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연수의 미래하천 프로젝트 '미호천 탐사'

「평사낙안(平沙落鴈)」-남동희

[嗈嗈鳴渦曉天開] 기러기 소리 용용하게 지나간 뒤 새벽하늘 밝아오는데
[十里沙平水碧回] 모래는 십리나 깔리었고 파아란 물은 굽이굽이 도는구나
[關山明月潚湘雨] 관산의 밝은 달과 숙상강 젖은 비에
[消息年年鴈帶來] 해마다 기러기 떼 소식 전해 주네
- 진천군에서 펴낸 『내 고장 전통 가꾸기』 ‘제영’ 편 -

조선시대 남동희 선생은 평산리를 둘러보고 굽이쳐 흐르는 물줄기와 기암괴석과 어우러지는 미호천의 고운모래가 십리나 이어지며 그곳에 기러기가 떼를 지어 앉아 있는 모습을 보고 풍광을 운치 있게 노래했다.

평사리(平沙里)에 접어들었다. 평사리는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이사리(梨峙里), 통산리(通山里)와 병합해 문백면 평산리에 병합되었다. 평사리는 미호천이 휘돌아가며 이루어낸 풍광과 농토가 어우러지는 절경이 일품이다. 산길을 따라 고개를 살짝 넘어 마을에 들어서자 밤꽃 향에 그윽하다. 평온한 산속마을이다. 길가 담 너머 살구나무에 노랗게 익은 살구가 달렸다. 살구하나 따려다 멍멍이와 할머니에게 혼나며 마을에 들어섰다. 언덕위에 정자가 있어 올라섰다. 잠깐 쉬어가도 되는가 여쭈니 “괜찮다”는 답이 들려온다. 몸이 불편해 보이는 어르신이 나오며 “어디서 왔는가?”를 묻는다. 이 집과 정자의 주인이자 평사리의 터줏대감인 민경수씨다. 민 어르신은 은성초등학교 교장선생님 퇴직자로 고향에 돌아와 논밭을 일구며 지내는데 땅이 많아 너무 힘들다 한다. 이 분의 추억에 평사리는 부유한 동네였으며 특히 밤농사를 하는 본인의 집은 매우 부자였다고 한다. 어릴 적 아버지와 매사냥을 한 이야기, 미호천에서 물고기 잡던 이야기 등 이야기가 끊이질 않는다.

마을 입구에서 만난 민경수 씨와 은행나무 아래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탐사대원.

평사는 민씨 집성촌으로 고려말에 형성 된 것으로 추측된다. 고려 충숙왕조(忠肅王朝)에 대제학(大提學)을 지낸 문순공(文順公) 민 적의 후손이 평사로 내려와 터를 잡고 인조(仁祖) 20년 사마벼슬에 합격한 민 태중(閔泰重)이 관직에 나가지 않고 고향에서 학문연구와 후배양성에 힘쓰면서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선생과 교류 하였다. 천혜경관의 아름다움에 감탄한 우암은 마을을 평사(平沙)로 지어주었다. 수 만년 세월 동안 미호천 물줄기에 깍여진 바위 절벽, 끝없이 펼쳐진 은빛 모래사장, 휘감아 돌아가는 물줄기를 따라 이어지는 바위병풍이 천혜경관을 만든다. 옛날 조정에 진상했다는 평사밤은 아직도 미호천 둔치에 숲을 이루고 옛 영화를 기록한다.

민경수 씨 정자에서 바라본 미호천.

정자 절벽 아래로 바라보이는 미호천은 과히 일품이다. 물속의 모래가 햇빛에 반사돼 금빛이 난다. 밤꽃과 어우러진 농토의 풍경 또한 작품이다. 마을을 내려서 천 가까이 모래사장에 다가섰다. 하늘을 치솟아 오르듯 청벽이 시야를 넘어선다. 물은 굽이치며 바위를 때리고 깊은 물줄기를 만들어 낸다. 모래는 여유있게 물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은빛 모래 위를 흐르는 물위에 발을 담그고 싶다. 아니 몸을 풍덩 던지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하지만 가까이 본 미호천의 물줄기에는 축산폐수로 인해 부유 물질이 떠다니고 10리도 넘게 펼쳐졌다는 모래사장은 하류의 보로 인해 육상식물들이 침투해 잠식하고 있다. 천혜절경 평사십리는 편리성을 추구하다 뒤돌아보지 못한 우리의 탐욕과 이기심으로 서서히 죽어 가고 있다. 기러기는 자취를 감춘지 오래고 물고기는 먹을 수 없다. 해안보다도 길다는 은빛 모래사장은 미루어 짐작 할 수밖에 없다. 끝없이 펼쳐지는 은빛 모래사장을 품고 흐르는 물줄기에 하늘 높이 솟아 오른 청벽이 있다. 취적대(吹笛坮)다. 그 위의 정자에 앉아 조선후기의 학자 한원진(韓元震)[1682~1751]은 이렇게 노래했다.

