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츠슈나이더의 ≪절반의 인민주권≫ 읽기 (2)

샤츠슈나이더(E. E. Schattschneider, 1892∼1971, 이하 그의 애칭인 샤츠로 표기)의 ≪절반의 인민주권≫의 부제는 ‘A Realist's View of Democracy in America'입니다. 샤츠는 현실주의자(Realist)입니다. 이상적인 민주주의는 어떤 모습이어야 하고 그러한 민주주의에 합당한 시민의 능력과 역할을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라는 시각이 아니라, 현실의 민주주의와 인민은 실제 어떠한가 라는 시각으로부터 민주주의 이론을 시작하여야 한다고 그는 주장합니다.

샤츠의 현실 민주주의와 인민에 대한 태도는 슘페터(Joseph Schumpeter, 1883∼1950)의 그것과 유사합니다. 샤츠도 슘페터처럼 현실에서 대의․정당민주주의는 필연이며, 정치의 실질적 주체는 인민이 아니라 정치엘리트와 정당이라고 주장합니다.

샤츠는 현실주의자이지만, 그러나 슘페터와 달리 현실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지는 않습니다. 그는 현실적 시각에 근거하여 객관적 자료와 경험을 중시하지만, 인간의 존엄․평등․연대 등 정치에서의 도덕적 전제를 중시하고, 민주주의는 무엇보다도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위한 것이라는 신념을 가진 인물이기도 합니다. 그가 현실주의자인 것은, 현실에서부터 시작해야만 그것을 개혁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그러한 것입니다.

샤츠의 책은 우리나라에 2권이 번역되어 있습니다. <<민주주의의 정치적 기초>>는 샤츠가 어린 학생들의 교육용으로 발간한 것으로, TV 프로그램 "썰전"으로 유명세를 얻었던 이철희씨(현 더불어 민주당 의원)가 번역한 것입니다.

갈등과 정당, 샤츠의 핵심 언어

샤츠의 현실 정치에 대한 분석에 기초에는 ‘갈등’과 ‘정당’이 있습니다. 인간 사회에서 갈등이 발생하는 이유는 사회내 여러 개인과 집단들 간에 신분적․지역적․종교적․경제적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정치학에서는 이러한 차이를 사회적 균열이라고 합니다. 사회내에는 이러한 균열이 있기에 사회구성원 간의 갈등은 피할 수 없는 것이고, 이러한 균열과 갈등에 따라 파벌이나 당파(현대적 의미의 ‘정당’)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사회적 균열 - 대립과 갈등 - 정당의 형성 - 정당체계 및 유권자투표 정렬의 연관성을 설명하는 정치이론으로 립셋-로칸 모델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립셋(Saymour M. Lipset)과 로칸(Stein Rokkan)은 사회적 균열이 사회적 대립과 갈등을 생성케 하고, 이러한 대립과 갈등이 서로 중첩되거나 교차하면서 특유의 정당체계와 유권자 투표정렬을 만든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은 서유럽 국가들이 근대국가로의 전환과 산업화 과정에서 ① 중심-주변간의 분열, ② 국가-교회간의 분열, ③ 도시-농촌간의 분열, ④ 자본-노동간의 분열이라는 4가지 주요한 균열을 갖게 되었는데, 이러한 균열에 따른 사회적 대립과 갈등이 상호작용을 하면서 서유럽 국가들이 각기 다른 정당체제와 유권자 투표정렬을 갖게 되었다고 주장합니다.

샤츠의 독창성은 이러한 사회적 갈등을 정태적인 것이 아니라 역동적인 것으로 이해하고, 정당을 단순히 이러한 갈등의 수동적 반영자로 이해하지 않고 적극적 개입자 내지는 형성자로 이해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갈등의 역동성과 그 과정에서의 정당의 주도적 역할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샤츠는 우선 갈등 자체의 역동성에 주목합니다. 그는 갈등에의 참여자가 확대되면 본래의 갈등의 내용과 성격도 변하여, 전혀 새로운 갈등으로 변질될 수 있다고 합니다. 이러한 사례는 무수히 많습니다. 예컨대 백인 경찰의 흑인 용의자에 대한 가혹한 처사가 흑인들의 폭동으로 발전하여 엉뚱하게도 아시아와 남미 출신 유색인종에 대한 테러와 약탈로 변질되기도 합니다. 어떤 빈민가족의 생활고에 따른 자살이 SNS를 통해 왜곡되어 이주노동자와 난민에 대한 탄압과 배척 주장으로 나아가기도 합니다. 본래의 갈등의 주체는 통제권을 상실하게 되고, 경찰의 불법행위․사회복지정책의 미비에 대한 비판이라는 본래의 갈등의 예상되는 방향이 전혀 다른 방향으로 변질된 것입니다.

