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예술 행위는 자신의 내면세계를 독특한 표현수단으로 드러내는 것이다.문학은 그것을 문자로 표현하는 것이어서 언어에 대한 예민한 감각을 갖추고 있을 때 훌륭한 작가로 남을 수 있는 조건이 된다. 특히 시는 근본적으로 ‘은유(metaphor)’이기 때문에 시인의 언어감각이 무디면 적확한 표현을 찾아내기 어렵고, 때로는 생뚱맞거나 너무 진부한 표현을 하게 되어 실망감을 주기 쉽다. 시를 포함한 글쓰기의 어려움이 이 지점에서 발생한다. 시인이 자신뿐만 아니라 독자에게 환영받을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러시아 형식주의자 쉬클로프스키의 말처럼 “낮설게하기(defamiliarization)”를 실현하는 것이다. 늘 새롭게 표현해야 한다는 이 방법 앞에 시인들은 머리를 쥐어짜며 고뇌할 수밖에 없다. 어떻게 이전과
인간이 동물의 길을 벗어나면서부터 본능적 욕망을 억제하고 문명을 건설했다고 프로이트는 진단했다. 풍선의 한쪽 끝을 누르면 다른 쪽이 불거지듯, 인간의 ‘에로스’(eros)에 대한 억압은 ‘타나토스’(Thanatos 파괴적 본능)를 수반했다. 그러나 허버트 마르쿠제(Herbert Marcuse)는 ‘억압 없는 문명은 정말 불가능할 것인가’라는 회의적 질문을 던졌다. ‘프로이트 이론의 철학적 연구’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마르쿠제의 『에로스와 문명』은 프로이트 이론을 충분히 설명하면서도 인류의 미래를 비관적으로 보았던 프로이트를 넘어서고자 했다. 인간이 노동은 하지 않고 본능에 충실할수록 풍요롭게 살기 힘든 일이기는 하지만, 재화(財貨)가 넘쳐나는 사회에서도 왜 인간은 과잉노동을 하지 않을 수 없는가에 마르쿠제의
여름방학 중 보스니아-헤르체코비나(Bosnia-Herzegovina, 통상 보스니아라고 불림)를 방문하게 된 나는, 사라예보로부터 120km 정도 떨어진 ‘스타리모스트’에서 1995년 초로 플래시백(Flashback)하고 있었다. 잔인한 ‘보스니아 내전’ 사태는 그해 가을 즈음 종결 됐고, 청운대학교(1995, 3월 개교)로 부임한 나는 하루가 짧다고 느끼고 있었다. 그때까지 국제 뉴스는 보스니아라는 글자를 빼놓지 않았었고, ‘인종청소(ethnic cleansing)’같은 단어들이 새롭게 만들어지며, 인간이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는지를 외국 잡지들은 처참한 사진들로 증명하고 있었다. 내가 서 있었던 스타리모스트는 1993년 보스니아 내전 당시 폭격으로 무너졌다가 유네스코의 지원으로 2004년 재건축되어 유네
어느 국가나 성숙한 사회로 이동해 가기 위해서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음을 인류의 역사는 보여준다. 17세기 이후 유럽의 근대화를 이끌어 온 밑바탕은 개인주의, 자유주의, 민주주의, 자본주의라는 틀이었다. 이러한 제도들을 유지시키기 위해 그들은 많은 피를 흘려야 했고, 그 속에서 약속 잘 지키기, ‘똘레랑스(관용)’와 같은 덕목들을 발굴해 냈다. 상호간에 약속을 잘 지키지 않아서는 위와 같은 시스템이 돌아가지 않을 터이니 ‘사회계약론(약속 잘 지키기)’을 말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고, 불관용(zero-tolerance)에서 시작된 사회적 비극을 보고 똘레랑스 또는 너그러움의 중요성을 체득했을 것이다.유럽사회가 지난 400여 년 동안 겪어 온 근대화를 우리는 해방 후 짧은 시간동안 압축성장해 왔다.
