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의 ≪소크라테스의 변명≫ 읽기 (1)

수많은 정치고전들과 우리의 교과서들은 소크라테스(Socrates, BC470?∼399)를 가르켜 ‘불의한 권력과 무지한 대중에 맞서, 자유와 평등․민주주의를 수호한 철학자’, ’죽음을 불사하며 정의를 주장한 양심가‘, ’억울한 죽음을 당하면서도 준법정신을 강조하며 이를 받아들인 순교자‘라고 합니다. 이런 평가 속에 내재된 프레임은 ’不정의한 권력․대중․법 vs 자유․평등․민주주의․법치주의를 수호한 철학자‘라는 것입니다.

BC 431년 아테네의 정치지도자인 노년의 페리클레스가 전몰자 추모연설을 할 때 소크라테스는 30대 후반의 장년이었습니다. 소크라테스가 이 장례식에 참석하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다음에 보듯이 지혜로운 사람 찾기가 직업이고 애국심이 투철하였던 그가 이런 자리에 빠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이 자리에서 페리클레스는 자신들의 정체가 민주적이고, 시민들은 법을 철저히 준수하며, 자신들은 일상생활에서도 자유롭고 평등하고 사려 깊게 행동하면서도 활기가 넘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소크라테스가 맞선 ‘권력․대중․법’이, 不정의한 ‘독재 권력․무지한 대중․악법’이라는 앞서의 프레임은 어딘가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페리클레스의 연설이 사실에 근거한 것이라면, 그가 맞선 것은 오히려 ‘민주 권력․자유롭고 평등하고 사려 깊은 대중․정의로운 법’이라고 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끈임없이 주입되어 상식처럼 되어버린 ’不정의한 권력․대중․법 vs 자유․평등․민주주의․법치주의를 수호한 철학자‘라는 프레임은 과연 정당한 것일까요? 잘못되었다면 어디서부터 꼬이기 시작한 것일까요?

페리클레스 vs 소크라테스

▲ 소크라테스, 그는 키가 작고 뚱뚱하고 눈은 튀어나오고 코는 들창코로 몹시 못생겼다고 한다. 그의 이러한 외모와 특별한 언행은 당시의 아테네인들에게도 기이하게 보였는지, 그는 당시에 아리스토파네스, 아메이프시아스의 희극의 주인공으로 등장할 정도로 유명 인사였다.

소크라테스는 지독히 못생겼다고 합니다. 그리고 맨발로 시장바닥을 돌아다니며 거의 씻지 않고, 1년 내내 허름한 1벌의 옷을 입고 다녔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부친의 일인 석공(또는 조각가) 직업 물려받았으나, 부친이 죽으면서 유산을 남기자 일을 그만두고 평생을 친구, 창녀, 동성애자들과 어울리며 무위도식하였고, 나이 50줄에 결혼하여 3명의 아들을 두고 첩도 두었지만 가족의 부양에 대하여는 전혀 관심조차 주지 않았습니다. 그는 평생을 정치적, 사회경제적, 학문적 엘리트들과 대화를 나누는 고상한 취미를 즐겼습니다. 그러나 그 대화라는 것은 나중에 보겠지만 그들로 하여금 그 스스로 얼마나 무지한가 자인하도록 무한정 추궁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로부터 확인된 그들의 무지(無知)를 세상 사람들에게 폭로하고, 자신이 적어도 그들보다는 현명하다고 떠벌리기를 좋아했습니다. 어찌 보면 아테네에서 그보다 더 非사교적이고 反사회적인 시민은 없었을 것입니다. 실제 그의 이러한 외모와 행태를 조롱하고 풍자하는 연극이 유행할 정도로, 그는 모든 아테네인들의 혐오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렇다고 그가 엘리트들을 증오한 反엘리트주의자는 전혀 아닙니다. 오히려 그는 빈민이나 하층민을 지독히 경멸하고, 정치를 엘리트들이 전담케 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라고 주장하며 빈민, 하층민들과 정치권력을 공유하는 현실의 민주정체를 조롱하고, 철저한 신분제 독재국가였던 스파르타를 자신의 민주적인 조국보다 탁월한 국가로, 치졸하고 오만한 전제 군주였던 아가멤논(영화 ≪트로이≫에 나오는 군주로, 영화에서 잠깐 보여지는 것 이상으로 그는 형편없는 인물이었다)을 역사에 남을 위대한 군주로 미화하고 왜곡하여 찬양하였습니다. 그보다 더 反민중적이고 反민주적인 사상가는 없을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그를 최악의 시민임을 넘어, 최악의 사상가라고 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수많은 정치고전들과 교과서들은 그를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철학자이자 양심가라고 하고, 심지어 그를 4대 성인(聖人)의 한명으로까지 추앙합니다. 최고의 아이러니는 위와 같이 지독한 민중혐오자이자 反민주주의자였던 그가, 오히려 자유와 평등․민주주의의 수호자로 둔갑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아이러니의 한가운데는 그에 대한 ‘재판과 죽음’이 있습니다. 그에 대한 재판과 죽음에 대한 기록이 없었다면, 그는 아마도 고대 아테네에 있었던 기이한 그러나 형편없는 反민주적 엘리트주의 철학을 소유하였던 그저 그런 소피스트(Sophist, 소크라테스 시대의 변론가들로 흔히 나쁜 의미로 돈을 받고 통치술, 처세술 등을 가르치는 학자들을 지칭합니다)의 한명으로만 남아 있었을 것입니다. 도대체 그에 대한 재판과 죽음이 어떠하였기에 이런 역설이 가능하게 되었을까요?