갈등도 갈등한다?

또한 샤츠는 모든 갈등을 사회화할 수도 없고, 모든 갈등을 동등하게 취급할 수도 없다고 합니다. 갈등들도 서로 경쟁관계에 있습니다. 즉 어떠한 갈등이 주요한 갈등으로 대두되면 여타의 갈등은 억압되거나 주요한 갈등축을 따라 부차적이거나 종속적인 것으로 편제된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지역갈등이나 이념갈등이 극단으로 치달으며, 그 내부의 빈부․도농․남녀 등의 갈등은 묻혀 지거나 사소한 것으로 취급된다는 것입니다. 갈등들이 경쟁적이기에 샤츠는 갈등들을 동원하고 관리하고 위계지우는 것이 정치의 본질적 속성이라고 주장합니다.

30여 년 전 미국의 저명한 사회학자 로스(E. A. Ross)는 갈등들은 서로 간섭하는 경향이 있으며 현대 사회가 포괄하는 균열의 다양성은 사회적 적대의 격렬함을 완화하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하였다. 로스 교수의 주장에 숨겨진 가정은, 갈등들 사이에는 일종의 등가적 상쇄관계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만약 이런 가정이 옳다면, 양립할 수 없는 수많은 갈들의 부상은 공동체 내의 모든 적대를 완화하면서 긴장도가 낮은 체제를 만들어 내는 경향을 보일 것이다. 이런 가정은 타당한가? 갈등들마다 강도가 다르다고 가정하는 것이 훨씬 타당하지 않을까? 왜 우리는 사람들이 모든 이슈에 대해 동일한 수준으로 열광한다고 가정해야만 하는가? 다른 한편, 갈등의 강도가 서로 균등하지 않다면 그것으로부터 추론할 수 있는 논리적 결과는 무엇일까? 더 격렬한 갈등이 덜 격렬한 갈등을 대신할 가능성이 크다는 가정은 타당한 것처럼 보인다. 이로써 도출되는 것은 갈등들 사이에 지배와 종속체제이다. 모든 주요한 갈등은 그보다 덜 주요한 갈등을 압도하고 종속시키며 가려 버린다.

정치적 균열들은 상호 양립할 가능성이 거의 없다. 즉 어떤 갈등의 발전은 다른 갈등의 발전을 막게 되는데, 그 이유는 어떤 갈등이 오직 모든 경쟁자들이 기존 관계 및 그에 대한 우선순위를 변화시키는 대가를 치른 뒤에야만 정치적 갈등 구도의 완전한 변화는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새로운 갈등이 지배적 지위를 차지할 수 있는 조건은 오직 기존의 갈등이 부차화 되거나 모호해지거나 잊히거나 그 경쟁자들을 자극할 만한 능력을 상실하거나 시대적 타당성을 잃어버리는 경우이다. 기존의 갈등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새로운 갈등을 촉진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에, 사람들은 여러 갈등 가운데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바꿔 말해 갈등 또한 서로 경쟁하고 있는 것이다.

현대 사회라면 어디에서나 무수히 많은 갈등이 잠재되어 있지만, 오직 몇몇 갈등만이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된다. 갈등의 수를 줄이는 일은 정치가 수행하는 핵심적 기능이다. 정치는 갈등들 간의 지배와 종속을 다룬다. 민주주의 사회가 존속할 수 있는 이유는 수많은 잠재된 갈등들에 대하여 우선순위를 부여하는 방식으로 갈등을 관리하기 때문이다……정치의 기원이 투쟁인 이상, 정치전략은 갈등의 조장․이용․억압을 다룰 수밖에 없다. 갈등은 매우 강력한 정치적 도구이기 때문에 모든 정치체제는 필연적으로 그것을 관리하고, 그것을 통해 통치하며, 그것을 변화․성장․통합의 도구로서 효과적으로 사용하는 데 관심을 갖는다. 정치의 근본 전략은 갈등과 관련된 공공정책을 다루는 것이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정책이다…… 정치의 의미를 파괴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모든 이슈가 자유롭고 동등한 가치를 갖는 것처럼 다루는 것이다. 이슈의 불균등성은 정치에 대한 해석을 단순화시켜 준다. 우리가 선호의 우선순위를 확립한 때에야 비로써 정치도 의미를 갖게 된다.

