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공산당 선언≫ 읽기 (3)

현실 사회주의(구 소련이나 동구권을 의미)는 명백히 실패하였습니다. 그것은 지난 세기말 파산선고를 받기 이전에도 명백히 실패한 모델입니다. 공산당 일당 독재, 일체의 언론의 자유 등 정치적 자유의 말살, 단독 입후보와 공개투표 등 민주적 절차의 형해화, 관료들의 복지부동과 비효율, 국가가 생필품을 받기 위하여 길게 줄어선 줄, 생산과 분배과정에서의 관리․감독자들의 부정부패……이것이 현실 사회주의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이러한 현실 사회주의 실패의 책임을 마르크스에게 묻지 않습니다. 그들은 이의 책임을 구 소련 권력자들의 개인적․실천적 결함으로 돌리거나 20세기 중반의 적대적인 자본주의 세력에 의한 고립과 대결로 돌리기도 하고 혹은 그보다 훨씬 더 멀리 20세기 초반 혁명기 러시아의 낙후된 경제와 내전․전쟁으로 인한 피폐에 그 책임을 돌리기도 합니다. 그들은 심지어 현실 사회주의는 마르크스의 이상과는 무관한 자본주의의 또 다른 변태(관료자본주의, 국가독점자본주의 등)에 불과한 것이었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이상 혹은 미래기획은, 실패한 현실 사회주의에 책임이 전혀 없거나 이와 전혀 무관한 것일까요? 마르크스의 이상기획을 제대로 다시 실천하면, 그것은 현실 사회주의와 전혀 다른 결과를 가져올까요? 여기서 문제 삼는 것은 마르크스의 ‘현실(현실사회주의)’이 아닌 그의 ‘이상(공산주의 기획)’ 그 자체입니다. 그의 이상 기획은 정말 우리에게 진정한 혹은 더 많은 자유, 민주주의, 물질적 풍요, 행복을 가져다 줄 것인가 묻고 있는 것입니다.

마르크스의 가족과 엥겔스.

마르크스의 ‘이상’은 이상적인가?

프롤레타리아트 혁명 이후에 도래할 이상 사회의 정치와 경제의 모습은 어떠할까요? 마르크스는 그러한 이상 사회로의 이행을 위한 설계도와 이상 사회의 정치경제에 대한 조감도를 구체적으로 그린 적이 전혀 없습니다. 그는 왜 그러한 설계도와 조감도를 그리지 않았을까요? 그는 현실주의자이며 실천주의자였습니다. 그는 기존의 유토피아적 사회주의자들처럼 미래를 몽상하기를 거부하고, 이상은 기존 체제를 타도하는 투쟁과 미래를 위한 실천 속에서만 그 구체적 모습을 만들어 갈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렇다고 하여, 그가 이상 사회가 어떠한 모습을 갖출지에 대하여 전혀 언급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그는 여러 저작에서 그 이상 사회의 모습을 은연중에 발설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이런 여러 발설들은 다분히 추상적․단편적이고, 서로 모순되기까지 합니다. 비교적 초기 저작인 ≪공산당 선언≫에서 그는 이상 사회로의 이행과 그 최후의 모습에 대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노동자 혁명의 첫걸음은 프롤레타리아트를 지배계급으로 끌어올리는 것과 민주주의를 쟁취하는 것이다……프롤레타리아트는 자신의 정치적 지배를 이용하여 부르주아지로부터 모든 자본을 점차로 빼앗고 모든 생산도구를 국가의 수중에, 즉 지배계급으로 조직된 프롤레타리아트의 수중에 집중시키며 가능한 빨리 생산력을 증대시키게 될 것이다, 이것은 물론 처음에는, 소유권과 부르주아적 생산관계를 전제적(專制的)으로 침해함으로써 이루어질 수 있다.……발전 과정을 거치는 가운데 계급적 차이들이 소멸하고, 모든 생산이 연합된 개인들의 수중에 집중되면 공권력은 그 정치적 성격을 상실하게 될 것이다. 본래 정치권력이란 한 계급이 다른 계급을 억압하기 위해 사용하는 조직적 폭력(에 불과하기 때문이다)……낡은 생산관계의 폐지와 더불어 프롤레타리아트는 계급대립의 존립조건들과 계급 일반을 폐지하게 될 것이며, 결국에는 자기 자신의 계급적 지배까지도 폐지하게 될 것이다. 계급과 계급대립으로 얼룩진 낡은 부르주아 사회 대신에, 각자의 자유로운 발전이 모두의 자유로운 발전의 조건이 되는 연합체가 나타날 것이다.

