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츠슈나이더의 ≪절반의 인민주권≫ 읽기 (1)

지난 5월 26일 충주의 한 미용실 원장이 장애인 여성에게 머리 염색을 해주고 52만원을 결제하여 문제가 되었습니다. 도움을 요청받은 장애인 단체 관계자와 경찰이 중재에 나섰으나, 미용실 원장은 정당한 요금이라고 맞섰습니다. 이 사실이 언론에 알려지자 수많은 시민들이 원장의 처사에 분노하였고, 여론에 밀린 경찰은 원장의 추가적인 부당요금 청구 사례를 밝혀, 결국 이 원장은 사건 발생 후 1달 여만에 이례적으로 구속까지 되었습니다.

같은 달 28일에는 서울 광진구 지하철 2호선 구의역 승강장에서 스크린도어를 점검하던 수리용역업체 직원 김모군이 전동차에 치여 숨졌습니다. 이 사건은 이전의 2-3차례의 유사사건처럼 김군의 과실로 종결될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컵라면을 가방에 넣고 다니며 시간에 쫓겨다니며 일했던 김군의 안타까운 사연이 언론과 인터넷을 통하여 알려지면서 수많은 시민들이 추모에 동참하였고, 결국은 원청업체와 서울시장의 사과와 법적 책임 인정, 스크린도어 수리 체제의 구조적 모순과 비리에 대한 폭로, 이전의 유사사건에 대한 재조사에까지 치달았습니다.

구의역 추모 포스트잇.

언론과 SNS을 통한 시민들의 분노와 동참이 없었다면, 이 두 사건은 그 이전의 수많은 사례들처럼 그냥 묻혔을 것입니다. 장애인 여성은 정상인이자 미용전문가인 원장에게, 하청회사의 비정규직이었던 김군의 가족은 거대한 원청업체와 서울시를 상대로 싸워 이길 수 없었을 것입니다. 어디 이 사건들만 그랬을까요. 한화그룹 회장의 사적 복수, 대한항공 땅콩회항사건, 수많은 갑질사건, 노동자들의 수많은 산업재해, 하청노동자와 부당해고자의 자살 등의 사건에서, 그것이 외부로 알려져 수많은 시민들이 관심․분노․참여가 없었다면, 모두 지극히 사적인 공간에서 약자들의 일방적 패배로 종결되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사적 영역에서 예정된 약자들의 필연적 패배를 막은 것은, 사건의 공적 영역으로의 전환과 수많은 시민들의 간섭이었습니다.

미국의 샤츠슈나이더(E. E. Schattschneider, 1892∼1971, 이하 그의 애칭인 샤츠로 표기)가 민주주의 정치에서 주목하는 것이 바로 이러한 ‘갈등의 사회화(socialization)’입니다. 그는 이미 정치고전의 반열에 오른 ≪절반의 인민주권(The Semisovereign People)≫(1960)의 첫 페이지에서, 유명한 ‘구경꾼’ 비유로 민주주의 정치의 기본 양상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는 샤츠의 전체 정치이론의 기초가 되는 비유이기도 합니다.

모든 싸움은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나는 싸움의 중심에 적극적으로 가감하는 소수의 개인들이고, 다른 하나는 어쩔 수 없이 그 광경 속으로 끌려들어 가는 구경꾼들이다.…… (그러나) 싸움의 결과를 결정하는 일은 대개 구경꾼들의 몫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구경꾼은 수나 영향력에 있어 압도적인 존재이다. 또한 그들은 결코 중립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는다. 갈등이 야기하는 자극과 흥분은 쉽게 군중에게 전달된다. 이것이 바로 모든 정치의 기본적 양상이다.……(그렇다면 A와 B가 갈등할 때) 갈등의 언저리에 있는 구경꾼들 가운데 B보다 A에 동조하는 사람이 백 배나 많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A는 갈등을 확대하고자 하는 동기를 강하게 갖지만, B는 갈등을 사적인 문제로 만들려고 할 것이다. 그러므로 갈등의 당사자들은 자신들의 싸움에 구경꾼을 끌어들이거나 배제하는 데 성공하느냐에 따라 승자가 되기도 하고 패자가 되기도 한다.

