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을 생각하며>

종은 쳤다

 

-광장에 운집한 150만 군중
 그들은 함성으로 외친다.

 "하야하라!" "하야하라!"고.
 세계역사에 유례가 없는

 거대한 국민의 쓰나미-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으로부터 시해(弑害)를 당한 뒤 곧바로 전두환 노태우 등 일부 군부세력의 정권 탈취 모의가 한창일 무렵, 미국 하원은 한국 상황에 관한 청문회를 열었습니다.

최규하 국무총리가 얼떨결에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았지만 이미 권력은 군부로 넘어가 있었고 후계자 문제를 놓고 정국은 한치 앞을 내다 볼 수 없을 만큼 짙은 안개에 덮여 있었습니다.

초미의 관심이 집중된 가운데 청문회에는 주한미군 사령관 존 위컴(John Adams Wickham)장군이 한국에서 불려와 증인석에 앉아 있었습니다. 먼저 민주당의 한 의원이 입을 열었습니다. “전두환 소장이 지도자가 될 경우 과연 한국 국민들이 그를 인정하고 따를 것인가?” 이름도 알려지지 않았을 뿐더러 정치적 능력마저 미지수인 그가 대통령이 될 경우 국민들이 과연 수긍할 것 같으냐는 질문이었습니다.

위컴은 망설임 없이 대답합니다. “물론 전두환은 육군 소장에 불과하다. 그러나 걱정 할 필요는 없다. 전통적으로 한국인들은 ‘레밍’의 근성을 갖고 있으므로 누가 지도자가 되던 힘을 가진 사람을 따르게 돼 있다. 한국인들은 민주주의를 하기 에는 맞지 않는 민족이다.” 청문회 참석자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해 5월 광주에서 계엄군에 의해 수 백 명의 시민들이 살육 당하는 참극이 있었지만 전두환은 민주정의당을 창당해 체육관 선거로 어렵지 않게 대통령이 되었고 7년 임기를 마쳤습니다. 그때도 언론은 경쟁적으로 전두환 ‘영웅 만들기’에 앞장섰고 어느 도지사는 “민족의 태양이 나타났다”고 낯 뜨거운 헌사(獻辭)도 아끼지 않았습니다. 일반 국민들 역시 바람에 갈대가 눕듯 “그런가 보다”하고 현실을 받아 들였습니다. 레밍의 속성을 예언한 위컴의 예측은 적중했고 뒷날 그는 대장으로 승진해 육군참모총장에 올랐습니다. 

국민성을 레밍에 비유해 한국인의 자존심을 상하게 한 이 유명한 증언은 군부의 검열로 언론에는 보도되지 못했지만 가톨릭 신부들에 의해  국내에 전해짐으로써 논란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당연히 양식 있는 국민들은 분개했고 화가 났지만 “아픈 데를 찔렸다”는 자성(自省)의 목소리도 있었습니다. 레밍을 닮았느니, 민주주의를 할 자격이 없느니 하는 소리는 솔직히 민망했지만 “아무려면 어떠냐”는 이들이 많았던 게 사실입니다. 

“박근혜는 하야하라”…거대한 쓰나미처럼 국민의 함성이 메아리 치고 있다. 모든 것이 끝났다. 종은 이미 쳤기 때문이다. /Newsis

위컴이 예로 든 레밍(Lemming)은 노르웨이 핀란드 등 북유럽과 북아메리카의 추운지방에 서식하는 들쥐입니다. 몸길이 15cm미만의 다리가 짧은 이 쥐는 겁이 많은 것이 특징으로 힘센 놈이 맨 앞에서 선도를 하면 수천, 수만 마리가 떼를 지어 뒤따라 광야를 몰려 다녀 일명 나그네쥐라고도 부릅니다.

번식력이 유별나게 강한 이 들쥐는 일 년에 두 세 차례씩 여러 마리 새끼를 낳는데 4년 주기로 그 숫자가 폭발적으로 증가해 때로는 수백만 마리가 무리를 짓곤 합니다. 의아한 것은 이 쥐떼가 바닷가 절벽에 다다르면 모두 한꺼번에 물로 뛰어 들어 집단자살을 한다는 점입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학설이 있습니다. 보통은 시력이 나쁜 레밍이 바다를 쉽게 건널 수 있는 작은 강으로 착각해 뛰어 드는 것이라고도 하고 자기장(磁氣場)의 이상에 의한 현상이라거나 개체증가에 따른 먹이부족으로 인한 자살이라는 설이 있습니다. ‘개미’의 프랑스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레밍은 개체수가 늘면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습성이 있는데 지각변동으로 인해 하나의 대륙이 갈라져 절벽이 생겼지만 초기상태의 유전자지도를 유지하고 있는 레밍이 절벽이 있는 걸 모르고 조상들의 길을 따라 가는 것”이라는 색다른 주장을 펴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번 ‘박근혜 최순실게이트’를 통해 권력에 가려진 상상도 할 수 없던 이면의 추악한 모습들을 똑똑히 보고 있습니다. 또한 한 인간의 표리부동한 위선을 확인하고  잘못된 한 표의 선택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가도 분명히 보았습니다. 

