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의 ≪대의정부론≫ 읽기 (1)

우리의 교과서에 등장하는 소크라테스부터 시작하는 수많은 저명한 정치사상가들 중 최초의 민주주의 사상가는 누구일까요?

고대 아테네는 민주정체였습니다. 현대의 우리의 대의제 민주주의와 다르게 민회와 추첨에 기반을 둔 민주정체였지만,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인 정치적 평등의 원칙에 우리보다 더 충실히 입각해 있었습니다. 그리고 소크라테스․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를 제외하고 아테네의 많은 철학자들은 그러한 민주정체를 지지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 중 자신들의 민주정체의 의미와 작동원리를 체계적으로 설명하며 이를 정당화한 사람은 없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학≫에서 그러한 민주정체의 의미․기본 원칙․작동원리에 대하여 누구보다도 정확하게 설명하고 있지만, 그는 민주주의를 지지하지는 않았습니다.

근대의 로크․몽테스키외․루소 등은 인민주권․천부인권(자연권)․평등․권력분립의 원리 등을 말하고 있지만, 그들은 모든 시민의 정치적 평등을 의미하는 민주주의에 대하여 무지하였거나 그러한 정치적 평등을 제도화 하는 것에 대하여 무관심하였습니다. 그들의 생존하던 때는 아직 민주주의 거대한 흐름이 시작조차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들이 명확하게 표명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은 모든 시민이 동등한 정치적 권리를 갖는다거나 가져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그들의 사상으로 촉발된 근대 시민혁명의 과정에서 등장한 영국의 수평파, 프랑스의 자코뱅파와 같은 소수의 급진적 혁명 엘리트들은 모든 시민의 정치적 평등을 주장하고 이를 실천하려고 하였지만, 그들을 민주주의 원리와 정당화를 학문적으로 체계적으로 논증한 사상가라고 부르기는 힘듭니다. 그것을 이론적․실천적으로 체계화하기에는 그들에게 주어진 힘과 시간이 너무나 부족하였습니다.

근대 시민혁명의 결과를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어 이를 제도화한 정치인들이나 그들을 이론적으로 지원한 정치사상가들은 어떠할까요? 프랑스 대혁명기의 시에예스, 미국의 헌법제정자, 밀과 동시대의 인물로 ≪미국의 민주주의≫의 저자인 토크빌, 다음에 살펴 볼 벤덤이나 제임스 밀과 같은 영국의 공리주의자들은 모든 시민이 자연적․신분적으로 평등하다고 믿고 그러한 시민의 대표로 구성되는 대의제도를 지지하였지만, 그들은 모든 시민이 동등한 정치적 권리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은 지적․윤리적 능력을 갖춘 교양 집단이나 토지를 소유하거나 세금을 납부하는 부유 집단만이 선거․피선거권을 갖거나 하층 시민들의 선거권은 그들이 계몽될 때까지 유보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들은 ‘온전치 못한 혹은 마지 못한’ 민주주의자들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저명한 정치사상가 중, 최초의 ‘온전한 그리고 진정한’ 민주주의 사상가는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 1806∼1873)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모든 시민이 아무런 제약 없이 동등하게 선거․피선거권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 점에서 온전한 민주주의자였고, 그러한 민주주의의 확대와 심화를 도모하고 그것을 위하여 투쟁하였다는 점에서 진정한 민주주의자였습니다.

존 스튜어트 밀.

밀, 최초의 ‘온전한 그리고 진정한’ 민주주의 사상가

존 스튜어트 밀의 아버지는 제임스 밀(James Mill, 1773∼1836)입니다. 그는 독자들도 여러 번 들어봤음직한 제러미 벤담(Jeremy Bentham 1748∼1842)과 더불어 ‘공리주의(功利主義, Utilitarianism)’ 철학의 기초를 세운 아주 유명한 사상가이자 정치인입니다.

