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길은 산이 ‘막혀/막히어’ 못 오며 물이 막혀 못 옵니까? “토란 잎에 이슬” 같은 우리 인생, 양반이나 중인이나 한번 가면 돌아올 줄 모르는 저승길이 되옵니다.≪오성찬, 한 공산주의자를 위하여≫

 

속담은 “인생살이가 아주 허망하다.”라는 뜻으로 빗대는 말이다.

오성찬은 1940년 제주도 서귀포에서 태어났다. 1969년 ≪신아일보≫ 신춘문예에 ≪별을 따려는 사람들≫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오게 되었다.
주요 작품으로 ≪별을 따려는 사람들≫, ≪한라산≫, ≪습작우화≫, ≪보제기들은 밤에 떠난다≫, ≪우리 시대의 애가≫, ≪슬픈 몽골반점≫ 등을 남겼다.

‘신석구(1875. 5. 3.~1950. 10. 10.)는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으로 충청북도 청주(옛: 청원(淸原) 출신이며, 기독교(基督敎)인이다. 협성신학교(協成神學校)를 졸업하고 감리교 목사가 되어 서울, 개성(開城), 춘천(春川), 원산(元山), 남포(南浦) 등지에서 포교활동을 하였다. 1919년 2월 27일 당시 기독교 남감리파 목사로 있던 그는 같은 남감리파 목사인 오화영(吳華英)으로부터 3·1독립만세운동 계획이 있음을 듣고, 오화영, 이승훈(李昇薰), 박희도(朴熙道), 이갑성(李甲成), 최성모(崔聖模), 이필주(李弼柱), 함태영(咸台永), 김창준(金昌俊), 박동완(朴東完) 등 10명의 기독교인과 함께 이필주의 집에 모여서, 함태영이 최린(崔麟)으로부터 받아 온 독립선언서와 기타 문서의 초안을 회람하고, 모두 그 취지에 찬성하였다. 그리하여 그들 중 함태영만이 다른 연명자가 체포될 경우 그 가족보호의 임무를 맡기 위하여 제외되고, 일본정부와 조선총독부에 제출할 문서에 날인하기 위하여, 인장을 모두 함태영에게 맡겨서 민족대표로서 서명 날인케 하였다. 그리고 28일 밤에는 다른 민족대표들과 재동(齋洞) 손병희(孫秉熙)의 집에 모여서 다음날 거행될 독립선언에 대한 최종 협의를 마쳤다.

3월 1일 오후 2시경 인사동(仁寺洞)의 태화관(泰華館)에 손병희 등과 함께 민족대표로 참석하여 독립선언서를 회람하고 만세삼창을 외친 뒤, 급거 출동한 일본경찰에 체포·연행되어 경시청총감부(警視廳總監部)에 구금되었다가,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2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도 계속 독립운동을 전개하다가 춘천(春川)·원산(元山) 등지에서 일본경찰에 여러 번 체포되었다.

천안(天安)에서는 신사참배(神社參拜)와 전승기원예배(戰勝祈願禮拜)를 거부하다가 검거되어 복역중 보석으로 석방되었다. 광복 후에는 북한에서 반공운동을 전개하여 3·1절기념방송사건과 기독교민주당(基督敎民主黨) 비밀결사 사건 등으로 투옥되었다. 1949년 4월 진남포(鎭南浦)에서 반공 비밀결사의 고문으로 추대되었다는 죄명으로 10년형을 언도받고 복역 중 6·25때 북한군에게 총살당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3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한글 맞춤법 제36항 ‘ㅣ’뒤에 ‘-어’가 와서 ‘ㅕ’로 줄 적에는 준 대로 적는다. 그러므로 ‘막혀’로 써야 한다. 예를 들면, ‘가지어/가져/가지었다/가졌다, 견디어/견뎌/견디었다/견뎠다, 다니어/다녀/다니었다/다녔다, 버티어/버텨/버티었다/버텼다’ 등이 있다.

‘가지다’는 ‘손이나 몸 따위에 있게 하다’, ‘다니다’는 ‘어떤 볼일이 있어 일정한 곳을 정하여 놓고 드나들다’, ‘버티다’는 ‘어려운 일이나 외부의 압력을 참고 견디다’, ‘치이다’는 ‘피륙의 올이나 이불의 솜 따위가 한쪽으로 쏠리거나 뭉치다’라는 뜻이다.

<제공: 청주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 교수 황경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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