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영배의 참뜻은

―대형 참극 아비규환에
안타까운 유가족들,
그 심정 오죽하랴. 
경제는 선진국이 되었으나
집단문화는 아직 후진국―

필자는 오래 전 평소 존경하는 분으로부터 받은 귀한 선물을 가보(家寶)처럼 고이 간직하고 있습니다. 이름 하여 계영배. 한자로 경계할 계(戒), 찰 영(盈). 잔 배(杯)이니 잔에 넘침을 경계하라는 뜻을 가진 주전자와 술잔, 잔 밭임 세트입니다. 술을 마시되 한꺼번에 많이 들지 말고 조금씩 적당량을 마시라는 교훈이 담긴 이 용기는 경기도 이천의 이름난 가마에서 정성들여 구운 옥빛의 아름다운 도자기로, 최인호의 소설 ‘거상(巨商)’에서 주인공 임상옥이 그토록 아꼈던 전설적인 술잔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 옛 날 중국의 성현들이 과욕을 경계하기 위해 의기(儀器)로 만들어 곁에 두고 교훈으로 삼았다는 계영배는 과음을 삼가는 잔이라 하여 일명 절주배(節酒杯)라고도 하는데 잔이 갖고 있는 의미는 인간의 끝없는 욕심을 경계해야한다는 깊은 뜻에 있습니다.

이 잔이 특이한 것은 잔의 어느 한도까지 술을 부으면 그대로 있지만 7할 이상을 부으면 모두 새 버리는 신기한 기능을 갖고 있다는 점입니다.

계영배의 비밀은 속으로 감추어져있어, 여간해서 이해하기가 쉽지 않지만 사이펀(Siphon)의 원리라는 게 정설로 현대의 ‘탄타로스의 접시’라는 화학 실험기구와 원리가 비슷하다는 것입니다. 주변에 사이펀 원리를 이용한 것으로는 수세식 변기, 석유자바라 호스, 배수구 트랩, 커피메이커, 농업용수 관개, 세탁기 헹굼제투입구, 압력계와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계영배가 처음 선보인 것은 조선후기 실학자 하백원(1781~1845)과 도공 우명옥(1771~?)에 의해서 입니다. 우명옥이 만든 계영배는 뒤에 거상 임상옥(1779~1855)에게 전해져 그가 항상 옆에 이 술잔을 두고 끝없이 솟구치는 과욕을 다스리면서 어려운 사람을 돕고 큰돈을 지켰다고 야사는 전합니다.

일개 상인이었지만 임상옥이 청부(淸富)로서 후세에 이름을 남긴 것은 바로 그런 자기 절제의 철학이 있었던 것입니다. 임상옥은 “재물은 평등하기가 물과 같고, 사람은 바르기가 저울과 같다(財上平如水 人中直似衡)”는 오늘 이 시대에도 교훈이 될 명언을 남겼습니다.

계영배를 처음 만든 우명옥은 본래 질그릇을 만들던 사람입니다. 그의 꿈은 도자기 가마에서 작품을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다 운 좋게도 왕실의 진상품을 만드는 경기도 이천의 가마로 들어가 명인 지외장의 제자가 되었고 주경야독, 도예를 공부해 순백색의 설백자기(雪白瓷器)를 탄생시켰습니다. 눈같이 흰 설백자기가 어찌나 아름다웠던지 그는 단박에 돈과 명예를 거머쥐었습니다. 언제나 그렇듯 그것이 문제였습니다.

서울 한복판 이태원에서 300여명의 사상자를 낸 참사현장. 29일 새벽 소방과 경찰들이 밤새워 사건을 수습하고 있다. /NEWSIS
서울 한복판 이태원에서 300여명의 사상자를 낸 참사현장. 29일 새벽 소방과 경찰들이 밤새워 사건을 수습하고 있다. /NEWSIS

돈이 생기니 자연스레 기생집에 드나들기 시작했고, 술과 여자에 빠져 도예를 등한시하며 오만해졌습니다. 그런데 여느 때처럼 향락을 즐기던 어느 날, 폭풍우를 만나 구사일생으로 살아났습니다. 크게 놀란 우명옥은 스승에게 돌아가 용서를 구하고,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전에 들은바 있는 계영배라는 술잔을 만들었습니다.

