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 읽기 (4)

자연은 인류를 육체적, 정신적 능력에서 평등하게 창조했다……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학≫에서 지배에 적합한 사람이 따로 있고, 남을 섬기는데 적합한 사람이 따로 있다고 주장하고 이런 불평등을 자신의 학설의 기초로 삼았다……그러나 그의 이런 주장은 이성에 위배될 뿐만 아니라 경험에도 위배된다. 왜냐하면 자기가 주인이 되기보다 차라리 남의 지배를 받는 것이 낫다고 생각할 바보는 세상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그러므로 자연이 인간을 평등하게 만들었다면 그 평등은 인정되어야 하고, 가사 자연이 인간을 불평등하게 만들었다고 하더라도 스스로 평등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평등한 조건에서가 아니면 평화상태에 들어가려고 하지 않으므로 그런 평등은 인정되어야 한다. - 홉스의 ≪리바이어던≫중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람은 결코 평등하게 태어난 것이 아니며, 어떤 자는 노예가 되기 위해, 어떤 자는 주인이 되기 위해 태어난다고 말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옳았다. 그러나 그는 결과를 원인으로 착각하고 있었다……만일 본성이 노예인 사람이 있다면 오히려 그것은 일찍이 자연의 원리를 거역하고 노예가 된 사람들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폭력이 처음 노예를 만들고 그들이 거기서 벗어나려 노력하지 않았기에 그들은 영원히 노예에 머무르게 된 것일  뿐이다. - 루소의 ≪사회계약론≫중

사람들의 타고난 재능의 차이는 실제로는 우리가 아는 것보다 훨씬 덜하다. 그리고 다양한 직업의 사람들 중 유난히 뛰어난 천재를 보면 실제로는 노동 분화의 결과인 경우가 많다. 철학자와 짐꾼을 예를 들더라도, 크게 다른 이 두 사람간의 차이는 천성의 결과라기 보다는 습관, 관습, 교육의 결과일 가능성이 더 크다 -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중

근대는 2천여 년을 지배하였던 소크라테스에서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까지 이어지는 위대한 교사들의 세계관에 대한 부정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위대한 교사들은, 인간은 직업적․신체적 소질과 지적․윤리적 능력에서 차이가 있기에 그에 맞게 사회적 차별과 위계를 두어야 하며 오직 그 차별과 위계 속에서 각자에게 주어진 역할만 열심히 수행할 때 전체가 유기적으로 조화를 이루어 훌륭한 사회가 성립될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 홉스의 <<리바이어던>>, 루소의 <<사회계약론>>, 스미스의 <<국부론>>.

근대, 소피스트적 세계관의 부활

그들과 달리, 당대 아테네의 소피스트(Sophist)들은 개인간의 소질과 능력의 차이는 그것으로 사회적 차별과 위계를 만들 정도로 심대한 것도 아니고, 그러한 차이도 태생적이거나 불변의 소여가 아니라 오히려 인위적 차별과 위계의 결과이며, 가사 그러한 차이가 있더라도 모든 인간이 평등하고 동등한 사회를 구성하는 것이 보다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리고 고대 아테네 민주정체는 이러한 생각을 실천에 옮겼던 것입니다. 우리 인류가 위대한 교사들의 악령에서 벗어나고, 이러한 아테네의 시민들과 소피스트들의 자유적․평등적 세계관을 복원하는 데는, 2천여 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던 것입니다.

나중에 이러한 근대인들의 세계관은 ‘자유주의’라는 이름을 얻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자유롭고 평등하다는 자유주의는 인민대중들에게 상당히 매력적인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세계관으로, 근대의 새로운 지배계급과 엘리트들은 전제군주와 귀족계급에 대항하여 인민대중을 광범위하게 동원할 수 있었고 그것을 기반으로 정치적․사회경제적․이데올로기적 모든 권력을 쟁취하였습니다. 18세기말 근대혁명의 상징과도 같은 프랑스 인권선언과 미국 독립선언이 그 처음에 “인간은 자유롭고 평등한 권리를 갖고 태어났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다는 사실을 자명한 진리로 받아들인다”라는 문구로 시작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변화된 세계관을 반영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위대한 교사들의 세계관이 폐기된 근대에 이르러서는 그들의 ‘정치철학’도 폐기되었을까요? 근대인들은 위대한 교사들의 정치철학에 근거한 고․중세의 신분적이고 위계적인 정치를 폐지하고, 모든 인민대중이 자유롭고 평등한 고대 아테네와 닮은 ‘민주주의’를 달성하였을까요?

