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Utopia)≫ 읽기 (1)

이상주의 vs 현실주의, 이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시작되었던 정치 또는 정치학의 근원적인 주제중 하나입니다. 그러한 정치, 정치학에서의 이상주의와 현실주의를 각각 대변할만한 위대한 정치고전이 거의 동시에 출간되었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흥미로운 대목입니다.

1513년 이탈리아의 피렌체의 외교관 출신인 현실주의자 마키아벨리(Niccolò Machiavelli, 1469∼1527)가 ≪군주론≫을 완성(출간된 것은 1532년)하고, 그로부터 3년 뒤 영국의 토마스 모어(Thomas More, 1478∼1535)가 이상적인 섬나라 이야기를 담은 ≪유토피아≫를 출간하였습니다. 이 둘에 의한 ‘마키아벨리즘’과 ‘유토피아’는 이후 극단의 현실주의와 이상주의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 토마스 모어.

모어 vs 마키아벨리

모어는 그의 저술이나 정치사상보다는 그의 삶 때문에 더욱 조명을 받는 인물입니다. 그를 평하는 모든 이들은 그를 인류 역사상 가장 도덕적인 모범이라고 칭송합니다. 그는 하원의장과 대법관까지 승승장구하였으나, 누구보다도 검소하고 경건한 생활을 하였으며, 가난한 이들에 애정과 정의에 대한 충심도 깊었다고 합니다. 그러하기에 그는 보수적인 카톨릭에서부터 혁명적인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까지 존경받는 보기 드문 역사적 인물입니다. 그는 죽은 후 400년이 지난 1935년 카톨릭의 성자(聖者)로 추존되었고(故 김대중 대통령이 그의 세례명을 따랐습니다), 한때 마르크스주의의 교황이라고 평가받던 카우츠키는 그를 사회주의의 선구자로 칭송하였습니다.
 
이토록 매력적인 인간이 공직에서 은퇴 후 인생의 말년에 이르러 고난을 겪게 됩니다. 그 고난은 우리의 숙종 임금처럼 여성 편력과 궁궐 암투 때문에 영국의 역사드라마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헨리 8세 때문입니다. 그는 재임기간 동안 6명의 왕비중 3명을 처형하고, 수백명을 반역죄로 암살하고 처형하였습니다.

모어의 죽음은 이러한 헨리 8세의 여성 편력과 관련이 있습니다. 헨리 8세는 본래 즉위 직후 요절한 형 아서의 아내였던(그에게는 형수) 캐서린과 결혼하였지만, 이후 프랑스 출신의 앤 블린과 사랑에 빠졌습니다. 그는 앤을 새 왕후를 세우려고 하다가 이혼을 금지하는 로마 교황청과 마찰을 일으키게 되었고, 종국에 영국의 교회는 로마 교황청이 아니라 오직 영국 국왕의 지시를 받는다는 수장령(首長令)으로 맞서게 됩니다. 이후 그는 앤 왕후의 대관식이 거행하며 신하들을 초대하고, 신하들에게 앤과 사이에 낳은 소생을 후계자로 삼는다는 왕위계승법에 따르겠다는 서약서에 서명할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당시 모든 공직에서 은퇴하여, 위대한 교사들이 말하는 가장 좋은 삶인 관조(觀照)적․철학적 삶을 살고 있던 모어는 왕의 이혼과 재혼 문제에 침묵으로 일관하고, 그 일환으로 새 왕후의 대관식에도 참석하지 않고, 왕위계승법 준수 서명에도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가까운 지인이 모어에게 국왕의 요구를 거부하면 결국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우려하자, 그는 “그들의 요구를 하나를 들어주면 그 다음 것도 들어주지 않을 도리가 없다……대관식에 참석하면 그 다음엔 새로운 질서를 위해 강연을 하고 글을 쓰라고 강요할 것”, “죽음 그것뿐인가? 그렇다면 당신과 나 사이에는 나는 오늘 죽고 당신은 내일 죽는다는 것 외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는 결국 반역죄로 체포되어 런던탑에 수감되었다가 단두대에 오르게 됩니다. 그는 마지막 순간에도 사형집행관에게 마저 “힘을 내시게, 자네 일에 두려워 마시게, 내 목은 매우 짧으니 조심해서 자르게” 말하고 마지막 순간에도 수염을 칼날 앞으로 내어 놓으며 “수염을 반역죄를 저지른 적이 없으니까”라고 말하는 여유를 잃지 않았다고 합니다.