“싸움의 결과를 결정하는 일은 구경꾼이다”

이와 같은 샤츠의 비유는 다분히 현실주의적이고 역동적이고 전략적인 것으로 보이지요? 그렇습니다. 민주주의와 정치를 대면하는 샤츠의 태도는 지극히 현실주의적이고 역동적이고 전략적입니다.

그는 기존의 정치학자들이 현대 민주주의의 기본적 양상과 이에 적합한 시민의 역할을 제대로 규명하지 못하였다고 비판합니다. 그는 기존의 정치학자들은 고대 아테네의 도시국가에서 배태된 인민에 의한 지배(인민자치)라는 민주주의에 대한 고전적 정의(正義)에 사로잡혀, 시민에게 과도한 정치적 역할을 상정하고 시민에게 그 역할에 맞는 과도한 지적 능력을 요구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는 현대 사회에서 고대 아테네적인 인민자치는 물리적으로 불가능할뿐더러, 현대 사회는 너무나 전문적이고 복잡하여 일반 시민이 고전적 정의가 상정하는 만큼의 정치적 지식과 사려 깊음을 갖거나 고전적 정의가 요구하는 만큼의 정치적 역할을 수행한다는 것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말합니다.

인민에 의한 통치라는 고전적 민주주의 정의는 현대 민주주의 이전 시대에 기원을 두고 있으며, 현실에서 작동하는 민주주의 체제를 볼 수 없었던 철학자들이 개발한 민주주의 개념에 바탕들 두고 있다. 민주주의 이전 시대의 이론가들은 토지 소유자들이 그들 자신의 이익을 위해 재산을 관리하는 것만큼이나 단순하게 인민도 민주주의에서 공적 업무를 맡아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정부를 운영할 것이라고 가정했다……만약 우리가 인민에 의한 통치와 같은 민주주의 개념에서 출발한다면, 현대 사회에서는 민주주의를 실행할 수 없다는 극히 비관적인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민주주의에서 일어나야 할 일들에 대한 전통적인 관념과, 놀라울 만큼 많은 사람들이 현재 진행중인 사안에 대하여 무지한 것 같다는 사실을 양립시키기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샤츠가 시민의 능력이나 인민에 의한 지배를 경시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그 누구도 정부를 운영할 만큼 충분히 많은 지식을 가질 수는 없기에, 무지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대통령 상원의원 주지사 판사 교수 박사 기자 같은 사람들도 우리 나머지 사람들보다 단지 조금 덜 무지할 뿐이다. 전문가조차도 어느 한 분야에 관해서는 전부를 알고자 하면서도 그 밖의 많은 것들에 대해서는 무지하기를 선택한 사람들일 뿐이다”라고 말합니다.

결국 문제는 기존의 정치학자들이 주장해 온 시민의 무지나 어리석음이 아닙니다. 샤츠는 오히려 문제의 근원은 기존 정치학자들의 민주주의와 시민의 정치적 역할에 대한 잘못된 정의에 있다고 주장합니다.