그렇다면 그들의 정치철학의 운명은 ?

흔히들 근대와 더불어, 예컨대 17-8세기 근대의 계몽주의 사상과 더불어 혹은 18세기말의 프랑스 혁명․미국독립전쟁과 더불어 ‘민주주의’가 시작되었다고 생각하지만, 이는 전혀 사실과 다릅니다. 지금과 같은 민주주의가 수립된 것은 그로부터 1-2세기가 지난 후의 일입니다.

근대의 지배계급과 엘리트들은 ‘자유주의’를 신봉하였지만, ‘민주주의’를 신봉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도, 근대의 혁명과정에서 일시적 필요에 의하여 동원되었던 인민대중들이 혐오스럽고, 이들의 민주주의의 요구(그것이 고대 아테네의 인민자치를 의미하든 아니면 인민 대다수의 지지와 선출에 의한 대의민주주의를 의미하건)가 두려운 것은, 위대한 교사들과 매한가지였습니다. 미국 독립과 건국의 주역으로 2대 대통령을 지낸 존 애덤스(John Adams, 1735-1826)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한 국가에서 약 1,000만 명의 국민이 부유하든 가난하든 어떤 정책 결정을 위해 한 자리에 모인다고 상상해보자. 토지나 집 혹은 기타 개인적인 사유재산을 가진 자들은 그중 100 혹은 200만 명에도 미치지 못할 것이다……만약 모든 사항들이 다수의 투표에 의해 결정되어야만 한다면……사유재산을 갖지 못한 800 혹은 900만 명의 다수는 100 혹은 200만 명의 소수가 가진 사유재산을 찬탈하려 할 것이다……다수는 우선 가난한 자들의 부채를 모조리 탕감하고, 세금은 부유한 자들에게 더욱 무겁게 부과하고 가난한 자들은 세금을 아예 내지 않게 할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모든 것들을 투표에 따라 완전히 공평하게 나누자고 요구할 것이다. 이런 상황이 벌어지게 되면 그 이후는 어떻게 되겠는가? 게으른 자들, 사악한 자들, 무절제한 자들은 모두 낭비와 도락에 빠져들어 자신들이 나누어 가진 모든 것을 팔아 치운 뒤, 그것을 사들인 자들에게 다시 새로운 분배를 요구할 것이다. 이와 같은 이념이 사회에서 인정되는 순간 사유재산은 더 이상 신성하지 않은 것이 되고, 이를 보호하기 위한 법이나 공공의 정의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고, 무정부 상태나 참주정이 시작될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지배를 유지하기 위하여(그들은 그것을 고상하게 자유, 문명, 이성 등으로 표현하였습니다), 혁명과정에서 과잉활성화 되었던 인민대중들과 꿈틀거리는 민주주의 사상을 정치과정에서 배제되고 폐기시켜야만 했습니다. 그것은 필연적으로 피의 학살을 동반하여야 하는 것이고 실제 역사도 그러하였지만, 이와 더불어 일견 그럴듯한 ‘철학적’ 휘장(정치철학)이라는 정당화 과정이 필요하였습니다.

▲ 플라톤(왼쪽)과 아리스토텔레스.

근대, 위대한 교사들의 재림(再臨)

2천여 년전에 이와 똑같이 ‘민주주의’에 대한 혐오와 두려움을 이야기 하고, 그것을 막기 위한 정치적 이상을 펼치고 현실적(대안적) 정치기획을 도모한 정치사상가들이 있습니다. 바로 위대한 교사들입니다.

