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을 생각하며>

내가 겪은 6·25전쟁

 

-전쟁은 인류의 공적,
수많은 인명을 살상하는
전쟁이 있어서는 안 된다.
'나쁜 평화'는 있어도
'좋은 전쟁'은 없다-

 

여름이었습니다. 아카시아 꽃이 만발해 달콤한 향기가 코를 찌르는 초여름, ‘보리고개’를 막 넘어가던 시절이었으니 배고픈 아이들에게 그것은 냄새만으로도 요기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숨 넘어 갈듯 한 고함소리가 성황당 쪽에서 들렸습니다. “난리 났대유!, 난리 났대유!” 고함은 계속됐고 놀란 사람들이 당황해 어쩔 줄 몰라 하며 웅성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이북에서 빨갱이들이 쳐들어 왔다”는 소리가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습니다. “빨리 피난가야지, 빨리, 빨리!” 황급히 집으로 달려 들어간 사람들이 허둥지둥 보따리를 챙겨 식구들을 이끌고 남쪽 길을 향해 마구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아이구, 이게 웬일이여? 웬일?” 졸지에 피난민이 된 사람들은 남부여대(男負女戴), 등에 지고 머리에 이고 놀란 아이들 손을 잡고 함께 뛰었습니다. 순식간에 신작로(新作路)는 피난민 행렬로 가득 찼고 고개 쪽에서도 사람들이 길을 메우고 넘어 왔습니다. 그때 난데없이 시커먼 물체가 번개처럼 머리 위를 날아가며 벼락 치는 소리를 냈습니다. 비행기였습니다.

사람들은 생전 처음 겪는 일이라 혼비백산상태가 된 채 뭐가 뭔지, 무조건 뒤질세라 그냥 뛰었습니다. 그런 와중에도 입을 통해 정보는 전달이 됐습니다. 인민군들이 서울을 점령하고 지금 물밀듯이 남쪽으로 내려오고 있다는 것, 금방  머리위로 날아 간 비행기는 이남을 도와주러 온 ‘호주기’라는 것, 대충 그렇게 상황 파악이 됐고 이제는 계속 도망가는 수밖에는 없다는 것이 사람들의 판단이었습니다. 라디오도 드물었던 시절이었으니 서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턱이  없었습니다. 그때 필자의 나이 열한 살, 초등학교 5학년이었습니다. 충청북도 청원군 사주면 개신리의 ‘6·25사변’은 그렇게 시작됐습니다.

1950년 6월 25일 동녘에 채 어둠이 가시지도 않은 새벽 4시 북한 인민군이 3·8선을 넘어 기습남침을 단행합니다.  그날은 마침 일요일이었고 3·8선 남쪽 국군들은 전 날 주말외출을 나가 단꿈에 젖어있던 시간이었습니다. 제대로 된 중무기도 없이 M-1소총이 전부나 다름없었던 국군은 탱크를 앞세우고 밀려오는 인민군에 제대로 맞서 보지도 못하고 후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전쟁이 일어난 지 사흘째 되던 27일 인민군은 이미 서울 북쪽 미아리고개까지 다다랐으며 28일 새벽 서울은 적군의 수중에 들어갔습니다.

뒤에 알려진 얘기지만 당시 인민군은 소련제 미그기 170대에 탱크 240대를 앞세우고 남침을 감행했고 국군은 대포 몇 백 문의 빈약한 무기로 급습을 당해야 했습니다. 거기다 장교들이 모두 외박 중이었으니 이렇다 할 전투태세가 되지 않아 노도처럼 밀고 내려오는 적군의 상대가 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국군은 제대로 전투다운 전투 한번 못 해보고 총을 거꾸로 메고 피난민과 함께 남으로 후퇴하기에 바빴습니다. 긴급 소집된 유엔안보리 결의에 따라 일본에 진주해 있던 미군이 급거 파병돼 오산 근처에서 방어선을 쳤으나 속수무책 밀려났고 대전에서는 24사단장 딘 소장이 인민군에 생포당하는 어이없는 일마저 일어났습니다.

