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 왕실의 또 다른 이야기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 다‘는 영국 왕실.
사랑을 위하여 왕위도 버린 
가슴 아픈 비화가
묻혀 있습니다―

전 세계에 애도물결을 불러일으킨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의 국장(國葬)이 별세 10일 만인 19일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왕위를 물려받은 아들 찰스 3세, 6,800만 영국 국민들, 그리고 세계의 정치 지도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성대히 거행되었습니다.

이제 영국인들은 1952년 25세 젊은 나이에 여왕으로 즉위해 70년 동안 국민들의 정신적 지주로 군림해온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아름답고 근엄하기만 한 모습은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한 시대가 가고 새로운 시대가 시작된 것입니다.

그런데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즉위하기 전인 영국 왕실에는 전대미문, 세계를 놀라게 한 안타까운 사랑 이야기, 아니 대형스캔들이 세상을 놀라게 했습니다.

1936년 12월 11일 영국의 BBC라디오는 깜짝 놀랄 특보를 방송합니다. 국왕 에드워드 8세의 비장하면서도 떨리는 목소리가 전 세계로 퍼져 나갔습니다. ―“나는 사랑하는 여인의 도움과 뒷받침 없이는 막중한 책무를 이행해 나가기가 불가능 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영국은 물론 유럽 전역은 삽시간에 놀라움에 휩싸였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대영 제국의 국왕이며 전 세계 56개 영연방의 황제가 갑자기 왕위를 내려놓겠다니, 그야말로 청천벽력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것도 사랑하는 여인과의 결혼을 할 수 없다는 것이 주된 이유였으니, 충격은 더욱 클 수밖에 없었습니다.

에드워드 8세는 1894년 선왕인 조지 5세의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아무 탈 없이 황태자가 되고 양위를 기다리던 그는 36세 때인 1930년 두 살 연하 미국인 유부녀인 심슨 부인을 운명적으로 만납니다.

에드워드 황태자와 심슨 부인은 추운 겨울날 영국 래스터셔의 작은 마을 멜턴 모브레이에서 처음 만났습니다. 여우 사냥에서 막 돌아 온 30대 중반의 황태자는 푸른색 드레스를 입은, 지적이며 우아한 심슨 부인에게 말을 건넸습니다. 심슨 부인은 당시 한 번의 이혼을 거쳐 어니스트 앨드리치 심슨과 재혼한 남의 아내였지만, 에드워드 황태자는 활달하고 세련되며 위트 넘치는 그녀의 매력에 금방 빠져 들었습니다. “불꽃같은 눈을 가진 아름다운 여인.” 왕위에서 물러나 훗날 윈저공이된 그는 심슨 부인의 첫 인상을 이렇게 얘기했다고 합니다.

이들의 만남이 계속되던 1936년 1월 국왕 조지 5세가 서거하자 황태자는 에드워드 8세라는 칭호로 국왕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자상한 성격과 탁월한 패션 감각으로 인기가 높던 그와 심슨 부인에 대한 소문은 이미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반응은 좋지 않았습니다. 볼드윈 총리를 비롯한 내각과 의회가 반대 의사를 표명했고 이내 심슨 부인은 국왕을 현혹시킨 공적(公敵)이 되어 결코 대영제국의 왕비가 될 수 없다는 쪽으로 국민의 여론이 기울었습니다. 에드워드 8세는 부단히 노력했지만 허사였습니다. 심슨 부인을 선택하려면 국왕의 자리를 포기해야하는 처지가 됐습니다. 결국 에드워드 8세는 왕위를 내려놓기로 결심을 하고 중대발표를 한 것입니다.

왕위에서 물러 난 에드워드 8세는 후임 왕이 된 동생 조지 6세로부터 윈저공이라는 작위를 받습니다. 결국 윈저공은 1937년 프랑스의 한 성에서 심슨 부인과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직전 국왕임에도 영국 왕실에서는 단 한사람도 보내지 않았고 결혼식 참석자는 불과 16명의 하객이 전부인 가운데 쓸쓸하게 치러졌습니다.

특히 에드워드 8세의 어머니였던 메리 왕비는 “고작 ‘그 여자’를 위해 이 모든 것을 포기했느냐”며 오랜 시간이 지나도 아들에 대한 원망을 내려놓지 않았습니다.

한 시대 세계인들을 안타깝게 한 윈저공과 심슨부인의 사랑. 그들의 사랑은 왕위를 버릴 만큼 위대한 것이었나. 1937년 프랑스에서 결혼한 뒤의 윈저공과 심슨 부인. / NEWSIS
한 시대 세계인들을 안타깝게 한 윈저공과 심슨부인의 사랑. 그들의 사랑은 왕위를 버릴 만큼 위대한 것이었나. 1937년 프랑스에서 결혼한 뒤의 윈저공과 심슨 부인. / NEWSIS

영국 왕실은 심슨 부인에게 작위는 물론 왕실의 격식에 맞는 어떤 호칭도 허용하지 않았고 그녀는 결혼 후에도 전 남편의 성을 따라 ‘심슨부인’으로만 불렸습니다.

