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을 생각하며>

옐로저널리즘

 

-언론의 영향은 무한대
사실을 왜곡, 외면하고
허위 사실을 퍼뜨리는
저급한 저널리즘은
우리 사회의 독버섯-

 

1889년 미국에서는 때 아닌 ‘신문전쟁’이 벌어졌습니다. 신문왕 조셉 퓰리처가 만드는 뉴욕월드(New York World)와 언론재벌 월리엄 랜돌프 허스트가 사주인 뉴욕저널아메리칸(New York Journal American)의 두 신문이 불꽃 튀는 경쟁을 벌여 온 사회를 뜨겁게 달구었던 것입니다.

당시 미국사회는 신문이 유일한 정보수단으로 지역의 작은 소식으로부터 정치권의 움직임 같은 다양한 내용들이 지면을 채워 시민들에게 전해졌습니다. 하지만 독자들은 딱딱한 기사보다는 재미있고 자극적인 내용을 좋아했습니다. 사실을 근거로 하되 좀 더 흥미롭고 선정적인 기사들이 채워진 신문을 선호했던 것입니다. 이때 인기를 누린 신문이 ‘뉴욕월드’와 ‘뉴욕저널’이었습니다. 이들 두 신문은 피차 물러설 수 없는 라이벌이었습니다.

경쟁이 가열될수록 앙숙이 될 수밖에 없었던 두 신문은 뉴스 제공에 그치지 않고 센세이션을 일으킬 만한 사건, 사고소식과 같은 기사로 독자 끌기에 온힘을 쏟았는데 연재물로 큰 인기를 누리던 만화 ‘옐로키드(Yellow Kid)’가 경쟁에 기름을 부었습니다.

‘옐로키드’는 퓰리처의 ‘뉴욕월드’에서 먼저 연재가 시작됐습니다. 이 만화가 선풍적인 인기를 누리자 허스트의 ‘뉴욕저널’이 꼼수를 써 작가를 빼돌려 데려갔고 화가 난 ‘뉴욕월드’가 다시 작가를 데려 오는 치열한 쟁탈전을 벌였습니다. 이 만화소동을 계기로 ‘옐로페이퍼’, ‘옐로저널리즘’이라는 용어가 탄생됐고 두 신문의 무분별한 선정성 경쟁은 도를 더하게 됩니다. ‘옐로’라는 호칭은 만화의 주인공인 아이가 노랑 잠옷을 입고 등장하는데서 생겨 난 것입니다.

100여 년 전 미국 사회를 뜨겁게 달구었던 만화주인공 ‘옐로키드.’ 오늘 언론의 사회적 책임이 더욱 절실해 지고 있다. / 위키백과

‘옐로저널리즘’을 우리말로 직역하면 ‘황색언론’이라고 하겠습니다. 쉽게 말하면 정론지(正論紙)가 아닌 흥미본위의 ‘삼류언론’이라는 의미쯤으로 보면 되겠는데 주로 인간의 원초적 본능을 자극하고 흥미본위의 보도를 일삼으면서 선정주의적 경향으로 일관합니다.

확실한 근거도 없이 멋대로 의혹을 제기하거나 단정을 해 보도하고 남녀 간의 스캔들 같은 것을 과장해서 퍼뜨려 대중의 호기심을 유발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시외버스터미널의 책 판매대 같은 곳에 널려있는 울긋불긋 자극적인 제목으로 표지를 장식한 것들이 모두 그런 것 들이라고 보면 됩니다.

‘언론의 자유’는 민주주의의 생명입니다. 어느 나라이건 민주주의를 하는 나라치고 헌법에 ‘언론의 자유’를 명시하지 않은 나라는 없습니다. 사람이 생각하는 것을 쓰고 싶은 대로 쓰고 말하고 싶은 것을 말하는 것은 인간의 기본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국가권력이 통제하고 막는 것은 독재국가이거나 ‘가짜민주주의’를 하는 후진국에서나 볼 수 있는 일입니다. 물론 허위사실을 쓰거나 남의 인권을 훼손하는 조작된 내용은 책임이 뒤따르기는 합니다.

