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의 ≪대의정부론≫ 읽기 (2)

≪대의정부론(Considerations on Representative Government)≫의 서문에서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 1806∼1873)은 “보수주의자와 자유주의자 사이에서 보다 나은 원리를 찾는 일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양쪽 주장 사이의 차이점을 떼내어 버린 채 단순히 절충을 꾀하는 차원이 아니다. 기존의 것보다도 더 포괄적이고 탁월한 내용의 대안이 제시된다면, 그래서 그들이 진정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요소들을 포기하지 않아도 된다면, 자유주의자와 보수주의자 모두 그 대안을 받아들일 수가 있을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자신의 ≪대의정부론≫은 상반되는 계급, 정치세력, 이론 간의 타협적인 절충이 아니라, 진리 내지 정의에 입각하여 양자 간의 ‘조화’를 모색하는 작업이라는 것입니다.

그와 거의 동시대의 인물이었던 마르크스(Karl Marx, 1818∼1883)는 ≪자본론≫ 2판(1873년) 서문에서 밀의 또 다른 대표적 저서인 ≪정치경제학 원리≫에 있는 그의 경제사상(밀은 생산은 자연 법칙에 의하여 결정되지만, 분배는 시대와 사회에 따라 변하는 인위적인 산물로 보고, 보다 평등한 분배 정책으로 보다 바람직한 사회를 이룩할 수 있다고 주장)에 대하여 “밀은 자본주의 정치경제학을, 1848년부터 분출하기 시작하여 이제는 더 이상 무시할 수 없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요구와 조화시키려던 대표적 인물”이라고 평가하고, 그를 따르는 정치경제학자들을 “타협 불가능한 것을 타협시키려” 한다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마르크스는 ≪정치경제학 원리≫에서의 밀의 조화 노력은 근본적으로 화해 불가능한 대립간의 타협적인 ‘절충’에 불과하여, 필연적으로 실패로 귀결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토드 부크홀츠의 <<죽은 경제학자의 살아있는 아이디어>>에 있는 밀의 경제학 부분, 저자는 밀을 "경제학계의 풍운아"로 표현하고 있다.

탁월한 조화 vs 타협적 절충

마르크스는 밀의 경제사상에 대하여만 말하였지만(비록 밀이나 마르크스가 ‘정치경제학’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지만, 현대적 용법으로는 ‘경제학’을 의미합니다), 사실 ‘조화’ 혹은 ‘절충’은 밀의 사상 전반의 핵심 키워드입니다. 그의 조화의 노력은 비단 경제적인 것에만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그의 철학․정치학․사회학․여성학․미래학 등 그의 사상 전반 모두가 조화를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밀의 ≪대의정부론≫은 그 자신의 말처럼 ‘정치’ 분야에서의 그러한 조화 추구의 설계도입니다.

그렇다면 밀이 ≪대의정부론≫에서 주장하는, 정치에서 조화를 이룩해야 하는 상반되고 대립되는 이념, 가치, 제도, 경향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민주주의’와 ‘지적․윤리적 탁월함’ 입니다. 즉 모든 시민의 정치적 평등이 보장되는 민주주의를 전제로 하되, 그러한 민주주의는 보다 바람직한 결과를 산출하기 위하여 지적․윤리적 탁월함의 담지자들에 의하여 운용되고 제어되고 지도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밀의 ≪대의정부론≫은 좋은 정부 혹은 이상적인 정치체제는 어떠한 것인가라는 추상적인 질문부터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는 그 자신 특유의 질적 공리주의에 입각하여 좋은 정부란 구성원들의 바람직한 지적․윤리적 자질을 잘 발전시킬 수 있는 정부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어떠한 형태의 정부가 가장 이에 부합할까요? 그는 좋은 정부는 최고 권력이 모든 시민에게 귀속되고, 모든 시민이 정치적으로 충분한 발언권과 참여권을 가진 민주주의 체제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민주정체에서만이 모든 시민이 자신의 권리와 이익을 능동적으로 지킬 수 있고, 정치 참여를 통하여 시민 개개인의 지적․윤리적 발전과 공공 정신의 함양을 도모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좋은 정부를 판가름하는 기준은 편의상 두 가지로 나누어 생각해볼 수 있다. 첫째 사회 구성원들의 현재 지니고 있는 도덕적‧지적‧능동적 능력을 활용해서 사회의 당면 문제를 얼마나 효과적으로 해결하고 있는가? 둘째 사람들의 그러한 능력을 얼마나 발전 또는 퇴보시키는가?……완벽하게 민주적인 정부가 바로 이 같은 규정에 부응할 수 있는 유일한 정치체제이다……이 정부가 기존 사회를 발전시킬 수 있으려면 다음의 두 가지 원리를 반드시 전제해야 한다. 첫째 누구든지 자신의 권리와 이익을 스스로 지킬 힘이 있고, 또 항상 지키려 해야 타인으로부터 무시당하지 않는다. 둘째 사회를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 개인적인 정력을 다양하게 많이 쏟을수록 그에 비례해서 사회 전체의 번영도 더 높은 수준에 이르고 또 널리 확산된다.