대중은 이론가들이 자신들에게 부과한 터무니없는 역할을 수행하고자 노력할 만큼 그렇게 분별력이 없는 사람들이 아니다. 우리는 이들 대중의 태도를 무시하곤 했다. 물론 그 이유는 우리가 민주주의에 대한 망상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민주주의에 대해 냉소적인 태도를 갖게 된 이유는 대중이 민주주의에 대한 매우 단순화된 정의가 상정하는 대로 행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바꿔 말해 우리는 대중을 그들이 원하지 않고 그럴 수도 없으며 충분한 분별력으로 그렇게 하려고 하지 않는 방향으로 몰아가고자 노력했던 것이다. 여기서 위기는 민주주의의 위기가 아니라 이론의 위기이다. ……인민을 위해 민주주의가 만들어졌지, 민주주의를 위해 인민이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민주주의는 평범한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학자연하는 이들이 인민의 자격을 인정하든 말든 상관없이, 그것은 평범한 사람들의 요구에 민감하게 반응하도록 고안된 정치체제이다. 미국 민주주의의 실패를 대중의 무지와 어리석음 탓으로 돌리는 것은 분개할 만한 일이다. 이 나라 정치체제에서 가장 심각한 결점은 지식인들이 놀랄 만큼 진부하고 경직된 민주주의 개념을 고수한다는데 있다

그렇다면 민주주의에 대한 현실적 정의는?

그렇다면 현대 민주주의와 시민의 정치적 역할을 어떻게 정의하여야 할까요? “문제는 정의(定義)와 관련된 것이다. 민주주의에서 대중은 어떤 역할을 하는가? 우리는 대중에게 무엇을 기대할 수 있는가? 고대인들로부터 물려받은 낡은 관념이 아닌 다른 민주주의 개념의 관점에서 문제를 재정식화하는 것은 가능할까?” 현대 민주주의의 기본 양상과 시민의 역할에 대하여 그는 다음과 같이 비유합니다.

사람들이 현대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이유는 그들이 꼭 알아야 하는 것과 알 필요가 없는 것을 구별하는 법을 배웠기 때문이다. 자동차를 구매하기 위해 자동차 기능공이 되거나 아기를 갖기 위해 산부인과 의사가 될 필요는 없다는 점을 깨달기 시작할 때, 문제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게 된다. 우리의 생존은 다른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들을 이용하기 위해, 그들이 만들어 낸 결과에 따라 사람들을 판단하고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신뢰와 책임을 형성할 수 있는 능력에 달려 있다. 만약 우리가 약사 의사 비행기 조종사 은행원 수리공 배관공 기술자 법률가 공무원 회계사 재판관 전화교환원 숙련공 그 밖의 많은 다른 사람을 매일같이 여러 방식으로 신뢰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현대 사회에서 살아갈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이들이 만들어 낸 결과를 중심으로 복잡한 메커니즘에 관한 판단을 내린다……민주주의는 우리가 하는 다른 모든 일과 마찬가지로, 무지한 사람들과 전문가들이 함께하는 협력의 한 형식이다.

지금까지의 논의는 샤츠적 언어로 표현되어 있지만, 별반 새로운 주장은 아닙니다. 현대 사회에서 ‘인민에 의한 지배’는 불가능하고 ‘인민의 동의에 의한 지배’만이 가능하고, 인민의 주권은 ‘온전하게’ 구현될 없고, 그것은 대의적 방식으로 ‘절반’만 실현될 수밖에 없다는 것으로, 결국 현대 사회에서 대표와 책임의 원리에 입각한 대의 민주주의는 필연이라는 것입니다. 샤츠의 민주주의에 대한 독특한 시각은 그 이후에 있습니다. 민주주의를 이렇게 재정식화 한다면, 이제 민주주의에서 강조되어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만약 우리가 서로 다른 종류의 지식을 구분할 수 있다면, 즉 아마추어가 아는 것과 프로가아는 것, 일반인들이 아는 것과 전문가들이 아는 것을 구별해 낸다면, 우리는 미로 속에서도 우리가 나아갈 길을 찾을 수 있다. 문제는 1억8천만 명(당시 미국 시민을 의미)의 아리스토텔레스들이 어떻게 민주주의를 운영할 수 있느냐가 아니라, 1억8천만 명의 보통 사람들로 구성된 정치공동체를 어떻게 조직해야 이 공동체가 보통사람들의 요구에 응답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이는 리더십, 조직, 대안 그리고 책임과 신뢰의 체계에 관한 문제이다. 민주주의에서 강조해야 할 것은 리더십과 조직의 역할이지, 풀뿌리 차원에서 창출되는 어떤 것이 아니다. 만약 우리가 이런 관점에서 문제를 접근한다면, 그 해결이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지는 않을 것이다.

