슘폐터의 ≪자본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 읽기 (2)

경제고전의 하나로서 ≪자본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1942)에 담겨져 있는 슘페터(Joseph Schumpeter, 1883∼1950)의 주장은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우선 그는 경제성장과 사회발전의 원동력으로 ‘기업가 정신((Entrepreneur)’과 ‘혁신(Innovation)’을 강조합니다. 자신의 제국을 건설하려는 영웅적 기업가들이 모험적으로 새로운 상품․기술․조직 등을 도입하여 혁신에 성공하면, 기존의 기업들과 시장 판도는 일대 혼란에 빠져 뒤쳐진 기업들은 도태되고, 혁신 기업가는 새로운 거대기업을 구축하고 막대한 독점 이윤을 취득하게 되고, 이러한 기업가의 선도적인 혁신은 여타 기업과 산업에 전파되어 전체 자본주의의 비약적 성장을 이끈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를 ‘창조적 파괴(Creative Destruction)’라고 표현하였습니다.

그는 기업가와 자본가계급을 서로 다른 것으로 사유합니다. 그는 기업가는 모험적․창조적 개인이나 가문으로, 자본가․귀족 뿐만 아니라 노동자․농민․빈민도 기업가가 될 수 있으므로 마르크스가 말하는 사회계급이 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거대하고 막대한 수익을 가져다주는 제국을 건설하려는 욕망을 갖고, 그 욕망을 충족하기 위한 창조적 사고와 불굴의 의지를 가진 자는 모두 기업가가 될 자격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러한 성공한 혁신 기업가들의 독점적 지배와 독점적 이윤 획득은 그들의 영웅적 행위에 대한 정당한 댓가에 불과하고, 이러한 일시적 독점은 오히려 혁신과 자본주의 발전을 위하여 권장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의 이런 생각은 그가 살았던 시대와 관련이 큽니다. 그가 말하는 기업가는, 19세기말과 20세기초에 기술혁신․새로운 생산방법 도입․기업조직 혁명․독점․기업연합․담합․뇌물 등을 통하여 석유, 철강, 자동차 등에서 거대한 기업과 막대한 부를 이룩한 록펠러, 카네기, 포드 등을 연상케 합니다. 물론 슘페터는 2번의 세계대전과 1929년의 대공황의 위기를 겪기도 하였지만, 아마도 이런 전쟁과 공황조차 그는 오히려 혁신의 훌륭한 계기일 뿐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가 말하는 기업가는 故 정주영 현대회장이나 故 박정희 대통령을 생각나게도 합니다. 이것이 필자만의 생각은 아닌 듯합니다. 슘페터와 같은 오스트리아 출신의 미국인으로 현대 경영학의 창시자로 평가받는 피터 드러커(Peter Drucker, 1909∼2005)는 슘페터의 열렬한 추종자이기도 합니다. 그는 살아생전에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정주영은 기업가 정신의 가장 극적인 사례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인류가 이룩한 성과 가운데 가장 놀라운 기적은 바로 박정희의 위대한 지도력으로 경제발전 이룩한 대한민국이다” 라고.

20세기초 포드 자동차 공장의 이동식 생산라인.

피터 드러커, “정주영과 박정희는 최고의 슘페터 추종자”

이처럼 슘페터는 자본주의, 그것도 20세기초와 같이 투기와 독점이 횡행하는 자본주의의 숭배자입니다. 그런 슘페터가 놀랍게도 자본주의는 사회주의로 대체될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자본주의가 성숙됨에 따라 점차 혁신의 가능성이 사라지거나 혁신의 정도가 수그러지고, 기업가를 대신하여 정부나 기업 관료들이 지배하게 되고, 자본주의에 대한 계획․조정․관리 등의 기술이 상승하여 자본주의는 안정화 되고, 지식인 사회나 대중들 사회에서 反자본주의적 정신과 문화가 확산되어, 종국에 자본주의는 사회주의로 저절로 대체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의 두 번째 주요 주장입니다.

1942년에 있었던 그의 이러한 전망은 얼마나 역사에 부합할까요? 우선 그가 그러한 주장을 한지 70여년이 지났지만 자본주의는 사회주의로 진화되기는커녕 오히려 지난 세기말 현실 사회주의가 몰락하였습니다. 그러면 사회주의 이전에, 즉 ‘불안정한 그러나 활력이 넘치는’ 자본주의가, ‘안정적인 그러나 무기력한’ 관리 자본주의로 진화한다는 그의 예언은 어떠할까요? 그가 제시하는 그리고 대단히 그럴듯해 보이는, 혁신의 소진․관리의 확산과 안정화․反자본주의적 정서의 확산이라는 과정은 얼마나 사실에 부합할까요?

