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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 후예들, 민주주의 vs 사회주의 딜레마에 빠지다베른슈타인의 ≪전제/과제≫와 로자의 ≪개혁/혁명≫읽기 (3)
최용현 | 승인 2016.05.09 09:15

1899년에 출간된 베른슈타인(Eduard Bernstein, 1850~1932)의 ≪사회주의의 전제와 사회민주당의 과제≫와 로자 룩셈부르크(Rosa Luxemburg, 1871∼1919)의 ≪사회개혁이냐 혁명이냐≫는 개혁적 사회주의와 혁명적 사회주의의 역사적 분기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후 사회주의자들은 개혁적 / 혁명적 사회주의자로 나뉘어 부르주아 정부에의 참여, 부르주아 정당과의 협력, 노동자 총파업, 제국주의와 식민지 정책, 전쟁(제1차 세계대전) 대응 등의 문제를 놓고 이론적․실천적 다툼을 벌이게 됩니다. 서로 공존하며 대립․경쟁하던 두 세력이 결정적으로 서로 분리되어 적대적 관계가 된 것은 제1차 세계대전에 대한 대응과 러시아 혁명의 성공이었습니다.

임박한 세계대전에 대하여 개혁파들이 주도하던 유럽 내 대부분의 좌파정당들은 방어적 전쟁을 명목으로 찬성 의견을 표명합니다. 이에 반발한 로자 등 혁명파들은 제국주의 전쟁에 반대하여 탈당을 하거나 보다 급진적인 정당을 창당합니다. 이러한 좌파정당들의 전쟁에 대한 찬성으로 개혁파와 혁명파를 망라한 세계 사회주의자들의 연합체라고 할 수 있는 제2 인터내셔널은 와해되게 됩니다. 전쟁에 대한 찬성과 제2 인터내셔널의 붕괴는 마르크스의 국제연대 원칙에 대한 명백한 배신행위로, 개혁파들의 도덕성에 치명적 타격을 주었습니다. 이후 개혁파의 모든 죄책을 개혁파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베른슈타인이 지게 되었고, 그는 사회주의의 배신자나 자본에 매수된 자로 매도되게 됩니다. 그러나 이는 베른슈타인으로서는 억울한 평가입니다. 오히려 그는 전쟁에 반대하여 독일 사회민주당을 탈당하였고, 죽는 순간까지 마르크스주의와 사회주의에 대한 신념을 잃지 않은 사람입니다.

제1차 세계대전의 와중에 유럽의 변방으로 후진국으로 저평가를 받던 러시아에서 1917년 레닌(Vladimir Ilich Lenin, 1870∼1924)이 이끄는 볼셰비키들이 사회주의 혁명에 성공하게 됩니다. 베른슈타인을 비롯한 개혁파들은 러시아 혁명을 사회주의 혁명이 아니라 정치 쿠데타에 불과하다고 폄훼하였지만, 어찌되었든 러시아 혁명의 성공으로 세계 사회주의 운동의 주도권은 독일로부터 러시아로 넘어가게 됩니다. 러시아 혁명으로 로자를 대신하여 마르크스주의의 적장자로 떠 오른 레닌은 혁명적 사회주의자들만을 규합하여 제3 인터내셔널(일명 코민테른 Comintern - Communist International)을 만들었고, 이때부터 개혁적 사회주의자는 ‘사회민주주의자’로, 혁명적 사회주의자는 ‘공산주의자’로 명확히 구분되어 불리게 된 것입니다.

독일에서 활동하던 로자는 전쟁 이전 혁명파를 이끌고 개혁파들이 주도하는 독일 사회민주당의 보수화․관료화와 지속적으로 싸우고, 반전운동에도 선봉에 나서 극우 군국주의세력과도 맞서 싸웠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그녀가 개혁파와 달리, 레닌의 혁명이론과 1917년 러시아 혁명과 그 이후의 러시아 혁명정부에 대하여 전적으로 찬동하는 입장은 아니었습니다. 나중에 보겠지만, 레닌과 그의 혁명정부에 대한 그녀의 비판은 어느 누구보다도 예리하게 그 핵심을 찌르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그러던 로자는 1919년 1월 독일 패전의 혼란 속에서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을 이끌고 봉기를 일으켰습니다. 그러나 사전 준비도 없이 일으킨 봉기는 바로 진압되었고, 로자는 개혁적 사회주의자들의 방조 속에서 극우파들에게 비참하게 살해되었습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공산당 선언>>.