위대한 교사들에게 민주주의는 ‘무지한 빈민에 의한 빈민을 위한 빈민의 정치’로 인간의 모든 고귀한 성취와 이상을 말살하는 혐오스럽고 두려운 정체였습니다. 그들은 민주주의는 인간의 고귀한 성취인 ‘신분과 재산’으로 제약되고, 고귀한 이상인 ‘탁월함’으로 제한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들은 신분과 재산 규모에 따라 정치적 지위와 권리 권한을 차등적으로 배분하고, 추첨 대신 선거제도의 전면 활용․계급별 대표 할당․재산 자격 요건을 부과한 차등적 선거․정치활동에서의 귀족과 부유층에 대한 편향적 강제 등 정치를 親신분적․親재산적으로 운용하는 정치체제를 대안으로 제시하고, 그것을 ‘탁월함’으로 포장하여 보다 훌륭한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서는 지적․윤리적 탁월함을 갖춘 엘리트들이 정치를 전담하거나 일반 시민보다 높은 정치적 지위와 주요한 정치적 권한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통상적으로, 그들의 정치철학은 이상에서 현실로, 즉 <이상적 기준으로서의 ‘탁월함’ → 탁월함의 모호성 → 그 현실적 대안으로서의 ‘신분과 재산’ → 신분과 재산으로 민주주의를 억제 → 현실의 민주정체에 대한 우려와 개선>으로 읽힙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 진행순서가 정반대입니다. 전회에 지적한 것처럼 모든 정치사상의 시작은 고매한 이상이 아니라, 불만스런 현실입니다. 실제 현실은 그들의 철학적 진행과 정반대로, <현실의 민주정체에 대한 귀족과 엘리트들의 혐오와 두려움 → 신분, 재산, 엘리트주의를 기반으로 한 정치질서에 대한 희구 → 신분, 재산, 지적 우월함에 탁월함이라는 철학적 휘장>의 순으로 진행되는 것입니다.

‘탁월함’이라는 망령의 부활

근대의 지배계급과 엘리트들이 직면한 위기 상황도 위대한 교사들이 직면하였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위기에 대한 이상적, 현실적 대응도 위대한 교사들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정치이념과 정치질서를 구축하는데, 위대한 교사들의 정치적 이상과 현실적 정치기획을 완전히 베끼고 있습니다. 먼저 그들은 위대한 교사들의 정치적 이상에서의 핵심 키워드인 ‘탁월함’이라는 개념을 다시 불러냈습니다.

나는 모든 사람들 중에서 일종의 여유로움으로 자유 교육을 받을 수 있고 교양을 함양할 수 있고 마침내 공적인 문제들에 관심을 가질 수 있는 그런 계층을 자유로운 계층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계층은 여타 인민의 이익과 다른 이익을 가지고 있지 않다. 이 자유로운 계층은 모든 점에서 전체 국민의 훌륭한 대표자가 될 수 있을 정도로 교육 받았고, 정직하고 품위 있는 시민들을 다수 포함하고 있다. - 시예스의 ≪제3신분이라 무엇인가≫중

시민이 선출된 소수의 대표에서 정부를 위임한다면……선출된 집단의 지혜는 자국의 진정한 이익을 가장 잘 분별케 할 것이며, 그들의 애국심과 정의에 대한 애정은 일시적이고 부분적인 이해관계 때문에 국가의 이익을 희생시키지 않을 것이다……모든 정치체제의 목표는 우선 그 사회의 공익이 무엇인가를 판단할 최고의 지혜와 그러한 공익을 추구하는 최고의 덕성을 지닌 사람들을 지도자로 확보하는 것이거나 확보해야 하는 것이다.- 매디슨 등의 ≪페더럴리스트 페이퍼≫중

모든 인간살이에서 이해당사자 본인은 자기 일에 대해 마땅히 발언권을 가져야 한다……그러나 모든 사람이 자기 주장을 할 권리를 가져야 한다는 것과 모두가 똑같은 발언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은 전혀 다른 말이다……인품이나 지적인 면에서 상대적으로 더 뛰어난 사람의 생각과 판단이 열등한 사람의 그것보다 더 가치가 있다고 보아야 한다. 만일 국가제도가 모두에게 똑같은 가치를 부여한다면 그것은 잘못이다. 둘 중에서 더 현명하거나 인품이 훌륭한 사람이 더 나은 대접을 받을 자격이 있다……바보, 그것도 아주 구제불능의 바보가 아닌한, 사람들중에는 생각과 심지어 희망사항까지 나의 것보다 더 큰 배려를 받아야 마땅한 예외적 존재가 있다는 사실을 누구나 인정할 것이다 - 밀의 ≪대의정부론≫중