여기서 마르크스는 정치권력을 획득한 프롤레타리아트에 요구되는 혁명적 조치의 대강을 언급하고 그러한 일련의 조치들로 종국에 계급과 소유의 완전히 폐지된 사회에 다다를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나중에 마르크스는 이 과정을 ‘낮은 단계의 공산주의’와 ‘높은 단계의 공산주의’로 구분하였고, 레닌은 이를 각각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라고 불렀습니다.

마르크스는 공산주의 단계에 이르면, 모든 물질적․경제적 부족의 문제가 해결되고, 계급과 소유에 근거한 모든 분쟁과 대립도 사라지고, 모든 정치적․국가적 강제와 억압이 사라져, 완벽한 자유․평등․자치․행복이 실현된 연합체 사회가 될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프롤레타리아트 독재

그러나 마르크스는 그러한 공산주의 사회의 실현을 위해서는,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의 성과를 수호하고, 생산력을 폭발적으로 증대시키고, 계급과 소유를 폐지하고, 공산주의를 향한 일련의 조치를 추진할, ‘강력한 권력을 가진’ 그러나 ‘철저히 민주적인’ 과도기적 정치체제가 필요하다고 보고, 이를 ‘프롤레타리아트 독재(dictatorship of the proletariat)’라고 불렀습니다. 바로 이것이 혁명 이후의 모든(임시적․과도기적인 것을 포함하여) 국가 권력이나 정치적 권위를 부정하는 아나키즘(Anarchism, 무정부주의)과 생디칼리즘(Syndicalism, 노동조합주의 운동)과 마르크스주의가 다른 점입니다.

많은 이들은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라는 마르크스의 표현을 근거로 그가 독재정치를 옹호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마르크스는 왜 일반적으로 부정적 의미를 갖는(反자유․反민주적 함의를 갖는) 독재라는 단어를 사용하였을까요? 독재라는 단어로써 그가 진정으로 이야기하고자 한 것은 무엇일까요?

사실 마르크스에게서 ‘독재(dictatorship)’은 ‘통치(rule)'와 유사한 의미를 갖습니다. 마르크스는 우리가 자유민주주의라고 부르는 부르주아지가 지배하는 지금의 체제는 실질적으로 '부르주아지 독재‘에 불과하다고 주장합니다. 마르크스에게서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는 이러한 부르주아지 독재에 대비되는 말로, 결국 마르크스의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우리식으로 표현한다면 프롤레타리아트가 지배하는 민주주의 체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마르크스는 프롤레타리아트 통치나 프롤레타리아트 민주주의라는 용어 대신에 왜 굳이 독재라는 단어를 선택하였을까요?

고대 아테네 이래로 독재를 의미하는 단어는 despotism, tyranny, autocracy 등이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나 마르크스가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에서 사용하는 용어는 ‘dictatorship’입니다. 이는 고대 로마적 전통에서 유래하는 것입니다. 고대 로마공화국에서는 외침 등의 위기적 상황에서 한시적으로 강력한 권한을 가진 독재관(dictator)을 임명하여 위기 상황을 극복하는 임시적 지배체제가 있었습니다. 결국 마르크스는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의 성과를 수호하면서 공산주의로의 점진적 이행을 추진할 임시적인 그러나 강력한 권력기구가 필요하다는 취지에서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입니다.

그러나 “노동자 혁명의 첫걸음은 프롤레타리아트를 지배계급으로 끌어올리는 것과 민주주의를 쟁취하는 것”이라고 표현한 것처럼, 마르크스는 역설적이게도 절대적 권력과 권한을 가진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는 철저히 민주주의적 성격을 갖게 될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독재적’이며 ‘민주적’이라고? 이것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공산당 선언>>.

독재가 민주적?