우리나라는 1960~79년 박정희, 1980~87년 전두환 정권 때 까지만 해도 ‘언론의 자유’는 헌법에만 있었지, 국가권력의 통제아래 쓸 것을 제대로 쓰지 못했습니다. 정부의 ‘보도지침’에 따라 기사를 써야 했고 그렇지 않으면 가혹한 탄압이 가해졌습니다. 당시 언론인이었던 사람 중에 ‘남산’이라는 별칭의 정보기관에 공포심을 갖지 않았던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 국민들처럼 신문, 방송에 대한 신뢰도가 높은 나라도 없습니다. 술좌석에서 “옳다”, “그르다” 말다툼을 벌이다가도 “신문에 났다”고만 하면 시비가 멎는 게 우리 사회입니다. 그만큼 일반 국민들의 언론에 대한 신뢰도가 높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군인들이 쿠데타를 일으키면 제일 먼저 점령하는 곳이 방송국입니다. 예나 이제나 집권세력이 반드시 장악하려고 하는 것이 언론인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사회적 공기(公器)로서 사회에 미치는 언론의 영향력은 무한대라고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2011년 종합편성채널이 방송을 개시한 이래 국민들의 채널 선택권이 많이 넓어져 시청자들을 즐겁게 해 주고 있습니다. 그동안 두서너 개 채널로 따분하기만한 지상파가 전부인줄 알았던 시청자들은 이 채널, 저 채널 돌려가며 흥미로운 내용들을 쉽게 접할 수 있으니 TV보는 재미로 하루를 보내는 것이 더할 수 없는 일과가 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긍정적인 측면이 있는가 하면 부정적인 역기능 또한 적지 않음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문제는 이 종편들이 하루 종일 쏟아 내는 토크쇼(Talk Show)라는 이름의 ‘정치방송’들입니다. 날이면 날마다 정치평론가라는 이들을 불러다 놓고는 온종일이다시피 계속되는 ‘말잔치’는 정말이지, 짜증이 날 때가 한 두 번이 아닌 것은 필자만이 아닐 것입니다.

마치 만물박사들의 경연대회 같은 이 프로들을 보노라면 세상에는 만병통치의 신통력을 가진 사람들도 많이 있구나 라는 생각을 금할 수 없습니다. 늘 주관적인 시각으로 어느 한편을 마구 비판하거나 막말을 서슴지 않는 것을 보면서 이것이 사회의 공기(公器)로서 합당한 일인가를 의심치 않을 수 없기에 말입니다.

그러잖아도 국민들이 정치에 민감해 정치얘기로 술좌석 논쟁이 싸움으로 비화되는 일이 비일비재한데 날마다 방송에서 정치얘기로 시시비비를 일삼고 있으니 우리사회의 심각한 갈등현상은 바로 그런 ‘정치방송’의 영향에서 오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언론의 책임은 사실(Fact)을 사실대로 보도하는 것입니다. 사실을 왜곡해 다르게 보도하거나 있지도 않은 일을 사실처럼 작문을 해서 보도를 한다면 그것은 이미 언론이 아니라 시쳇말로 ‘찌라시’에 다름 아닙니다.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을 북한군이 내려와 저지른 사건이라고 보도한 황당한 일도 있었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그것은 허무맹랑한 오보였고 결국 사과방송까지 해야 했습니다.

그러니 국민들이 기자를 ‘쓰레기’라 하여 ‘기레기’라 부르고 있습니다. 과거 언론이 어려웠을 때도 ‘사이비기자’는 있었어도 ‘쓰레기 기자’라는 소리는 듣지 않았습니다.

이제 우리 언론도 품격을 찾아야 합니다. 신문이고 방송이고 있는 사실을 진실대로 전하고 확실치도 않은 내용을 가공해 마구 퍼뜨리는 저급한 일은 그만 둬야합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매우 불안합니다. 상상하기도 어려운 사건, 사고, 흉악범죄가 하루가 멀다 하고 일어나고 있습니다. 도대체 여성이 밤길을 제대로 갈 수 있습니까? 화장실을 제대로 갈 수 있습니까? 등산을 제대로 갈 수 있습니까? CCTV를 설치한다, 경찰을 늘린다 하는 것은 사건이 난 뒤에 범인을 잡는데 필요한 것이지 예방책은 아닙니다. 제발 엉뚱한 것 가지고 생색내려 하지 말고 억울하게 국민들 희생당하는 일이나 없게 해 주는 것이 정부가 할 일입니다.

언론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선정적인 보도로 죄 없는 국민들 혼란스럽게 하지 말고 책임 있는 언론의 역할을 다 해야 합니다. 그것이 ‘옐로저널리즘’을 추방하는 오늘의 과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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