우선 그의 이러한 예언은 계속적인 혁신은 불가능하고 결국은 혁신이 중단될 것이라는 전망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슘페터는 정치경제에서 소비자의 수요나 유권자의 의사보다, 기업가와 기업, 정치엘리트와 정당의 이니셔티브를 중요시 합니다. 정치경제에서의 공급자들이 새로운 상품과 정책으로 전에 없는 대중의 새로운 수요와 여론을 만들어 낸다는 것입니다. 그런 그가 혁신의 소진을 예견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실제 역사는 어떠할까요? 항공우주․컴퓨터․인터넷․휴대폰 시장 등의 창출에서 보듯, 너무 성숙하여 더 이상의 성숙을 말하기 어려울 것 같은 현대에도 혁신과 창조적 파괴는 계속되었습니다.

그의 말대로 경제․경영학의 발전, 정보기술의 발전 등으로 자본주의 관리 기술이 지난 시기에 비하여 월등히 발전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관리 기술의 발전 이상으로 자본주의 경제 자체도 규모적으로 더 커지고, 세계적으로 더 넓어지고, 그 내부의 유기적 연관성도 더욱 커졌습니다. 그리고 그 만큼 불안정의 기회와 증폭도 더욱 커졌고, 그 반면에 위기의 효과적 예측과 관리 가능성은 더욱 축소되었습니다. 계속되는 동아시아 외환위기․미국 금융위기․그리스 사태․중국발 위기설 등과 그에 따른 불안정과 위기감의 전 세계적 확산이 이를 증명한다고 할 것입니다. 결국 슘페터의 예상과 달리 현대 자본주의도 결코 안정화 되지 못하였고, 위기 관리를 포함한 관리 능력이 현저히 증대되었다고 볼 수도 없습니다.

지식인 사회나 대중들 사회에서 反자본주의적 정신과 문화가 확산된다는 것은 어떨까요? 1942년 출간된 ≪자본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에서 슘페터는 유럽은 이미 사회민주당 계열의 정당이 지배적 정치세력이 되었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미국도 그러할 것이라고 예견하였습니다. 지난 베른슈타인의 ≪사회주의의 전제와 사회민주당의 과제≫ 읽기에서 지적하였듯이, 20세기초에 서구 사회는 사회주의에 대한 희망과 열정이 넘쳐났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떠한가요? 오히려 슘페터 사후 유럽의 사회민주당은 마르크스주의 전제와 사회주의적 지향을 버렸고, 지난 세기말에는 우파에 투항해버렸습니다. 물론 지식인 사회에서의 反자본주의적 태도는 여전하지만, 그 이상으로 자본주의를 수호하는 언론․전문가 집단․보수단체 등의 기구와 제도는 더욱 확대되고 강고해졌고, 대중은 자본주의가 만들어내는 신상품․광고․스포츠․연예 등의 홍수 속에서 전혀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슘페터의 <<자본주의,사회주의,민주주의>>.

그럴 듯하지만, 아무 것도 맞지 않은

결국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혁신이 소진되고, 자본주의는 안정화되고 정치경제 관료들의 계획․관리 욕구가 점증하고, 지식인 사회와 대중사이에서 反자본주의적 정신과 문화가 확산하여, 종국에 자본주의는 사회주의로 진화할 것이라는 슘페터의 예언은 얼핏 그럴듯하지만, 역사는 전혀 그렇게 진행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지금까지의 역사는 그와 정반대로 진행되었습니다. 자본주의에서 혁신은 계속되었고, 계획․관리 능력과 기술은 향상되었지만 자본주의의 불안정성과 위기는 더욱 커졌고, 자본주의 수호를 위한 정치적․이데올로기적 기구는 더욱 강화되었고, 대중 속에서 자본주의적 정신과 문화는 여전히 견고하고, 反자본주의적 운동은 대중과 정치적 구호에서 물러나 상아탑과 현학적 언술로 후퇴하였고, 현실 사회주의는 오히려 몰락하였습니다. 그의 예언은 그럴 듯해 보이지만, 실제는 ‘아직까지는’ 아무 것도 맞지 않았습니다.

슘페터가 ≪자본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에서 말하는 세 번째 주요 주장은, 자본주의적 에토스의 부활입니다. 그는 이러한 관리 자본주의화 또는 사회주의화에 맞서 20세기초 기업가의 자유 정신과 영웅적 활력을 부활시켜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는 영국의 많은 산업 부문의 국유화 계획과 사회화 정책을 언급하며, 자신이 영국인이라면 ‘온 힘을 다해’ 이 정책에 반대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자신이 말한 기업가만큼이나, 스스로도 자본주의를 수호하고자 하는 의지와 열정이 넘쳐났던 것입니다. 그는 경제학자이며 그와 동시에 정치적 이데올로그였습니다.

그의 정치경제학은 그가 생존하는 동안에는 많은 이들의 관심을 받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지난 세기말 그의 정치경제학은 화려하게 부활하였습니다. 혁신․창조적 파괴․기업가 정신․경영전략 등 슘페터의 언어는 현재 가장 각광을 받는 언어입니다. 방송과 신문에 등장하는 우리 사회의 수많은 현대 경제․경영 전문가들은 “세계적 무한경쟁 시대에 맞서 우리 정치경제도 근본적 혁신이 필요하다”, “케인즈적 단기 처방이 아니라, 슘페터적인 근본적 구조개혁과 체질개선이 필요하다”, “경제민주화나 재벌개혁이라는 허황된 담론으로 우리 사회를 먹여 살리는 기업과 기업가들을 욕보여서는 안된다”, “경제에만 기업가정신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정치․사회․조직․가족․개인도 기업가 정신으로 자기혁신이 필요하다”라고 말합니다. 지금 박근혜 정권의 ‘창조경제’ 슬로건도 그중 하나일 것입니다.