적대청람(笛臺晴嵐)-한원진(韓元震)[1682~1751]

평사리 모래사장.

신선이 놀다 간 자취 천년이나 지난 듯[游仙往跡隔千秋]
취전대만 남아 있고 벽류만 보이네[惟有高臺俯碧流]
맑게 빛나는 봉우리 반이나 잠겼는데[隱約晴嵐籠半面]
생황 소리 산머리에 울려 퍼지는 듯하구나[鸞笙彷佛響山頭]
- 진천군에서 펴낸 『내 고장 전통 가꾸기』 ‘제영’ 편 -

신선이 피리를 불고 갈 정도로 아름다웠던 미호천은 오폐수와 수중보 등으로 인해 옛 모습은 잃었지만 옛 선인들의 노랫소리를 통해 상상 할 수 있다. 평사낙안(平沙落雁)과 적대청람(笛臺晴嵐)은 앞으로 우리가 미호천을 어떻게 만들어 가야 하는지를 설명해 준다.

함께 탐사를 한 충북시민재단 강태재 이사장은 ‘미호천 광역협의체’를 구성을 강력히 주문했다. 충북과 중부권의 젓줄인 미호천은 4개의 광역 시도와 8개의 기초 지자체를 품고 있는 곳이다. 상·하류, 지역, 지자체간 이해와 관점이 다르고 산업구조도 다르다. 미호천 광역협의체를 구성해 그 안에서 논의를 해야 한다. 예전에 하천이 치수와 이수의 개념이었다면 이제는 친수의 개념으로 전환해야 한다. 어떻게 관리하고 수질을 개선 할 것인가를 논해야 한다. 하천에서 삶을 즐겨야한다.’고 역설한다.

평사리 선촌서당.

마을 안쪽으로 들어섰다. 청학동 김봉곤 훈장의 선촌서당이 터를 잡았다. 선촌서당은 선비가 사는 마을의 서당이란 의미로 김봉곤훈장 자신을 비유한 말인 듯하다. 입구에 장승과 인사를 나누고 들어섰다. 2층 한옥으로 만들어진 선촌서당은 정문이 남쪽인 미호천을 향해 있다. 차 한 잔 드시라는 학도의 권유로 여유롭게 차를 마시고 2층 누각에 놀라서니 잔잔한 미호천의 풍광이 눈앞에 펼쳐진다. 대문을 나서니 연못이 있고 그 가운데로 다리를 놔 길을 만들었다. 누각의 기둥엔 이런 글귀가 있다.

지족자 빈천역락(知足者 貧賤亦樂)  자신의 위치에 만족하면 가난하여도 행복하고
불지족자 부귀역우(不知足者 富貴亦憂) 자신의 위치를 모르면 부유하여도 근심이 많다.

현재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고 허망 된 과욕을 미호천 물줄기에 흘려보내고 대문을 나선다. 그네에 70줄의 강태재이사장님을 몸을 맡긴다. 동네 아낙의 몸놀림보다 유연하다. 그것을 바라보며 유용기자(KBS시사투데이 진행)는 ‘청년 강태재’라 칭한다. 양청산이 흘려내려 미호천에 맞닿는 곳에 오솔길이 있다. 이 길을 우리는 그네길이라 명명했다. 그네가 설치되어 있는 것도 그려려니와 ‘위로 오르면 산이요 앞으로 오르면 물’이라 또 미호천의 물이 멀리서 보면 청정한데 가까이 보면 사람이 들어가기 꺼릴 만큼 혼탁해 널 띠듯 그네 타듯 보여 ‘그네길’로 부르기로 했다.

평사리 하류의 미호천.

미호천 자락을 따라 길은 이어져 있고 중간 중간 기암절벽을 또 하나의 풍치를 자아낸다. 충북 학생종합수련원까지 이어지는 약 1km의 구간은 어는 길 보다도 아름다운 곳이다. 숲과 기암절벽 그리고 천(川)과 모래사장이 하모니를 만들어 낸다. 미호천은 빼어난 경관과 농업용수로서의 역 할 뿐 아니라 역사문화의 보고이다. 예로부터 사람들은 물 주위에 모여 살면서 마을을 형성했다. 마을의 안녕을 비는 동제부터 어업 농업의 풍년을 기원하는 기원제 그리고 서로 영토를 확장하려는 부족 간의 전쟁 등 삶의 흔적으로 만들어진 다양한 역사가 구석기부터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그간 사람들은 하천을 홍수를 일으키는 주범 및l 쓰레기 등 오물을  처리하여 쓸려 보내는 공간으로 인식하고 그 주위를 떠났다. 이제 하천을 친수공간으로 만들어가는 새로운 관점이 필요하다. 하천이 깨끗해지고 물고기가 돌아오고 모래사장이 펼쳐지며 사람들이 멱을 감고 철렵을 하는 공간으로 바뀌어야 한다. 사람에게 있어 하천은 핏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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