롤즈의 ≪정의론≫과 노직의 ≪아나키에서 유토피아로≫ 읽기

문명 세계에서 미국만큼 철학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나라는 아마 없을 것이다. 미국인들은 그들 자신의 고유한 철학 학파를 갖고 있지 않을뿐더러 유럽의 여러 학파에 대하여도 관심이 없다. 그렇지만 미국인들 거의 모두가 동일한 사고방식을 갖고 있고, 그 바탕의 법칙도 동일한 것에 의존하고 있다. 그들은 그러한 법칙에 어떤 정의를 내리려 애쓰는 일도 없이 전 국민이 공통되는 철학적 방법을 갖고 있는 것이다. 미국인들이 갖고 있는 철학적 방법의 특징은 이렇다. 제도나 관습, 가훈이나 계급상의 견해, 민족적 편견 등으로부터 탈피하고, 전통을 단지 하나의 정보수단만, 현실을 개선하기 위한 여러 참고할 만한 교훈중의 하나만으로 받아들이는 것, 수단이나 방법에 구애됨이 없이 결과를 추구하는 것, 그리고 형식을 통해서 본질을 파악하는 것이다.

이는 1830년대 신생미국을 방문하여 그들의 헌정질서와 사회분위기를 기록한 ≪미국의 민주주의≫에 있는 토크빌(Alexis de Tocqueville, 1805∼1859)의 말입니다. 토크빌의 묘사는 결국 ‘그들은 철학적이지 않다, 굳이 그들이 철학적이라고 해야 한다면 실용적이다’ 라는 것입니다.

토크빌의 묘사는 정확했고, 선지(先知)적이었습니다. 고교 윤리시간에 고대 아테네의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시작하여 현대 실존주의로 끝나는 그 많은 철학자의 이름과 그들이 말하는 철학을 외우면서, 미국의 철학에 대하여 외울 것이 있었다면, 듀이(John Dewey)로 대표되는 실용주의(pragmatism)가 유일하였을 것입니다. 무엇인가 중후하고 난해한 것이 철학일 것이다 라는 우리 통념에 의하면 ‘실용주의 철학’이란 그 자체 형용모순일 것이고, 실제 철학계에서도 우리의 통념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듯 미국의 철학, 그 대표로서의 실용주의는 먹물 먹은 식자들이 배울만한 것이 못 되는 것으로 취급되어 왔습니다.

존 롤즈 교수, 그의 <<정의론>>은 지난 세기 최고의 정치철학서로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런 미국이 정치철학의 왕국 ?

그러나 독자분들은 혹시 아시나요? 현대 정치철학계를 주도하는 것이 바로 미국이라는 사실을! 미국은 이미 20세기 초반 ‘과학’으로서의 정치학을 주도하는 나라가 되었지만, 20세기 후반에는 ‘철학’으로서의 정치학마저 주도하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물론 2차 대전을 전후하여 미국으로 망명하여 활동한 수많은 유럽 출신 철학자들(아렌트나 독일의 프랑크푸르트 학파 학자 등)의 기여도 일부 있었지만, 세계 정치철학계에서의 미국이 지금과 같은 확고한 위상을 갖기 시작한데는, 미국 태생으로 하버드대에서 정치철학을 강의한 존 롤즈(John Rawls, 1921-2002) 교수의 영향이 결정적이었습니다.

1971년 발간된 그의 ≪정의론(A Theory of Justice)≫은 전 사회과학 분야를 망라한 20세기 최고의 저작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고, 그 이후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위 저작의 결론에 대한 자신 나름의 판단을 언급하지 않고 시작하는 정치철학서는 없다고 할 정도입니다.