훗날 세계는 윈저공과 심슨의 사랑을 소재로 한 수많은 서적이 발행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1950년대 유치환은 시 ‘사모(思慕)’에 ‘뉘는 사랑을 위하여 나라도 버린다는데…’라고 읊었고 한때 유행한 대중가요 노랫말에도 ‘사랑을 위하여 왕관도 버리고’라는 구슬픈 가사가 애창된 적이 있습니다.

사람들 가운데 어떤 이는 윈저공과 심슨부인을 왕위를 버리고 사랑을 성취한 멋지고 위대한 남녀로 평가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그녀는 팜 파탈로 치부하기도 합니다. 팜 파탈(femme fatale)이란 저항할 수 없는 관능적 매력과 신비롭고 이국적인 아름다움을 통해 남성들을 성적으로 종속시킬 뿐만 아니라 상대를 파멸시키는 여성을 가리키는 프랑스어입니다. 팜므(femme)는 여성을 뜻하는 단어이고 파탈(fatale)은 치명적 매력을 뜻합니다. 반대로 남성의 경우에는 옴므 파탈(homme fatale)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에드워드 8세의 왕위 사퇴의 경우 전적으로 심슨부인에 의해 당한 불행으로 본 것입니다.

에드워드 8세가 왕위를 포기하자 뒤를 이은 사람이 동생인 조지 6세입니다. 그가 바로 이번에 세상을 떠난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아버지입니다. 그러니까 에드워드 8세는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큰 아버지입니다. 그런데 조지 6세 또한 1952년 세상을 떠나 딸인 엘리자베스 2세가 왕위를 물려받아 70년을 그 자리에 있었던 것입니다.

영국 전기 작가 앤 세바가 2012년 미국에서 펴낸 책 ‘그 여자(That Woman)’에 따르면 “두 사람의 결혼 생활은 그리 행복한 것 같지는 않았다”고 썼습니다. 이 책은 저자가 각종 사료를 통해 심슨의 일대기를 분석한 것으로, 제목인 ‘그 여자’는 윈저공의 어머니 메리왕비는 시종 심슨을 못 마땅한 심정으로 호칭한 말입니다. 책에 따르면 ―미국 볼티모어의 중 상류층 가정 출신인 심슨은 타고난 요부(妖婦)였다. 그녀의 친구들은 심슨이 아주 어릴 적부터 남자들을 유혹하는 법을 알았다고 밝혔다. 단순히 매력적인 외모로 눈에 띄는 차원을 넘어 주도적으로 남자들을 끌어당기는 기술이 있었다는 것이다. 심지어 심슨은 두 번 째 남편과 결혼한 상태에서 윈저공과 외도를 하면서도 남편을 속이면서 결혼 생활을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결국 두 사람은 만인의 부러움을 사며 결혼했지만, 윈저공은 심슨의 조울증적인 성격과 씨름해야했다. 심슨은 윈저공에게 폭언을 일삼는가 하면 몸 가꾸기와 사치품에 집착했다. 심슨은 부와 안정을 얻기 위해 여러 차례 결혼 했지만, 끝내 진정한 행복을 찾은 것 같지는 않다. 윈저공이 사망한 뒤 그녀는 파리의 낡은 집에서 술과 외로움으로 말년을 보냈다. 심슨은 말년에 지극히 절망적이어서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삶을 살았다.― 책은 심슨부인에 대해 긍정적이기 보다 부정 일색으로 쓴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결국 이국을 떠돌던 윈저공은 1978년 5월 28일, 77세의 나이로 사망합니다. 이때도 그가 머문 곳은 영국이 아니었고 결혼 이후 부인과 줄곧 생활하던 프랑스 파리였습니다. 하지만 그의 시신은 결국 영국으로 돌아갑니다. 돌고 돌아 왕실 묘지에 묻히게 된 것입니다. 그로부터 14년 후 숨을 거둔 아내 심슨부인, 그녀 역시 결국 영국왕실의 인정을 받아 마지막 사랑이었던 남편 곁에 나란히 묻히게 됩니다. “내가 죽거든 푸른색으로 갈아 입혀달라”는 말이 그녀의 마지막 유언이었다고 합니다.

20, 21, 두 세기를 풍미(風靡)한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화려한 장례식을 마친 뒤 런던 서쪽 약 30km 지점에 위치한 윈저성의 성 조지 예배당으로 옮겨져 그곳에 안장돼 있는 아버지 조지 6세와 남편 필립공, 동생 마거릿 공주의 곁에 묻혀 져 영면에 들어갔습니다. (위 내용은 인터넷에 올라있는 과거 동아일보와 서울신문 기사에서 참고하였습니다)

저작권자 © 충청미디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