전쟁이 터지자 27일 재빨리 대전으로 피신한 이승만 대통령은 “국민 여러분, 지금 우리 국군이 적을 격퇴 중이니 안심하시오”라며 자신이 서울에 있는 것처럼 미리 녹음된 방송을 하고는 28일 새벽 한강에 단 하나뿐인 인도교 폭파를 지시합니다. 피난길에 나서 다리를 건너던 500여명이 날벼락에 목숨을 잃었고 강을 못 건너게 된 수많은 서울시민은 피난을 포기해야 했습니다.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오던 인민군은 7월 말 낙동강에 최후 방어선을 친 유엔군과 국군에 의해 진격을 멈추었으나 전라남북도까지 모두 적의 손에 들어간 상황에서 이제 남은 것은 부산과 대구, 포항, 경주뿐이었습니다. 국운이 풍전등화(風前燈火)의 위기에 처한 것입니다.

그나마 미공군의 제공권 장악으로 전세는 소강상태에 들어간 가운데 영국 캐나다 호주 등 유엔참전 16개국의 병력이 속속 도착하고 9월 15일 유엔군 사령관 맥아더장군의 지휘아래 261척의 군함이 성공적으로 인천 상륙작전을 단행하면서 전세는 반전돼 급기야 9월 28일 서울을 탈환하게 됩니다.

보급로가 끊긴데다 퇴각로 까지 막힌 인민군은 유엔군과 국군의 공세로 전 전선에서 후퇴에 들어갑니다. 이번에는 유엔군과 국군의 총반격이 감행됐고 북진, 북진, 3·8선을 넘어 10월 19일 평양에 입성합니다. 국군이 26일 북중국경인 압록강에 다다라 만세를 외치는 그때 강 건너에서 물밀 듯이 중공군이 압록강을 건너오는 것이 아닌가. 유엔군과 국군의 진격은 거기까지였습니다.

당시 중공군은 자그마치 28만 명. ‘인해전술(人海戰術)’로 물밀 듯이 밀려오는 중공군의 공격에 유엔군과 국군은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다시 지옥 길과 다름없는 후퇴를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민족 5천년 역사의 가장 큰 비극이요, 재앙이 된 6·25전쟁. 다시는 그런 민족사적 비극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위키백과

1951년1월 4일, 유엔군과 국군은 이날 또 서울을 내 주었고 수원까지 점령당합니다. 소위 ‘1·4후퇴’였습니다. 다시 전국의 도로는 피난민 행렬로 아비규환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화력을 집중시킨 유엔군과 국군의 반격으로 다시 서울을 되찾았고 지금의 휴전선까지 밀고 올라가 일진일퇴를 거듭하다가 급기야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을 체결함으로써 피비린내 나던 전쟁은 3년 1개월 만에 포성을 멈추었습니다.

전쟁소식에 놀라 무조건 남쪽을 향해 길을 떠났던 피난민들은 해가 지면 농촌마을 마당에서 야숙을 하곤 했습니다. 처음 겪는 일에 모두가 기가 막혔지만 어쩔 수 없이 며칠을 버티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들 갔습니다.

어린 나는 몇 번의 ‘죽을 고비’가 있었습니다. 8월 어느 날 학교로 오라는 선생님의 연락이 왔습니다. 한 여름 뜨거운 날씨에 왜, 그런가 싶어 십리도 훨씬 더 되는 길을 나섰습니다. 오가는 사람도 없는 시골길을 얼마를 걸어가려니 읍내 쪽에서 ‘쌕쌕이’라고 부르던 전투기 한 대가 산 너머에서 쏜살같이 날라 와 머리 위로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뒤로 간 비행기가 금방 되돌아오더니 내 머리 위를 원을 그리며 빙빙 도는 게 아닌가. 고도가 낮아 조종사의 얼굴도 보일 정도였는데 화들짝 놀란 나는 순간적으로 길옆 논두렁으로 몸을 날려 우거진 콩잎 속으로 쳐 박혔습니다. 그리고는 “아, 이제 죽었구나”하고 눈을 감았습니다. 그런데 비행기는 몇 바퀴를 더 돌더니 가던 길로 사라져 가는 것이었습니다. 혼이 빠진 채 온 몸이 땀으로 흠씬 젖어 일어나 “살았구나!”하는 안도감과 함께 옷을 털고 학교를 향해 다시 걸어갔습니다. 어린 마음이지만 아마도 조종사는 나를 ‘수상한 사람’으로 보고 되돌아왔던 것이 아닌 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 만약 조종사가 방아쇠에 손을 대기만 했더라도 나는 죽음을 면치 못했을 것입니다.

