현실의 민주주의마저 급속히 퇴보하는 지금, 새로운 진보적 민주주의 대안 모델은 과연 어떠한 것이어야 하는가, 그리고 그것을 성취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고민하고자 함입니다.

베른슈타인의 <<사회주의의 전제와 사회민주당의 과제>>와 로자의 <<사회개혁이냐 혁명이냐>>.

베른슈타인과 로자의 논쟁, 100년간 좌파 대립의 근원

18세기가 자유주의의 시대였다면 19세기는 민주주의의 시대입니다. 영국의 청교도․명예혁명, 미국 독립전쟁, 프랑스 대혁명 등 17-8세기의 근대 시민혁명은 입헌주의, 의회제도, 권력분립 등 민주주의의 자유주의적 기초를 수립하는 역사적 계기가 되었지만, 민주주의의 본격적 시작점이라고 할 수 있는 보통선거권 즉 모든 시민이 신분이나 재산을 불문하고 동등한 선거․피선거권을 갖는 제도가 수립된 것은 아닙니다.

19세기 내내 좌파들은 이러한 민주주의 쟁취를 위하여 싸웠습니다. 토크빌(Alexis de Tocqueville, 1805∼1859)과 밀(John Stuart Mill, 1806∼1873)은 이러한 민주화 시대에 직면하여, 근대적 자유주의의 입장에서 민주주의 문제를 고민한 대표적 정치사상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민주주의의 도래는 불가피한 미래라고 인정하고, 다만 민주주의가 가져올 폐해를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막을 수 있을까 고민하였던 것입니다.

마르크스(Karl Marx, 1818∼1883)는 토크빌이나 밀과는 10여년 정도 터울이 있는, 거의 동시대의 정치사상가입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마르크스의 저서들에서는 이러한 민주화 추세에 대한 체계적인 분석을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는 마르크스의 주요한 관심사가 자유주의나 민주주의와 같은 이데올로기적 상부구조가 아니라 그것의 물질적․경제적 토대인 ‘자본주의’였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이유도 있습니다.

정확히 말한다면, 토크빌․밀․마르크스가 적극적으로 활동하던 시대는 민주주의가 아직 현실화되지 못하였습니다. 마르크스는 1848년 ≪공산당 선언≫에서 국가란 기본적으로 자본가 계급의 지배를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고 주장합니다. 이는 정치 팜플렛적 속성에 따른 단순하고 과격한 선동적 표현일 수도 있지만, 실제 당시 국가기구란 상층계급만의 전유물이었습니다. 당시 가장 선진국이었던 영국에서도 1832년 이전에는 귀족과 大상인에게만 선거․피선거권이 인정되었습니다. 이후 1832년 선거법 개정으로 자본가 계급에도 선거권이 인정되었지만, 노동자 계급에게는 선거권이 전혀 인정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노동자 계급이 취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지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은 마르크스가 말하는 기존 사회의 폭력적 전복, 즉 ‘혁명’ 뿐이었습니다. 자신들의 의사와 이익이 반영될 정치적 창구를 갖지 못한 노동자 계급과 정부의 탄압을 피해 유럽 각국에서 도피와 망명 생활을 해야 했던 사회주의자들이나 무정부주의자들에게 바리케이트 시위, 시가전 혹은 테러는 그들의 자유로운 선택 항목이 아니라, 객관적으로 주어진 유일한 저항의 방법이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19세기 말이 되면서 유럽 각국의 정치상황은 전혀 달라졌습니다. 노동자 계급에게 선거권․피선거권이 부여되고(영국에서는 1867년에 도시의 노동자에게 선거권이 인정되고, 1884년에는 농민과 광부에게도 선거권이 인정됨), 노동자 계급 정당이나 사회주의 정당이 점차 합법화 되었습니다. 그리고 제도권 정치로 진입한 이들 정당들은 노동자 계급의 전폭적인 지지와 후원으로 1-20년 사이에 최대 정당이 될 정도로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였습니다.