고대 중국 춘추오패(春秋五霸)의 하나인 제환공(齊桓公)이 군주의 올바른 처신을 위해 인간의 끝없는 욕망을 경계하며 늘 곁에 놓아 마음을 가지런히 했었던 그릇이라 하여 유좌지기(宥坐之器)라 불리었습니다. ‘순자(荀子)’에 보면 공자가 제환공의 사당을 찾았을 때 그릇에 구멍이 뚫려 있음에도 술이 새지 않다가 어느 정도 이상 채웠을 때 술이 새는 것을 보고 제자들에게 “총명하면서도 어리석음을 지키고, 천하에 공을 세우고도 겸양하며, 용맹을 떨치고도 검약하며, 부유하면서도 겸손함을 지켜야한다”며 이 그릇의 의미를 가르쳤다고 합니다.

우명옥은 당시 설백자기를 만들어 명성을 얻은 후에 자신의 방탕한 삶을 뉘우치면서 계영배를 만들었고, 이 잔이 임상옥에게 전해졌고 그는 늘 이 잔을 곁에 두고 자신의 과욕을 경계하면서 조선 역사상 전무후무한 거상으로 거듭났다고 합니다.

오늘 우리 사회가 하루도 평안한 날이 없을 만큼 온갖 사건 사고와 추문으로 얼룩지고 있는 것은 모두 탐욕에서 비롯되고 있음은 두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잔을 가득 채우지 말라는 경구는 건강을 생각해 과음을 삼가라는 뜻이겠거니와 그 보다는 일상에서의 욕심을 줄이라는데 더 깊은 뜻이 담겨져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전후좌우 주변을 돌이켜 보건대 우리 사회의 온갖 사건, 사고는 모두 적정선을 넘는 과욕에서 비롯되고 있음을 부인하지 못합니다. 넘침은 모자람만 못하다는 과유불급(過猶不及)이 그것입니다.

불가(佛家)에서는 “마음을 내려놓아라,” “집착을 버려라”라고 합니다. 욕심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글자를 보건대 아래쪽에 마음心이 붙은 욕(慾)자는 소유하고자하는 욕심 욕자요, 마음心이 없는 욕(欲)자는 하고자 할 욕자입니다. 그러니까 마음을 비우라 함은 갖고자 하는 욕심을 버리는 것만이 아닌, 무엇을 하고자 하는 생각, 그 역시 버리라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명심보감은 이렇게 충고하고 있습니다. ‘족하나 부족하다 생각하면 항상 부족하고, 부족하나 족한 것으로 알면 매사에 여유가 있느니라’(足而不足常不足 不足知足每有餘).

그런데 이건 또 웬 날벼락인가. 할로윈데이를 즐기기 위해 거리로 나갔던 젊은이들이 이태원 좁은 언덕길에서 도미노처럼 쓰러져 대참사(大慘死)를 당한 사건은 오늘 우리를 다시 한 번 슬프게 합니다. 코로나19가 잠시 주춤하는가 싶더니만 졸지에 150여명이 목숨을 잃고 또 150여명이 부상을 당했으니(31일 6시기준) 재앙도 큰 재앙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비규환의 현장에서 희생된 젊은이들의 억울한 죽음이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우리는 이번 사건을 통해서 집단문화에 아직은 성찰해야 할 점이 적지 않음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고 보면 대한민국은 경제적으로는 선진국 대열에 들어섰다고 하나, 국민적 집단문화의식은 아직 후진국을 벗어나지 못한 사실을 다시 확인하게 됩니다. 게다가 주체가 없는 자발적인 행사이다 보니 책임 질 사람도 없는 축제였다는데 사건의 허점이 있습니다.

한창 피어나는 20~30대의 꽃 같은 청춘들이 부지불식간에 참변을 당했으니 어찌 그 슬픔과 안타까움이 유가족만의 것이겠는가. 희생당한 고인들의 명복을 빌고 사랑하는 아들 딸, 형제자매를 잃은 유가족에게도 위로의 말씀으로 조의를 표합니다. 어찌하여 이 좋은 가을 날, 이런 참극이 일어나는가. 오호(嗚呼)라, 슬프다.

저작권자 © 충청미디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