롤즈 교수의 정치철학에 대한 가장 강력한 비판은 같은 시기에 같은 대학에서 같은 과목을 가르치는 동료 교수로부터 나왔습니다. 바로 노직(Robert Nozick, 1938-2002) 교수입니다. 그의 유명한 저서 ≪아나키에서 유토피아로(Anarchy, State, and Utopia)≫는 명백히 롤즈적 정의에 대한 반박으로 기획되었습니다. 노직은 롤즈의 정의는 정의롭기는커녕 놀랍게도 오히려 ‘범죄적’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로부터 10여년 뒤 같은 대학에서 같은 과목을 가르치던 샌덜 교수(Michael Sandel, 1953-)가 노직과 마찬가지로 롤즈의 정의를 비판하면서 주목을 받기 시작하였습니다. 샌덜은 2010년 우리 서점가에서 생뚱맞은 열풍을 일으켰던 ≪정의란 무엇인가(Justice : what’s the right thing to do)≫의 저자이기도 합니다. 그도 롤즈적 정의에 대해 비판하고 있지만 그러나 그 방향은 노직의 그것과 정반대입니다.

이렇게 하버드내 정치철학 과목을 담당하던 3명의 석학들에 의하여 현대 정치철학의 3대 주류인 자유주의(Liberalism), 자유지상주의(Libertarianism), 공동체주의(Communitarianism)가 정립, 발전되게 된 것입니다. 현실 사회주의(구소련과 동구권) 몰락의 과정에서 유럽의 정치철학이 현실과 동떨어진 지독히 사변적이고 난해한 포스트 모던류의 사상에 함몰되어 헤매는 사이, 이들 3대 석학에 의하여 미국이 지독히 非미국적으로 보였던 정치철학에서조차 최고의 논쟁마당으로 올라선 것입니다. 이제 그 3대 석학들이 전하는 ‘무엇이 정의인가’라는 강의를 본격적으로 들으러 가보시지요.

롤즈, 노직, 샌덜 교수의 대표적 저서들.

하버드 3인방, 미국을 ‘정의’의 왕국으로 만들다

어린 시절 저의 상상력을 가장 자극한 동화책은 쥘 베른의 ≪15소년 표류기(원제는 2년간의 휴가)≫입니다. 15명의 소년들이 무인도에 2년간 표류하면서 겪는 갈등과 모험을 그리고 있는 소설입니다. 새로운 공간에서 새로운 공동체를 구성하게 된 그 소년들은 공동체를 운영할 여러 규칙을 정해야 할 것입니다. 지금 기억하기로는 그들이 맨 처음 한 공동 결정은 대장을 뽑는 것이었던 같은데, 그들이 정해야 할 여러 공동의 규칙 중에는 공동의 획득물에 대한 분배 규칙도 당연히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들은 어떠한 내용의 분배규칙에 서로 합의할까요?