마르크스가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민주적’이라고 주장하는 근거를 명시적으로 설명하지 않았지만, 대체로 두 가지에 근거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그러한 독재기구가 계급과 소유의 종속성으로부터 철저히 벗어나 있기 때문입니다.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피착취․무소유 계급이었던 프롤레타리아트는 혁명 이후에 오직 모든 계급과 소유를 폐지를 해야 할 사명만이 있기에, 그들의 독재기구는 자본주의하에서의 국가와 달리 계급과 소유의 종속성을 띠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이전의 모든 지배계급들은 지배권력을 장악한 후, 사회 전반을 자신의 전유(專有) 조건 아래 종속시킴으로써 이미 획득한 자신의 지위를 공고히 하고자 했다. 하지만 프롤레아타리아는 자기 자신이 속해 있던 기존의 전유양식을 폐지하고, 나아가 지금가지 존재한 다른 모든 전유양식을 폐지함으로써만 사회적 생산력을 장악할 수 있다. 왜냐하면 프롤레타리아는 보호하고 강화할 그 무엇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의 사명은 지금까지 사적 소유를 보호하고 보장해 온 일체의 것을 파괴하는 것이다.

둘째 근거는 그 독재기구의 위와 같은 脫계급․소유적 성격이 아니라, 그 독재기구의 구성과 운영 원리에 있습니다. 프롤레타리아트 독재기구는 어떻게 구성되고 운영될까요?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에는 이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습니다. 나중에 마르크스는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의 구성과 운영 원리의 현실적 모습을 1871년 파리코뮌에서 찾았습니다. 엥겔스는 “파리코뮌을 보라, 이것이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였다”고 말합니다.

1871년 나폴레옹 3세가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패하자, 파리의 노동자들과 민중들은 봉기를 일으켜 구체제를 폐지하고 새로운 체제와 질서를 수립하였습니다. 이를 파리코뮌이라고 합니다. 이 코뮌은 결국 프랑스군에 의하여 무참하게 진압되었지만, 마르크스는 ≪프랑스 내전≫에서 위 파리코뮌에 대하여 자세히 언급하며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의 하나의 모델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공산당 선언≫에서 마르크스는 프롤레타리아트가 기존의 국가기구를 접수하여 혁명의 임무를 완수할 것이라고 하였지만, ≪프랑스 내전≫에서는 “노동자 계급은 단순히 기존의 국가기구를 접수하여 자신의 목적으로 위해 그것을 행사할 수는 없다”며 오히려 기존의 국가기구를 파괴하고 파리코뮌과 같은 새로운 정치체제를 구축하여 혁명의 임무를 수행하여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기존의 국가기구를 대체하고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의 모델이 될 수 있다는 파리코뮌은 도대체 어떠한 정치체제였을까요? 파리코뮌은 기본적으로 입법기능과 집행기능의 통합(권력분립의 폐지), 법관을 비롯한 모든 공무원의 선거를 통한 선출, 빈번한 선거․명령적 위임․즉각적 소환제도, 최하위 단계에서의 자치에 기반을 둔 피라미드 구조의 상향식 의사결정, 인민의 민병대로 군대와 경찰의 대체 등을 특징으로 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근대의 의회제나 대표제(representative)와는 그 구성과 운영원리를 달리합니다. 파리코뮌은 기본적으로 각 지역․단위․작업장별로 고대 아테네적인 인민자치(직접 민주주의) 체제를 바탕으로 하되, 보다 확대된 수준에서는 선출직 대표들로 피라미드적 구성을 반복합니다. 그리고 선출된 대표들은 선거민들의 명령에 구속되고 언제라도 소환되는 대리제(delegate)를 따릅니다. 결국 파리코뮌 혹은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는 자치제와 대리제를 혼합한 민주정체입니다.

마르크스는 가끔 있는 선거로 선출되고 선거인의 지시에 구속되지 않고 선거인에 의하여 즉각적으로 소환 당하지도 않는 근대의 의회․대표제, 정치권력을 분립하여 많은 부분을 非민주적으로 임명된 자들에게 맡겨 민주주의를 제약하도록 하는 근대의 권력분립 제도 등으로는 민주주의의 대표성과 책임성 원리를 제대로 실현할 수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는 모든 국가기구를 모든 인민이 직접적 수행 또는 인민의 직접적 통제 하에 편입시키는 보다 민주적인 모델로서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제시하였던 것입니다.

파리코뮌, 1871년 3월 18일부터 5월 28일까지 72일간 존재하였던, 프랑스 파리 노동자와 민중에 의해 수립된 혁명적 자치정부.

