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표지교

―어제의 동지가 오늘 적이 되고
오늘의 친구가 내일 적이 되는
이 나라의 정치권. 
신의를 찾을 수 없는
적대관계만이 있을 뿐―

중국 춘추전국시대 제(齊)나라에 관중(管仲·BC725~BC645)과 포숙(鮑叔·BC723~BC644)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들 두 사람은 어렸을 적부터 아주 가까운 죽마고우였습니다.

관중은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는데 집안이 매우 가난했습니다. 포숙은 관중에게 함께 장사를 하자고 제안했고 밑천을 모두 댔습니다. 그런데 관중은 이익이 나면 번번이 포숙보다 더 많은 돈을 몰래 가져가곤 했습니다. 이를 본 포숙의 하인들은 불평을 했습니다. 하지만 포숙은 “그런 소리 하지들 마시게. 관중은 집이 어려운데다 노모를 봉양해야하기 때문에 좀 더 가져가도 괜찮다네”라며 하인들을 타일렀습니다.

어느 때 두 사람이 함께 전쟁에 나가 적과 싸울 때면 관중은 늘 뒤로 몸을 피하기 일쑤였습니다. 이를 본 동료들은 “목숨을 아까워하는 겁쟁이”라고 흉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포숙은 “그는 죽기를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고향에 그가 봉양해야 할 늙은 어머니가 있기 때문에 목숨을 아끼는 것”이라고 오히려 관중을 두둔했습니다.

그 뒤 두 사람은 벼슬길에 나가 각각 다른 사람을 섬기게 되었습니다. 관중은 제나라 군주 양공(襄公)의 아들 규(糾)를 보좌했고 포숙은 규의 이복동생인 소백(小白)을 섬겼습니다. 시간이 흘러 제나라가 폭군 양공으로 인해 혼란에 빠지자 관중은 규와 함께 노나라로 피신했고 포숙은 소백과 함께 거(莒)나라로 몸을 피했습니다. 얼마 후 반란으로 왕이 피살되자 이번에는 두 형제가 서로 왕위를 놓고 싸움을 벌였고 그로인해 관중과 포숙도 서로 적이 되었습니다. 관중은 규를 왕으로 세우기 위해 소백을 암살하려 했지만 실패하였고 포숙의 도움을 받은 소백이 먼저 제나라로 돌아와 왕위에 오르니 그가 바로 제 환공(齊桓公)입니다.

제 환공은 포숙을 재상으로 삼으려 하자 그는 극구 사양하며 투옥된 관중을 석방해, 발탁하라고 권합니다. 포숙은 “관중의 재능은 신보다 훨씬 훌륭합니다. 공께서 제나라를 다스리는 것으로 만족하신다면 신만으로도 충분하지만 천하를 도모하려 하신다면 관중을 기용하셔야 합니다.”

제 환공은 “관중은 나를 죽이려한 원수이다. 그런데 그를 어찌 중용하라 하는가,” 라며 크게 화를 냅니다. 그러자 포숙은 “관중은 자신의 주공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한 것” 이라며 계속 관중을 감쌌습니다.

결국 제 환공은 포숙의 말을 받아 들여 관중을 상경(上卿)에 봉했고 포숙은 스스로 관중의 수하(手下)에 들기를 청했습니다. 포숙의 도움으로 상경이 된 관중은 온 힘을 다해 환공을 보좌했습니다. 그로인해 부강해진 제나라는 춘추전국시대 최초로 천하의 패자(霸者)가 되었습니다. 관중의 지모(智謀) 덕이었습니다.

가을이 성큼 다가 온 증평읍 사곡리 농심 테마파크 꽃밭에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황화코스모스 모습. 증평군 제공 / NEWSIS
가을이 성큼 다가 온 증평읍 사곡리 농심 테마파크 꽃밭에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황화코스모스 모습. 증평군 제공 / NEWSIS

훗날 관중은 “포숙과 장사를 하던 어렵던 시절, 나는 언제고 이문을 더 많이 가져갔는데도 포숙은 내가 욕심을 부린다고 말하지 않았다. 한번은 포숙에게 도움을 주려다가 오히려 그를 곤경에 빠뜨렸는데, 그는 나를 어리석다고 하지 않았다. 나는 세 차례 관직에 올랐다가 주군으로부터 번번이 파직되었는데, 포숙은 내가 능력이 없는 것이 아니라 아직 때를 만나지 못해서 그렇다”면서 “나를 세상에 낳아준 사람은 부모이지만(生我者父母) 세상에서 나를 알아준 사람은 포숙(知我者鮑子也)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이야기는 사마천의 ‘사기(史記)’ 관안열전(管晏列傳)에 나오는 고사입니다.