성인 소크라테스를 만든 건, ≪변명≫과 ≪크리톤≫

소크라테스는 평생 단 한권의 저술도 남기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그의 철학이나 인생에 대하여 비교적 상세히 알고 있는 것은, 거의 대부분은 그의 제자였던 플라톤(Platon, BC427~347) 덕분입니다. 그렇다고 하여 플라톤이 스승인 소크라테스의 삶에 대한 전기를 쓰거나 그의 사상에 대한 체제적인 저술을 쓴 것은 아닙니다. 그의 방식은 독특합니다. 소크라테스가 직접 화자(話者)로 등장하여 지인들과 대화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평생 체계적인 저술을 남기기를 기피한 스승의 의사를 나름대로 존중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는 현대와 같은 녹취기술이 불가능하였기에 과연 플라톤의 저서에 등장하는 소크라테스의 말이 얼마나 정확한 것인지 의문이 들고, 화자와 편집자가 다르기에 어디까지가 소크라테스의 생각이고 어디부터는 단지 플라톤 자신의 생각인지 구분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다만 플라톤이 자신의 저술을 펴냈을 때, 소크라테스를 기억하는 많은 사람들이 특히 대화의 상대방으로 등장하는 인물들마저 아직 생존하였을 때였기에, 플라톤의 소크라테스에 대한 기록(특히 지금 살펴보는 그에 대한 재판과 죽음에 관한 기록)은 비교적 정확하게 소크라테스의 말과 생각을 반영했을 것이라고 일반적으로 인정되고 있습니다.

플라톤의 여러 저작중 소크라테스의 재판, 죽음과 직접 관련된 것은 ≪소크라테스의 변명≫과 ≪크리톤≫입니다. 전자는 애매모호한 죄명으로 기소되어 재판을 받게 된 소크라테스가 자신을 변론하는 것을(그래서 제목이 ‘변명’ 보다는 ‘변론’이 적절합니다. 다만 일반적으로 ‘변명’이라고 해석되어 있기에 여기서는 ‘변명’이라 합니다), 후자는 이와 같은 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감옥에서 사형집행을 기다리던 소크라테스가 죽마고우였던 크리톤과 대화를 나눈 것으로 기록한 책입니다. 2권 모두를 하루도 안 걸려 읽을 수 있을 정도로 아주 작은 분량이지만, 민주주의․법치주의․사상의 자유․준법정신 등 무거운 정치철학적 주제도 있고, 비록 단편적이지만 소크라테스의 실제 삶을 유추해볼 수 있는 재미있는 일화도 많이 있습니다. 또한 소크라테스와 관련된 유명한 3개 경구인 ‘너 자신을 알라’, ‘무지(無知)의 지(知)’, ‘악법(惡法)도 법’이라는 말도 위 2권의 책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습니다.