나중에 보겠지만, 프랑스의 시예스(Emmanuel-Joseph Sieyès, 1748∼1836), 미국의 매디슨(James Madison, 1751∼1836), 영국의 밀(John Stuart Mill, 1806∼1873)은 근대 정치사상과 근대 정치에서 핵심적인 인물들입니다. 이들은 모두 사회적 지위와 재산을 바탕으로 훌륭한 교육을 받고 훌륭한 인품을 소유하고 있다고 사회적으로 인정받은 소수의 엘리트들[근대인들은 이를 ‘자연귀족’이라고 표현하기도 하였습니다. 여기서 ‘자연(natural)’은 중세의 ‘세습’귀족과 대비되는 말입니다. 그들은 중세의 귀족들을 몰아냈지만, '귀족'이라는 단어 자체는 그들의 허영심을 충족시키기에 안성맞춤이었나 봅니다]이 정치영역을 전담하는 것이 정의롭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놀랍게도 이미 2천년 전에 고대 아테네의 위대한 교사들이 ‘탁월함’이라고 주장하던 것이었습니다.

▲ 시예스의 <<제3신분이란 무엇인가>>, 매디슨 등의 <<페더럴리스트 페이퍼>>, 밀의 <<대의정부론>>.

재산과 선거, 근대정치를 디자인하는 2대 지주

그들이 빌린 것은 위대한 교사들의 정치․정치인․정치적 지식에 대한 태도와 탁월함이라는 애매모호한 정치용어 뿐만이 아닙니다. 그들은 위대한 교사들이 그러한 反민주주의(과두주의 혹은 엘리트주의) 정치를 만들기 위하여 구상한 정치제도와 질서도, 위대한 교사들에게서 빌려왔습니다. 그것은 ‘재산과 선거’를 활용하는 것이었습니다.

먼저 고대 아테네의 인민자치적 민주주의가 명백히 거부되었습니다. 근대의 지배계급은 놀랍게도(?) ‘선거’를 기반으로 한 ‘대의제도’와 ‘민주주의’를 대립적으로 이해하였습니다. 혁명 후 미국과 프랑스 건국을 주도한 매디슨과 시예스 등은 소수의 엘리트들이 정치를 전유하는 것이 사회 정의와 전체 이익에 부합한다는 증명되지도 않은 전제를 바탕으로, 인민들로부터 분출하는 정치참여 욕구(민주주의)를 억누르고 기만하기 위하여, 엘리트들만이 대표와 정치적 지배자가 될 수 있는 선거에 의한 대의제도를 창안하였습니다.

이와 더불어 그들은 국가내에서 상당한 재산을 소유하여 국가의 안위에 중대한 관심이 있거나 상당한 세금을 납부하여 국가에 기여하는 부유한 시민들만 정치적 권리를 갖고 정치적 대표가 되어야 한다는 위대한 교사들의 비례적 정의 관념을 실제 법제화하였습니다. 대표적으로 혁명 이후 프랑스는, 시민을 능동적/수동적 시민으로 나누어, 토지를 소유하거나 수일치의 임금과 맞먹는 세금을 납부하는 능동적 시민에게만 선거권을 부여하고, 여기에 더하여 1년 이상치의 임금과 맞먹는 세금을 납부하는 시민에게만 의원이 될 수 있는 자격을 부여하였습니다. 다소의 차이가 있을 뿐 이러한 것은 유럽대륙과 미국 모두 동일하였습니다.

무려 2천년이라는 시차를 두고 반복되는 反민주적 정치기획의 진행경로는 정확히 똑같습니다. 그것은 <민주주의에 대한 지배계급과 엘리트들의 혐오와 두려움 → 신분, 재산, 엘리트주의에 기반한 정치질서에 대한 희구 → ‘재산과 선거의 활용’ → 탁월함으로 포장>입니다. 차이가 있다면, 2천년 후에는 그것이 실천으로 옮겨져 법제도로 현실화 되었다는 점입니다.