롤스의 정의론은 바로 이러한 가상의 상황에서 등장합니다. 롤스의 정의론 구상의 독특한 아이디어는 ‘원초적 상황(original position)’과 ‘무지의 장막(veil of ignorance)’입니다. 각자가 자신의 능력․재산․지위․성향 심지어 운수까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이들이 합의하게 되는 분배의 원칙이 바로 가장 정의로운 원칙이라는 것입니다. 롤스가 무지의 장막을 상정한 것은, 각자가 자신의 사회경제적 위치와 이념적 성향 등을 잊음으로서 자신에게 유리한 원칙이 아닌 공정한 심판관의 관점에서 누구에게나 공평한 정의원칙을 찾게 하려는 의도입니다. 예컨대 자신이 어떤 조각의 사과를 먹게 될지 모른다면 더 공평하게 사과를 자를 가능성이 클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무지의 장막하의 원초적 상황에서 선택될 정의의 원칙은 어떤 내용일까요? 롤스는 이러한 상황에서 선택될 정의의 원칙은 다음과 같다고 합니다. “1. 보편적 자유에 대한 평등한 권리를 가져야 한다.(평등한 자유의 원칙) 2. 사회경제적 불평등은 다음의 두가지 조건을 충족시킬 수 있을 때만 허용된다. (a) 그 불평등의 원인이 되는 지위와 직무는 모든 사람에게 개방되어 있어야 하고(기회균등의 원칙), (b) 그 불평등은 사회적으로 가장 불우한 사람들에게 가장 도움이 될 수 있어야 한다(차등의 원칙). 그리고 1원칙은 2원칙에 우선하고, (a)원칙은 (b)원칙에 우선한다. 즉 두번째 원칙을 고려하기 전에 우선 첫번째 원칙이 충족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 원초적 상황에 있는 사람들이 이런 정의원칙을 선택할까요? 그 실제 선택의 결과가 맞든 틀리든, 롤즈의 정의의 원칙은 기본적 자유와 기회 균등의 보장하에 경제적 약자를 적극적으로 배려한다는 현대 자유주의의 정치적․정책적 정당성을 철학적으로 논증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그는 이념적․정치적 당파성에 따라 사회정의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또한 동료 인간으로서 불우한 이웃을 도와야 한다는 도덕성의 고취를 설교하는 것이 아니라, 공정한 절차에 따라 성립하는 불편부당한 정의가 바로 현대 자유주의 노선임을 철학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롤즈의 정의의 원칙에서의 핵심은 차등의 원칙입니다. 이 원칙은 적하효과(전체의 부를 증대시켜 그것이 흘러넘쳐 불우한 사람들에게 혜택이 돌아가도록 한다는 것)를 주장하는 경제성장 우선론자들의 정의의 관념을 거부합니다. 또한 그 반대편인 공리주의적·사회주의적 정의도 거부합니다. 위 원칙에 따르면 구체적 정책은 전체에게 이익이 돌아간다거나 모두에게 균일하게 이익이 배분된다거나 불우한 사람들에게 약간의 이익이 더 돌아갈 것으로 기대된다고 하여 정당화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불우한 계층에게 최대의 이익이 될 때만 정당화된다는 것입니다.

롤즈 교수, 재화는 하늘에서 떨어진 공짜가 아니야 !

지금 제가 마시고 있는 음료수는 필자가 돈을 주고 구입한 것입니다. 그런데 필자보다 더 목이 마르지만 음료수를 구입할 돈이 없는 불우한 사람이 그것을 조금 나누어 달라고 합니다. 그러나 냉혹한 저는, “음료수는 내가 노동을 하여 번 돈으로 구입한 내 것으로, 나는 당신에게 이를 나누어줄 의무가 없다”며 거절하였습니다. 당신은 저를 도덕적으로 비난할 수 있지만, 나의 노동-나의 소유-나의 권리에 기반한 저의 냉혹한 처사를 논리적으로 비판하기는 힘들 것입니다.

노직은, 롤즈가 재화를 ‘하늘에서 떨어진 만나(manna)’처럼 취급한다고 정곡을 찌릅니다.‘만나’는 성서에 나오는 것으로, 애굽에서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세속적으로 표현하면 ‘공짜로’ 받은 음식을 말합니다. 세상의 재화가 만나처럼 개개인이 노동을 투여하거나 댓가를 지불함이 없이 그냥 주어진 것이라면 롤즈의 원칙처럼 분배되는 것이 정의로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재화는 누군가의 노력의 산물이거나 혹은 돈을 지불하고 정당하게 구입한 것입니다. 자신의 노동으로 만들거나 혹은 자신의 돈으로 구입한 재화가 자신의 소유가 되지 못하고, 사회정의라는 명목으로 타인과 공유해야 하거나 자신보다 불우한 타인에게 배분되도록 한다면, 그것은 ‘정의’가 아니라 강․절도와 같은 ‘범죄행위’일 뿐이라는 것이 노직의 롤즈의 정의에 대한 반박 요지입니다.