그는 왜 재판정에 섰나

그의 변론을 듣기 전에 우선 당시의 재판제도부터 알아야 합니다. 전회에 살펴보았듯이 그들의 법정은 우리와 전혀 다릅니다. 고대 아테네에는 우리처럼 전문적인 법관․검사․변호사가 없었습니다. 일반 시민이 범법자를 고발 기소하고, 당사자가 직접 자신을 변론하고, 일반 시민들로 구성된 배심원단이 그 재판을 담당하였습니다. 소송은 1심으로 끝나고 단 1일로 종결하는 것이 원칙이었습니다. 당시 재판절차는 먼저 고발자와 피고인의 진술을 듣고 유무죄 판단하고, 유죄 평결이 있으면 이후 양형 평결이 있는데 이때 고발자와 피고인은 각자가 원하는 형종(刑種)과 형량(刑量)을 제의할 수 있었습니다.

소크라테스도 이렇게 일반 시민 501명의 배심원으로 구성된 시민법정에서 재판을 받았고 단 1일의 재판으로 사형 선고를 받았습니다. 특이한 것은 유무죄판단에서 유죄 281/무죄 220표 받아 근소한 차이로 유죄선고를 받았으나, 양형판단에서는 360/140표로 오히려 더욱 불리하게 사형선고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소크라테스를 고발한 사람은 3사람으로 멜레토스, 아뉴토스, 류콘입니다. 그들은 각각 “아테네 시민중 작가, 수공업자와 정치인, 변론가를 대변한다”고 소크라테스는 말합니다. 그들의 고발내용을 들은 소크라테스는 “그들의 말을 듣고 나 자신도 하마터면 내가 누구인지 잊을 뻔 했을 정도로, 이들이 설득력 있게 말했다”라고 하였는데, 안타깝게도 ≪변명≫에는 그들의 고발내용에 대한 진술은 빠져 있고, 그 이후에 있는 소크라테스의 반박부터 시작하고 있습니다. 단지 소크라테스의 입으로만 전달되는 그들의 고발취지는 “소크라테스가 아테네의 청년들을 타락시키고, 국가가 인정하는 신을 인정하지 않고 다른 귀신에게 제사를 지낸다”는 것이었습니다. 사형까지 선고한 죄의 내용 치고는 너무나 모호하지요?

맞습니다. 소크라테스의 재판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이 죄목에 많은 의문이 있다고 합니다. 당시 민주주의 국가였던 아테네는 사상과 종교의 자유가 있었고(게다가 당시 아테네는 유일신 사상도 없었고, 소크라테스 자신도 무신론자도 아니었고, 그 자신이 국가의 신에 대한 제사에도 열심이었습니다), 죄형법정주의(어떤 행위가 범죄로 처벌되기 위해서는 명확한 법률로 규정되어 있어야 한다는 원칙)가 시행되고 있었는데, 어떻게 이러한 아테네의 기본 법리도 어긋나고 도대체 어떤 법령을 위반하였는지도 모를 정도로 애매모호한 내용으로 기소될 수 있었냐는 것입니다. 더욱 이상한 것은 소크라테스도 이러한 문제점에 대하여 법정에서 전혀 항변하지 않았고, 나중에 이를 회고하여 ≪변명≫을 남긴 플라톤도 이에 대하여 전혀 지적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소크라테스가 이러한 문제점을 주장하여 자신을 변호했다면 그는 쉽게 무죄방면 되었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가사 그가 무죄방면 되지 않았더라도, 그가 ≪변명≫에서 사상과 표현의 자유, 종교와 무종교의 자유, 세평(世評)의 의한 단죄 금지, 명확성의 원칙 등 현대 민주주의와 법치주의의 기본 원칙을 주장하여 자신을 변호하였다면, 그나마 그는 민주주의와 법치주의의 발전에 기여하였다고 평가받아 마땅할 것입니다. 그러나 다음에 보듯 그는 전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소크라테스가 고발당한 이유는 따로 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그가 고발되어 사형 선고까지 받은 것은, 실질적으로는 1) 反사교적․反사회적인 그의 평소 언행에 대한 아테네인들의 반감, 2) 그의 反체제적인(당대의 아테네가 민주정체였으므로, 여기서 ‘反체제적인’은 ‘反민주적인’이라는 의미입니다) 철학과 행보에 대한 아테네인들의 의구심 때문이라고 합니다.

소크라테스도 이를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도 많은 시간을 들여 본래의 고발취지와는 무관한, 이러한 내용에 대하여 변론을 합니다. 즉 1) 자신이 왜 이렇게 反사교적․反사회적으로 보일 수도 있는 언행을 하게 되었는가, 그러한 자신의 언행이 어떻게 아테네인들의 오해와 편견을 불러일으키게 되었는가 해명하고, 2) 反민주적 쿠테타 세력과 자신은 무관하고, 오히려 자신은 이들의 지시를 거부하기까지 하였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먼저 1)에 대한 그의 해명을 들어봅시다.