그리고 나서 그는 곧바로 규모의 제약으로 인하여 고대 아테네적인 인민자치는 재현불가능하다고 전제하고, 지금의 시대에는 대의제(representative, 밀은 스스로 대의정부를 “전 인민 또는 그들 중 다수가 주기적 선거에서 뽑은 대표를 통해 최고 통치 권력을 행사하는 정부 형태”라고 정의) 민주정체만이 현실적으로 가능한 이상적인 정치체제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가 대의제 민주정체를 이상적으로 간주한 것은 다음 회에서 보듯 단지 물리적 이유 때문만은 아닙니다.

영국의 근대의회의 모습.

밀이 생각하는 민주정체의 결함은?

그렇다면 이러한 민주정체가 갖는 결함은 무엇일까요? 그는 이에 대하여 두 가지로 압축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두 가지로 압축될 수 있다. 첫째 통제기구가 전반적으로 무지와 무능력에 빠지는 것, 좀 더 부드럽게 표현하자면 정신적 자질을 충분히 갖추지 못하는 경우이다. 둘째 그 기구가 공동체의 복리와 일치하지 않는 이해관계의 영향 아래 놓이는 위험성이다……대의민주주의 내재한 두 가지 위험은, 첫째는 대의기구와 이것을 통제하는 국민 여론이 조잡한 지적 수준을 벗어나지 못할 때 생기는 것이고, 둘째는 똑같은 계급으로 구성된 다수파 사람들이 자기들의 당파적 이익에 따라 계급입법(class legislation)을 시도할 때 생기는 것이다.

밀이 지적하는 민주정체의 예상되는 두 가지 결함(무지와 계급입법의 위험)은 사실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이 두 가지는 과거에서부터 수차 반복적으로 주입되어 왔던 것입니다.

고대 아테네의 플라톤 이래 反민주적 정치사상가들은 민주정체가 되면 무지한 하층민들에 의하여 지적‧윤리적 탁월함은 무시되거나 배척될 것이고, 그들의 탐욕을 만족시키고자 부자들의 지위와 재산을 강탈하는 법규와 정책을 추진할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민주정체를 거부하고, 엘리트들이 정치를 전담하는 체제(플라톤과 보수주의자들), 소수의 사회경제적 지배층과 지식인들이 주요한 정치적 권한을 갖고 피지배층은 기초적인 공민권만 갖는 식의 정치권력 분점체제(아리스토텔레스와 공화주의자들), 선거권을 제한하고 공직 취임 요건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정치참여자의 범위를 제한하는 체제(로크부터 토크빌에 이르기까지 근대의 정치사상가들) 등을 대안으로 제안하였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밀의 주장에서 새로운 점은 없을까요? 그는 민주주의의 옹호자입니다. 밀이 2,400여년 동안 계속되어 왔던 反민주적 정치사상가들의 민주주의에 대한 편견을 단순히 반복하였다면 그는 민주주의자로 남아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의 새로운 점은 무엇일까요?

첫째, 밀은 이러한 무지와 계급입법의 위험은 민주정체에 특유한 것만은 아니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는 역사적으로 군주정과 귀족정에서도 권력자의 정치적 무지는 항상 있어왔고, 권력집단이 자신들만의 눈앞의 단기적 이익만을 도모하는 계급입법에 따른 위험과 폐해도 항상 있어왔다고 주장합니다. 결국 정치적 탁월함이나 신중함을 발전시키고 모든 시민과 공동체의 이익을 위한 불편부당한 법령이나 정책을 이끌어 낼 수 있는 것은 ‘어떠한 정치체제냐’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결함 중에서 첫째 것, 즉 높은 수준의 정신 능력을 갖추지 못하는 것은 흔히 민주정부가 다른 형태의 정부에 비해 눈에 띄게 부족한 측면이라고 인식되고 있다. 왕정은 에너지가 넘치고, 귀족정은 일관성과 신중함이 돋보인다. 이에 비해 민주정부는 꽤 괜찮은 경우에도 변덕스럽고 근시안적인 형태를 보일 때가 너무 많다. 그러나 이와 같은 통념은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렇게 근거가 튼튼하지 못하다……세습왕정은 대의정부의 결점이라 여겨지는 모든 특성을 더 많이 보여준다……세습군주가 능력이나 품성의 강인함 측면에서 평균 이상을 보여준다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었다.

