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게를 ‘뉘어/누이어’ 놓고 그들은 그 위에서 피곤한 몸을 푼다.≪이어령, 흙 속에 저 바람 속에≫

 

이어령(李御寧)은 1934년 충청남도 아산에서 태어났다. 부여고등학교를 거쳐,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 서울대학교 국문학 석사, 단국대학교 국문학 박사를 취득하였다.

주요 작품으로 평론 ≪이상론≫, ≪해학의 미적 범주≫, 소설집 ≪환각의 다리≫, ≪둥지 속의 날개≫, ≪무익조≫, 수필집 ≪신한국인≫, ≪지성의 오솔길≫, ≪지성에서 영성으로≫ 등을 출판하였다.

“조헌(趙憲, 1544∼ 1592)”은 본관 백천(白川)이며 중종 39년(1544) 6월28일 김포군 감정리에서 부친 응지와 모친 용성 차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자는 여식(汝式), 호는 중봉·도원·후율이라 했고,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하였기 때문에 시호를 문열이라 하였다. 1565년(명조 20) 성균관에 진학하였으며 24세가 되던 해 문과에 급제하여 잠시 교서관의 부정자직에 있다가 곧 경주, 파주, 홍주의 교수를 역임하였다. 조헌은 파주목의 교수로 있을 때 성혼, 이이와 교류했으며, 이로 말미암아 그는 서인으로 지목되었고, 그의 생애에 많은 영향을 끼쳤었다.
1548년(명종 3년) 어느 봄날 김포군 서감정리의 큰 길가에 있는 한 정자에서 마을 아이들이 모여 천자문을 읽고 있었다. 때마침 정자 아래의 대로에 위의(威儀)를 갖춘 높은 벼슬아치의 행차가 지나가다 글을 읽던 아이들이 다투어 이 요란한 행차를 구경하려고 달려나왔다.

그러나 이제 겨우 다섯 살이 된 어린아이만은 그대로 앉아 글을 읽고 있었다. 지나가던 벼슬아치가 이를 보고 기특히 여겨 정자에 올라가 “다른 아이들은 모두 나의 행차를 구경하는데 너만은 왜 그냥 있느냐?” 하고 물었더니 “오로지 글 읽기에만 마음 쓰라는 아버지의 말씀이옵니다”라고 의젓이 대답하는 것이었다. 이에 감복한 벼슬아치는 그 아이의 아버지를 만나 “우리나라에 참다운 학자가 또 하나 나오게 되었습니다” 하고 칭찬하면서 극진한 예를 올리고 떠났다 한다.

1572년(선조 5)교서관 정자로 있을 때, 왕이 절에 향을 내리는 것을 반대하다 파직되었다가 곧 저작에 등용되고 1574년(선조 7) 성절사 박희립을 따라 명에 질정관으로 다녀왔다. 그 후 호조·예조의 좌랑, 감찰을 거쳐 통진 현감이 되었으나 죄인을 장살한 일로 탄핵되어 2년간 부평에 유배되었다. 1581년 공조좌랑·전라도 도사·종묘서령을 지내고, 1582년 부모 봉양을 위해 보은현감으로 나갔다.

조헌이 이끄는 의병이 최초로 왜군과 싸운 것은 8월1일 청주전투였다. 청주로 가서 죽음으로 싸움을 결심한 의병들과 승병장 영규대사와 함께 싸움에 임하였다. 죽음을 각오한 의병에게 두려움이 있을 수 없었다. 이런 자세로 싸우니 왜적이 성안으로 도망가는 것이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대장이 되어 기개를 마음대로 펴보았던 조헌은 마침내 금산 벌판에서 49세를 일기로 장렬한 죽음을 맞이 하였다. 조헌의 시신은 옥천으로 옮겨져서 장례를 지냈고, 이해 12월에 무계 성혼의 상소에 의하여 조정에서는 가선대부 이조참판 겸 동지경영춘추관 의금부사의 벼슬을 추증했고 임진왜란이 끝난 후에는 선무원종 일등공신에 봉하였으며 그 부친과 함께 이조판서에 증직되었다.

그의 묘소는 옥천군 안남면 도농리에 있다. 1656년 신도비를 세웠는데 청음(淸陰) 김상헌이 글을 짓고 동춘당(同春當) 송준길이 글씨를 썼다. 중봉의 묘소가 현재의 장소로 옮겨진 것은 그가 죽은 지 44년 만에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이 아늑한 곳을 택하여 편히 모시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옥천의 표충사, 금산의 성곡서원, 보은의 상현서원 등에서 그의 충절을 받들어 제향하고, 금산에는 비를 세웠으며 7백의총이 있다. 그의 저서로는 ≪중봉집≫, ≪중봉동환봉사≫가 있다. 그는 고경명, 김천일, 곽재우와 함께 임진사충신의 한 사람이다.

한글 맞춤법 제37항 ‘ㅏ, ㅕ, ㅗ, ㅜ, ㅡ’로 끝난 어간에 ‘-이-’가 와서 각각 ‘ㅐ, ㅖ, ㅚ, ㅟ, ㅢ’로 줄 적에는 준 대로 적는다. 그러므로 ‘뉘어’로 써야 한다. 예를 들면, ‘싸이다/쌔다, 펴이다/폐다, 보이다/뵈다, 누이다/뉘다, 뜨이다/띄다, 쓰이다/씌다’ 등이 있다.

<제공: 청주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 교수 황경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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