카레이폰(소크라테스의 친구)이 델포이(아폴론 신전이 있는 곳)에 찾아가, 그곳의 무녀(巫女)에게 “소크라테스보다 더 지혜로운 자가 있는가”라고 물었소. 그러자 그 무녀가 “소크라테스보다 지혜로운 자는 아무도 없다”고 말해주었소……나는 그 신탁을 전해 듣고 생각했소. ‘신은 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일까? 나는 나 자신이 결코 지혜로운 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데 말이다. 신은 적어도 거짓말을 하지 않는데, 신은 그렇게 말함으로써 도대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일까?’……그래서 나는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신의 뜻을 알아보기로 했소. 그것은 누군가 지혜로운 자로 여겨지는 자를 찾아보는 것이었소. 그를 찾는다면 델포이에 가서 신탁을 반박할 수 있기 때문이오.

이처럼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가장 지혜롭다는 신의 신탁이 틀렸음을, 즉 자신의 무지(無知)함을 증명하고자 하는 너무나도 겸손한 마음으로, 그 길로 지혜롭다고 소문난 정치인, 작가, 시인, 수공인들을 찾아 나섰다고 합니다.

자신의 무지를 증명하고픈 너무나 겸손한 소크라테스

▲ 소크라테스가 '자신이 가장 지혜롭다'는 신탁을 받았다는 델포이 신전.

그러나 그러한 ‘자신’의 무지를 증명하고픈 겸손함에서 비롯된 긴 여행으로부터 확인한 것은, 오히려 ‘그들’의 무지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무지와 자신의 무지의 중대한 차이는 바로, 자신은 적어도 자신이 무지함을 알고 있다는 ‘無知의 知(knowledge of ignorance)’에 있다는, 즉 자신의 지적 겸손함에 있다는 사실임을 알게 되었고, 그것이 자신이 그들보다 지혜로운 근거가 되었다고 주장합니다. 그 이후로 그들의 무지를 그들뿐만 아니라 세상 사람들에게 폭로하여 각자가 반성하고 성찰케 하는 것이 자신의 직업이자 신에 의하여 주어진 소명이 되었다고 합니다. 

정치가를 찾아가 만나 내가 느낀 것은 이 사람이 많은 사람들에게 지혜로운 사람으로 여겨지고 그 자신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만, 실은 그렇지 않구나 하는 것이었고, 그래서 그 뒤로 나는 그 사실을 알리려고 애썼고, 그 결과 나는 그 사람과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의 미움을 사게 된 것이오……그 다음에는 비극 작가와 시인들을 찾아갔소. 이번에야 말로 내가 그 사람들보다 무지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으리라 기대하고 말이오……(그러나) 그들은 훌륭한 말을 많이 늘어놓지만 자기들이 하는 말의 뜻조차 제대로 모르고……다른 일에 있어서도 자신들이 지혜로운 양 착각하고……그러한 착각이 그들의 귀한 지혜를 망치고 있었던 것을 깨달았소……이러한 일로 인하여 그들의 미움을 받게 되고  많은 중상이 생기게 되었소

그러나 여러분(배심원을 지칭), 사실은 오직 신만이 참으로 지혜로운 자이며, 인간의 지혜란 너무나 보잘 것 없다는 것을 신은 그 신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소. 그리고 그것은 이 자리에 있는 소크라테스를 두고 말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내 이름은 그저 곁들이로  이용하고 있을 뿐인 것 같소. 즉 나를 예로 들어서 ‘인간들아, 그대들 가운데 소크라테스처럼 자신의 지혜가 보잘 것 없다는 것을 아는 자가 가장 지혜로운 자다’라고 말하는 듯이 여겨지는 것이오

그런 연유로 나는 지금도 여기저기 다니며 이 나라 사람이건 외국 사람이건 적어도 지혜가 있다고 생각되는 사람을 신의 지시에 따라 찾아가서 조사하고 있는 것이오. 그리하여 그가 지혜가 있다고 여겨지지 않을 때 그 사실을 밝혀 주고 있는 것이오. 그리고 이 일로 바쁘기 때문에 나라의 일이건 가정의 일이건 값어치 없는 일을 할 여유가 없고 무척 가난하게 살고 있소만, 이것도 오직 신을 섬기기 위한 것이오

어찌 보면 스스로 지혜를 찾고자 하는 또는 세상 사람들에게 그들이 가진 지식과 능력의 한계를 경고해주고픈 순수한 마음에서 비롯된 고행이었을 것이고, 달리 보면 잘난 척하거나 세상의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이 허풍떠는 정치인들과 학자들의 초라한 실상을 세상 사람들에게 폭로하고 ‘너 자신을 알라’며 조롱하는 재미에 빠져 살았다는 것입니다.
 