▲ 모어와 그의 가족, 가운데 검은 예복을 입은 사람이 모어입니다.

“내 목은 짧으니 조심해서 자르게”

‘유토피아(Utopia)’는 모어의 조어(造語)입니다. 이는 그리스어로 ‘없다’라는 ‘ou'와 ’장소‘라는 ’topos'를 합친 것으로 ‘어디에도 없는 곳’이라는 의미입니다. 모어의 ≪유토피아≫는 2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1편은 모어와 여행가로 가상의 섬인 유토피아에 가 보았다는 가상의 인물인 라파엘 히슬로다에우스(Raphael Hythlodaeus) 간에 당대의 유럽의 현실을 비판적으로 논하는 대화를, 2편은 그가 전하는 당대의 유럽․유럽인과 전혀 다른 유토피아인들의 생활상과 정신세계를 서술하고 있습니다.

≪유토피아≫의 1편에서 모어와 라파엘은 두가지 쟁점을 놓고 이야기를 나눕니다. 첫째는 철학자 혹은 지혜롭고 덕성을 갖춘 자는 현실 정치에 적극 참여하여 불의와 부정에 가득찬 현실을 개선하는 것이 올바른가 아니면 그러한 노력의 헛됨을 알고 현실 정치에서 물러나 혼자만의 관조적․철학적 삶을 사는 것이 보다 바람직한가라는 것이고, 둘째는 범죄(특히 절도범)는 사악한 개인적 본성에서 비롯된 것인가 아니면 사회구조적 차원에서 비롯된 문제인가, 이에 대한 대책으로 엄벌을 지속하여야 하는가 아니면 범죄를 양산하는 사회구조적 병폐를 척결하는 것이 우선인가 라는 것입니다.

첫째 논쟁은 고대 아테네의 플라톤 때부터 논쟁하여 온 해묵은 것이었습니다. 그만큼 정치철학자들의 영원한 논쟁중 하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라파엘은 현자(賢者)는 정치와 공직에 참여해봤자 군주와 그 주변 인물들로부터 무시를 당하거나 그들의 탐욕과 시기에 이용되고 희생만 될 뿐이라며, 현자는 정치와 공직에서 멀어져 관조적․철학적 삶을 사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주장합니다.

플라톤의 유명한 ‘철인왕 패러독스’도 이와 관련이 있습니다. 플라톤은, 철인왕 기획에 따라 교육받고 훈련받은 진정한 철학자들은 애초의 의도와 달리 통치자의 지위를 수락하지 않으려고 할 것으로 추측합니다. 플라톤의 논리대로라면 그들은 동굴 생활과 같은 현실 정치에서 벗어나 세상의 진짜 빛을 경험한 자이기에 다시 동굴생활로 돌아가 통치자가 되기를 원하지 않을 것이라는 딜레마에 빠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들(철학자)은 다음과 같은 현실을 뼈저리게 느꼈을 것이네, 즉 나라의 정치에 대하여 누구도 무엇 하나 건전한 일을 하지 않고, 정의를 위해 같이 싸울 동지도 없다는 현실을. 그래서 야생의 짐승들 속으로 혼자 들어간 사람처럼 부정과 맞서 싸울 마음도 없고, 혼자서 만인의 광포와 대항하여 싸울 힘도 없으니, 국가와 동료들을 위해 유익한 일을 하기 전에 자신의 몸을 망치게 될 것이고,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에도 무익한 사람으로만 남게 될 수 밖에 없음을 알게 될 것이네. 이런 모든 점을 심사숙고한 끝에 그는 조용하게 자기의 일만을 하며 살아가는 길을 택하지. 마치 폭풍우 속에서 흙모래와 억센 비를 피하기 위해 벽 뒤에 숨는 것처럼, 그는 다른 사람들의 막대한 부정을 보더라도, 자기 자신이 그에 의하여 더럽혀지지 않는다면 그리고 이 세상을 떠날 때 홀가분하게 사라질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하는 거지 - 플라톤의 ≪국가론≫ 중