민주주의 vs 사회주의 딜레마, 마르크스가 알지 못한 것

베른슈타인, 로자, 레닌간의 사회주의로의 이행전략, 러시아 혁명의 의미, 러시아 혁명정부의 조치에 대한 논쟁의 핵심에는, 민주주의와 사회주의의 상관관계에 대한 서로 다른 이해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는 사실 마르크스로부터 시작된 것이고, 마르크스가 구체적으로 해답을 주지 않은 것이기도 합니다.

1840년대 중반 즉 1848년 ≪공산당 선언≫을 집필하기 이전까지만 해도 마르크스(Karl Marx, 1818∼1883)와 엥겔스(Friedrich Engels, 1820∼1895)는 급진적 민주주의자에 가까웠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들의 사고는 베른슈타인과 유사하였습니다. 베른슈타인이 ≪사회주의의 전제와 사회민주당의 과제≫에서 정치적․경제적 민주주의의 확대와 심화가 종국에는 사회주의로 귀결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공산당 선언≫을 집필하기 이전까지만 해도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민주주의에 내재된 평등주의적 본성이 사회경제적 부문에 확대되어 종국에 사회주의(공산주의)적 주장으로 귀결될 것으로 보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이후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민주주의나 사회개혁적 운동을 사회주의 운동과 동일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이러한 운동을 부르주아적 혹은 쁘띠(小) 부르주아적 운동으로 규정하고, 이러한 민주주의와 개혁의 누적으로는 사회주의를 실현할 수 없고, 사회주의의 실현을 위해서는 기존의 체제와의 근본적인 단절인 혁명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마르크스는 도래할 사회주의 혁명은 기존의 봉기나 정치쿠데타와는 명백히 다를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도래할 혁명은 계급과 소유의 종식을 목표로 한다는 점에서 뿐만 아니라, 그 혁명의 수행(과정)에서도 이전의 혁명이나 정치쿠데타와도 확연히 다를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마르크스는 ≪공산당선언≫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전의 모든 지배계급들은 지배권력을 장악한 후, 사회 전반을 자신의 전유(專有) 조건 아래 종속시킴으로써 이미 획득한 자신의 지위를 공고히 하고자 했다. 하지만 프롤레아타리아는 자기 자신이 속해 있던 기존의 전유양식을 폐지하고, 나아가 지금가지 존재한 다른 모든 전유양식을 폐지함으로써만 사회적 생산력을 장악할 수 있다. 왜냐하면 프롤레타리아는 보호하고 강화할 그 무엇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의 사명은 지금까지 사적 소유를 보호하고 보장해 온 일체의 것을 파괴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일어나 모든 운동은 소수의 운동이었거나 혹은 소수의 이익을 위한 운동이었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의 운동은 압도적 다수의 이익을 위한 압도적 다수의 자주적 운동이다.

공산주의자들은 프롤레타리아 전체와 어떠한 관계를 맺고 있는가?……공산주의자들은 실천적인 측면에서 볼 때 모든 나라의 노동계급 정당들의 가장 선진적이며 굳센 부분으로서 다른 모든 정당들을 앞으로 밀고 나아가며, 이론적인 측면에서 볼 때 프롤레타리아 대중에 비하여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진행 경로와 조건들, 그리고 궁극적이고 전반적인 결과를 명료하게 인식한다. 이러한 공산주의자들의 당면 목적은……프롤레타리아트를 계급으로 형성시키고, 부르주아 지배를 타도하며, 프롤레타리아트가 정치권력을 장악하도록 하는데 있다.

마르크스의 사회주의 혁명에서 등장하는 두 인물은 프롤레타리아트와 공산주의자입니다. 마르크스에 의하면 사회주의 혁명의 주체는 프롤레타리아트라는 ‘압도적 다수 대중’이고 그들의 ‘자주적’ 운동입니다. 이점이 기존의 봉기나 쿠데타와 명확히 다른 점입니다. 그러나 마르크스에 의하면(특히 성숙한 마르크스의 경우), 프롤레타리아는 자연적으로 계급 의식이나 사회주의 이념을 갖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프롤레타리아에게 계급의식을 주입하여 이들을 하나의 계급으로 엮어내고, 이들로 하여금 정치권력을 장악하게 하고 모든 계급과 소유를 폐지하도록 하여, 궁극적으로 사회주의 사회로 이행토록 만드는 것은 공산주의자들입니다.