오랜 옛날 관중과 포숙의 진정한 우정에서 비롯된 관포지교(管鮑之交)는 오늘 날 고교교과서에도 소개될 만큼 친구간의 깊은 우정을 상징하는 의미로 쓰이고 있습니다.

현재 중국 산동성(山東省) 쯔보(淄博)시에 있는 관중기념관에는 관포지교의 일화를 기리는 대련(對聯)이 걸려있습니다. ―친구를 사귀고 마음을 나누는 지기(知己)를 만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관중과 포숙은 금전과 명예를 서로 양보할 만큼 지극히 순수한 우정의 본보기이다―

이들의 우정은 당나라 때 두보(杜甫)의 ‘빈교행(貧交行)’이라는 시에도 나타나 있습니다. ―손바닥 뒤치면 구름이 되고 손을 엎으면 비가 되는 것처럼 사소한 원인으로 날씨는 금방 변한다. 세상인심도 그와 같아서 경솔한 행동과 박절한 마음을 일일이 셀 수 있으리. 옛날에는 그렇지 않았으니 그대들은 보지 못 하였는가. 관중과 포숙의 빈한했을 때의 사귐을 지금의 사람들은 진정한 우정의 도를 흙 버리듯이 하네―

후세 역사는 관중의 현명함을 칭송하는 사람보다 포숙의 사람 됨됨이를 칭송하는 사람이 더 많았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전통적으로 우리 사회는 남자들 사이의 깊은 우정을 남녀사이의 애정에 못지않게 높이 평가하는 정서가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정을 미화하는 용어가 수 없이 많이 전해 옵니다. 금란지교(金蘭之交)에 금석지교(金石之交), 단금(斷金)지교, 교칠지교(膠漆之交), 담수지교(淡水之交), 문경지교(刎頸之交), 수어지교(水魚之交), 지란지교(芝蘭之交), 막역지우(莫逆之友), 백아절현(伯牙絶絃)등이 그것들입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출범할 때만 해도 정치권을 비롯한 우리 사회에는 신의(信義)니, 의리(義理)니 하는 용어가 중요하게 빈번히 사용되곤 하였습니다. 그러나 근래에 오면서 인간관계는 과거와 달리 이해여부, 득실에 따라 행해질 뿐, 옛날처럼 의리로서 맺어지는 일이 드물어 졌습니다. 그러기에 “이(利)를 보거든 그것을 취하기 전에 의(義)를 먼저 생각하라”는 견리사의(見利思義), 네 글자가 서예가들의 애용구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사회는 정치권은 물론 각 분야에 도리에 의한 우정은 보기 드물고 이해득실에 따라 만나고 헤어짐이 이루어지는 것을 흔히 보게 됩니다.

국제사회에서는 “영원한 친구도, 영원한 적도 없다”고 합니다. 필요에 따라 손을 잡아 이익을 취하고, 다시 또 새로운 대상을 찾아 이를 취하는 것이 현실적 외교인 것입니다. 도리와 명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익의 많고 적음에 따라 가부가 달라집니다. 날이 갈수록 사회가 점점 더 가팔라지는 이유입니다.

정치에서 여(與)와 야(野)는 상대 개념이지 적대관계가 아닙니다. 한 시대, 한 집단을 대변하는 경쟁의 관계입니다. 더 큰 의미로 본 다면 경쟁자를 넘어 동지의 관계라고도 말 할 수 있습니다. 동시대 하나의 집단을 함께 이끌고 가야하는 동일체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 정치가 허구한 날 상대를 궤멸시키려 드는 것은 솔직히 정치를 하는 것이 아닌 전쟁을 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전쟁에서는 상대를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기 때문에 방아쇠를 당겨야 하지만, 나도 살고, 너도 사는 것이 궁극적인 정치의 가치요, 목적입니다. 새 정부가 출범한지 5개월, 여야의 대결이 꼭 전쟁을 보는 것 같아 2500년 전 옛날 옛적의 역사를 훑어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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