중국은 사드(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문제로 남한과 한류를 비롯한 경제적 마찰을 야기하고 있고, 1월 초에는 군용기를 발진시켜 한국방공식별구역(KADIZ)을 4-5시간가량 침범한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은 부산 대사관 앞 소녀상 설치문제를 놓고 주한 일본대사 나가미네 야스마사를 일시 귀국시키는 등 위안부 소녀상 설치에 대해 대응강도를 높이고 있다. 이것은 두 나라와 우리의 외교가 순조롭지 않음을 예고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조짐들은 최순실 국정 농단의 사태로 남한이 국내의 정치적 소용돌이에 빠져 들자 더 노골화되고 있다. 국내 정치 리더십이 흔들릴 때마다 두 나라가 우리를 넘보았던 것은 역사 속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일이다.역사적으로 한반도의 위기는 동아시아 정세가 요동치거나 한반도의 국내
세상은 변하고 있다. 엄동설한 추위에도 시민들을 촛불을 들고 대통령의 하야, 즉각 체포를 요구하고 있다. 청와대 100m 앞까지 몰려간 시민들은 화염병과 몽둥이가 아니라 성숙한 시민의식으로 품격을 잃은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고 있다. 이들이 추운 겨울밤 거리로 나선 것은 허접한 모습이면서도 제왕적 권력을 갖고 있었던 대통령, 패거리 지으면서 공천이나 얻으려고 눈치나 살폈던 국회의원들, 권력과 결탁하여 몇 푼의 뒷돈을 주고 많은 이권을 챙기려 했던 기업인들, 그럴듯한 자리를 얻으려고 정치권을 기웃대는 폴리페서들, 그리고 자기의 이익만 추구하는 고착화 된 기성세대들을 찬양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들에게 염증을 느끼고,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갈망했기 때문이다. 촛불을 든 시민들은 우리 시대의 구태의연한 ‘앙시앙 레
얼마 전 지인(知人)이 한통의 이메일을 보내왔다. 그 내용은 일리노이 대학교(어바나 샴페인) 대학원생(한국인)이 2016년 일리노이대학교 최우수 음악상을 수상했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그 학생이 음악과 학생이 아니라 전자공학과 학생이라는 점이 눈길을 끌었다. 메일에는 학과 홈페이지에 소개된 그 학생의 수상소식과 공연 장면이 첨부되어 있었다. 공연장면은 음악인지 퍼포먼스인지, 시(詩)인지 애매했으며, 오히려 이것이 융합되어 하나의 새로운 종합예술을 연출하고 있었다. 공연이 끝나자 청중은 모두 일어나 낮선 장르(?)의 예술에 기립박수를 보내고 있었다. 존 케이지도 「4‘ 33’‘」라는 곡에서 피아노 앞에 앉아 피아노 덮개를 열고 4분 33초 동안 피아노만 응시하다가 한 번도 건반을 두드려 보지 않고 퇴장
북한 외교관 출신인 태영호 영국 주재 북한대사관 공사가 가족과 함께 서울로 망명했다. 장성택 처형 이후 북한 엘리트라고 할 수 있는 외교관들마저 흔들리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북한 정권에 대한 염증내지는 자녀들의 미래에 대한 걱정이 함께 깔려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북한정권은 아직도 남한의 공작정치 탓으로 돌리고 있다. 겉으로 그런 반응을 보이지만 외국 주재 외교관들에 대한 감시, 감독이 강화되고 있다고 들린다. 북한 정권을 선전해야 할 이들이 북한 정권에 대한 쿠데타에 나서고 있는 셈이다.이렇게 되고 있는 이유는 삼대(三代)에 걸쳐 지리멸렬하게 지속되는 독재정권에 대한 염증일 것이다. 남한이나 외국과 비교해 볼 때 절대적 궁핍 속에서 살아가야하는 북한의 현실을 이들은 분명 인식하고 있었을 것이다. 또