그렇다면 노직에게 정의란 무엇일까요? 노직은 정의를 소유의 문제로 접근합니다. 노직에게 정당한 소유는 1) 그때까지 누구에게도 소유되지 않았던 외부의 일부를 점유하거나 2) 이전의 소유자로부터 정당하게 이전을 받거나 3) 1)과 2)에서 부정이 발생하였을 때 이를 교정하는 것입니다. 그에게 정의란 이러한 정당한 소유에 대한 권리를 존중해 주는 것일 뿐입니다. 이런 노직의 정의론은 철학적으로 익숙합니다. 바로 근대의 존 로크(John Locke, 1632∼1704) 논리입니다. 로크와 노직의 소유정의관, 노직의 롤즈적 정의관에 대한 비판은 지극히 일반인의 직관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설득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노직의 정의가 과연 불편부당하게 정의로울까요? 노직의 정의관은 소유질서가 정의롭다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실제 노직은 최초의 정당한 재산 취득과 그 이후의 자발적인 교환이 지속되는 역사를 상정합니다. 그러나 실제 소유의 획득․이전의 역사와 현실은 그만큼 정당하지도, 자발적이지도 않았습니다. 유럽의 백인들이 아메리카의 원주민들을 쫓아내고 광대한 토지를 점령한 것과 같은 수많은 강탈의 역사와 불합리한 고용관계라도 생존으로 강제될 수밖에 없는 자발적이지 못한 현실이 이를 증명합니다.

소유의 역사와 현실은 정당하지도 자발적이지도 않다

노직의 정의론의 정치적 정책적 함의는 무엇일까요? 노직은 소유정의론에 입각하여, 소유권을 보호하는데 필요한 만큼만의 최소국가(근대의 야경국가와 유사)만 정당할 뿐, 그 이상의 권력과 기능은 정당하지 못하다고 주장합니다. 그는 롤스식의 복지국가는 정당한 소유물을 빼앗고, 그 강탈한 몫만큼 의무 없는 자를 강제 노동케 하는 강도국가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노직의 최소국가는 더 이상 해체될 수 없는 최소한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자유지상주의자중에는 이러한 최소국가조차 부정하는 일군의 철학자도 있습니다. 데이비드 프리드먼(David Freedman, 그는 저명한 신자유주의 경제학자인 밀턴 프리드먼의 아들입니다)은 로크와 같은 고전적 자유주의자나 노직과 같은 자유지상주의자들조차 국가의 기능으로 최소필요악이라고 인정한 국방․치안․사법도 민간의 계약으로 대체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국방․치안․사법마저도 민간의 계약으로 대체한다? 쉽게 상상이 가지 않는다고요? 영화 <로보캅(RoboCop)>에서 용역회사 직원들이 경찰을 대체한 것을 상상하면 됩니다. 영화 속의 이야기일 뿐이라고요? 이미 우리 사회에서는 용역회사의 직원들이 경찰의 묵인과 비호아래 분쟁중인 노조원과 철거민들에게 폭력(사적 경찰력)을 행사하는 것이 일상화되지 않았는가요?

자유주의와 자유지상주의적 정의 원칙을 알았으니, 기왕에 현대의 3대 정치철학의 주류중 하나인 공동체주의의 정의 원칙도 알아보는게 좋겠지요? 1980년대 들어 롤즈의 자유주의와 노직의 자유지상주의를 공동체주의적 시각에서 비판하는 일군의 학자들이 등장합니다. 알래스데어 매킨타이어(Alasdair MacIntyre), 마이클 왈쩌(Michael Walzer), 찰스 테일러Charles Margrave Taylor) 그리고 마이클 샌덜이 대표적이고, 이들을 흔히 공동체주의 4인방이라고 합니다.

