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업도 얼마 안 남았고, 한 시간씩만 빨리 일어나면 ‘돼/되어’요. “가난이 일찍 철들게 하고 효자도 만든다더니” 아들은 이렇게 대견스럽게 말했다.≪조정래, 한강≫

 

속담은 “가난에서 벗어나려 이런저런 궁리도 하고 실제 일도 하게 되니 일찍 철들고, 효자가 되기 쉽다.”라는 뜻이다.

조정래(趙廷來)는 1943년 전라남도 순천에서 태어났다. 광주서중학교, 서울보성고등학교를 거쳐, 동국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했다. 1970년 ≪현대문학≫ 6월호에 ≪누명≫이 첫 회 추천되어 등단하였고, 12월호에 ≪선생님 기행≫이 추천 완료되어 문단에 나오게 되었다.

주요 작품으로 ≪유형의 땅≫, ≪인간의 문≫, ≪메아리 메아리≫, ≪태백산맥≫, ≪황홀한 글감옥≫, ≪정글만리≫ 등을 출간하였다.

‘신백우(1887. 12.~1962. 1. 2.)’는 충청북도 청원(淸原)군 낭성(琅城)면 관정(官井)리에서 태어났다. 1907년 4월에 양기탁(梁起鐸), 안창호(安昌浩), 전덕기(全德基), 이회영(李會榮) 등을 중심으로 국권회복을 위한 비밀결사로서 신민회(新民會)가 창립되자, 족친인 신채호(申采浩)의 권유로 이에 가입하여 서울과 충청북도에서 활동하였으며, 1909년에 합법적 외곽청년단체로 청년학우회(靑年學友會)가 설립되자, 이에 가입하여 청년학우회 한성연회(漢城聯會)의 서기(書記)로서 활동하였다. 역시 1909년의 신민회 계열의 비합법적 청년단체로서 대동청년당(大東靑年黨)이 조직되자 남형우(南亨祐), 안희제(安熙濟), 박중화(朴重華) 등 80여 명과 함께 국권회복을 위한 지하활동을 하였다.

1910년 8월 일제가 한국을 병탄하여 나라가 망하자, 1911년 만주로 망명하여 봉천(奉天)성 일대에서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는데 노력하다가, 조부의 별세로 1918년에 귀국하였다. 1919년 3월 3 1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참가한 후 다시 만주로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에서 군사교육을 받고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의 참모부에서 활동하다가 1920년에 귀국하였다.

1920년 10월에는 윤덕병(尹德炳) 등과 조선노동연맹회(朝鮮勞動聯盟會)를 발기하여 조직하고 그 기관지 ≪노동(勞動)≫의 편집책임자로 활동하였다. 1923년 7월에는 홍명희(洪命熹), 윤덕병 등과 함께 신사상연구회(新思想硏究會, 후에 火曜會로 개칭)를 조직하였으며, 1924년 윤덕병, 차금봉(車今奉) 등과 조선노농총동맹(朝鮮勞農總同盟)을 조직하고 중앙집행위원이 되었다가 코민테른에의 대표파견사건으로 체포되어 6개월간 투옥 당하였다.

1936년 신채호가 여순감옥에서 옥사하여 그 유해가 돌아오자, 이를 고향에 안장하고 일제의 방해를 물리치면서 묘비를 세웠다. 정부에서는 그의 독립운동에 끼친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한글 맞춤법 제35항 모음 ‘ㅗ, ㅜ’로 끝난 어간에 ‘-아/-어, -았-/-었-’이 어울려 ‘ㅘ/ㅝ, /’으로 될 때에는 준 대로 적는다.

[붙임 2] ‘ㅚ’뒤에 ‘-어, -었-’이 어울려 ‘ㅙ, ’으로 될 적에도 준 대로 적는다. 그러므로 ‘돼’로 써야 한다. 예를 들면, ‘괴어/괘/괴었다/괬다, 뵈어/봬/뵈었다/뵀다, 쇠어/쇄/쇠었다/쇘다, 쐬어/쐐/쐬었다/쐤다’ 등이 있다.

<제공: 청주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 교수 황경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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