이처럼 마르크스는 사회주의 혁명의 주체로서의 프롤레타리아트와 그들을 사회주의로 이끄는 지도자로서의 공산주의자라는 구조를 상정하고 있습니다. 전자가 도래할 혁명에의 다수 대중의 참여라는 ‘민주주의’를 담보한다면, 후자는 목표지향인 ‘사회주의’를 담보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구조는 이론상으로만 본다면, 다수의 의사와 이익을 우선시하기에 그리고 정치적 평등은 물론 사회경제적 평등을 추구하기에, 사회주의는 가장 민주주의적인 것으로 되고 이 양자 사이에는 모순과 대립이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민주주의와 사회주의는 실천적으로는 끈임없이 대립하고 충돌할 수 있습니다. 다수 대중 혹은 다수의 프롤레타리아트와 공산주의자의 관계는 어떠하여야 하는가, 다수 대중은 물론 프롤레타리아트도 자연적으로 사회주의적이지 않다면, 이들에 의하여 사회주의적 지향에 대한 태업․반대․반역이 발생할 수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혁명전 또는 혁명후 공산주의자들은 이러한 反사회주의적 저항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제어할 것인가, 그러한 제어는 다수의 의사에 따르는 민주주의를 통해서도 가능할 것인가, 만약 그렇지 않다면 공산주의자들은 권위주의적(反민주주의적) 방식으로라도 사회주의적 지향을 추구할 수 있는가 등등.

그러나 이에 대한 마르크스의 답변은 없습니다. 이에 대한 후대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의 답변은 두가지입니다. 첫째는 위 양자를 ‘변증법적 통일’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이는 어려운 질문에 더 어려운 말로 대답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둘째는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선험적으로 또는 책상 위에서가 이론적으로 결정될 문제가 아니라, ‘실천적으로’만 극복될 문제라는 것입니다.

베른슈타인의 <<사회주의의 전제와 사회민주당의 과제>>와 로자 룩셈부르크의 <<사회개혁이냐 혁명이냐>>.

베른슈타인과 로자, 민주주의 vs 사회주의

사실 마르크스가 주로 활동하던 시기에는, 민주주의와 사회주의가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을까 또는 이 양자는 근본적으로 서로 대립․모순적일 수 있지 않을까 라는 문제에 대하여 고민할 만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프롤레타리아트는 아직 미약하였고, 사회주의를 추구하는 대중정당은 존재하지 않았고, 사회주의의 실현은 너무나 요원한 것이었습니다.

베른슈타인, 로자, 레닌 등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활동하던 마르크스의 후예들은 이러한 문제에 ‘실천적으로’ 봉착하였습니다. 프롤레타리아트가 사회의 다수가 되고 사회민주당이 제도권 내 유력한 정당으로 성장하고 사회주의의 도래가 임박한 것처럼 보이자, 이제 민주주의와 사회주의의 상호관계의 문제가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베른슈타인의 민주주의와 사회주의의 상호관계에 대한 생각은 젊은 시절의 마르크스와 유사합니다. 그는 입헌주의․표현의 자유․경쟁적 정당체계․다수의 원칙 등 민주주의의 기본원칙은 다수인 프롤레타리아트가 정치적 주도권을 확보하고, 사회주의 정당이 다수 대중이 사회주의를 지향할 수 있도록 조직․선전․교육할 수 있는 토대를 제공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는 이러한 민주주의 원칙은 사회주의로의 이행의 과정은 물론 도래할 사회주의 체제에서도 반드시 필요하다고 보았습니다. 그는 그러한 민주주의를 전제하지 아니한 사회주의는 필연적으로 독재로 귀결될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에게 사회주의는 보다 확대되고 심화된 민주주의에 불과하였습니다.

로자는 ≪사회개혁이냐 혁명이냐≫에서 이러한 베른슈타인의 민주주의 노선은 결코 자본주의의 계급적 한계를 넘어설 수 없으며, 이는 오히려 민주주의의 진전이 아니라 정체나 퇴보를 가져올 뿐이라고 반박하며, 혁명을 통한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치권력의 쟁취와 일관된 사회주의적 조치로만 사회주의를 달성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렇다면 그녀는 反민주적인, 소수에 의하여 주도되고 지배되는 권위주의적인 혁명과 혁명정부를 주장하였을까요?