훌륭한 부친을 둔 덕택으로 밀은 어린 나이부터 체계적인 교육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는 3세에 그리스어를 8세에 라틴어를 익혔고, 당대의 최고의 철학자였던 벤담이나 최고의 경제학자였던 리카도로부터도 수업을 받았습니다. 그로 인하여 그는 청소년기에 이미 원숙한 지성을 갖게 되었습니다. 후에 밀은 ≪자서전≫에서 이러한 부친의 조기교육은 지성만을 중시하였기에 감성 함양을 게을리 하는 결과를 초래하여 20대에 신경쇠약에 걸리게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그는 17세에 동인도 회사에 취업을 해 50세가 넘을 때까지 그곳에서 편안한 관료 생활을 하였는데, 어린 시절부터 쌓은 지식으로 인하여 청년 시절부터 문필가로서도 명성이 높았습니다.

그는 순애보와 같은 사랑 이야기로도 유명합니다. 그는 24세였던 1830년 두 자녀를 둔 유부녀인 해리엇(Harriet Taylor)을 만나 사랑에 빠졌습니다. 그러나 불륜이 아니고, 지적인 동료로서 서로 정신적인 사랑을 나누었다고 합니다. 그로부터 20여년을 기다려 그녀의 남편이 사망한 후인 1851년에 그녀와 결혼하였습니다. 밀은 ≪자서전≫에서 그녀에 대하여 “훌륭한 시인이며, 나보다 뛰어난 사상가이며, 내 생애의 영광이자 으뜸가는 축복이며, 나에게 하나의 종교이자 가치의 근본이자 내 삶을 이끌어 준 표준 같은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긴 기다림에 비해 행복의 시간은 너무나 짧았습니다. 그녀와 결혼한 지 몇 년 지나지 않은 1858년 그녀가 사망하였습니다. 밀은 해리엇이 죽은 후에도 그녀를 잊지 못해 매년 반년 정도를 그녀의 무덤이 있는 프랑스의 아비뇽에서 지냈고, 1873년 그녀의 옆에 묻혔습니다.

그는 현실정치인으로 나서기도 하였습니다. 1865년 그는 주위의 강권으로 하원 의원 선거에 출마하게 되었는데, 그는 이를 마지못해 승낙하며 “의원이 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다. 선거에 출마해도 선거를 위해 돈을 전혀 쓰지도 않을 것이고, 또한 당선된다고 해도 지역구 이익을 위해 노력하지 않을 것이며, 여성의 선거권과 권리를 위하여 노력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고 합니다. 이에 대하여 주위에서 바보 같은 짓이라며 “이런 공약으로는 하나님도 당선될 수 없다”고 한탄하였는데, 그들의 한탄처럼 당시 선거와 정치는 돈과 이권의 잔치판이었고, 여권 신장 주장은 지금의 ‘종북(從北)’ 주장과도 같이 위험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당선되어 선거 운동 역사상 신기원을 이룩하였고, 실제 그는 의원이 된 후에도 자신의 약속대로 실천하였습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체계적으로 익힌 지식으로 ≪논리학 체계≫(1843), ≪정치경제학 원리≫(1848), ≪자유론≫(1859), ≪대의정부론≫(1861), ≪공리주의≫(1863), ≪여성의 종속≫(1869), ≪사회주의론≫(1879) 등 다방면에 걸쳐 저술을 하였는데, 이들 각각은 철학․정치학․경제학․여성학 등에서 위대한 고전들이 되었습니다. 그만큼 다방면에 걸쳐 위대한 저작이나 사상을 남긴 인물은 아리스토텔레스, 루소, 마르크스 정도일 것입니다.

그는 위대한 저작들만 남긴 것이 아닙니다. 그는 자신의 이념과 가치를 현실에서도 적극적으로 실천하였습니다. 그는 개인적 안락과 이익을 벗어나 노동자와 빈민들의 정치적․사회경제적 권리, 남녀평등과 여권신장을 위해 평생 싸웠고, 세상 사람들의 편견에 분연히 맞서 그들의 잘못된 시각을 고치려 부단히 노력하였습니다. 정치사상가 중에서 ≪유토피아≫의 저자인 토마스 모어와 더불어 그만큼 삶과 실천에서 선의(善意)를 가졌던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의 이러한 정치적 주장과 실천은, 현대적 시각에서 보면 상식적인 것이지만, 당대에는 너무나 급진적인 것이어서 자주 언론이나 기득권층으로부터 조롱과 질시를 받았습니다. 이러한 그의 급진적인 주장과 실천의 근간에는, 그의 사상의 시작점인 ‘공리주의’가 있습니다.