샌덜과 같은 공동체주의자들은 롤스나 노직과 같은 자유주의자들이 ‘공동체’의 중요성을 무시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들은 인간이란 자유주의자들이 상정하듯 하늘에서 떨어진 아무런 연고도 없는 개인이 아니라, 특정한 공동체의 가치관․도덕․예절 등을 공유하는 공동체의 일원이라고 하고, 따라서 사회정의도 롤스나 노직과 같이 가상적 상황이나 추상적 원리로부터 도출되는 것이 아니라, 특정 공동체의 공동선이라는 맥락에서 구체적․상황적으로 정의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1970년대 대두한 노직의 자유지상주의 철학은 롤스식의 자유주의에 대하여 ‘자유의 부족’을 비판하였습니다. 그러나 자유주의, 자유지상주의 모두 공히 그 학파의 이름처럼 개인적 자유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공동체주의자들은 자유지상주의 철학자들과 정반대로, 롤스식의 자유주의는 ‘자유의 과잉’이라고 비판합니다. 그들은 현대사회의 제 문제가 개인주의와 가치중립성 등에 입각한 자유주의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은 그 대안으로 시민들이 각각의 공동체 특유의 전통․가치관․연대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며, 국가가 나서서 그러한 윤리규범과 공동체에 대한 책임의식을 적극 교육하고 권장하여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예컨대 샌덜은 ≪민주주의의 불만(Democracy's Discontent)≫에서 미국의 정치․사법史에서 나타난 자유주의적 경향을 분석하며 이러한 경향이 현재의 불만스런 민주주의를 초래하였다며 그것의 극복 방법으로 이러한 내용의 공동체주의 내지는 공화주의를 부활시켜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정치철학의 3대 주요 흐름인 자유주의, 자유지상주의, 공동체주의 등을 설명하고 있는 책들.

공동체주의는 잡탕, 그것도 싱겁고 위험한

공동체주의자들이 정확히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인지 모르겠지요? 영국의 저명한 정치철학자인 애덤 스위프트(Adam Swift)는 공동체주의는 ‘완벽한 잡탕’이라고 표현하며, 이는 여느 ‘주의(-ism)’들과 비교하여 보아도, 유난히 여러 주의, 주장들이 뒤섞여 그 정체를 알기 어렵다고 꼬집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롤스의 자유주의가 19세기의 존 스튜어트 밀로부터, 노직의 자유지상주의가 17세기의 로크로부터 영감을 얻었다면, 공동체주의는 고대 아테네의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영감을 얻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식의 조화와 중용이라는 공화주의적 미덕 속에 내포되어 있는, 해소 곤란하고 심지어 때론 배타적이기까지 한 것의 뒤섞임이라는 문제가 현대의 공동체주의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고 할 것이니, 그들의 주장을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어찌보면 당연하다고 할 것입니다.

필자에게는, 공동체주의는 스위프트의 표현처럼 잡탕일뿐더러, 나아가 너무 ‘싱겁고’, ‘위험하기까지’ 한 잡탕으로 보입니다. 대부분의 공동체주의자들은 자본주의의 성장과 시장의 확대로 개인주의와 자유주의가 과잉하여 공동체의 근간이 파괴되고 있다고 하면서 시민의 공동체적 덕성을 부활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공동체 의식을 부식시키는 개인주의와 자유주의 경향을 비난하면서도, 그것을 배양한 ‘자본주의’의 모순을 지적하거나 그에 대한 ‘사회경제적 해결책’을 전혀 내놓거나 하는 것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한 점에서 사회정의를 소유와 분배 중심으로 접근한 롤즈와 노직의 정의론은, 공동체주의자들보다는 문제의 핵심에 다가서 있는 것입니다. 공동체주의자들의 비난과 교의는 비록 화려하나, 대안과 그것을 위한 실천적 프로그램은 공허하고 싱겁기 그지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한 공동체주의 정치철학자들이 사용하는 똑같은 용어를, 미국내의 정치적 극우보수파, 종교적 근본주의자들, 백인인종주의자들도 유사한 맥락에서 사용하고 있는 것이 미국의 현재입니다. 과거 극우보수세력들이 국가․민족․국가 이익․국격 등의 이름으로 자유․사회적 다원성․소수자․비주류 문화 등을 억압한 것처럼, 이제 ‘공동체’라는 보다 세련된 용어를 들먹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동체의 우선성을 강조하는 공동체주의는 그만큼 위험하기까지 하다고 생각됩니다.