최대한 선해하여 전자로 해석하더라도, 이는 소크라테스 자신이 종국에 터득한 철학과 심각한 모순이 있습니다. 다음 회에 살펴보겠지만, 그의 철학의 근간은 세상에는 상대적이지 않고 제한적이지 않는 ‘절대적 진리’나 ‘궁극적 선’이 있다는 것이고, 그것은 자신과 같은 소수의 지적 특권자만 터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의 순수한 의도는 그가 종국에 터득한 이런 철학과는 전혀 맞지 않습니다. 어쩌면 그가 말하는 지식과 능력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고 스스로 전지전능하다고 생각하는 오만하고 뻔뻔한 사람은 그의 대화 상대방이 아니라, 오히려 그 자신이었을지도 모릅니다.

후자라면 어떨까요? 그의 제자들과 달리 그의 철학의 심오함을 이해하지 못하는 일반시민이나 그의 위와 같은 독선적인 철학에 반대하는 다른 철학자의 입장에서는, 소크라테스의 자신이 무지하다는 겸손과 오직 충만한 이타심에 따른 상대방에 대한 무지성찰 권유는, 단지 ‘상대방 면박 주기’와 ‘자기 자랑질’로 여겨질 것은 당연합니다.  

그의 주특기, ‘상대방 면박주기’와 ‘자기 자랑질’

그렇다면 소크라테스가 스스로 지혜롭다고 생각하거나 그렇게 소문난 정치인, 학자들을 만나 그들의 지혜를 확인하는 방법은 어떠한 것이었을까요? 그 방법 속에도 그 특유의 ‘상대방 면박 주기’과 ‘자기 자랑질’이 녹아 있습니다.

흔히들 소크라테스의 대화법이 탁월한 대화방식이었던 양 칭송합니다. 그러나 실제 그것은 자신은 결코 그에 대한 답을 내놓지 않으면서, 자신도 결코 쉽게 정의를 내릴 수 없는 추상적 질문을 계속 상대방에게 하고는, 상대방이 이에 대하여 마지 못하여 답변을 하면 그것에 논리적, 현실적 모순이 있음을 지적하며 이를 논박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우리가 그런 대화를 경청하는 제3자였다면 궁지에 처한 상대방을 보며 나름 재미를 느꼈을 수도 있었을 것이지만, 우리 자신이 그 대화의 상대방이 된다면 얼마나 기분이 나쁠까요? 지혜를 얻고자 왔다며 또는 지혜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자며 접근해서는, 오직 우리에게만 꼬치꼬치 추궁하듯 질문하여 궁지에 처하게 하고는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당신은 정말 무식한 사람이었군요”라고 선언을 해버리니 말입니다. 그런 불운에 처한 불쌍한 트라쉬마코스와 히피아스는 이런 소크라테스 대화법의 부당함을 지적하며 분연히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지만, 소크라테스는 그들의 소매를 강제로 잡아끌며 그런 대화를 계속하자고 합니다.

소크라테스는 이런 대화법이 서로 지혜를 터득하고 상대방 스스로 무지함을 반성케 하는 탁월한 방법이라고 하겠지만, 대화 상대방에게는 대화가 아니라 대화를 가장한 고문이고, 생지옥도 이런 생지옥이 없었을 것입니다.

▲ 아테네 전경.

법정에서도 멈출 수 없는 그의 본능

그는 자신의 목숨이 걸려 있는 절체절명의 엄숙한 법정에서도, 이러한 자신의 평생의 주특기인 ‘상대방 면박주기’와 ‘자기 자랑질’로 일관합니다. 다만 그 대상이 정치인, 작가들에서 배심원과 방청객들으로 바뀌었을 뿐입니다. 그래서 그는 배심원들과 방청객들로부터 수차 야유를 받았고, 급기야는 유무죄 판단에서보다 불리한 양형평결(사형선고)마저 받게 됩니다. 