밀과 해리엇.

공리주의, 그의 급진주의의 바탕

우리에게는 흔히 19세기 초반 영국에서만 잠깐 있었던 철학의 한 조류 정도로만 알려져 있지만, 공리주의(功利主義, Utilitarianism)는 그 이전의 세계관과 정의관에 대한 혁명적 전환이었고, 그 이후의 모든 사회사상은 공리주의와 대면(그것을 전제, 참조하거나 혹은 적대, 극복하거나)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 정도로 공리주의는 현대까지도 지속되는 중요한 사상 중 하나입니다.

밀의 스승인 벤담과 부친인 제임스 밀은 공리주의 철학의 기초를 닦은 사상가입니다. 이들 공리주의자들의 주장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자명한 것(인간 행동의 원초적이고 환원 불가능한 요소)은 모든 인간은 ‘쾌락’(욕구의 충족을 의미, 보다 고상하게 표현하면 ‘행복’)을 추구하고 ‘고통’을 회피하려고 한다는 것뿐이다. 둘째, 따라서 어떠한 행위와 제도가 올바른가 혹은 바람직한가 여부는 오직 이러한 행복을 증진시키고 고통을 감소시키냐 여부로만 판단되어야 한다. 셋째 그러므로 이상적 사회는 최대 다수의 행복을 증진시키거나 행복의 총량을 증진시킬 때(“최대다수의 최대행복 the greatest happiness of the greatest number”) 달성할 수 있다. 넷째, 이러한 공리성 원칙에 따라 사회 제도와 질서는 재검토되고 재구축될 수 있으며 또한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들의 세계관과 정의관은 기존의 아리스토텔레스적인 고중세 철학과 다른 것일 뿐만 아니라, 전통적인(근대 초기의) 자유주의 철학과도 다른 것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자연적으로(본성적으로) 불평등하기에 인간 사회는 그러한 자연의 질서에 부합하도록(그러한 불평등에 따라 대접받도록) 구축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공리주의자들은 인간은 소질이나 능력 면에서 대략 같을 뿐만 아니라 동등하게 대접받을 자격을 갖고 있다고 보고, 인간사회는 자연의 목적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인공적 산물이나 관습의 결과에 불과하며, 그러하기에 인간사회는 인위적 설계에 따라 충분히 개선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러한 사고는 사실 근대 초기의 자유주의나 계몽주의 철학에서부터 시작된 것이기도 합니다(이는 그보다 훨씬 전인 고대 아테네의 일군의 철학자들이 사유하던 것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위대한 교사들에 의하여 속물적인 궤변가들로만 묘사된 소피스트들입니다). 그러나 공리주의자들은 근대 초기에 지배적 담론으로 등장한 천부적(혹은 자연적) 권리와 의무라는 것을 믿지 않았습니다. 근대인들은 이러한 자연권은 ‘자명한 사실’이라고 하였지만, 공리주의자들은 그것은 사실이 아니라 일방적 선언에 불과한 것이라고 비판합니다. 벤덤은 “자연권은 수사(修辭)적 허풍의 넌센스에 불과하다”고 말합니다.

그렇지만 공리주의자들이 내세운 공리성의 원칙도 사실 많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공리주의는 쾌락이 무엇인가, 그것은 물질적인 것에 불과한가, 정신적인 것도 포함한다면 그것을 측정하고 비교할 수 있는 기준은 무엇인가 라는 등의 질문에 대하여 답변하기 어렵습니다. 또한 수의 행복 총량과 양의 행복 총량이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대조적인 A정책과 B정책이 있는데, 親서민적인 A정책이 다수 하층민들의 복지를 조금씩 증진시키지만, 反서민적인 B정책이 소수 부유층의 이익을 월등히 증진시켜 그것의 행복 총량이 A정책에 따를 때의 행복 총량을 넘어설 때 어느 정책을 따라야 하는가 입니다.