대학이나 단체 등에서 강의나 강연이 끝나고 나면 으레 하는 일이 수업평가(강의평가)다. 주로 강의가 유익했는지, 재미있었는지부터 강사가 첨단 기기를 잘 사용했는지, 목소리는 작지 않았는지까지 다양하게 수강자에게 물어 본다. 이것은 다음 학기 강의나 강연을 준비하는 강사에게 학생들의 반응을 전달하여 질 높은 강의를 준비하기 위한 과정일 수 있다. 가르치는 사람도 배우는 사람들의 반응을 어느 정도 느끼고는 있지만 그들의 마음을 속속들이 들여다보는 일이 강의에 도움이 될 것이다. 참신한 질문과 진솔한 대답이 강사에게 전달되어 효과적인 강의가 이루어질 수 있게 된다면 수업평가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일 것이다.수업내용이 쉽지 않은 내용일 때, 강사의 효과적 수업방법은 더욱 빛을 발할 수 있다. 수강자들의
영국이 EU에서 탈퇴하자 유럽뿐만 아니라 전 세계가 혼란에 빠졌다. 브렉시트를 단행한 영국도 그 후유증에 시달리기는 마찬가지다. 북 아일랜드+스코트랜드+웨일즈+잉글랜드가 영연방으로 구성된 영국연합왕국(United Kingdom)은 지난해 스코트랜드 분리 독립 투표로 한차례 몸살을 앓더니 브렉시트로 인하여 다시 내부 혼란에 휩싸이고 있다. 아일랜드 일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북 아일랜드도 비슷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한때 대영제국을 건설하여 세계를 경영해 본적이 있는 해가지지 않는 나라가 조그만 국가로, 유럽 한쪽 끝의 섬나라로 전락할 운명에 처해 있다. 왜 이들은 불안정한 상황 속에서 브렉시트를 감행 했을까? 설마 그렇게 되랴하고 브렉시트 찬성에 투표한 영국인들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그들의 투표결과를 가난한
지난주 연휴 산에 올랐다. 5월의 산속에는 아까시 나무를 비롯해, 노린재 나무, 층층나무, 조팝나무의 흰 꽃들이 저마다 화사함을 뽐내고 있다. 아까시 꽃 아래에는 애기똥풀 꽃이 노란 얼굴을 내밀고 있다. 더 숲속을 헤치고 들어가자 하얀 산딸기 꽃이 꿀벌을 맞이하여 힘에 겨운 듯 가지를 늘어뜨리고 있다. 여름이면 산딸기 꽃들은 벌들과 합작으로 붉은 열매를 마술사처럼 내놓을 것이다. 이름 모를 새들은 집 지을 터를 찾는지 산딸기 넝쿨 주변에서 마냥 부산하기만 하다. 고목나무에 매달려 보금자리를 준비하는 딱따구리 소리는 스님의 목탁소리를 닮았다. 오월의 숲속은 싱그러우면서도 새 생명을 잉태할 준비로 분주하다. 멀리서 숲을 바라볼 때 늘 비슷한 모습이었지만, 가까이 들여다보면 새 생명이 탄생하고, 생을 마감한 생명
알파고와 이세돌의 바둑대결로 이세돌에 대한 인기가 어느 아이돌 못지않게 높다고 한다. 그러나 어린이 바둑교실에 아이들이 몰려들고 있지만 알파고로 인한 인공지능(AI)에 대한 세간의 호기심은 ‘인공지능 공포증’으로 바뀌어 가고 있다. 아직 인공지능다운 인공지능이 출현되지 않았는데도 그에 대한 두려움이 앞서는 것은 인공지능의 궁극적 모습을 그려볼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미래에, 인간이 인공지능에 의해 인간 대접 받지 못하고, 일자리를 빼앗기지는 않을 것인가 하는 막연한 공포감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인공지능이 발전한다 하더라도 경우의 수가 체스보다 훨씬 많은 바둑에서 인간 최강 이세돌을 이길 수 있을까하는 것이 많은 사람들의 생각이었을 터인데, 이세돌이 승리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고 보통일이 아니구나 싶