그녀의 혁명이론에 영감을 준 것은 1905년의 러시아 혁명(흔히 이를 1차 혁명이라고 하고, 1917년 2월 혁명을 2차 혁명이라고 합니다)입니다. 1905년 러시아의 노동자들과 대중은 아무런 사전 징후나 준비도 없이 자발적으로 대규모 파업과 소요를 일으켰는데, 로자는 이듬해 ≪대중파업, 정당, 노동조합≫라는 소책자를 써서 이를 분석하고 있습니다. 그녀가 주목한 것은 ‘대중의 자발성’입니다. 그녀는 1905년 러시아 대중의 자발적인 투쟁을 보며 보수화․관료화된 당대의 독일 사회민주당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러시아 혁명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보다도 다음과 같은 사실이다. 즉 대중파업은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거나 불시에 결정된 것 또는 전파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대중파업은 특정 시점에서 사회적 관계의 상황으로부터 필연적으로 따라나온 역사적 현상이다……간단히 말해 대중의 자발성이라는 요소가 러시아의 대중파업 속에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이다. 그것은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가 교육되지 않아서가 아니라, 바로 혁명이 그들을 훈육시키는 것을 불필요하게 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로자의 혁명이론의 제 1의 특징은 대중의 자발성에 대한 신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그녀가 마르크스가 말하는 공산주의자들이나 당대의 사회주의 정당의 존재 의미와 가치를 방기한 것은 아닙니다. 그녀도 이들의 존재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주장합니다. 다만 다음에서 보는 레닌과 차이가 있다면, 로자는 이들의 임무를 대중에게 사회주의와 혁명을 선동하고 교육하고 계몽하는 정도로 한정하였다는 점입니다. 이러한 로자의 태도는 ≪공산당선언≫에서의 마르크스의 태도와 지극히 닮았습니다. 그러나 ≪공산당선언≫에서의 마르크스가 민주주의와 사회주의, 노동계급과 공산주의자의 구분과 상관관계에 대하여 대단히 모호한 태도를 보인 것처럼, 그러한 모호성은 로자에게도 유전되었습니다.

베른슈타인과 로자의 논쟁, 레닌이 등장하다

이러한 로자의 대중․프롤레타리아트와 사회주의 정당의 관계에 대한 주장은 독일 사회민주당내에서 뿐만 아니라, 레닌에 의해서도 혹독한 비판을 받았습니다. 그들의 비판의 핵심은, 로자의 대중의 자발성 관념에 내포된 결정론적 태도와 당과 조직에 대한 경시였습니다. 즉 그들은 로자가 대중이 저절로 사회주의적으로 될 것이라고 간주하는 잘못을 저질렀고, 사회주의로의 진행과정에서의 당과 조직의 역할을 대중추수적인 것으로 협소하게 한정하였다는 잘못을 저질렀다고 비판하였습니다.

베른슈타인과 로자간의 논쟁이 시작된 후 2년 정도 지난 1902년 레닌은 마르크스주의와 혁명이론의 역사에서 새로운 전환기적 기념비라고 할 수 있는 저작을 내놓았습니다. 바로 ≪무엇을 할 것인가≫입니다. 이 저작은 레닌의 독특한 혁명이론이라고 할 수 있는 레닌주의가 시작하는 저서이기도 하고, 혁명 이후 러시아가 反민주주의적(권위주의적)으로 귀결되는 과정을 이해하는 이론적 원형이 되는 저서이기도 합니다.

이 저서에서 레닌은 기존의 사회주의자와 전혀 다른, 심지어 마르크스와도 분별되는 새로운 혁명이론을 내어놓습니다. 그는 프롤레타리아트는 스스로 계급의식과 사회주의 이념을 성취할 수 없고, 노동조합적․경제적 투쟁의 수준만으로는 부르주아적 헤게모니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는 계급의식은 ‘외부에서’만 노동계급에게 주입될 수 있고, 프롤레타리아트의 자발적․경제적 투쟁은 의식적․정치적 투쟁의 한 계기로 포함될 때만 유의미하다고 주장합니다.

