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죽 속에 든 복은 누가 훔쳐 가지도 못하고 속이지도 못하는 법,” 신랑이든 신부든 제 복만 있다면 비록 혼인식이 초라했을망정 ‘훗날/후날’ 잘 사는 법이요.≪최래옥, 되는 집안은 가지나무에 수박 열린다≫

 

속담은 “제가 타고난 복은 누구라도 어쩌지 못한다.”라는 뜻으로 이르는 말이다.

최래옥은 1940년 전라북도 남원에서 태어났다.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 대학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주요 작품으로 ≪감기 걸리면 왜 콧물이 나오나≫, ≪천냥짜리 입담≫, ≪하늘님, 나라를 처음세우시고≫, ≪그래 그래, 좋아 좋아≫ 등이 있다.

부처님의 법문이 머문 곳, 법주사(7)

‘목조관음보살좌상’은 보물 제1361호이며, 불상의 크기는 높이 235cm, 너비 147cm이다. 1655년(효종 6)에 조성된 이 관음보살좌상은 법주사 원통보전(보물 916)에 주존불로 봉안되어 있다.

연화좌 위에 결가부좌로 앉아 있는 이 불상은 머리에는 중앙에 화불을 모신 다음 화염보주로 호화롭게 꾸민 보관을 쓰고 있다. 배 부분에도 복갑(腹甲) 같은 둥근 꽃 장식 판을 두르고 있어서 전반적으로 장식성이 두드러진다. 불단 양옆에는 남해용왕과 남순동자(南巡童子)의 조각상을 배치하였다. 더구나 조선 말기에 그린 관음탱이 후불탱으로 걸려 있어 더욱 두드러져 보인다. 네모난 얼굴에 두 눈을 아래로 내려뜨고 있어 인상이 근엄해 보인다. 수인(手印)은 오른손은 가슴 선까지 올리고 왼손은 배 높이에 둔 채 엄지와 중지를 맞댄 하품중생인(下品中生印)을 취하고 있는데, 마치 실제 인물의 손을 대하듯 곡선적이고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생동감이 넘쳐난다. 두 손은 다른 보살상처럼 가냘프다기보다는 크고 굵은 손가락들의 움직임이 크다. 양쪽 어깨를 덮은 천의(天衣) 자락은 신체의 곡선을 따라 자연스럽게 흘러내려 부피감 있는 곡선미가 드러난다.

‘복천암수암화상탑’은 보물 제1416호이며, 조선 전기의 고승 혜각존자(慧覺尊者) 신미(信眉, 1405년경∼1480년)의 부도로 성종 11년(1480년)에 조성되었다. 신미는 성종 때 영의정에 추층된 훈(訓)의 장자로, 이름을 수성(守省)이라 했고, 수암(秀庵)이라 불렸다. 그의 둘째 동생이 김수온(金守溫, 1410∼1481)이므로 1405년 무렵 태어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는 성균관에 입학했다가 출가하였으며, 세종 28년(1446년) 무렵 세종과 조우하여 여러 대군의 총애를 받았다. 당시 유생들의 거센 반대를 무릅쓰고 판선교종직(判善敎宗職)을 제수받았으며 국가적인 행사인 수륙제를 관할하였다. 문종대에 선교 양종을 통솔하는 위치에 올랐으며, 세조대에는 불경간경사업을 주도하며 세조의 존경을 받고 그의 두 제자 학열(學悅)과 학조(學祖)와 더불어 삼화상으로 불렸다. 그의 부도는 제자인 학조의 부도와 함께 속리산 복천암에 봉안되어 있다.

‘복천암학조등곡화상탑’은 보물 제1418호이며, 연산군 때의 고승인 학조대사 등곡(燈谷, 1432∼1514)의 부도로서 1514년(중종 9)에 조성되었는데, 등곡의 스승인 신미대사(信眉大師)의 부도 뒤편에 있다. 학조화상은 1464년(세조 10) 속리산 복천암에서 왕을 모시고 스승 신미와 함께 대법회를 열었고, 1467년(세조 13) 금강산 유점사를 중창하고 봉선사에 주석한 후 김천 직지사에 머물면서 1488년(성종 19) 인수대비의 명으로 해인사를 중수하고 진관사, 대자사, 낙산사를 중수하였다. 1500년(연산군 6)에는 왕비 신씨의 명으로 해인사 고려대장경 3부를 인행하여 발문을 짓는 등 조선전기에 활동한 고승이다. 1514년(중종 9) 그의 부도가 속리산 복천암과 함께 김천 직지사에 세워졌다.

한글 맞춤법 제30항 사이시옷은 다음과 같은 경우에 받치어 적는다. 2. 순 우리말과 한자어로 된 합성어로서 앞말이 모음으로 끝난 경우 (2) 뒷말의 첫소리 ‘ㄴ, ㅁ’앞에서 ‘ㄴ’소리가 덧나는 것은 사이시옷을 첨가한다. 그러므로 ‘훗날’로 써야 한다. 예를 들면, ‘곗날, 제삿날, 툇마루, 양칫물’ 등이 있다. ‘곗날(契-)’은 ‘계의 구성원이 모여 결산을 하기로 정한 날’을 말한다. ‘툇마루(退--)’는 ‘툇간에 놓은 마루’을 일컫는다.

<제공: 청주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 교수 황경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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