이러한 이론적 헛점에도 불구하고 공리주의는 정치적으로 무한한 발전 가능성을 갖고 있습니다. 모든 인간이 행복을 추구하고 그러한 행복을 추구할 권리에 차별이 없다는 공리주의는, 왕실과 귀족의 존엄을 주장하거나 귀족과 부르주아 지배체제의 지속을 주장하는 주류적 정치관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나아가 사회의 절대 다수인 사회경제적 약자들의 권리와 복지가 증진될 때 종국에 사회 전체의 행복이 증진될 수 있다는 공리주의는, 참정권의 확대․노동자와 빈민의 복리 증진․여성의 권익 신장 등 여러 개혁적인 사회제도와 정책으로 이어질 수 있고, 종국에는 사회경제적 평등이나 사회주의적 주장으로 나아갈 여지가 있는 것입니다(밀이 말년에 사회주의를 인정하고 이를 인류의 바람직한 미래로 사유한 것도 이러한 공리주의의 논리적 지평의 확대와 연관된 것입니다).

이처럼 공리주의는 급진적․민중적 민주주의로 발전할 가능성을 갖고 있고, 밀의 사상과 실천에서의 선의와 급진적 개혁 주장은 바로 이러한 공리주의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대의정부론≫에서의 밀의 민주적 이상은 그러한 방향으로 발전하지 않고, 제한적․엘리트적 민주주의로 귀결됩니다. 이러한 온건하고 보수적인 귀결은 어떻게 가능할까요? 그것은 그의 공리주의에 대한 ‘수정’으로부터 시작합니다.

밀의 <<대의정부론>>.

밀의 수정, 그것의 철학적 의미는?

흔히들 벤담의 공리주의를 ‘양적(量的)’ 공리주의라고, 밀의 공리주의를 ‘질적(質的)’ 공리주의라고 합니다. 벤덤은 인간의 쾌락이 고상한 것인가 저급한 것인가에 차별을 두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벤덤의 공리주의를 ‘돼지의 철학’으로 비아냥거리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밀은 ‘배부른 돼지보다는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낫다’라는 말처럼, 물질적․세속적 쾌락보다는 정신적․윤리적 가치를 추구하는 쾌락을 우선시 합니다.

밀의 ≪대의정부론≫도 다음과 같은 질적 공리주의에 입각한 문구로 시작됩니다. 여기서 그는 공리주의 철학에 입각하여 모든 인간의 행복을 증진시키는 가장 이상적인 정부(정치체제)를 설계하고자 한다(또한 그러한 설계에 따라 기존의 정부를 이상적으로 재구축할 수 있다)고 하고, 정신적․윤리적 가치 추구를 최우선시 하는 자신의 질적 공리주의를 그러한 이상적 정부의 최고의 목표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정치공동체를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의 덕성과 지적 능력이 좋은 정부의 첫 번째 요소가 된다. 같은 맥락에서 그 구성원들의 바람직한 도덕적․지적 자질을 얼마나 잘 발전시킬 수 있는지 여부가 모든 정부의 탁월성을 가늠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된다……결국 어떤 정부가 일을 잘하고 있는지 평가하자면, 첫째 그 정부의 관할 아래 있는 사람들의 좋은 자질의 총량을 집단적으로 그리고 개인적으로 얼마나 잘 증대시키는지 따져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의 복리를 증진시키는 것이 정부의 유일한 목적일 뿐 아니라 그들의 좋은 자질은 정부기관이 계속 잘 작동하는 원동력이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하고 나면, 좋은 정부를 구성하는 또 다른 요건으로서 정부기관 자체의 자질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다시 말해 특정 시점에 존재하는 좋은 자질들을 잘 활용하여 올바른 목적을 달성하는데 도움이 되게 하는 일이 중요한 것이다……하나는 정치제도가 사회의 전반적인 정신 수준을 얼마나 향상시킬 수 있는가에 관한 것이고……다른 하나는 공공 문제를 효율적으로 해결할 수 있게, 정치제도가 사회의 도덕적․지적․능동적 가치를 얼마나 완벽하게 조직할 수 있는가(이다).