선거제도 자체가 反민주적이라고?

그러나 선거 등 정치에서 모든 재산적 제약은 20세 초에 사라졌습니다. 그렇다면 모든 시민들이 자유롭고 평등한 정치적 지위와 권리가 보장되는 ‘보통선거권’ 제도가 실현된 현대에는 이들 위대한 교사들의 反민주적 악령이 사라졌을까요?

‘재산’으로 정치적 지위와 권리에 차등과 위계를 두어야 한다는 것이 反민주적(과두적) 기획임은 명백합니다. 그러나 ‘선거’도 마찬가지로 그러한 기획의 수단으로 활용해야 될 수 있다는 점에는 많은 사람들이 의문을 가질 법합니다. 현대의 우리는 선거제도를 민주주의의 핵심적인 제도로 이해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우리의 중앙선거관리위원회도 ‘선거는 민주주의의 꽃’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이와 관련하여 놀라운 것은 위대한 교사들이 反민주적 정치기획을 도모하면서 선거제도를 재산과 연계시켜 구상하기도 하였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선거제도 그 자체를 反민주적인 제도로 인식(아리스토텔레스, “공직자를 추첨으로 임명하면 민주적이고, 선거로 임명하면 과두적이다”)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똑같은 말을 근대의 몽테스키외와 루소도 반복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통념과 정반대로, 위대한 교사들은 물론 아테네의 일반 시민들도 ‘선거제도 그 자체’를 反민주적 정치제도로 인식하고 있었고, 우리들과 보다 가까운 근대의 지배계급도 그러한 인식을 공유하고 오히려 反민주주의를 관철하기 위하여 선거제도를 도입하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선거제도와 관련된 놀라운 반전의 역사의 추적한 마넹(Bernard Manin) 교수는 ≪선거는 민주적인가≫ (원제는 The Principles of Representative Government)에서, 선거제도가 본질적으로 과두적․反민주적 성격을 가졌음을 학문적으로 규명하고 있지만, 그러한 논증이 없더라도 우리는 이를 직감적으로 인식할 수 있습니다.

조금만 둘러보면, 우리의 대통령과 국회의원을 뽑는 공직선거에서부터 초등학교의 반장을 뽑는 선거까지 모든 선거는 과두적․反민주적 속성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선거제도를 통하여 선출된 우리의 대표와 그들에 의하여 임명된 장관, 기관장 등 고위 공직자들은 어떠한 사람들인가요? 그들의 8-90%는 우리 사회의 경제적, 사회적, 지적 최상층 출신들입니다. 그러면 실제 우리 사회에서 맞닥뜨리는 일반 시민들의 8-90%도 바로 그러한 사람들인가요? 정치적 평등이라는 헌법적 선언과 법적 보장이 있지만, 과연 일반 회사원․자영업자․비정규직․가정주부들이 개인적 생존의 문제를 팽개치고 수억 원에 이르는 선거비용을 감당하면서 일반 시민의 대표로 나설 수 있을까요? 그렇게 모인 우리 사회의 최상층 엘리트들이 과연 자신들의 개인적․계급적 이익을 떠나 우리 공동의 이익만을 위하여 정치를 수행한다고 할 수 있을까요? 그런 그들이 親서민․親노동적 정책을 내놓을 것이라고 상상한다는 것이 오히려 비합리적이지 않을까요? 

물론 선거제도가 민주적 성격도 갖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외면적으로만 그렇습니다. 비록 선거제도가 선언적․법적으로는 정치적 평등의 얼굴을 하고 있지만, 그 내면은 귀족적․과두적 본성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런 야누스적 측면으로 인하여 ‘反민주적’ 이상을 위한 선거제도의 효용성이 큰지도 모릅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제대로 혼합된 혼합정체는 민주정체의 요소와 과두정체의 요소를 모두 포함하는 것처럼 보이면서 동시에 그중 어느 쪽 요소도 포함하지 않는 것처럼 보여야 한다”라고 말하는 있는 것처럼.