정당, 갈등을 선택하고 동원하고 위계지우다

샤츠에 의하면, 수많은 갈등 중에 특정한 갈등을 사회적 갈등으로 추출하고, 특정한 사회적 갈등을 주요한 갈등으로 선택하여 여타의 갈등을 이에 따라 부수적이거나 종속적인 것으로 편제하고, 이러한 주요한 갈등을 부각시켜 구경꾼인 시민들의 더 많은 관심과 참여를 유인하고, 주요한 갈등에 따른 대안을 정의하고 그 실천적 프로그램을 산출하는 핵심적 정치기제가, 바로 정당이라는 것입니다.

전통적으로 정당과 정당체계는 사회적 갈등축의 반영물로 보아왔습니다. 즉 빈부 격차, 지역적 분열, 종교적 차이 등 사회내의 주요한 갈등축을 따라 한 나라의 정당과 정당체계가 형성되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샤츠는 이러한 전통적인 논의를 거꾸로 뒤집어 놓았습니다. 샤츠에게서 정당은 사회적 균열에 따른 사회적 대립과 갈등의 단순한 반영자가 아닙니다. 그는 오히려 정당과 정치엘리트들이 어떠한 갈등축을 선택하고 어떠한 갈등축을 배제하고 어떻게 대중을 동원하느냐에 따라 정치경쟁의 양상은 전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는 이에 대하여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립셋-로칸과 다른 방향에서 균열의 정치이론을 대표하는 샤츠슈나이더는 균열의 정치적 형성과 작위적 동원의 측면을 강조하였다. 즉 정당체제나 정당간 경쟁 및 대립을 사회균열의 정치적 표출로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정당과 정치엘리트들이 여러 균열요소들 중에서 특정 균열을 선택적으로 동원하고 배제한 결과로서 정당체제를 설명한다. 나아가 유권자의 분포 역시 사회균열의 단순한 반영이 아니라, 정당과 정치엘리트들에 의해 어떤 갈등요인이 지배적인 균열라인으로 만들어지느냐의 결과에 따라 변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따라서 특정 정당과 정치엘리트의 정치적 영향력과 권력 효과는 자신에게 유리한 균열을 동원하고 그렇지 않은 균열을 억압하거나 배제하는 능력에 따라 좌우된다고 보았다. - 최장집,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중

최장집,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진보적 사회학자로 유명한 김호기 교수는 자신을 포함한 486세대 지식인들은 '최장집의 아이들'이며, 최 교수의 위 책은 '민주화 시대 이후 한국 사회를 대표하는 단 한권의 사회과학 저서'라고 극찬합니다(2013.11.4.자 경향신문). 우리 나라의 대부분의 진보적 사회과학자들은 김 교수의 위 말에 전적으로 동의할 것입니다. 필자도 대학시절 최 교수로부터 정치학을 배웠습니다. 그냥 배운 것이 아니라, 최 교수의 매니아가 되어 그의 수업을 2-3번씩 도강까지 하며 들었습니다. 또한 지루한 검사시절 그의 위 책을 읽고 충격에 빠져 검사를 그만두고 대학시절 허투루 배웠던 정치학을 다시 제대로 공부할 생각을 하였고, 그 결과 이렇게 정치고전과 민주주의에 대한 글을 쓰게 된 것입니다.

갈등이 경쟁적․역동적이고 그 과정에서의 정당이 주도적 역할을 한다는 샤츠의 주장은, 민주주의에 불리하게 작용할 수도 있습니다. 예컨대, 기존의 정당이나 정치엘리트들은 일반 대중의 이익보다는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유리한 특정한 갈등축을 동원하여 이를 제도화한 기존의 정당체계와 정치질서를 유지하려 할 수 있습니다. 즉 자신들에게 유리한 ‘편향성의 동원(mobilization of bias)’을 지속함으로써, 기존의 대중 참여가 배제된 기성 정치엘리트 중심의 카르텔 정치를 유지하려고 할 수 있습니다.