정치공동체를 어떻게 조직하고 운영해야 보통사람들의 요구에 보다 잘 응답을 할 것인가? 정치체제가 제대로 대중의 이해에 반응하고 대중에 대하여 보다 더 책임을 지게 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이것이 샤츠가 제기하는 현대 민주주의의 최대의 문제인 것입니다. 여기서 샤츠 특유의 ‘갈등’과 ‘정당’ 이론이 등장합니다.

샤츠는 민주주의 혹은 정치를 법․제도적 원리로 설명하거나 투입․산출․전환의 정치시스템으로 설명하려는 정치학에 매우 비판적입니다. 그는 정치의 범위를 공식적인 절차 내지는 제도로 한정 짓고 정치의 태양을 그 공간 내에서의 정태적 순환으로 규정하는 것에 반대합니다. 그는 정치를 사회내 갈등과 이에 대한 정치세력(특히 정당)의 대응의 차원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의 이러한 독특한 태도가 그의 현실주의적 정치학을 지극히 역동적이고 전략적인 것으로 만든 것입니다.

샤츠슈나이더의 <<절반의 인민주권>>.

갈등과 정당, 역동적이고 전략적인 샤츠 정치학의 핵심

인간 사회에는 무수히 많은 개인적․집단적․사회적․지역적․경제적․이념적․정치적 갈등이 존재합니다. 사회경제적 강자는 이러한 갈등을 사적인 공간에서 해결하려고 합니다. 그들은 사적인 공간에서 우월적인 자원과 수단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약자가 강자와의 갈등에서 이기려면 그러한 갈등을 공적 공간으로 끌어내 다수가 참여하여 호응하고 간섭토록 해야 합니다. 쉽게 말해 약자는 강자와 뒷골목에서 싸우면 항상 질 수 밖에 없지만, 대로변에서 구경꾼들이 자신에게 호응하고 편들어주면 승리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강자는 갈등을 ‘私事화(privatization)’하려 하지만, 반대로 약자는 갈등을 '사회화(socialization)‘ 시켜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사적인 갈등에서 경쟁자들 간 힘의 관계는 언제나 불평등하기 마련이므로, 당연히 가장 강력한 특수이익은 사적인 해결을 원한다. 외부의 개입 없이 갈등이 사적인 채로 남아 있는 한, 강자는 갈등의 결과를 결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A가 B보다 백 배 더 강하다면, 그는 자신의 의사를 B에게 쉽게 강요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제3자의 개입을 환영하지 않는다. 즉 그는 B를 고립시키기를 원한다.……공적 권위의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들은 강자가 아니라 약자이다. 갈등을 사회화하고자 하는 사람들, 즉 힘의 균형이 변할 때까지 더욱 더 많은 사람을 갈등에 끌어들이고자하는 사람은 약자이다. 학교 교정에서 “선생님에게 고자질하는” 사람은 골목대장이 아니라 힘없는 작은 소년이다. 선생님이 관여하게 되면, 교정에서 나타났던 힘의 균형은 급격하게 변할 것이다. 공적 권위의 기능은 갈등의 범위를 넓혀 사적 권력 관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경제 권력과 정치 권력의 일체성은 예외가 아니라 규칙이었습니다. 즉 경제 권력의 소유자가 곧 정치 권력자였던 것이다. 이 두 권력이 분리된 것은 근대 이후입니다. 그렇다고 하여 현대 사회에서 경제 권력과 공적 영역간의 긴장관계가 근원적으로 해소된 것은 아닙니다. 공적 영역은 평등주의적이며 수(數)의 의존하고 권력의 분산을 장려하지만, 경제 권력은 반대로 배타적이며 불평등적이며 권력의 집중화를 장려합니다. 두 체계가 전혀 다른 원리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에 양 권력은 항상 긴장과 대립관계에 놓여 있습니다.