미국의 억만장자 빌게이츠와 마크 주커버그의 공통점 중 하나는 바쁜 일정 속에서도 많은 책을 읽는다는 것이다. 빌 게이츠는 매주 2권 정도의 책을 읽고 독후감을 자신의 블로거에 공개하고 있다. 마크 주커버그도 2015년을 ‘책의 해’로 정하고 2주에 한번 씩 듬쑥한 책을 소개함으로써 지난해 독서열풍을 이끌었다. 책 읽기는 그들의 삶의 중요한 부분이며 이 습관이 그들을 세계적인 부자로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그들은 많은 재산을 사회에 거의 환원하고 있는데, 이것도 독서가 그들에게 끼친 영향이라고 할 수 있다. 독서를 통해 축적된 지식은 일상에서 그들이 현명한 판단을 할 수 있도록 의식 속에서 작동되고 있다.훌륭한 책을 많이 읽어야 한다는 말은 너무 많이 들어온 터라 다시 발설하기에도 멋쩍게 들린다. 그러나
사람은 내면에 동물적 수성(獸性)을 가두고 살아간다. 그것이 밖으로 드러날 때 짐승만도 못한 놈이라는 소리를 듣게 된다. 동물은 생식에의 본능, 먹이를 찾는 본능, 생존의 본능으로 산다. 동물들 사이의 투쟁은 이 본능의 충돌이다. 본능에 충실할수록 동물은 더욱 맹수의 위엄을 발한다. 동물은 영육(靈肉)을 하나로 뭉개서 현존의 조건으로 무지몽매(無知蒙昧)를 용인하고 그걸 발판 삼아 동물적 숭고함에 도달한다. 그러기에 동물은 내면이라는 심연(深淵)을 갖지 못한다. 동물은 표면이 곧 심연인 셈이다. 그러나 인간은 본능을 억압하고 양심을 기르기 시작한 동물이다. 동물 중에서 인간만이 그 감옥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열쇠를 쥐고 있다.이런 감옥에서 탈주할 수 있는 열쇠는 ‘윤리학’이라는 의미의 라린어 ‘에티카’
얼마 전 프랑스의 바타클랑 극장과, 축구경기장, 음식점, 그리고 말리의 바마코 호텔에서 테러가 일어나 수백 명이 죽고 부상을 당하는 참사가 발생하였다. 이러한 테러가 발생하기 직전에도 베이루트 지역에서 40여명, 나이지리아에서도 49명이 자살 폭파범의 테러로 인하여 목숨을 잃었다. 이번 테러와 인질극은 알카에다와 이슬람국가(IS) 등 극단주의 이슬람 무장단체들과 지하드(jihad), 파리외곽에 살고 있는 일부 이슬람주의자들의 소행으로 밝혀졌다. 이들과 유사한 단체들의 공격은 예전에도 있어 왔고 앞으로도 쉽게 끝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서구의 보복도 반복될 것이다. 이러한 악순환 속에서도 그들은 왜 계속 성전(聖戰)을 외치면서 악랄한(barbarous), 타락한(depraved) 방법으로 살상을 반복하
영국 스코트랜드 출신의 앵거스 디턴(프린스턴大)교수가 올해 노벨 경제학상을 받자 ‘불평등’이라는 단어가 주목 받고 있다. 한 국가가 경제성장을 하다보면 불평등도 생길 수 있고 그것의 긍정적 효과로 인하여 사람들이 과거보다 더 윤택하고 건강한 삶을 살 수 있다고 그는 주장한다. 한 예로 중국과 인도 같은 나라에 불평등이 존재하지만 수십억명의 사람들이 절대빈곤으로부터 벗어났다는 것이다.그러나 그가 사람들을 보고 지속적으로 불평등을 견뎌 내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노벨상을 받고 나서 영국 파이낸셜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지나친 불평등은 공공서비스를 붕괴시키고, 민주주의를 약화시키는 등 여러 가지 부정적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디턴과 『21세기 자본』의 저자 토마스 피케티(파리경제대 교