샤츠는 미국 남부의 보수파가 가난한 백인을 자신의 휘하에 묶어 두기 위하여 인종적 적대를 이용하거나, 계급갈등의 정치적 부각을 막기 위하여 도시와 농촌의 갈등을 이용하거나, 다양한 진보적 자유주의의 대의를 막기 위하여 매카시즘을 이용하는 경우 등이 그러한 사례에 해당된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가장 흔한 사례는 계급갈등을 막기 위하여 인종갈등이나 지역갈등을 이용하는 경우라고 할 것입니다.

미국은 어떻게 지역정당체계를 극복하였는가?

샤츠는 이러한 편향성의 동원을 통한 엘리트 중심의 정치구조 고착화의 대표적 사례로, 1896년부터 30년간 미국 정치를 지배하였던 지역정당체계를 거론하고 있습니다. 19세기 후반 미국도 남북전쟁을 거치면서 지역주의가 극심하여, 우리의 영남-새누리당 호남-민주당 구조와 유사한 북부-공화당, 남부-민주당이라는 정당-유권자 투표정렬이 형성 되었습니다.

이러한 지역정당체계는 19세기말 정당과 지역을 가로지르는 진보적 농민운동인 인민주의 운동으로 폐기될 시점에 이르렀습니다. 인민주의자들은 기존의 부패한 정치질서의 개혁과 사회경제적 형평성 확보 등을 주장하였습니다. 이에 대항하여 북부의 공화당 보수파와 남부의 민주당 보수파는 주저없이 낡은 지역감정을 되살려내, 인민주의 운동을 분열시키며 오히려 기존의 지역정당체계를 더욱 공고화하였습니다.

급진파들(인민주의적 정치세력을 의미) 패배한 이유는, 일당 중심의 지역갈등 구도를 통하여 남부와 서부의 급진파들을 상호 고립 분열시키면서 그들을 압도해버린 일관성 없는 균열에(지역갈등 구도를 의미), 이들 급진파들이 이용하려 했던 갈등(사회경제적 갈등 구도를 의미)이 종속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반면, 보수파들이 권력을 획득한 이유는, 그들이 원하는 방식대로 대중을 분열시키는 갈등을 이 나라에 부과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북부의 공화당 보수파와 남부의 민주당 보수파가 공개적으로 협력했던 것은 아니지만, 이들간 사실상의 은밀한 동맹이야 말로 공화당 우위 체제의 주축돌이라 하겠다.

지역갈등이 지배적 갈등으로 부각되는 지역정당체계가 민주주의에 미치는 효과는 어떠한 것일까요? 지역정당체계에서는 특정 정당이 특정 지역을 우월적으로 지배하기에 시민의 투표의 가치는 현저히 저하됩니다. 따라서 대중의 정치참여 의욕과 필요성은 감퇴되고 기존의 보수 엘리트들의 지배구조를 고착화됩니다. 또한 시민들의 생활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여타의 갈등은 정치의 무대에서 제대로 대표되지도 다루어지지도 못하게 됩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정체 내지 퇴보입니다.

이러한 지역정당체계는 1932년에 이르러 붕괴되는데, 이는 대공황으로 인하여 지역갈등보다 사회경제적․계급적 갈등이 더 부각될 수밖에 없었을 뿐더러, 루즈벨트 등 민주당의 새로운 정치엘리트들이 이러한 새로운 갈등을 지배적 갈등으로 삼기 위하여 노동자․빈민 등을 대변하는 정책을 적극적으로 구사했기에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갈등의 대체로 어떠한 효과가 발생하였을까요? 샤츠는 이러한 갈등의 대체로 정당경쟁은 전국적 규모로 확대되고 보다 경쟁적으로 되었며, 다수 대중의 정치참여도 확대 되고, 정치적 의제도 그 폭이 넓어지고 대중의 사회경제적 이해관계에 보다 연관성을 갖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한마디로 민주주의의 진전이라고 할 것입니다.

샤츠의 분석에서 우리는 어떤 시사점을 얻을 수 있을까요? 영남과 호남이라는 지역적 분리나 양쪽 주민의 차이가 영남-새누리당, 호남-민주당이라는 정당체계를 만든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결과를 만들 정도로 양쪽 주민의 인종적 차이가 있거나 먼 지역에 있는 것도 아니고 전혀 다른 역사와 전통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이러한 지역정당체계는 기존의 보수양당과 정치엘리트들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위하여 지역적 갈등축을 주요한 갈등축으로 동원한 결과라는 것이 샤츠 독해가 시사하는 것입니다.