프롤레타리아트 독재 이후는 ‘정치’의 종말?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의 문제점을 살펴보기 이전에 그 이후를 먼저 알아봅시다. 프롤레타리아트 독재(혹은 민주주의)는 마르크스에게 최종적 정치모델이 아닙니다. 마르크스가 최종적으로 상정하는 정치모델은, 비록 장시간이 걸리고 지난한 투쟁이 필요하고 인민들의 근본적 인식의 변화 등이 필요한 것이지만,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와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그것은 놀랍게도 ‘정치’ 자체가 사라진 세상입니다.

마르크스는 ≪공산당 선언≫에서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이후에 등장하는 공산주의 사회를 “각자의 자유로운 발전이 모두의 자유로운 발전의 조건이 되는 세상”이라고 표현합니다. 마르크스의 이 표현을 단지 투쟁적인 정치 팜플렛에 의례 등장하는 상투적 예찬으로 볼 수도 있지만, 마르크스는 다른 저서들에서도 “자유로운 생산자들의 연합체”, “각자는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받는 사회”, “필요와 세속적 고려를 넘어선 진정한 자유의 왕국” 등 유사한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마르크스의 위 표현들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마르크스는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계급과 소유가 사라지고 생산력이 발전하여 물질적 필요가 충족이 될 것이기에 지금과 같은 정치적․경제적․사회적 제 갈등은 모두 사라질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때의 정치의 모습은 어떠한 것일까요? 그때의 국가의 일이란 단지 도로 정비, 교통정리, 소방 활동 등 지극히 사무적․중립적 일로 한정될 것이고, 정치 경쟁은 어디에 도로를 놓고 교통정리와 소방활동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정하는 등의 지엽적인 다툼에 불과할 것이고, 대표를 뽑는 선거란 이런 일을 처리할 사무자를 뽑는 것으로 순번적 교대의 의미밖에 갖지 않을 것이라고 보았던 것입니다.

우리의 상식과 경험에 비추어 보면 이것은 ‘정치의 종식’이지만, 마르크스에게는 이러한 정치의 모습은 ‘진정한 정치’의 시작을 의미할 것입니다. 마르크스에 의하면 모든 대립적 이해관계의 근원에는 계급과 소유가 있고, 해소 불가능한 대립적 이해관계를 갖는 것은 오직 이러한 계급과 소유뿐이기에, 계급과 소유의 종식은 모든 분쟁의 근거와 이견(異見)의 소멸을 의미합니다. 분쟁과 이견의 정당한 근거의 소멸은 대립․갈등․타협을 다루는 정치의 종식이며, 지도․관리․순응만이 존재하는 행정의 시작입니다.

정치의 종식이라는 마르크스의 주장은 인간의 이기심이나 非이성적 동기 등에 대한 너무 순진한 발상에 근거한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인간 사회의 제 갈등을 지나치게 단순하게 계급 갈등만으로 환원하여 잘못된 결론에 도달한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렇게 타박할 필요도 근거도 없습니다. 마르크스가 인류의 역사를 공산주의 전사(前史)와 공산주의 후사(後史)로 나눈 것처럼, 정치가 사라진 공산주의 사회는 모든 계급과 소유가 사라지고 인간과 사회의 물질적․사회적․정신적인 근본적 변화가 전제되어야 하는, 현재의 우리가 전혀 상상할 수 없는 너무나 먼 미래이기 때문입니다. 마르크스의 미래 정치에 대한 기획의 적정성 여부의 판단 범위는 우리가 예상 가능한 시간내의 정치에 한정시켜야 합니다. 바로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입니다.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의 현실은 민주적일 수 있는가?

형식적․논리적으로 본다면 자치와 대리제에 근거한 마르크스의 프롤레타리아트 독재(혹은 민주주의)는 의회제와 대표제에 근거한 우리의 민주주의보다 훨씬 더 민주적입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도 그러할까요? 그것은 우리의 어법 그대로 프롤레타리아트 혹은 그 대행자가 다수 인민과 민주주의를 억압하고 독재를 행하는 체제에 불과하지 않을까요? 가사 프롤레타리아트 독재가 일시적으로는 독재적일지라도 궁극적으로 그것은 더 많은 자유와 민주주의를 낳을, 그래서 미래를 위하여 견딜만한 체제일까요? 아니면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는 이상적인 공산주의커녕 그와 정반대로 자유와 민주주의에 역행하는 더 나쁜 체제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것은 아닐까요? 마르크스의 프롤레타리아트 독재 속에는 현실과 미래 모두를 보다 암울하게 만드는 심각한 反민주적 결함이나 모순이 있는 것은 아닐까요?