경제상황도 마르크스의 암울한 예견과 달랐습니다. 마르크스의 사회변혁 이론의 핵심은 자본주의 붕괴의 필연성과 계급의 양극화․궁핍화에 따른 계급투쟁의 불가피성입니다. 그러나 19세기 말 자본주의는 금융․신용․주식제도의 혁명으로 놀라운 성장을 거듭하였고, 이후 제국주의 시대라고 명명하는 것처럼 그 힘을 전세계로 확장하였습니다. 이러한 급속한 경제 성장으로 노동자의 실질 임금이 상승하는 등 노동 조건은 점점 개선되었으며, 농민이나 중간계급은 소멸하기는커녕 공무원․사무원 등 새로운 중간층이 유입되어 자본가와 노동자로의 계급양극화 현상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현실의 이러한 변화는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는 심각한 이론적․실천적 딜레마를 주었습니다. 19세기말의 자본주의의 놀라운 발전은 노동자 계급의 생활수준과 권리의 향상을 가져왔지만, 마르크스주의자들 사이에는 마르크스의 이론 특히 그의 자본주의 붕괴 시나리오에 대한 회의(懷疑)가 퍼졌습니다. 또한 정치 현실의 민주적 개선은 노동자 계급에게 조만간 제도적 절차로 더 나은 사회에 도달할 수 있다는 희망을 주었지만, 제도권 정치 밖에서의 폭력적인 계급투쟁과 혁명을 선동하여 왔던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는 심각한 실천적 딜레마를 주었습니다.

‘짱돌’을 든 노동자들의 손에 ‘투표용지’와 ‘돈’이 주어진 새로운 시대가 된 것입니다. 마르크스의 후예들에게는 새로운 시대에 맞는 새로운 마르크스주의가 필요하였습니다. 그것을 대변하는 것이 베른슈타인의 ≪전제/과제≫입니다.

카우츠키(우)와 베른슈타인, 이둘은 1891년 세계 최초의 마르크스주의 당 강령이라고 할 수 있는 독일 사회민주당의 에르푸르트 강령을 작성하였다. 전반부의 마르크스의 사상에 입각한 자본주의의 파국과 사회주의 혁명의 필연성을 서술한 부분은 카우츠키가 작성했고, 후반부의 구체적 실천부분은 베른슈타인이 작성하였다.

투표용지를 받아든 노동자들, 새로운 변혁이론이 필요하다

당시의 독일 사회민주당은 세계 최초의 그리고 세계 최대의 계급․이념․대중정당이었습니다. 그들은 독일 노동자 계급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었고, 마르크스주의적 사회주의 강령을 채택하고 있었고, 세계의 사회주의자들과 사회주의 정당들의 협의체라고 할 수 있는 제2 인터내셔널을 주도하고 있었습니다.

독일 사회민주당과 제2 인터내셔널의 지도자들은 19세기말의 변화된 현실에 대한 이론적 해답과 실천적 지침을 주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카우츠키(Karl Kautsky, 1854~1938)와 베벨로 대표되는 독일 사회민주당의 지도부(흔히 정통파 또는 중앙파라고 불림)는 마르크스의 예측에 어긋나는 자본주의의 진행에 대한 반대 증거를 외면하고, 자본주의 발전은 필연적으로 노동자 계급의 증대와 양극화․궁핍화를 가져오고 그들은 계급의식을 터득하게 되어 종국에 자본주의 사회를 전복하게 된다는 본래의 마르크스의 주장을 반복하였을 뿐입니다.

그들은 사회주의 혁명이 필연적으로 일어날 것이며 심지어 그것도 아주 임박해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임박한 파국에 따라 혁명적 행위로 나아간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정치전략은 임박한 승리에 초를 치지 않기 위하여 조심스럽게 기다리는 것이었습니다. 자본주의의 붕괴와 혁명이 필연적임을 믿고, 그러한 모든 조건이 성숙될 때까지 믿고 기다리라는 것뿐이었습니다. 결국은 ‘아무 것도 하지 않기’였습니다. 그것도 ‘혁명적으로’. 카우츠키는 나중에 이렇게 말합니다.

그것(당시의 독일사회민주당을 지칭)은 혁명적인 정당이지만, 혁명을 만들어 내는 정당은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목표가 오직 혁명을 통해서만 성취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이 혁명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우리의 힘이, 혁명을 방해하기 위한 우리 적들의 힘과 마찬가지로 얼마나 미약한지도 알고 있다. 혁명은 우리 마음대로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우리에게는 그것이 언제 어떠한 조건에서 어떠한 형태로 실현될 것인지에 대하여 말할 수 있는 능력조차 없다.

우리를 패배로 이끌고 우리에게 매우 유리한 상황을 뒤범벅으로 만드는 유일한 것은, 우리 쪽에서의 성급한 행동이다. 이는 우리가 성급함 때문에 혼란에 빠져 과실이 익기도 전에 그것을 따려고 시도하는 경우, 우리의 승리가 결코 확실하지 않은 지형에서 힘을 시험하고자 대드는 경우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인 것이다.

아무런 이론적 해답도, 실천적 지침도 찾지 못한 채 기존의 마르크스의 교리만 반복하던 이러한 지도부와 달리, 1890년대 중반부터 마르크스주의의 이론적․실천적 변화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일군의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정치인․직업혁명가․직업당료들이 등장합니다. 이들은 정통파에 의하여 ‘수정주의자’ 혹은 ‘개량주의자’라고 불리게 됩니다.