그와 함께 우리 자신도 미처 알지 못했던 국민의 집단에너지와 성숙함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크나큰 소득이기도 합니다. 평소에는 아무 힘도 없어 보이는 순한 양 같던 국민들, 그 민초들이 촛불을 들고 광장에 모여 비폭력의 평화로운 집회를 보여줬다는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연출입니다. 추운 날씨도 아랑곳없이 50만, 100만, 150만이 한 공간에 모여 국민의 저력을 보여 준 위대한 퍼포먼스요, 일대 축제였습니다.

1960년의 ‘4월혁명’, 1987년의 ‘6월 항쟁’, 2016년 ‘11월의 촛불집회’, 이것들은 모두 1919년 ‘3·1운동’의 연장선상에 있는 거대한 국민운동입니다.

미국의 정치학자 에리카 체노웨스(Erlca Chenoweth)는 1940년대 이후 2000년대 까지 전 세계의 반정부 운동을 분석한 결과 비폭력운동이 폭력투쟁 보다 성공확률이 높다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시위에 대한 전 세계의 데이터를 모아 분석한 이 보고서는 인구의 ‘3.5%가 지속적으로 비폭력 시위를 계속하면 정권은 반드시 무너진다는 소위 ‘3.5%의 법칙’을 도출했습니다. 현재 한국의 총 인구 5160만명의 3.5%는 180만 명입니다. 그동안의 다섯 차례 전국 시위참여숫자 400만 명, 이 수치는 역사상 유례가 없는 세계사에 기록될 금자탑입니다.

종은 쳤습니다. 박대통령은 이미 끝났습니다. 검찰에 의해 최순실의 공범으로 피의자가 된 신분이고 특검을 받는 처지에 탄핵을 앞두고 있으니 임기가 언제까지인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국민이 박대통령을 버렸다는 사실입니다.

박대통령은 민주주의를 잘 몰랐던 것 같습니다. 본 것이 있다면 아버지가 쿠데타로 정권을 잡아 공포정치로 일관한 철권통치만을 보면서 자랐기에 민주주의 국가에서 대통령의 역할을 착각했던 게 분명합니다.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 세상에 나 홀로 존재한다”는 독선과 아집으로 비정상의 정치를 해 왔기에 오늘 이런 불행을 맞게 된 것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이 비극적 상황은 일찍이 예고됐던 것의  현실화에 다름 아닙니다.

1950년 6·25전쟁 뒤 한국에 와있던 한 미국기자는 자유당 정권의 온갖 파행과 부조리를 보고 “한국에서 민주주의를 기대하는 것은 마치 쓰레기통에서 장미꽃이 피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고 보도한 적이 있었습니다. 말만 민주주의였지, 온갖 편법으로 국민을 속이고 부정부패가 만연됐던 이승만 정권을 보고 도대체 가망이 없는 나라로 그의 눈에 비쳐졌던 것입니다.

나라의 주인은 국민입니다. 천하비일인지천하 천하지천하(天下非一人之天下 天下之天下). 삼천 여 년 전 중국 은(殷)나라 강태공의 ‘육도삼략’에 나오는 이 명구는 “천하는 천자 한사람의 것이 아니요, 만백성의 천하”라는 뜻입니다. 오늘 이 나라 대한민국은 5000만 국민의 나라이지 ‘박근혜대통령’ 개인의 나라는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박대통령은 그걸 착각했습니다. 박근혜는 ‘여왕’이 아니었는데도 말입니다.

나는 이번 서울 등 전국의 50개 도시, 해외각지에서 벌어진 연 400만 명의 평화적인 대규모 촛불 집회를 보면서 한국인임을 새삼 자랑스럽게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필자만이 아닐 것입니다.

수백만 국민이 평화적인 질서 속에서 내뿜는 펄펄 끓는 쇳물같은 이 에너지를 보고 “한국인은 민주주의를 할 자격이 없는 민족”이라고 보도했던 그 기자에게 묻습니다. “이래도 한국민이 민주주의를 할 수 없는 삼류 민족이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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