이러한 패러독스에 대한 해결책으로, 플라톤은 철학자는 통치자의 지위를 떠맡도록 강제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서로 대통령이나 국회의원과 같은 권력자가 되겠다고 싸우는 우리의 현실에서는 도무지 상상할 수 없지만 말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철학자의 이러한 현실초월적인 나쁘게 말하면 현실도피적인 태도가 최선은 아니라고 하면서, 지나가는 말투로 “철학왕이 통치하는 나라에서만 그 자신(철학자)이 가장 훌륭하게 성장할 것이고, 개인적 일도 공적인 일도 모두 안전하게 구원될 수 있다”는 명분에 ‘스스로 설득’되어 통치자의 지위를 받아들이라고 얼버무립니다.

성실한 공직자였던(은퇴하여 관조적․철학적 삶을 살기 전의) 모어가 이러한 라파엘의 주장에 동조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는 현자는 국가와 인민대중을 위해서라도 정치와 공직을 외면할 수는 없으며, 다만 보다 온건함과 신중함으로 정치와 공직에 다가가는 노력을 계속하여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정말 모어다운 교과서적 답변입니다. 이러한 모어의 답변은 플라톤의 철학자의 ‘자발적 설득’과 닮았습니다. 

(군주나 신하들의) 잘못된 생각을 완전히 근절할 수 없고, 고질화된 악을 내 마음에 흡족하도록 바로 잡을 수 없더라도, 나라를 버려서는 안되지요. 바람을 조절할 수 없다고 푹풍우 속의 배를 버려서는 안되지요. 다른 생각으로 이미 굳어진 사라들에게 너무 동떨어진 생각을 강요하지 말고, 우회적인 방법으로 요령껏 자신의 입장을 개진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면 더 좋게는 만들 수 없더라도 더 나빠지지는 않게 될 것입니다.

‘침묵’이 모어를 잡아먹다

이에 대하여 라파엘은 모어와 같은 우유부단하고 애매모호한 자세는, 종국에는 잘못된 인식이나 견해를 갖고 있는 군주나 신하들과 공범이 되는 결과에 이르거나, 정반대로 그들에 대한 반역자의 지위로 떨어지는 결과중 하나만을 가져올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그런 식으로 해서는, 다른 사람들의 광기를 고치려다가 나까지 그들과 같이 광기에 휩싸이게 될 것입니다……내 의견이 다른 사람들의 의견과 다르면 내 의견을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일 테고, 그들에게 동조하면 그들의 미친 짓을 재확인하는 꼴이 됩니다……그릇된 제안들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찬성하지 않고 엉거주춤하게 찬성하는 사람은 종국에 스파이 또는 반역자로 의심받게 마련입니다……그들의 못된 수법에 의해서 자신도 타락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설사 자기 혼자 성실과 순결을 지키더라도 다른 사람들의 협잡과 어리석은 행동을 덮어주는 가리개가 될 뿐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그와 동시대 인물로 그와 마찬가지로 수년간 공직에 봉사하였던 마키아벨리도 이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지독한 현실주의자였던 마키아벨리는 라파엘(모어)보다 냉철한 눈을 가졌습니다.

군주에게 너무 접근하면 멸망의 불행을 피할 수 없고, 너무 멀리 있으면 재기(再起)할 수 없으니, 할 수만 있다면 중도에 서는 것이 좋다. 그러나 이것은 애당초 불가능하므로, 군주에 딱 붙어 있거나 멀리 있거나 그 어느 쪽을 고를 수밖에 없다. 그러면 이러한 행동에 미치는 자신의 재능으로 인하여 밤낮으로 위협을 받으며 살아가야 한다. 이렇게 되면, 자기에게는 아무런 야심이 없고, 명예도 이익도 원하지 않으며, 오직 조용히 후회 없는 생활을 하고 싶다고 떠들어대도 소용이 없다. 왜냐 하면 이러한 변명은 사실이 아니라고 받아들여져 납득시킬 수도 없는데다가, 본디 신분이 있는 사람은 그러한 경우로부터 빠져 나올 수 없으므로, 비록 진심으로 속세를 버리고 아무런 야심도 없는 경우에도 쉽사리 그를 이해하려 하지 않고, 자기가 조용한 생활을 하고자 해도 다른 사람들이 이를 가만히 놔두지 않는다. 따라서 바보를 가장하고 자신의 양심에 위배해서라도 군주를 기쁘게 해주기 위하여 바보 같은 일을 태연히 해내는 것이 신상에 좋다. - 마키아벨리의 ≪로마사 논고≫