계급과 소유가 완전히 폐지되지 아니한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의 단계에서는 프롤레타리아트만 존재하지 않습니다. 거기에는 프롤레타리아트 이외에도, 非프롤레타리아 노동자 계급, 자영업자․농민․전문직 종사자 등 중간 계급들도 존재합니다. 더불어 그 단계에서는 자원 부족과 빈곤의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지 않아 자원의 소유와 가치의 배분을 둘러싸고 커다란 이해와 의견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거기에는 공산주의적 미래를 지향하는 공산주의자와 이에 동의하는 프롤레타리아트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에 대하여 동의하지 않는 프롤레타리아트․중간계급이나 정치세력도 존재합니다.

마르크스의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의 구상에서는 이렇게 서로 대립적이거나 조화 불가능한 다양한 이해관계와 이견들에 대한 문제가 충분히 고려되어 있지 않습니다. 거기에는 단 하나의 프롤레타리아트의 이해와 의견만이 존재합니다. 그는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에서는 서로 다른 다양한 이해와 의견이 대립될 수 있음을 주목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리하기에 그는 이러한 다양한 이해와 의견이 용인되고 반영되고 경쟁할 공적 공간인 민주적인 제도를 충분히 검토하지 않습니다.

물론 마르크스는 ≪프랑스 내전≫ 등에서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의 구성과 운영원리로 자치․대리적 대표․소환 제도 등을 제시하고 있고, 이것이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의 민주성을 담보한다고 반박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민주주의의 주요 원리중 하나인 ‘다수의 지배’를 위한 수단일 뿐, 또 하나의 원리인 ‘소수자 보호’ 원칙을 담보하지는 못합니다. 마르크스의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에서는 다른 이해와 의견을 가진 소수자 보호에 관한 고려를 전혀 볼 수 없습니다.

전체 인민․다른 계급이나 계층․소수자의 이해와 의견에 대하여 고려하지 않고 프롤레타리아 계급만의 이해와 의견만을 고려하는 프롤레타리아트 독재가 의미하는 것은 결국 ‘민주주의의 부재’입니다. 그것은 오직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다수라는 이유만으로(사실 그 다수도 마르크스가 제시하는 계급이라는 특정한 구획선에 따를 때만 다수임) 그들의 지배가 정당화되는 ‘다수에 의한 독재’일 뿐입니다.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의 미래는 민주적일 수 있는가?

그렇다면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에 의한’ 혹은 ‘다수에 의한’ 독재에 머물까요? 마르크스에게 의하면 프롤레타리아트가 자연적으로 계급의식을 성취하는 것도 아니고, 자연적으로 공산주의 이념을 갖게 되는 것도 더욱 아닙니다. 개인적․경제적 이해와 분노에 사로잡힌 프롤레타리아에게 계급의식을 주입하여 이들을 하나의 계급으로 엮어내고, 이들로 하여금 정치권력을 장악하게 하고 독재 권력을 행사하여 모든 계급과 소유를 폐지하도록 하고, 궁극적으로 공산주의 사회로 점진적으로 이행토록 만드는 것은 ‘공산주의자들(혹은 공산당)’입니다.

공산주의자들은 프롤레타리아 전체와 어떠한 관계를 맺고 있는가?……그들은 프롤레타리아 전체의 이해관계와 동떨어진 이해를 갖지 않는다……공산주의자들은 실천적인 측면에서 볼 때 모든 나라의 노동계급 정당들의 가장 선진적이며 굳센 부분으로서 다른 모든 정당들을 앞으로 밀고 나아가며, 이론적인 측면에서 볼 때 프롤레타리아 대중에 비하여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진행 경로와 조건들, 그리고 궁극적이고 전반적인 결과를 명료하게 인식한다. 이러한 공산주의자들의 당면 목적은……프롤레타리아트를 계급으로 형성시키고, 부르주아 지배를 타도하며, 프롤레타리아트가 정치권력을 장악하도록 하는데 있다.