슘페터가 말하는 기업가가 주도하는 자본주의 혹은 20세기초 서구나 196-70년대의 한국의 투기적․독점적 자본주의는 이미 과거사가 되었는데, 슘페터의 언어가 왜 갑자기 우리의 일상이 되었을까요? 방송과 신문에 연일 등장하여 슘페터적 언어의 일상화를 도모하는 우리 경제․경영 전문가들이 의도하는 정치적 목적은 무엇일까요? 슘페터적 언어 자체가 갖는, 그리고 오늘날과 같은 그것의 일상화가 갖는 문제점은 무엇일까요? 슘페터적 자본주의는 현대 자본주의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유용한 대안일까요? 아니면 오히려 그 문제를 더욱 악화시키는 것은 아닐까요?

1929년 대공황때 배급을 받기 위해 줄을 선 실업자들.

슘페터적 언어의 일상화, 무엇이 문제인가?

연일 방송과 신문에 등장하여 슘페터적 용어로 우리 정치경제의 근본적 개혁을 부르짖는 경제․경영 이데올로그들이 주장하는 전략이나 정책은, 누구에게나 불편부당한 혹은 모두를 위한 것처럼 보입니다. 창조적․미래지향적 마인드로 국가의 경제구조와 기업체계를 혁신하여 세계적 무한경쟁에서 승리하고 우리 경제의 활력과 고용창출을 이끌자는 주장 자체에 반대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이는 개인 혹은 기업의 미덕일 수는 있어도 사회 전체의 미덕이 될 수는 없습니다. 슘페터는 20세기초의 자본주의에서 기업가들의 발흥과 자본주의의 활력을 보고 있을 뿐, 그러한 체제에서의 독점과 담합으로 인한 공적 이익의 침탈․노동자의 불안정과 착취의 강화․사회불평등 구조의 악화와 세습화․뇌물과 탈세로 인한 공적 정의의 붕괴․배금주의와 한탕주의의 만연으로 인한 사회 윤리의 파탄 등의 문제는 애써 외면하고 있습니다. 정주영과 박정희가 가졌던 자신의 제국을 만들고자 하는 불굴의 의지와 열정이 그들 자신에게는 혹시나 미덕일 수는 있지만, 결국 그들이 우리들에게 가져다 준 것은 재벌과 독재였습니다. 슘페터를 추종하는 현대 경제․경영 이데올로그들의 시각도 그와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 사회에서 슘페터적 용어의 부활을 말하는 전문가들의 면면을 살펴보는 것도 유의미합니다. 그들은 모두 예외 없이, 피터 드러커와 같이 경영학 전공자이거나 경영학적 시각으로 정치경제를 바라보는 학자들입니다. 기업가나 기업의 시각에서 경제문제를 바라보는 그들의 시각이 그대로 정치와 사회 문제를 바라보는 데까지 확장된 것입니다. 그들의 정치적 의도는 명약관화 합니다. 기업가의 의사와 이익에 따라, 기업적 준거와 가치에 따라, 우리 사회를 재편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리 정치와 경제의 진정한 문제는 그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우리 사회가 너무 反혁신적․反유연적․反기업적․反자본적이라는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 사회의 문제는 재벌 위조로 구조화된 경제구조가 전혀 개선의 기미가 보이지 않은 채, 그 재벌들이 여전히 법․제도의 특권과 특혜로 사회 공동적 성취를 빼먹으며 중소 기업들과 영세 상인들을 질식시키고, 노동자들과 서민들의 실업과 고용불안정의 공포는 확산되고, 자산과 소득 정도에 따라 사회계층은 점점 신분화․세습화 된다는데 있으며,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정치가 이러한 노동과 서민의 현실을 개혁하기는커녕 기업과 상층계급의 이익을 위하여 더욱 더 편향적으로 구조화 되고 운영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의 문제는 그들 주장과 정반대로, 정치가 너무 親기업적․親자본적이라는데에, 그리고 재벌과 그들의 이데올로그들이 너무 反개혁적․反유연적이라는데에 있습니다.

개인의 부(富)에 대한 의지와 열정, 그리고 그러한 노력의 결과는 존중을 받아야 한다는 슘페터의 주장은 충분히 받아들여져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개인적․기업적 미덕은 될 순 있어도 전체 사회를 위한 정의가 될 수는 없습니다. 사회에는 강자와 영웅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약자․패자․열등자․소수자 등도 있는 것이고, 이들의 의사와 이익도 모두 존중해야만 사회 정의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부를 향한 투기․배신․전횡․사기․음모․담합․뇌물 등만이 난무하는 세상을 갖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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