수정주의자? 개량주의자? 통상 이는 같은 취지로 사용되지만, 엄밀하게 보면 똑같은 의미는 아닙니다. 수정주의(Revisionism)는 마르크스의 기본적 원칙 중 일부가 오류이거나 더 이상 현실에 적합하지 않기에 이를 수정해야 한다는 주장을 말하고, 개량주의(Reformism)는 계급투쟁의 방식을 합법적․제도적 틀 내로 보다 온건화․현실화하려는 주장을 말합니다. 수정주의가 이론적 변화를, 개량주의의 실천적 변화를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새로운 흐름을 상징하는 인물이 바로 베른슈타인이었고, 그 흐름을 이론적․역사적으로 설명하려 시도한 책이 그의 ≪전제/과제≫였습니다.

베른슈타인의 <<사회주의의 전제와 사회민주당의 과제>>와 그 외 논문 모음집.

베른슈타인이 응답하다

위 책의 주요핵심은 크게 2부분입니다. 첫째는 앞서 설명한 자본주의의 발전 상황을 거론하며, 현실의 자본주의의 진행 경로는 마르크스의 예측과 다르며, 그 파국은 임박하지 않았다는 것이고(심지어 그때부터 1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자본주의는 여전히 생존해 있지 않은가요!), 둘째는 이러한 사회경제적 변화와 더불어 정치적 상황의 변화에 따라 마르크스주의의 사회변혁 전략이 수정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베른슈타인의 첫 번째 주제에 대한 분석은 그 자신의 독창적인 것은 아닙니다. 그 스스로 이는 기존의 수정주의적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들의 분석적 결과를 종합하여 놓은 것에 불과하다고 인정하고 있습니다. 베른슈타인은 자본주의의 발전 양상이 위기와 붕괴로 나아가지 않고 오히려 위기 관리능력이 향상되어 가고, 독점이나 집중 경향이 있으나 그것이 중소기업이나 여타 산업부문의 몰락을 초래하지도 않았으며, 주식소유자의 증가 등으로 유산계급의 수가 증가하고, 중간계급은 몰락하기는커녕 농민․사무원․공무원의 증가로 계속적으로 충원되며, 노동자 계급이 압도적인 단일 계급으로 통일되지 않고 오히려 그 내부에서 직업․소득․문화 등의 차이로 지속적으로 분화되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는 마르크스와 정통파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자본주의 붕괴와 계급투쟁 시나리오와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자본주의가 마르크스의 주장과 달리 자본주의의 위기가 붕괴로 치닫지 않고, 자본가 계급이 소수독점화 되지 않고, 중간계급도 지속적으로 재생산되고, 노동자 계급이 압도적 다수가 되지 않으며, 노동자 계급이 절대적으로 궁핍화되지도 않고, 노동자 계급 내부의 다양성도 증대된다면, 이러한 사회경제적 분석으로부터 도출될 수 있는 사회변혁 전략도 마르크스와는 전혀 다른 것이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베른슈타인은 자본주의 붕괴를 전제로 한 혁명적 이행전략은 폐기되어야 하고, 민주주의의 확대와 심화를 통한 사회개혁 전략으로 대체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는 사회주의는 노동자 계급을 중심으로 한 사회적 합의와 연대의 구축이나 다양한 영역에서의 점진적인 개혁을 통하여 이룩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근대국가의 정치제도가 민주화되면 될수록 정치적인 대파국의 필연성과 기회는 점점 더 줄어든다……사회민주당은 오랜 기간에 걸쳐 대파국만을 꿈꾸며 앉아 있을 것이 아니라, 노동계급을 정치적으로 조직하고, 민주주의를 위해 교육시켜 나갈 뿐만 아니라 국가 내에서 노동자 계급을 고양시키고 국가기구를 민주적인 내용으로 바꾸어나갈 수 있는 모든 개혁을 위해 싸워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잠깐 지적하여야 할 것이 있습니다. 흔히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사회주의는 폭력혁명으로만 달성될 수 있다고 주장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이들도 말년에 보통선거권의 실현과 사회주의 정당의 성장을 보며 영국과 네덜란드 같은 국가에서는 사회주의로의 평화적 이행이 가능할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하고, 또한 국가 폭력기구의 발달로 과거와 같은 노동자들의 바리케이트 투쟁은 한계에 다다랐다고 주장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베른슈타인의 획기적 전환은, 말년의 마르크스나 엥겔스와 마찬가지로 사회주의로의 평화적․점진적 이행의 가능성을 이야기 하였다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그는 그 이상을 사유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러한 사회주의로의 평화적․점진적 이행이 가능할뿐더러, 오히려 ‘바람직한’ 사회 변혁이라고 합니다. 그는 사회주의는 정치경제체제의 전환뿐만 아니라, 인민의 문화적․윤리적․정신적 성숙이라는 장기간의 이행과정이 필요하며, 일거의 사회주의로의 폭력적 전환은 오히려 무정부 상태나 독재를 초래할 뿐이라고 주장합니다