정치에 관한 문헌을 훑어보면, 정말이지 갈등의 사사화와 사회화를 지향하는 상반된 경향들 간의 오랜 투쟁을 목격할 수 있다. 한편으로 갈등의 범위를 제한하거나 심지어 공적 영역에서 그것을 완전히 배제하려는 의도에서 만들어진 일련의 이념들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개인주의, 기업활동의 자유, 지방주의, 사생활보호, 재정지출의 축소와 관련된 이념들의 긴 목록은 갈등을 사사화하거나 그 범위를 제한하기 위해, 혹은 공적 권위를 사용해 갈등의 범위를 확대하고자 하는 시도를 막기 위해 마련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다른 한편 갈등의 사회화에 기여하는 일련의 이념들 또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우리 생활 속에 자리 잡은 보편적 이념들뿐만 아니라, 평등과 공존, 모두에게 동등한 법의 보호, 정의, 억압으로부터의 자유, 이주의 자유, 언론 및 결사의 자유, 시민권과 관련된 이념들은 갈등을 사회화하는 경향을 갖고 있다.

이러한 차원에서 샤츠는 민주적 절차와 제도는 갈등을 사회화하는 거대한 엔진과 같다고 말합니다. 샤츠는 갈등의 존재를 필연으로 받아들이고, 오히려 이의 확대․공공화․정치화화를 주장합니다.

이러한 샤츠의 태도는 우리에게 생소한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나라의 보수정권과 그들의 하수인인 보수언론만큼 갈등에 대하여 부정적인 정치세력도 없습니다. 노동자의 권리와 권익의 보장을 요구하며 시위를 하는 노동자에 대하여, 더 많은 민주주의를 요구하며 집회를 하는 시민들에 대하여, 정부의 정책에 반대를 하거나 정부의 발표에 불신을 표시하는 시민단체에 대하여, 이러한 행위는 사회갈등을 조장하고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고 국론을 분열케 하는 행위라고 매도하는 것은, 우리 정치와 언론의 일상이 된지 오랩니다.

그러나 문제는 갈등의 존재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인간이고 사회를 구성하는 한 수많은 갈등들은 피할 수 없습니다. 문제는 그러한 갈등들이 어떻게 표현되고 처리되고 해소되는가에 있는 것입니다. 갈등들을 일방적으로 무시하고 힘으로써 억압하려는 것은 非민주적 권위주의 정권의 일반적 태도이고, 이러한 갈등들을 공적영역으로 가져와 타협, 조정, 설득 등의 정치적 행위로 해소하는 것이 바로 민주정치인 것입니다. 우리 사회의 보수세력에 의하여, 우월한 국가이념․국격․국론으로 등장하는 것은 가진 자들의 특수한 의사와 이익일 뿐이고, 공적으로 표출되지 못하고 정치적으로 수용되지 못한 채 무시되고 억압되고 심지어 사회분란만 일으키는 이적행위로 폄하되는 것은 사회경제적 약자의 의사와 이익입니다.

국회의사당에서 몸싸움을 벌이고 있는 국회의원들.

정당만이 희망이라고?

정치공동체로 하여금 인민의 요구에 제대로 부응토록 하여 절반의 주권자인 인민을 온전한 주권자로 만들고, 갈등을 사회화를 통하여 사회경제적 약자로 하여금 일방적으로 패배하지 않도록 도와주는 최상의 정치적 도구로, 샤츠는 ‘정당’을 지목합니다.

정당? 좌우를 막론하고 우리 사회에서 정당은 모든 정치적 패악의 근원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샤츠는 정당만이 미래의 민주주의의 유일한 희망이라고 주장합니다. 도대체 부패하고 무능력한 정치인들의 소굴인 정당이 어떻게 우리의 희망이 될 수 있다는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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