정의의 여신상, 외형적으로부터 보이는 것을 넘어 진실을 찾고자 눈을 가리고 있는 것이 마치 롤즈의 '원초적 상황'과 '무지의 베일'을 연상케 한다.

‘모두의 정의’는 가능한가

헐리우드 영화 <2012>은 고대 마야 문명이 예고하였다는 2012년에 닥친 지진, 화산폭발, 해일 등으로 인류가 멸망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영화는 소수의 사람들만 살아남아 2012년 이후의 새로운 세계를 시작하려는 것으로 끝납니다. 영화가 끝난 후 남게 된 그들은 어떠한 사회정의 원칙을 세울까요?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대재앙 후 살아남은 여자 아이가 남자 아이에게, 그가 갖고 있는 귀여운 고양이를 만져 봐도 되냐고 묻습니다. 대재앙 전에는 이기심으로 똘똘 뭉쳐 있었던 남자 아이는 이제 ‘모두의 고양이’라며 당연히 만져도 된다고 말합니다. 원초적 평등상태에 처한 2012년 이후 생존자들과 무인도에 표류한 15명의 소년들은 모두가 동의하는 정의의 원칙을 보다 손쉽게 세울 것이고, 그것은 대체로 지금보다는 평등주의적이거나 적어도 타인을 적극 배려하는 내용으로 채워질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계급적 위치와 이념적 성향 등에서 벗어날 수 없는 현실의 우리들은, 공동의 정의원칙을 쉽게 세우지 못할 것입니다. 각자의 이익과 생각이 반영되어야 한다며 싸울 것이고, 가사 공동의 정의원칙이 세워지더라도 각자의 정의에 어긋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끈임 없는 도전을 받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역설적이게도 이념적․계급적 당파성의 오염을 벗겨낸 가상적 설계로 시작하는 롤즈의 유토피아적 발상이 오히려 보다 현실적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두가 동의하는 정의 원칙의 현실적 불가능’에 대한 고민은 노직도 공유하고 있습니다. 다른 측면에서 보면 샌덜과 같은 공동체주의자들도 이를 공유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단일한 정의원칙이 아닌 각각의 공동체마다의 정의를 말합니다. 노직은 독특한 상상을 합니다. 단일한 공동의 원칙을 세우려는 롤즈와 반대로, 또한 현실의 공동체를 바탕으로 한 개개의 정의를 구상하는 샌덜과 다르게, 노직은 오히려 메타-유토피아(Meta-Utopia)를 상상합니다(그래서 그의 저서에 유토피아라는 제목이 들어간 것입니다). 특정 정의관을 공유하는 사람들끼리 공동체를 구성하고 각자가 마음에 드는 공동체를 자유로이 선택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최상의 정의로운 세상이라는 것입니다. 즉 각각의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자발적으로 동의할 경우 이슬람 근본주의 원리에 따라 살든, 사회주의 원리에 따라 살든, 신자유주의적 원리에 따라 살든 마음대로 선택할 자유가 있고, 그것에 동의하지 않으면 그 공동체를 떠나 다른 원리에 따른 공동체를 선택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메타-정의(Meta-Justice)라는 것입니다.

독자 여러분은 롤즈 자유주의적, 노직의 자유지상주의적, 샌덜의 공동체주의적 정의 원칙 중 어느 것이 정의롭다고 생각하는가요? 그리고 그 정의 원칙에 비추어 지금의 현실은 정의로운가요? 독자 여러분의 가족․동료․이웃도 당신의 정의원칙에 동의를 할까요? 나아가 우리 5천만 국민 혹은 전세계 인류가 동의하는 정의의 원칙을 가능할까요?

※ 1년여 동안 ‘민주주의 키워드로 뒤집어 읽는 정치고전’을 읽어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매주 A4 용지 5-6장의 분량을 쓰는 것이 힘들었지만, 독자 여러분의 관심과 격려가 있어 꾸준히 쓸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지난 세기말 이후 출간된 현대 정치를 다룬 책들 읽기를 준비하고 있는데, 그때 다시 찾아뵐 기회가 있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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