진보정당,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샤츠는 인민에 의한 지배와 온전한 정치 주체라는 민주주의와 시민에 대한 고전적 망상에서 벗어나 현실의 민주주의에 주목하라고 합니다. 시민의 동의에 기반을 둔 정치엘리트와 정당에 의한 지배는 필연입니다. 현실의 민주주의가 그렇다면, 민주주의의 핵심 문제는 어떻게 정치엘리트와 정당으로 하여금 가난하고 소외된 다수의 인민의 의사에 부응하고 이들의 이익을 위해 봉사토록 강제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정치적 보수파와 사회경제적 상층계급은 다수에 의한 공적결정을 핵심으로 하는 정치의 영역을 축소하려고 합니다. 특히 사회의 최대 균열이자 갈등축인 사회경제적 불평등의 문제가 그렇습니다. 그들은 이러한 사회경제적 갈등을 사적 영역에 묶어두어 정치적 의제가 되는 것을 막으려고 하고, 이념이나 인종․지역갈등 등을 동원하여 사회경제적 갈등을 부차적인 것으로 만들거나 왜곡하려고 합니다. 이는 우리의 민주주의를 더욱 허약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정치가 다수 대중의 주요한 갈등과 이슈가 포괄하지 못함으로써, 대표되지 못하는 노동자와 서민, 다수 대중의 정치적 무관심과 불참, 정치계급만의 일상사로의 정치, 정치의 상층계급 편향성 등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진보적 민주주의자는 어떠한 전략을 가져야 할까요? 샤츠에 따르면, 지역주의의 폐해를 호소하며 지역정당체계를 공격하거나 캠페인을 통하여 시민 투표를 독려하는 전략은 효과적이지 않습니다. 진보적 정치전략의 핵심은 기존의 갈등을 사회의 최대의 갈등축이라고 할 수 있는 사회경제적․계급적 갈등으로 대체(치환)하여 대중의 정치에 대한 관심과 필요를 불러일으키고, 대중을 적극적으로 조직화 하여 그들의 정치적 역량을 집중화하고, 그들의 요구를 효과적으로 대안과 정책으로 전환하는 것입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진보정당과 정치엘리트들의 이러한 새로운 조직․전략․대안․리더십이라는 것입니다.

정치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지는 파벌․정당․집단․계급 등 사람들이 나누어지는 방식에 달려있다. 정치라는 게임의 결과는 무수히 많은 잠재된 갈등 가운데 어떤 갈등이 지배적 지위를 차지하느냐에 달려 있다……갈등의 대체는 가장 파괴적인 정치전략이다……정치에서 가장 파국적인 힘은 하나의 갈등을 전혀 다른 갈등으로 대체하면서 기존의 모든 갈등 구도를 뒤바꿔 놓은 권력, 즉 서로 관련이 없는 것을 연결 짓는 권력이다.

투표불참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정치에 대한 새로운 종류의 사고가 필요하다. 정치공동체를 확장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문제에 대한 답은 공공정책의 성격과 정책에 대한 지지를 이끌어 낼 수 있는 조직에서 찾을 수 있다……우리는 새로운 참여자들과 사회적 혜택을 좀 더 적게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주의를 기울여 그들이 공적 행동의 새로운 프로그램ㅇ르 지지하도록 해야 한다. 바꿔 말해, 이제 우리는 사회적‧정치적 조직의 범위를 확대하기 위해 정치적 수단을 사용해야 하는 것이다.

정당의 시대는 끝났다?

지금 우리사회에서는 ‘정당의 시대는 끝났다’라는 말이 유행처럼 되었습니다. 특히 좌파에서 그러한 노래 소리는 더욱 높습니다. 87년 민주화이후에도 사회경제적 불평등과 모순이 사라지기는커녕 점증하자, 현실의 민주주의에 대한 실망으로 보다 이상적이고 완벽한 대안의 민주주의에 대한 갈망이 커진 것입니다. 그들은 지난 세기말부터 등장하기 시작한 참여․숙의 민주주의 이론을 바탕으로 기존의 대의․정당민주주의를 대체한 시민의 온전한 정치참여 모델을 주장하기도 하고, 촛불집회․월가점령시위와 같은 시민 직접행동 모델을 찬양하기도 합니다.