학교에 도착하니 선생님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미 아이들 몇 명이 와 있었습니다. 선생님은 “너희들은 특별히 소년단에 뽑혔다. 너희가 할 일은 병에 휘발유를 넣어 가지고 있다가 국군이 오거든 불을 댕겨 탱크 밑으로 들어가 터뜨리는 것이다. 집에 가 있다가 연락하면 바로 와야 돼. 알겠지?” 선생님의 말은 국군탱크가 오거든 뛰어들어 ‘자폭 투신’을 하라는 뜻이었습니다. 몸이 오싹했지만 뭐라고 말 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전쟁이 끝날 때까지 선생님의 연락은 없었습니다.    

6·25전쟁은 너무나 큰 상흔을 남겼습니다. ‘위키백과’에 따르면 한국은 군인 전사, 14만9천명, 민간인 사망 37만4천600명, 부상, 실종 등 총 189만 8천480명의 사상자가 났고 미군은 3만7천명이 전사했고 부상, 실종도 9만6천명이 넘었습니다.

북한도 군인 전사 29만4천명, 민간인 사망40만6천명 등  70만 명이 목숨을 잃었고 총 332만 명의 사상자를 냈습니다. 중공군도 전사11만6천명, 부상자도 21만 명이나 되었습니다. 또 남쪽에서만 20만 명의 전쟁미망인과 10만 명의 전쟁고아, 1천만 명의 이산가족을 낳았습니다. 그리고 국토는 남과 북이 똑같이 폐허가 되었습니다.

6·25전쟁은 핵무기를 제외한 최신의 살상무기가 총 동원된 전쟁이었습니다. 전쟁중 미군은 폭탄 46만톤, 네이팜탄 3만2천400톤, 로켓탄 31만4천발, 연막로켓탄 5만6천발, 기관총탄 1억7천만발을 쏟아 부었습니다. 이 엄청난 폭탄은 1차 세계대전 때 사용한 것과 맞먹는 양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어이없는 것은 휴전협정 조인식에는 미국과 중국, 북한만이 참석을 하였고 당사국인 우리 대한민국은 제외됐다는 사실입니다. 이유는 당시 이승만대통령이 북진통일을 계속 주장하며 끝까지 휴전을 반대해 미국이 제외시켰기 때문입니다.

6·25때 태어난 아이가 올해 예순 여섯의 나이가 되었습니다. 그때 총을 들고 싸웠던 이들은 대부분 세상을 떠났거나 살아있다 해도 80이 훨씬 넘은 노쇠한 노인들이 되어 있습니다. 남이고 북이고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노래 부르지만 관계는 더욱 더 악화돼 가기만 합니다.

전쟁은 인류의 공적(公敵)입니다. 전쟁이 일어나면 수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목숨을 잃어야 합니다. 정의가 어쩌니, 평화가 어쩌니 전쟁광들이 아무리 그럴듯한 구실을 내 걸더라도 ‘좋은 전쟁’은 없습니다. ‘나쁜 평화’일지언정 전쟁은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

전쟁을 일으키는 자는 한때 영웅이 될지언정 역사에는 전범자가 될 뿐입니다. 6·25전쟁은 한민족 5000년 역사의 가장 큰 재앙이었습니다. 우거진 숲 산과 들에서 나라를 위해 숨져 간 이름 모를 병사들, 그들을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호국의 달’, 그 6월을 보내며 당시 모두 즐겨 불렀던 진중가요 ‘전우야 잘 자라’를 기억 속에서 꺼내 적습니다.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낙동강아 흐르거라 우리는 전진 한다/원한이야 피에 맺힌 적군을 무찌르고서/꽃잎처럼 떨어져 간 전우야 잘 자거라-

●蛇足:‘호주기’는 6·25때 활약한 미군전투기의 별칭입니다. 이대통령부인 프란체스카여사의 국적이 오스트리아인데 일부 국민들이 오스트레일리아, 즉 호주로 잘못알고 프란체스카 친정나라에서 보낸 것으로 착각해 ‘호주기’라고 부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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