우리는 사회민주주의 의식이 노동자들에게 있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그것은 오직 외부에서 들여올 수 있을 뿐이다. 노동자 계급은 그 자신의 힘만으로는 노동조합주의 의식, 즉 조합으로 단결하여 고용주들과 투쟁하고 노동자들에게 필요한 이러저러한 법률들을 정부가 제정하도록 하는 등등의 것이 필요하다는 신념을 마련할 수 있을 뿐이라는 사실은 모든 나라의 역사가 증명하는 바이다. 사회주의 학설이라는 것은 유산계급의 교육받은 대표자들, 즉 지식인들이 일구어 낸 철학, 역사, 경제 이론들에서 자라는 것이다. 현대의 과학적 사회주의의 창시자들인 마르크스와 엥겔스 역시 그 사회적 지위로 볼때 부르주아 지식인에 속했다. 그와 꼭 마찬가지로 러시아에서도 사회민주주의 학설은 노동운동의 자생적 성장과는 전혀 무관하게 발생하였다……노동자계급적 정치의식은 오직 외부에서만, 즉 경제투쟁의 외부에서만, 고용주에 대한 노동자의 관계라는 영역 밖에서만 노동자들에게 도입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레닌의 계급 의식관(계급의식과 사회주의 이념은 노동자들이 자생적으로 취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외부로부터 주입될 수 있을 뿐이다 라는 관념)은 마르크스주의에서 크게 벗어난 것도, 레닌의 독창적인 것도 아닙니다. 마르크스는 ‘노동계급의 해방은 노동계급 자신의 행위’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주장하였지만, 그도 계급의식이나 사회주의적 이념의 터득을 위해서는 공산주의자들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인정하고 있었고, 한때 마르크스주의의 교황으로 불리다가 자유주의자로 개종한 카우츠키도 레닌에 앞서 이러한 취지의 주장을 하였습니다. 레닌도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이러한 자신의 주장을 카우츠키의 권위를 빌려 정당화 하고 있습니다.

그의 놀라운 사고의 전환은 그 다음의 당 조직과 운영 원리에 있습니다. 그는 사회주의 정당은 대중이나 노동자들이 참여하는 개방적이고 민주적인 방식으로 구성되어서는 안 되고, 지식인․학생․선진적 노동자 등 소수의 직업혁명가들로 구성되고 상명하복 등의 엄격한 규율이 있고 철저히 비밀로 유지되는 조직이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사회민주주의자에게 정치투쟁이라는 개념이 ‘고용주와 정부에 대한 경제투쟁’ 개념으로 윤색된다면, 다소간의 차이가 있더라도 ‘혁명가 조직’이라는 개념이 ‘노동자 조직’이라는 개념으로 될 것이라 생각하는 것도 당연하다……우리의 견해 차이의 근원은 어디에 있었던가? ‘경제주의자들(베른슈타인 노선 지지자들을 의미)’은 조직적 임무, 정치적 임무 둘 다에서 항상 사회민주주의를 벗어나 노동조합주의의 길로 새어 버린다는 바로 그 지점에 있다……혁명적 사회민주주의 당 조직은 그런 투쟁을 위한 노동자 조직과는 다른 종류의 것일 수밖에 없다. 노동자 조직은 첫째 노동조합 조직이어야 하며, 둘째 가능한 한 폭 넓은 조직이어야 하며, 셋째 가능한 한 공개적이어야 한다. 이와 반대로 혁명가 조직은 무엇보다도 먼저, 그리고 주요하게 혁명 활동을 직업으로 가진 사람들이어야 하며……이 조직은 그렇게 폭 넓지 않아야 하며, 가능한 한 비밀스러워야 한다.

레닌의 <<무엇을 할 것인가>>.

베른슈타인과 로자, 레닌에게 민주주의를 묻다

레닌의 이러한 당 조직, 운영 원리는 러시아적 특수성을 반영한 것입니다. 레닌은 노동계급 정당이나 사회주의 운동이 허용되는 독일이나 서유럽과 달리, 짜르 정부의 혹독한 탄압과 다수의 비밀경찰이 활동하는 러시아에서는 이러한 자신의 당 조직, 운영만이 생존 가능하고 합리적인 것이라고 강변하고 있습니다. 일제 치하의 우리 독립운동가들, 박정희․전두환 군사정권하의 우리 학생운동의 조직과 활동을 생각해보면, 분명 레닌의 주장은 현실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레닌의 당 개념을 순전히 러시아적 현실을 반영한 것으로만 볼 수도 없습니다. 그는 때때로 대중이나 노동계급의 자발성․참여와 당의 민주적 운영을 강조하기도 하였지만, 그의 기본적 논조는 항상 당의 혁명성을 강조하고, 대중이나 노동계급보다는 당을 우선시 하고, 대중이나 노동계급은 당의 계획대로 조직되고 지도되고 동원되어야 한다고 주장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레닌의 당과 프롤레타리아트․대중과의 관계 설정에 대하여 베른슈타인과 로자는 혹독한 비판을 하고 있습니다. 베른슈타인과 로자의 레닌에 대한 비판의 핵심에는 ‘민주주의’의 문제가 있습니다. 그들은 레닌에게 ‘그러한 방식은 과연 민주주의적인가 그리고 그 결과는 과연 민주주의적일 수 있을까’라고 묻고 있습니다. 그들의 레닌에 대한 비판과 우려는 현실이 되고 심지어 미래가 되었습니다.

최용현  choiyh6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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