터키 휴양지 보드룸 해변에서 붉은 색 티셔츠와 남색 반바지를 입은 채, 엎드려 잠자는 듯 발견된 시리아의 세살배기 아일란 쿠르디 시신이 지구촌을 울렸다. 아일란은 부모를 따라 내전이 5년 동안 지속되고 있는 시리아를 떠나 에게해(Aegean Sea)를 거쳐 유럽으로 가려다 참변을 당한 것이다. 아일란 가족처럼 시리아인이 전쟁과 가난을 피해 조국을 줄줄이 떠나고 있지만 아직 시리아의 내전은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시리아 정부군과 반군 그리고 이슬람국가(IS)까지 합세하고 있는 이 나라의 미래는 갈수록 어둡기만 하다. 특히 슬라보예 지젝같은 좌파 철학자는 난민 발생의 궁극적 원인을 글로벌 자본주의에서 찾고 있다. 시리아 정부군에 암암리에 무기를 공급하지 말라고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러시아에 경고하고 있
그리스의 유명 관광지 중 하나가 ‘에피다우로스’라는 원형극장이다. 14000명 이상을 수용할 수 있는 이 노천극장은 지금도 정기적으로 연극이 상연되고 있는데, 무대에서 114m 거리에 있는 객석 끝에서도 배우의 소곤거리는 대사가 들릴 정도라고 한다. 지금부터 2400-2500여년 무렵 고대 그리스인들은 여기에 모여 연극공연을 관람하면서 교양과 지식과 지혜를 넓혀갔다. 고대 그리스의 극장은 단순히 연극을 공연하는 장소이외에 학교의 역할도 겸하고 있었다.일상 뿐 아니라 디오니소스 축제 같은 때에도 연극 경연대회가 벌어지기도 하였으니 아이스퀼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같은 고대 그리스 비극작가들의 주옥같은 작품들이 이 시기에 탄생된 것은 자연스러워 보인다. 이들 작품구성이 얼마나 치밀하고 탄탄한지 오늘
‘하늘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라는 말은, 순수하게 독창적으로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예술품)이 없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인용부호 없이 인용문만으로 된 책을 쓰고 싶다던 베냐민의 말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문명이 발전하여 역사를 이루면서 문화의 층이 더욱 두터워 졌고, 이에 새로움을 발견해 내려는 문화의 창조자들은 선배 시인들의 자장(磁場)에서 벗어나기 위해 지난한 몸짓을 해야만 했다.헤롤드 블름이라는 미국 문학 비평가의 말을 빌리자면 후배 시인은 선배시인에 대해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 놓이게 되는데, 후배 시인은 강한 아버지를 존경하면서도 그 영향에서 벗어나려 했다는 것이다. 또한 의도적으로 그를 왜곡하고 방어적으로 읽음으로써 자신의 창조성을 부각시키려 했는데, 블름은 이것을 ‘영향의
고전 영화들이 요즘 디지털 리마스터링을 거쳐 재개봉되고 있다. 리마스터링을 거친다는 것은 화면의 선명도나 음질, 색상 등이 더욱 좋아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옛날 영화를 보았을 때 스크린에 비가 내리는 듯한 현상은 이제 추억 속에 남겨두어야 할 것 같다. 새 단장한 애드리안 라인 감독의 『롤리타』(1997)도 5월 28일 우리나라에서 처음 재개봉 됐다.이 영화는 러시아 출신 소설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소설 『롤리타』가 영화화된 것이다. 이 소설은 우선 야할 것이라는 선입감이 있지만 그렇지 않으며 나보코프의 개인적 삶도 그와는 거리가 멀다. 나보코프는 볼세비키 혁명으로 러시아를 떠나 유럽을 전전하다가 미국에서 『롤리타』라는 소설을 써서 베스트셀러의 작가가 된다. 조국을 떠나왔지만 스스로 러시아 문학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