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주의 vs 현실주의, 이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시작되었던 정치 또는 정치학의 근원적인 주제중 하나입니다. 그러한 정치, 정치학에서의 이상주의와 현실주의를 각각 대변할만한 위대한 정치고전이 거의 동시에 출간되었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흥미로운 대목입니다.1513년 이탈리아의 피렌체의 외교관 출신인 현실주의자 마키아벨리(Niccolò Machiavelli, 1469∼1527)가 ≪군주론≫을 완성(출간된 것은 1532년)하고, 그로부터 3년 뒤 영국의 토마스 모어(Thomas More, 1478∼1535)가 이상적인 섬나라 이야기를 담은 ≪유토피아≫를 출간하였습니다. 이 둘에 의한 ‘마키아벨리즘’과 ‘유토피아’는 이후 극단의 현실주의와 이상주의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모
자연은 인류를 육체적, 정신적 능력에서 평등하게 창조했다……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학≫에서 지배에 적합한 사람이 따로 있고, 남을 섬기는데 적합한 사람이 따로 있다고 주장하고 이런 불평등을 자신의 학설의 기초로 삼았다……그러나 그의 이런 주장은 이성에 위배될 뿐만 아니라 경험에도 위배된다. 왜냐하면 자기가 주인이 되기보다 차라리 남의 지배를 받는 것이 낫다고 생각할 바보는 세상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그러므로 자연이 인간을 평등하게 만들었다면 그 평등은 인정되어야 하고, 가사 자연이 인간을 불평등하게 만들었다고 하더라도 스스로 평등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평등한 조건에서가 아니면 평화상태에 들어가려고 하지 않으므로 그런 평등은 인정되어야 한다. - 홉스의 ≪리바이어던≫중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람은 결코
이번과 다음 회에서는 소크라테스에서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까지 이어지는 위대한 교사들의 정치학을 다시 한번 개괄적으로 살펴보고 그 밑바탕에 흐르는 反민주성을 조명해보는 시간을 가질 것입니다. 그들의 이상주의적 정치철학의 핵심 개념인 ‘탁월성’과 그들의 현실주의적 정치기획인 ‘과두와 민주의 혼합정체’에서 핵심 기재로 등장하는 ‘재산과 선거’에 내재된 反민주적 실체를 밝히고, 더불어 위대한 교사들이 의도한 것도 바로 그 반민주적 실체를 구현하는 것이었음을 밝히는 것입니다.위대한 교사들의 기본적 세계관은, 인간은 직업적·신체적 소질과 지적·윤리적 능력에서 차이가 있기에 그에 맞게 사회적 차별과 위계를 두어야 하며 오직 그 사회적 차별과 위계 속에서 각자에게 주어진 일만 열심히 할 때 전체가 유기적으로 조화
이상주의자로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철학은 플라톤과 거의 흡사합니다. 플라톤과 마찬가지로, 그는 지배와 피지배를 정당화하고 정치적 지위와 권한을 배분하는 정의로운 기준으로 ‘탁월함’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과 마찬가지로, 정치는 그에 합당한 지적․윤리적 탁월함을 갖춘 자가 수행하는 것이 정의로운 것이라고 주장합니다.다만 그는 시민들은 그러한 탁월함을 완벽하게 갖거나 완벽하게 갖지 않았는지로 양분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종류 혹은 정도에서 차이가 있을 뿐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므로 그 종류와 정도에 ‘비례하여’ 정치적 지위와 권한이 배분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주장합니다. 탁월성에 비례하여 정치적 몫을 배분하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광의의 정의의 원칙인 ‘비례성의 원칙’의 한 범주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보다 40여년 늦은 BC 384년 마케도니아의 영향권에 있던 스타기로스라는 작은 도시의 귀족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18세에 아테네로 이주하여 플라톤이 세운 ‘아카데미’에서 플라톤이 사망할 때까지 20년을 수학하였습니다. 당시 아테네는 펠레폰네소스 전쟁에서 스파르타에 패배하여 비록 정치적 경제적 패권은 잃었지만, 여전히 민주정체를 유지하고 있었고, 문화와 교육의 중심지의 역할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플라톤 사후에 대학 내 그리고 아테네 시민들 사이에서 反마케도니아 감정이 심해지자 고향으로 돌아가, 마케도니아를 통치하던 필리포스 2세의 초청으로 그의 아들인 알렉산드로스(영어로는 알렉산더, BC 356∼323) 왕자의 가정교사 노릇을 하기도 합니다. 나중에 알렉산드로스가 그리스를 점령
이전의 ≪소크라테스의 변명≫ 읽기에서 보았듯이, 소크라테스(Socrates, BC470?∼399)는 당시 아테네인들로부터 두 차례의 反민주 쿠테타와 연루되었을 것이라는 의심을 받았고 이로서 사형선고를 받았지만, 그로서는 억울한 혐의였습니다. 만약 그 혐의를 받아야 할 사람이 있었다면, 오히려 그의 제자였던 플라톤(Platon, BC 427?~347)이 더욱 적절할 것입니다.플라톤은 명문 귀족가문 출신으로 젊어서 정치가가 되는 게 꿈이었습니다. BC 404년 귀족과 反민주주의자들이 쿠테타를 일으켰는데 이들 중 몇몇은 플라톤의 친인척이었고, 젊은 플라톤은 이 쿠테타 정권에 동참하여 자신의 反민주적 이상을 실현하려고 하였다고 스스로 고백하고 있습니다.젊은 플라톤, 反민주 쿠테타를 흠모하다바로