귀족정이든 귀족제 성격의 군주정이든, 지배계급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부당한 특권을 끝없이 다양하게 확보하려 한다. 그래서 인민들에게 희생을 강요해서 자신을 호주머니를 채우려고 하고, 때로는 그저 단순하게 다른 사람들보다 자신을 더 높이 세우려고 또는 다른 사람들을 자신보다 낮은 위치에 몰아넣으려고 한다……민심을 너무 자극한 나머지 반란이 일어날까 염려하는 마음에서 다른 이익을 고려하면 모를까, 그렇지 않다면 이러한 방향으로 행동할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입을 틀어막을 수 있을 정도로 그들의 힘이 막강한 곳에서는 사악한 이익에 휘둘려 이런 모든 폐해가 발생했고, 지금도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

“그들의 대안은 엉터리고 더 큰 해악만 초래할 뿐”

둘째, 밀은 기존의 정치사상가들이 제시하는 대안은 완전히 엉터리이고 더 큰 해악을 가져올 뿐이라고 주장합니다. 민주주의의 옹호자였던 밀이 이러한 反민주적 대안을 받아들일 수는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탁월한 일인 또는 소수에 의한 정치권력의 독점이란 기본적으로 전지전능한 인간을 전제하는 것으로 달성 불가능할뿐더러 결국 그것은 독재로 귀결될 것이며, 또한 정치권력의 분점이나 선거권의 제한도 지속가능성이 없고 전자와 마찬가지로 정치에서 배제된 다수 인민의 지적․윤리적 발전도 기할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사람들은 오랜 세월 선한 독재자(good despot)가 존재할 수 있다면 전제군주정이 최선의 정부 형태일 것이라고 이구동성으로 이야기해왔다. 그러나 이런 생각이야말로 좋은 정부라는 개념을 완전히 왜곡하는 대단히 위험한 발상이다……선한 독재자라는 것은 한마디로 우리가 모든 일을 신의 뜻에 맡기듯이 정부에 맡겨버린다는 것인데, 이 말은 사람들이 그런 일에 일체 신경쓰지 않고 어떤 결과가 나오든 마치 자연의 섭리인 것처럼 받아들인다는 뜻과 같다……우리가 인류의 전 역사를 통해 배울 것이 있다면, 바로 이러한 사태야말로 민족적 쇠퇴의 시작을 알려준다는 사실이다……결국 선한 독재라는 것은 한마디로 완전히 엉터리 이상에 불과한 것이다. 실제 그런 것은 전혀 말도 되지 않는, 위험하게 이를 데 없는 괴물과도 같은 것이 될 수밖에 없다.

민주주의 장점(정치 참여를 통한 지적․도덕적 발전을 의미)의 유지와 폐단(다수파에 의한 배타적 지배를 의미)의 방지라는 두 가지 목표는 임시방편으로 선거권을 제한하는 방식, 다시 말해 일정한 범주의 시민들을 투표에 참여하지 못하게 강제로 제한하는 것을 통해서는 충족될 수 없다. 자유 정부(대의제 민주정부를 의미)가 지닌 최대 장점이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국가의 가장 중요한 문제를 직접적으로 결정하는 일에 참여하면 사회의 최하위 계층 사람들까지 지성과 심성을 교육시키는 효과를 얻게 된다는 사실이다……인류의 대다수가 높은 수준의 정신적 진보를 이루는 것을 꿈꾼다면 이것이야말로 확실한 길이다.

무지와 계급입법의 위험은 모든 정체에 공통된 것이고 反민주적 대안은 더 큰 해악을 가져올 뿐이라는 밀의 비판은, 기존의 정치사상가들의 민주주의에 대한 평가가 잘못된 편견이고 명백한 왜곡이었다는 진실을 날카롭게 규명하는 것이었습니다.

밀의 <<대의정부론>>.

그렇다면 밀의 대안은?

그렇다고 민주정체가 무지와 계급입법의 위험에서 완전히 벗어났다는 것은 아닙니다. 밀은 다수의 무지한 하층민이 정치를 주도하는 민주정체가 수립되면, 무지와 계급입법의 위험은 더욱 커질 것은 당연하다고 주장합니다. 또한 그들은 다수이기에 그러한 위험을 더욱 제어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밀이 ≪대의정부론≫을 쓴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대의정부론≫의 근본 취지는 민주주의의 당위성과 장점에 대하여 밝힘과 동시에 그로부터 발생할 수 있는 (모든 정체에 공통적인, 그러나 민주정체에서 더욱 증폭될 수 있는) 무지와 계급입법의 폐해를 효과적으로 예방할 수 있는 대안을 구상하는데 있었습니다. 밀은 민주주의 정치체제를 인정하되, 민주정체의 정치적 무지, 정책의 졸속, 다수의 배타적 횡포, 물질적․즉자적 이익 추구 등의 나쁜 경향을 예방하고 제어할 수 있는 현명함, 사려 깊음, 소수자 보호, 정신적 가치와 진정한 이익 추구를 도모하고 구현할 수 있는 제도적․실천적 대안을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가 제시하는 이러한 대안들은 그 자신이 최상의 정체로 상정하는 ‘숙련(skilled) 민주주의’로 가는 탁월한 조화를 만들어 냈을까요? 아니면 마르크스가 말하듯 그것은 조화 불가능한 것을 타협시키는 절충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요?

아니면 그 이상은 아닐까요? 그는 조화라는 명목 하에 민주주의와 反민주주의를 뒤섞은 잡탕을 만들어낸 것은 아닐까요? 나아가 그의 조화란 사실상 기존의 전통적인 反민주주의자들의 反민주적 대안들을 현대적으로 변색(變色)한 위선(僞善)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요?

저작권자 © 충청미디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