라파엘과 마키아벨리는, 자신의 양심과 정의에 따른 올곧은 태도와 처신을 잠시 묻어두고, 침묵이나 소극적 반대의 자세로 현실과 타협하려고 하거나 그 자리에서 조용히 물러나더라도, 종국에는 반역자로 몰려 죽임을 피할 수 없다고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이들의 경고가 20년 후 모어에게 현실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모어가 체포될 무렵(1535년)에는 그는 모든 공직에서 은퇴한 후였습니다. 더불어 그는 새로운 왕후의 즉위와 새로운 왕위계승법에 적극적으로 반대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다만 자신의 양심과 종교에 따라 이에 대하여 침묵하였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는 헨리 8세 치하에서 최고위 공직을 담당하였고, 은퇴 후에도 사회적으로 최고의 명망 있는 인사였습니다. 그는 재판과정에서 자신은 오직 침묵하였을 뿐인데 그것은 반역행위가 될 수 없다고 반박하였지만, 그러한 사회적 영향력을 갖춘 그의 ‘침묵’은 헨리 8세에게는 어떠한 소란스런 불충행위나 집단적인 반역행위보다도 불쾌하고 위협적인 것이었습니다. 라파엘과 마키아벨리는 20년전 그러한 침묵은 죽음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라고 경고하였던 것입니다.  

≪유토피아≫의 1편에서 모어와 라파엘은 위와 같은 현자의 정치참여에 대한 논쟁과 함께 또 하나의 논쟁을 하는데, 그것은 ‘범죄의 원인과 대책’에 관한 것입니다. 이는 이야기 구조상으로는 ‘유토피아 섬’에 대하여 이야기를 시작하는 단초가 되는 것이고, 철학적으로는 보다 심원한 문제인 ‘사유재산 제도’에 대한 논쟁으로 나아가는 시작점이 되는 것입니다.

▲ 1518년 출간된 <<유토피아>>에 실려 있는 삽화와 유토피아인들이 사용하는 문자.

“양(羊)이 사람을 잡아먹다”

이에 대한 이야기는, 라파엘 자신이 모어의 조국인 영국을 방문하였던 경험을 이야기하며, 당시 잠깐 만났던 변호사가 절도범에게 가혹한 처벌을 하는 것(당시 유럽에서는 절도행위를 하는 하층민에게 교수형을 선고하였습니다)을 자랑하면서 ‘우리는 절도범을 거의 모두 교수형에 처해 엄벌하는데 절도범이 줄지 않는 것이 이상하다’라고 의아해하는 것을 듣고, 이에 대하여 당시 라파엘 자신이 반박을 하였던 내용을 들려주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라파엘은 하층민의 절도와 같은 범죄에 대한 형벌이 지나치게 가혹하며 효과도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것은 가벼운 범죄도 살인죄와 마찬가지의 형벌을 선고하므로 정의에도 합당하지 않고, 살인을 하지 말라는 기독교의 윤리에도 어긋나며, 범죄인으로 하여금 더욱 흉악해지도록 부추키며(예컨대 절도범으로 잡히면 어차피 교수형에 처해지므로 피해자나 목격자를 살해), 반성과 재생의 기회를 박탈하여 그는 물론 사회에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라파엘(모어)의 인도주의적 형벌관은 최초의 사형폐지 주장자이자 근대 형사정책학의 선구자인 베카리아(Cesare Beccaria, 1738∼1794)보다 2세기나 앞선 것입니다.

나아가 라파엘은 엄중한 처벌에도 절도범이 늘어나는 것은 그의 개인적 본성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 구조적 모순과 병폐에 원인이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합니다. 일하는 자에게 토지나 일자리를 주기는커녕 오히려 그들의 토지와 일자리를 빼앗고(당대의 영국의 엔클로저 운동을 신랄하게 풍자한 “양이 사람을 잡아 먹는다”라는 말도 여기서 등장합니다), 소수의 귀족과 부유층들이 토지와 시장을 독점하여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고 사치와 낭비를 일삼는 당대의 사회에서, 가난한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것은 구걸과 절도 뿐이라며, 이러한 모순과 병폐를 고치지 않는 한, 그들에게 혹독한 형벌을 가하더라도 먹고 살기 위한 범죄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종국에 그의 이러한 주장은 사유재산 제도의 폐지에 까지 이릅니다.