비록 선거제도 그 자체가 과두적․反민주적 본성을 갖고 있더라도, 현대의 우리는 선거제도 그리고 그것의 또 다른 표현인 대의민주주의를 내팽개치고, 모든 인민의 정치적 평등성이 제대로 실현되는 고대 아테네의 민회민주주의 혹은 추첨민주주의(이에 대하여는 이전의 페리클레스의 전몰자 추모연설 읽기를 참조)로 되돌아 갈 수는 없습니다. 현대의 우리가 대의제도 그리고 그 근간으로서 선거제도 자체를 피할 수는 없는 것이라면, 현대 민주주의의 미래는 우리의 의회와 선거를 얼마나 민주주의적으로 만드느냐에 달려 있다고 할 것입니다.     

▲ 마넹의 <<선거는 민주적인가>>, 마넹은 이 책에서 선거제도의 놀라운(우리의 상식과 정반대의) 반민주의 역사를 추적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민주주의’와 ‘정치’란

철학적 휘장으로서의 ‘심오함’ 이외에, 反민주주의를 위한 위대한 교사들의 정치철학의 치명적 매력중 또 하나는 ‘상식성’입니다. 그들의 정치철학은 심오하고 난해하지만, 그와 정반대로 지극히 일반인의 상식에 기초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러한 상식성은 민주주의에 치명적입니다. 그들은 당대의 아테네 민주주의에 이렇게 반문합니다.

“우리는 아프면 유능한 의사를 찾아가고, 항해할 때는 유능한 선장에 의존하고, 좋은 음악을 위하여 훌륭한 연주자의 연주를 듣는다. 이렇게 우리는 치료, 항해, 연주에서 우리보다 훌륭한 의사, 선장, 연주자에게 의존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독 정치에서만은 무작위 추첨으로 대표를 뽑아야(고대 아테네 민주정체)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훌륭한 의사, 선장, 연주자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정치에 탁월한 지식, 기술과 윤리를 가진 자를 우리의 대표로 뽑아 그들에게 정치를 맡긴다면, 우리는 보다 올바른 정치적 결정에 이르고 보다 나은 사회를 이룰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정치는 항해나 의료와 달리 선험적․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정답이 없습니다. 무엇이 올바른 정치적 선택인가, 무엇이 모든 사람에게 유익한 결정인가에 대한 대답은 모두가 다릅니다. 전회에 언급한 로버트 달(Robert Dahl, 1915∼2014)의 지적처럼, 그러한 많은 대답들 중 엘리트들의 대답이 이에 대한 정답일 것이라거나 그들이 모든 사람에게 유익한 결정을 할 것이라는 주장은 전혀 근거가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들은 자신들의 사적, 조직적, 제도적 이익을 올바르거나 모두를 위한 것으로 우리 보다 잘 포장하고 가장할 뿐일지도 모릅니다.

정치는 항상 새로울 수밖에 없는 정답을 만들어가는 과정일 뿐입니다. 더욱이 그것이 민주정치라면 그러한 정답을 만드는 과정에 모두가 참여하거나 모두의 의사나 이익이 반영되어야 할 것입니다.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처럼 자신만이 진정한 정답을 아는 듯이 행세하는 철학자들도, 사회적 지위와 부로 휼륭한 교육을 받아 누구보다 똑똑하다고 주장하는 귀족도, 무지하고 냄새나는 노동자와 시장의 아주머니와 마찬가지로 오직 1사람으로서의 몫으로 정치적으로 참여 혹은 반영되어(모두가 함께 또는 동등하게 기회를 갖지 못한다면, 그들의 계급적․직업적․지역적․성별적․연령적 제 분포에 따라 비례적으로 대표되는 방식으로), 무엇이 올바른 정치적 선택인가 무엇이 모두에게 유익한 결정인가에 대한 해답을 만들어 가는 것이 바로 민주주의입니다.

선장 의사 악기연주자도 그렇지 않거늘, 어떻게 ‘정치적 대표’만은 제비뽑기 뺑뺑이로 뽑을 수 있냐고요? 그에 대한 대답은 간단합니다. 그것이 항해도 의료도 연주도 아닌, 모든 시민들이 평등하게 참여하고 대우받는 정치 바로 민주정치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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