최근 사회과학 연구에서 자주 등장되는 ‘민주주의’ 용어들로는 대의민주주의 이외에도, 참여민주주의, 심의민주주의, 토의민주주의, 결사체민주주의, 풀뿌리민주주의, 나아가 생태민주주의, 공화주의, 공동체주의 등 다양한 용어들이 있다. 이는 현대 대의민주의가 처해 있는 위기에 대해 다양한 처방을 제시하는 이론적 논의들의 현주소를 보여준다. 실제로 각종 글로벌 서베이 결과는 대의민주주의를 대표하는 의회에 대한 신뢰가 사상 최저 수준임을 밝히고 있어 대의민주주의가 심각한 위기 국면에 있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그러나 연구자들이 한국의 상황은 이보다 더욱 심각하다는데 공감하고 있을 것이다. 최근 몇 년 사이에 벌어진 심각한 사태 몇 가지만 살펴보더라도, 대의민주주의의 위기를 극복하는 처방으로 시민들의 ‘참여적’, ‘직접적’, ‘심의적’ 제도들을 어떻게 제도화해 나가는가에 따라 한국 민주주의의 명암이 달려 있는 듯하다. - 새로운 참여적․심의적 민주주의 이론들을 소개하는 우리 젊은 지식인들의 논문들을 모은 ≪민주주의 대 민주주의≫ 서문 중

2008년 한국사회를 뒤흔들고 있는 촛불은 과연 무엇일까요? 지난 대통령선거와 국회의원총선거에서 무기력할 만큼 얌전했던 시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세 달이 가깝도록 밤을 하얗게 새워가며 목 놓아 외치게 만든 그 힘은 무엇일까요?……촛불의 외침은 민주주의에 대한 끝없는 도전(이고)……천박한 자본주의에 대한 저항(이고)……탐욕스러운 시장만능주의에 대한 거부(이고)……지난 10년간 신자유주의의 경제의 부식과 그 결과로 나타난 경제와 사회의 양극화로 인해 배제되고 주변화 된 사람들의 분노(이고)……우리사회의 부자유와 음습함, 권위주의를 조롱하고 일거에 날려버린 유쾌한 반란이며 문화혁명입니다……그런 점에서 촛불을 혁명을 닮았습니다. - 촛불집회의 사회적․역사적․학문적 의미를 고찰하고 있는 당시의 대표적 글들을 모은 ≪촛불이 민주주의다≫ 서문 중

2008년 광우병 사태 당시의 촛불집회.

정당을 통한 민주주의 진전의 시대는 끝났다는 이러한 주장은 얼마나 타당할까요? 수(數)는 정치에서 주요한 힘 중에 하나입니다. 그러나 그 수가 정치적으로 집적되고 집중되지 못한다면 그 수는 정치적 힘으로써 무의미합니다. 가사 시위와 집회로 그 수의 힘이 정치적으로 표출되더라도 그것이 체계적으로 누적되지 못한다면 한낱 용쓰기에 불과합니다.

이러한 논리를 먼저 깨달은 것은 오히려 반대편의 지배층이었습니다. 18-9세기부터 서서히 등장하던 민주주의는 지배층에게는 공포 그 자체였습니다. 사회적 절대다수인 노동자와 하층민들이 새로이 선거권을 갖고 정치를 전횡하는 세상이 되는 것은 단지 시간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보수적 정치엘리트들이 생각해낸 것은, 민주주의가 다룰 수 있는 영역을 제한하는 것 이외에, 여기에 더하여 노동자와 하층민들의 다수라는 잠재된 힘이 정치적으로 집적․집중․누적되지 못하게 막는 것이었습니다. 우리에게 민주적 제도로 알려진 권력분립․양원제도․사법부 독립․전문적 관료제도․정치적 대표의 독립성 등도 다른 한편으로는 이러한 차원에서 모색된 것들이기도 합니다.

정치의 무대에 등장한 두려운 다수를 원자․분산․휘발화 시켜 그들이 정치적으로 힘을 집적․집중․누적 시키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보수적 지배층의 정치전략이라면, 진보 세력의 최고의 정치전략은 정확히 그 반대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다수 대중을 정치의 무대로 끌어들이고, 그들의 수를 정치적으로 단일한 힘으로 집중시키고, 다수 대중의 사회경제적 갈등을 정치의 최대 주제로 만들고, 그들의 사회경제적 요구를 효과적으로 정치적 대안과 실천적 프로그램으로 만드는 유일한 정치 기제는 바로 정당입니다. 누가 말하지 않더라도 우리 정당과 정당체계는 참혹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당만이 희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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