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구 청운대학교 산업기술경영대학원장

김상구 청운대학교 산업기술경영대학원장.

대학이나 단체 등에서 강의나 강연이 끝나고 나면 으레 하는 일이 수업평가(강의평가)다. 주로 강의가 유익했는지, 재미있었는지부터 강사가 첨단 기기를 잘 사용했는지, 목소리는 작지 않았는지까지 다양하게 수강자에게 물어 본다. 이것은 다음 학기 강의나 강연을 준비하는 강사에게 학생들의 반응을 전달하여 질 높은 강의를 준비하기 위한 과정일 수 있다. 가르치는 사람도 배우는 사람들의 반응을 어느 정도 느끼고는 있지만 그들의 마음을 속속들이 들여다보는 일이 강의에 도움이 될 것이다. 참신한 질문과 진솔한 대답이 강사에게 전달되어 효과적인 강의가 이루어질 수 있게 된다면 수업평가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일 것이다.

수업내용이 쉽지 않은 내용일 때, 강사의 효과적 수업방법은 더욱 빛을 발할 수 있다. 수강자들의 시선을 붙잡기 위해 강사들은 다양한 방법을 시도하고 있다. 칠판에 쓰고 받아 적는 고전적 수업방식만으로는 수강자들의 시선을 모으기 어렵다. 수강생들이 첨단기기에 익숙한 세대이기 때문이다. 수강자들에게 외면 받는 강의는 지속될 수 없다. 대학에서도 학생들의 수업평가가 좋지 않을 때 강사는 교단에서 퇴출될 위기에 내몰린다. 이쯤 되면 강의실에서 선생이 갑이 아니라 수강생들이 갑의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수강생들의 선택을 받은 자만이 지자체 및 단체 등의 강연장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다는 사실은 이미 현실이 된지 오래다. 그러나 대학에서도 이와 같은 평가가 일반화되고 피교육자의 반응을 우선시 할 때, 각 대학의 교육 목표를 성취할 수 있는지는 의문으로 남는다. 대학은 각종 단체의 강연처럼 지식 전달만을 목표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각 대학은 고유의 창학정신과 교육목적, 목표를 갖고 있다. 지식을 전달하지만 왜 전달하는지 뚜렷한 그 목표가 있는 것이다. 청주역을 어디로 가느냐고 누군가가 물어보았고 그것을 단순히 알려 주었을 때 그를 교육자라고 말할 수 없는 이유는 왜 가르치는지 깊은 사유(思惟)가 없기 때문이다. 알고 있는 것을 효과적으로 알려주는 것만이 훌륭한 교육이라고 볼 수 없다. 그러나 요즘 왜 가르치는지 보다는 효과적인 수업방법만이 교육의 알파이자 오메가로 여겨지고 있다. 왜 가르치고 배우는지 교육의 이념이 필요한 시대다.

요즘 각 대학이 교양교육에서 인성교육을 새롭게 부각시키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미국 동부 아이비리그 대학들은 서양의 고전을 읽고 토론하며 글 쓰는 교양교육에 관심을 기울여 왔다. 학생들이 좋아하는 흥미위주의 과목들이 아니라 어떻게 살아야 가치 있는 삶인지를 철학적으로 묻는 듬쑥한 책을 선택해 가르쳐 왔던 것이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교육이란 피교육자를 역사속의 한 존재로 성장하게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학생들의 눈치를 살피는 지식노동자는 이런 역할을 하기 보다는 교단에서 광대 역할을 하기 쉽다. 강의 평가가 좋지 않을 경우 조직의 장은 교육자에게 책임을 묻기 때문이다.

참 교육은 사람과 사람이 긴밀하게 만나는 일이다. 그러나 현재의 학교와 같은 공교육에서는 불가능하기 일이기에 학급당 학생 수를 차츰 줄여왔다. 긴밀한 만남은 둘 사이에 이루어지는 육체적 사랑(에로스)과 같은 것에서 발생하는 일이지만 플라톤은 『향연』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을 빌려 정신적 사랑도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말하고 있다. 사랑은 원래 한 몸이었던 다른 반쪽을 찾아내어 함께 있으려는 갈망이라고 그 당시 최고의 희곡작가였던 아리스토파네스가 말을 하자,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선생 노릇을 하는 여인 디오티마의 입을 빌려 성교를 통한 사랑이외의 사랑도 가능하다고 설명한다. 바로 교육이다. 교육은 생물학적인 짝이 하는 것처럼 자식을 낳아 후세에 남길 수는 없지만 피교육자의 영혼 속에 아름답고 훌륭하다고 여겨지는 것을 보태어 그 결실이 자식처럼 후세에 전해지도록 하는 것이다.

플라톤은 ‘같이 있음’, ‘만남’, ‘성교’를 뜻하는 ‘시누지아’(syunousia)라는 말을 교육이라고 생각했다. 교육은 만남을 통해 선생이 아름답고 가치 있다고 여겨지는 것을 학생에게 전수하는 일이기에 자신의 존재 전체를 걸고 하는 것이다. 선생과 학생의 만남이 관공서의 공무원을 만나 민원을 해결하는 일과 같은 것이라면 그러한 학교는 불행을 약속하는 장소에 불과할 뿐이다.

그래서 아름답고 훌륭한 삶이 무엇인지를 선생과 학생이 고전을 읽고 토론하며 그것을 독립영화로 함께 만들어보는 고대 그리스의 ‘파이데이아’(놀이, 교육)와 같은 모임들이 생겨나고 있다. 누가 잘 가르치는지를 수치화하여 평가하고, 허접한 실용지식 전달에 열을 올려 보았자 우리 삶의 질이 크게 향상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난 후의 일이다. 이런 모임이 활성화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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