페리클레스(Pericles, BC 495~429)가 전몰자 추모연설에서 자랑스레 웅변하고 있는 고대 아테네의 민주주의는 ‘정치적 평등’ 원리에 기초합니다. 아테테인들은 이 원칙에 기초하여, 모든 성인 남성시민들이 그가 귀족이건 부자건 시장의 날품팔이건 항구의 막노동꾼이건 상관없이, 공적인 일을 결정하는 민회에서 참석해 동등하게 발언 투표하고, 오직 운에 따른 추첨으로 대표가 되고 공직에 취임할 수 있는 동등한 권리와 기회를 갖는 정치제도를 만들었습니다.그러나 이러한 제도는 사회경제적 지배계급이나 지적 엘리트들이 보기에는 너무나도 불만스럽고 불안한 것이었습니다. 초라한 행색으로 케케묵은 냄새마저 풍기는 하층민과 빈민들이 신분이 높고 교양 있는 자신들과 동등한 정치적 지위와 권한을 갖고 심지어 자신들의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의 청년들을 타락시키고, 국가가 인정하는 신을 인정하지 않고 다른 귀신에게 제사를 지낸다’는 애매모호하고 억울한 죄명으로 기소되어 재판을 받았고, 전혀 예상치 못한 사형이라는 최고의 중형을 선고받았습니다. 그렇지만 많은 학자들은 사형은 소크라테스가 의도한 것이라며 그가 재판이라는 수단을 빌어 자살한 것이라고까지 평하곤 합니다.소크라테스는 재판이라는 수단을 빌어 자살하였다 ?이는 충분히 근거 있는 해석입니다. 전회의 ≪소크라테스의 변명≫(이하 ≪변명≫)에서 보듯,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혐의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변소하거나 배심원들의 감성에 호소하여 선처를 구하기는커녕, 변론과정에서도 모든 아테네인들이 혐오하는 기존의 자신의 행태를 멈추지 않겠다고 하고, 특유의 현란한 추궁으로 고
여러분은 앞으로 욕을 듣고 비난을 받을 것이오. 이 나라를 나쁘게 말하려는 인간들로부터 여러분은 지혜로운 소크라테스를 죽였다고 비난받을 것이오……여러분은 나의 죽음을 결정했지만, 내가 죽은 뒤 머지않아 여러분은 징벌을 받을 것이고, 그 징벌은 맹세코 나의 사형보다 훨씬 쓰라린 형벌이 될 것이오“여러분은 지혜로운 소크라테스를 죽였다고 비난받을 것”이 글은 소크라테스가 사형선고를 받고 배심원들(특히 사형평결을 한 배심원들)에게 한 말입니다. 어찌되었든 그의 예언은 적중하였습니다. 그의 사후 수많은 정치고전들과 교과서들은, 당시의 불의한 권력과 무지한 배심원들이 자유와 민주주의의 진정한 수호자인 소크라테스를 죽였다며, 그 사례를 통하여 민주주의의 중우성(衆愚性)이나 인민대중의 무지함을 경고합니다.
수많은 정치고전들과 우리의 교과서들은 소크라테스(Socrates, BC470?∼399)를 가르켜 ‘불의한 권력과 무지한 대중에 맞서, 자유와 평등․민주주의를 수호한 철학자’, ’죽음을 불사하며 정의를 주장한 양심가‘, ’억울한 죽음을 당하면서도 준법정신을 강조하며 이를 받아들인 순교자‘라고 합니다. 이런 평가 속에 내재된 프레임은 ’不정의한 권력․대중․법 vs 자유․평등․민주주의․법치주의를 수호한 철학자‘라는 것입니다.BC 431년 아테네의 정치지도자인 노년의 페리클레스가 전몰자 추모연설을 할 때 소크라테스는 30대 후반의 장년이었습니다. 소크라테스가 이 장례식에 참석하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다음에 보듯이 지혜로운 사람 찾기가 직업이고 애국심이 투철하였던 그가 이런 자리에 빠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민주주의(democracy)는 본래 그리스어 ‘데모크라티아(demokratia)’에서 유래하는데, 그것은 ‘인민(demos)에 의한 지배(kratia)’를 가리킵니다. 인민에 의한 지배의 최선의 의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처럼 “어느 누구에게도 지배받지 않거나(역으로 표현하면 스스로 지배하고), 번갈아 지배하고 지배받는” 것이고, 그것을 현실적으로 구현하는 최선의 방식은 고대 아테네가 행한 것처럼 모든 시민이 모여서 공동체의 의사를 결정하는 ‘민회’와 모든 시민을 대상으로 무작위로 대표와 공직자를 뽑아서 그 의사의 집행을 맡기는 ‘추첨’일 것입니다. 적어도 논리적으로는 그렇다는 것입니다.그러나 그러한 정치제도가 실제 그렇게 이상적일까요? 1개 종합대학 규모(고대 아테네에서 실제 정치적 권리를 가진 시민
같은 해 겨울 아테네인들은 전통적인 관습에 따라 이번 전쟁(펠레폰네소스 전쟁을 의미)에서 죽은 최초의 전사자들을 위해 국비로 장례를 치렀는데……장례식에서는 크산팁포스의 아들 페리클레스가 연설하도록 선출되었다. 때가 되자 그는 무덤가를 떠나 되도록 많은 사람들이 듣도록 높다랗게 설치된 연단에 올라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위 글은 고대 아테네의 역사가 투키디데스의 ≪펠레폰네소스 전쟁사≫에 기록된 것입니다. 위와 같은 언급 뒤에 인용된 페리클레스(Perikles, BC495?∼429)의 전몰자 추모연설은 비록 10쪽도 되지 않는 분량이지만, 링컨 대통령의 게티스버그 연설과 더불어 인류 역사에서 ‘민주주의’를 찬양하는 가장 유명한 연설이 됩니다. 굳이 두꺼운 투키디데스의 책을 읽지 않아도 인터넷을 통하여 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