사유재산이 있는 곳, 그리고 돈으로 모든 것이 평가되는 곳에서 국가가 정의롭고 번성하기란 도저히 불가능한 일입니다……사유재산 제도가 완전히 폐지되지 않는 한, 재화의 공정한 분배는 이루어 질 수 없고, 사람들은 행복해 질 수 없다고 확신합니다. 사유재산 제도가 존속하는 한, 인류 가운데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선량한 사람들이 빈곤과 근심이라는 무거운 짐에 압도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짐을 어느 정도 가볍게 할 수는 있다는 것을 나도 인정합니다. 하지만 그것을 완전히 치워버릴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이런 종류의 법률들(토지소유와 수입의 상한을 정하고, 돈으로 공직을 사는 것을 금지하는 법 등)은 치유할 수 없는 병자의 몸에 계속 붙이는 찜질약을 정도의 효과는 있겠지만, 사유재산 제도가 존속하는 한, 그러한 사회악들을 치유하여 사회를 다시 건강한 상태로 되돌릴 수 있는 가망이 전혀 없습니다.

아무리 서민들에게 우호적이고 공정의 정신에 충만한 모어라도 이에 대하여는 동조할 수 없었습니다. 모어는 보다 나은 삶을 위해서는 물질적 증대가 필요한데 이기심의 자극과 사유재산의 보호 없이 이것은 불가능하다고 반박합니다. 그의 반박은, 철인통치계급내의 공산주의(사유재산과 상속제도 폐지)를 주장한 플라톤의 ≪국가≫를 비판하던 아리스토텔레스를 연상케 합니다. 그만큼 이 사유재산 논쟁도, 처음의 논쟁 주제만큼 아니 그보다도 훨씬 더 해묵은 그리고 영원한 논쟁거리입니다.

저(모어)는 모든 것을 공유하는 곳에서 인간의 삶이 좋아지리라 생각하지 않습니다……이득을 볼 수 있다는 희망이 없어지면, 그는 다른 사람에게 의지하고 나태해질 수밖에 없지요. 또한 궁핍을 벗어나기 위해 일을 하려 해도 자기가 일해서 얻은 것을 법적으로 보호받을 수 없다면 끈임 없는 유혈과 난동이 뒤따를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 아메리고 베스푸치(Amerigo Vespucci), 이탈리아 출신의 상인 겸 항해사로 현재의 '아메리카'라는 명칭은 그의 이름에서 유래하는 것입니다. 모어의 시대에 그의 신대륙 항해기록이 널리 읽혀졌는데, 모어의 <<유토피아>>도 그의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유토피아>>에서 화자로 등장하는 가상의 인물인 라파엘 히슬로다에우스도 베스푸치의 신대륙 항해에 동참한 적이 있다고 설정되어 있습니다.

‘허튼 소리’로라도 우리의 ‘무지(無知)’를 알 수 있다면   

모어의 반박은 우리의 상식입니다. 우리는 사유재산 제도 그 자체가 폐지된 사회를 상상하지 못하거나 최악의 사회로만 상상할 뿐입니다.

이에 대하여 라파엘은 모어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이 그런 관념을 지닌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당신 마음에 그런 나라에 대한 아무런 상(象)도 지닌 게 없거나 아니면 그릇된 상만 지니고 있으니까요”라고 말하며, 그는 사유재산 제도가 폐지되었지만 누구보다도 훌륭한 사회를 이룩한 유토피아 섬에 대하여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이제 ‘허튼 소리꾼’(실제 라파엘의 성인 히슬로다에우스는 그리스어로 허튼 소리를 의미하는 hythlos에서 나온 말입니다)인 라파엘이 경험하였던 유토피아 섬으로 가 봅시다. 그 섬에서 금은보화를 얻지 못하여 그의 허튼 소리에 속았다고 할지라도, 혹시 사유재산 제도에 대한 우리의 무지(無知)와 그 무지에 기반한 근거 없는 편견과 집착을 발견할 수 있는 행운을 얻을 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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