≪공산당 선언≫에서의 공산주의자들의 임무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치권력 장악으로 끝납니다. 그러나 공산주의자들의 임무는 그 이후에도 지속이 되어야만 합니다.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은 언제라도 반동 세력에 의하여 전복될 수 있고, 수많은 非프롤레타리아 계급이나 계층에 의하여 이리저리 휘둘릴 수도 있고, 또한 프롤레타리아트는 지배계급이 되었다고 하여 스스로 공산주의 사회를 만들지도 못합니다. 혁명을 수호하고, 중간계급의 기회주의와 태만을 분쇄하고, 계급과 소유 폐지를 독려하고, 궁극적으로 공산주의로 이행하는 역사적 과정으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프롤레타리아트는 ‘가장 선진적이며 굳센 부분’인 공산주의자들의 지도를 계속 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것의 예상 가능한 결과는 무엇일까요? 이것은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는 다수 혹은 프롤레타리아 계급에 의한 지배가 아니라, 프롤레타리아트를 내세운 공산주의자들에 의한 지배, 다수를 내세운 극소수가 지배하는 체제가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반동세력에 의하여 혁명이 끈임없이 위협받고, 중간 계급들이 이리저리 눈치를 살피고, 계급과 소유의 철폐에 대한 항의와 태업이 증대되고, 공산주의로의 이행이 지지부진 할수록 공산주의자들 혹은 독재자의 권력을 더욱 증대되고 강력해져야 합니다. 그것이 가져올 미래는 어떠한 것일까요? 그것은 적어도 모든 억압과 강제가 사라지고 완전한 자유와 민주주의가 실현되는 공산주의 세상은 아닐 것입니다.

레닌.

레닌의 추억

레닌(Vladimir Ilich Lenin, 1870∼1924)은 자신의 이상을 실제 현실에서 실현한 최초의 정치사상가입니다. 그의 깊이 있는 정치이론의 덕분인지, 아니면 앞서 언급한 당대 러시아의 전쟁과 내전 등의 어려운 형편 때문인지, 그것도 아니면 일찍 죽은 예기치 않은 행운(레닌은 1917년 러시아 혁명후 6년간 집권하다가 1924년 사망) 덕분인지, 거의 모든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그에게 현실 사회주의의 패악에 대하여 면죄부를 주고 있습니다. 그는 대부분의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서 마르크스의 진정한 계승자 겸 실현가로 취급되고 있습니다.

그러한 레닌은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의 反민주적 결함을 최초로 경험한, 아니 그러한 결함을 직접 실천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1917년 10월 러시아 혁명에 성공하여 정치권력을 잡은 레닌은 이미 일정이 잡혀 있었던 제헌의회 선거를 실시합니다. 민주적 절차에 따른 선거 결과, 다른 정당이 다수당이 되고 레닌이 이끄는 볼셰비키는 소수당으로 전락합니다. 그러자 레닌은 제헌의회를 해산시켜 버리고, 의회의 지위를 러시아의 코뮌격인 소비에트(Soviet)로 대체하였습니다. 혁명의 수호와 계속이 명분이 되고, 마르크스가 ≪프랑스 내전≫에서 말한 ‘기존 국가기구의 파괴와 새로운 국가기구의 구성’ 주장이 이를 정당화 시키는 논리가 되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많은 마르크스주의자들 조차 레닌의 제헌의회의 해산조치는 인민의 의사에 반하는 것이며, 이는 민주주의의 말살의 전조가 될 것이라고 비판하였습니다. 그들의 예상은 실제 현실이 되었습니다. 그 이후 모든 정치과정은 레닌과 일부 볼셰비키 지도자들에 의하여 독단적으로 결정되었고, 민주주의의 기초가 되는 언론의 자유나 경쟁적인 정당체계는 다시는 복원되지 않았습니다. 공산당의 일당 독재․정치적 자유의 억압․소비에트의 형식적 기구로의 전락 등 현실 사회주의의 암울한 미래는 사실상 그때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민주주의가 부재하는 이상 기획은, 그것이 아무리 화려하고 고귀해보이더라도 말 그대의 독재일 뿐입니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공산주의 기획의 근본적 문제점은 정치에서의 민주주의의 결함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보다 큰 문제는, 그 물질적․경제적 토대라고 할 수 있는 공산주의적 생산양식에 있습니다. 마르크스의 공산주의 생산양식 기획에는 무슨 문제가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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