내가 이런 일을 하는 것은 그것이 신의 명령이기 때문이오. 그리고 내가 생각하기로는 이 나라에서 신을 위한 이러한 내 봉사 이상으로 큰 선(善)을 아직 여러분이 받아 본 적이 없을 것이오……만일 여러분이 나를 사형에 처한다면, 그것은 나의 손해라기보다 오히려 여러분의 손해가 될 것이오……지금의 변론도 내가 나 자신을 위해서 하고 있는 것이 결코 아니라, 오히려 여러분을 위한 것이오. 여러분이 나를 유죄로 평결함으로써 신이 주신 귀한 선물에 대하여 잘못을 저지르는 없도록 하기 위해서인 것이오……

나는 다른 사람처럼 아이들까지 동원하여 여러분에게 무죄 투표를 해달라고 부탁하지 않을 것이오……배심원에게 부탁한다든가 부탁해서 무죄를 받는다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닐뿐더러, 오히려 배심원들을 가르쳐서 설득해야 할 일이라고 보오   

(유죄선고를 받고 스스로 양형을 제의하는 절차에서) 내가 정의에 합당한 평가로 내가 받아야 할 형벌을 제의해야 한다면, 내가 받아야 할 형량은 영빈관에서 대접을 받는 것이오……굳이 벌금형을 제의해야 한다면 아마 은화 1므나 정도면 낼 수 있을 것이오. 그렇다면 그 금액을 제의하기로 합니다. 다만 여기 있는 플라톤과 크리토부로스, 아폴로도로스가 은화 30므나의 벌금형을 제의하라고 권하고 그들이 보증을 하겠다니, 그러면 그 금액을 제의하기로 합시다

그가 절대적 진리를 터득한 최고의 사상가이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의 사상을 지킨 성인일수는 있어도, 적어도 그는 생활의 의무를 저버리고, 하층 시민들을 경멸하고, 동료 시민들에게 모욕감을 주고, 배심원들과 법정을 농락하고, 자신만의 말만 진리라고 주장하는 아주 형편없는 시민이었다고 하면, 너무 심한 폄하일까요?   

▲ 1655년 화가 보멘다엘(Van Bommendael)의 그림, 소크라테스의 처인 크산티페가 소크라테스의 머리 위에 오물을 붇고 있다.

그는 최악의 사상사이기도 한가?

그러나 사상가나 예술가의 위대함은 그가 인간과 시민으로서의 의무와 책임을 얼마나 성실히 수행 하였는가 여부로 판단할 수 없습니다. 평생 귀족 부인들을 등쳐먹으며 살고 자신을 뒷바라지하는 동거녀를 경멸하여 하녀처럼 다루고 5명의 자녀들 모두를 고아원에 보내버리고 자신에게 도움을 준 모든 지적 동료들을 비난하고 저주한 루소와, 평생을 유산과 자본가인 친구의 도움 속에서만 살고 노동자와 빈민의 해방을 주장하면서도 귀족적 취향을 즐기고 자신의 동료들과 끊임없이 불화를 일으켰던 마르크스도, 사상과 정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한 위대한 사상가들중 한명입니다.

이제 그의 사생활이나 교제, 대화, 공부 방식의 문제점은 접어두고 그의 정신세계로 가봅시다. 흔히 알고 있듯 그를 자유와 평등․민주주의의 수호자로 평가하는 것이 과연 정당할까요? 그 주요한 근거가 되는 것은 ≪변명≫에서 행한 그의 변론인데, 과연 그의 변론은 자유와 평등․민주주의의 수호를 말하는 것이었을까요? 이는 그가 재판과정에서 자신에 대한 反민주 혐의를 부인하는 두 번째 변론 내용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의 두 번째 변론을 들어봅시다.      

◇ 최용현 약력
 
▲ 학력 
  - 청주신흥고
  -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
  - 제40회 행정고시, 제2회 지방고시 합격
  - 제40회 사법시험 합격
 
▲ 경력 
  - 대구지방검찰청 검사
  - 창원지방검찰청 거창지청 검사
  - 서울북부지방검찰청 검사
  - 청주지방검찰청 검사
  - 법무법인 청남 대표변호사 
  - 공증인 최용현 사무소 개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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