내 견해의 최종결과는 이것이다. 즉 사회주의는 커다란 정치적 결전의 결과가 아니라, 그것이 영향을 미치는 다양한 영역에서 노동운동이 거둔 전제적인 경제적, 정치적 승리의 결과로 온다. 노동자의 억압, 빈곤, 퇴락이 거대하게 증가한 결과가 아니라, 노동자들의 사회적 영향력이 증가한 결과로, 그리고 그들에 의해 쟁취된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윤리적 성격의 상대적인 개선의 결과로 온다. 나는 사회주의가 카오스에서 생겨난다고 보지 않는다. 대신 사회주의 사회는 자유 경제 영역에서 노동자의 조직적 창조물과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에서 이루어지는 투쟁적 민주주의의 창조물과 획득물이 결합됨으로써 온다고 생각한다……그러한 운동이 없다면 오늘날 우리는 단지 혁명만을 갖는 게 아닐 것이다. 그러한 운동이 없다면 오늘날 우리는 모든 공포를 수반한 무정부 상태를 갖게 될 것이다. - 베른슈타인의 또 다른 논문 <사회주의란 무엇인가> 중에서

정치환경의 변화도 이러한 이행전략 수정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19세기 말에 이르러 유럽의 각국은 점차 보통선거제를 도입하는 추세였습니다. 베른슈타인은 마르크스 생존하던 때와 달리 노동자 계급에게 선거권이 주어지고 있으므로, 그들이 선출한 의원들을 통하여 민주주의의 심화와 진보적 사회경제적 정책을 가져와 종국에 사회주의를 달성할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보통선거제의 확립으로 폭력적 계급투쟁과 피의 혁명이 아닌, 합법적․민주적 절차를 통하여 사회주의를 달성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보통선거권은 민주주의의 한 요소에 불과하지만, 그것은 마치 자석이 흩어진 쇠조각들을 끌어모으는 것과 마찬가지로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민주주의 다른 요소들을 자신에게로 끌어들이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많은 사람들이 바라는 것보다 느리게 진행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작동한다. 그리고 사회민주당이 이것의 작동을 촉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지속적으로 자신의 교의를 보통선거권의 토대인 민주주의 위에 세우는 것은 물론 자신의 전술을 그것과 일관성 있게 맞추어 채택하는 것이다……사회민주당의 모든 실천적 활동은 급작스런 폭발적 사태 없이 근대사회제도를 보다 발전된 사회제도로 이행하도록 하기 위한 상태들과 전제조건들을 만들어 내는 것으로 귀착된다.

로자(우)와 클라라 체트킨, 이둘은 20세기 초반 독일 사회민주당내의 대표적인 여성 지도자였다.

베른슈타인의 주장의 기초는 마르크스적인가?

베른슈타인은 마르크스가 주장하는 자본주의 붕괴와 사회주의 도래의 필연성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또한 그는 사회주의로의 평화적․점진적 이행의 가능성과 바람직함을 마르크스의 권위를 빌려(마르크스의 저작 중에서 그러한 가능성을 부정하지 않는 표현들을 인용하는 방식으로) 강변하고 있습니다. 그러하기에 많은 이들은 베른슈타인의 주장을 마르크스의 특정한 하나의 경향을 강조한 것으로만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다음 회에서 보듯 베른슈타인의 주장에는 본질적으로 마르크스와는 전혀 다른 사회․역사 인식이 깔려 있었습니다. 이러한 그의 사회․역사인식은 어떤 면에서는 마르크스가 생전에 철저히 비판하였던 것이거나 어떤 면에서는 마르크스주의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이념의 출현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가장 명쾌하게 규명한 사람이 바로 로자 룩셈부르크였습니다.

그녀의 ≪개혁/혁명≫은 베른슈타인의 수정․개량주의에 대한 자신의 비판 글들을 모은 것입니다. 그녀의 비판은, 베른슈타인 스스로도 자신에 대한 수많은 비판 중 가장 예리할뿐더러, 문제의 핵심에 다가가 있는 것이라고 극찬할 정도입니다. 지금껏 있었던 수많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역사적 저서들 중에서도, 그녀의 ≪개혁/혁명≫이 가장 ‘마르크스적’인 것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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