흔히들 이러한 밀의 공리주의 수정은, 물리적․세속적 이익의 추구와 그것의 배분만을 강조하는 기존의 공리주의에 대하여, 정신적․윤리적 가치의 중요성을 부가하여(조화시켜), 공리주의의 철학적․윤리학적 완성을 이룩하였다는데 의의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밀의 이러한 공리주의의 질적 수정(혹은 공리주의와 정신적․윤리적 가치의 조화)은 사실상 공리주의 철학의 최대의 장점인 현실성․실천성을 약화시키는 것이고, 종국에는 공리주의를 그 기반부터 무너뜨리는 것이기도 합니다. 즉 그것은 정의(定義)․측정․비교 불가능한 정신적․윤리적 쾌락을 부가함으로써 공리주의적 정의(正義)의 기준 자체를 애매모호하게 만들고 현실적으로 무력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밀의 수정이 갖는 정치(학)적 의미는?

그렇다면 이러한 밀의 공리주의에 대한 질적 수정(혹은 정신적․윤리적 가치와의 조화)가 갖는 정치학적․정치적 함의는 무엇일까요?

밀은 쾌락 혹은 가치를 ‘물질적․세속적인 것’과 ‘정신적․윤리적인 것’으로 나누고 후자에 우선적 의미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즉 정신적․윤리적인 것의 범주로 포함될 수 있는 것을 상층에, 물질적․세속적인 것의 범주로 포함될 수 있는 것을 하층에 위치 지우고, 그것들 간에 ‘위계(位階)’를 설정하는 것입니다. 밀의 수정 내지 조화는 사실상 새로운 위계의 설정이었습니다.

앞의 인용문을 다시 읽어보시죠. 앞의 인용문은 지독히도 아리스토텔레스적으로 읽힙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소질과 능력에는 차등이 있으며, 그러한 본성(소질과 능력) 중 정신적․윤리적 탁월함이 최상의 위치에 있기에, 그러한 탁월함으로 지도되는 정치체제가 자연적인 정의에도 부합한다고 주장하고, 그러한 정치체제는 구성원들이 가진 본성을 최대한 발휘케 하고 그들이 가진 저급한 정신과 윤리를 고차원적인 것으로 고양시켜 결국 사회 전체의 행복도 증진시킨다고 주장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와 밀 모두 정신적․윤리적 가치에 우선성을 부여하고, 정치체제의 최고의 목적을 구성원들의 정신과 윤리를 고차원적인 것으로 고양시키는데 두는 점에서는 같지만, 양자간에는 중대한 차이점이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이 가진 ‘본성’(소질과 능력)의 차등에 따라 사회와 정치를 위계화 하였다면, 밀은 인간과 사회가 아니라 단지 그들이 추구하는 ‘가치’만을 차등지우고 위계지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분명한 反민주주의자였던 반면, 밀은 모든 인간의 자연적․사회적․정치적 평등을 옹호하는 분명한 민주주의자입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의 ‘본성’과 밀의 ‘가치’는 그리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본성의 차등과 위계는 사실상 가치의 차등과 위계를 전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에게 누군가가 최고의 소질과 능력을 가졌다는 것은 그가 최고의 가치로 상정된 정신적․윤리적 가치를 추구하는 심성과 지식을 가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역으로 가치의 차등과 위계를 구축한 사람은 그러한 차등과 위계를 외부적으로 구축하려는 욕망 혹은 집착에서 벗어나가기 어렵습니다. 밀의 ≪대의정부론≫이 바로 그러합니다.

결국 그는 공리주의의 질적 수정과 가치의 위계화(정신적․윤리적 가치의 최우선성)를 통하여, 공리주의의 최대의 정치적 지평인 급진적․민중적 민주주의 내지는 사회경제적 평등 사회를 버리고, 정신적․윤리적 가치의 담지자들에 의하여 지도되고 후견되는 제한적․엘리트적 민주주의로 안주하게 됩니다. 이러한 정치철학적 이해를 바탕으로, 밀이 ≪대의정부론≫에서 구체적으로 어떠한 민주정체를 설계하고 있는가 살펴봅시다.

저작권자 © 충청미디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