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수교 30년

―발전이 많았지만
도전도 많았습니다.
다시 고래싸움에 낀 
새우형국이 된 대한민국,
과연 지혜는 무엇일까―

1992년 9월27일 대통령 전용기인 에어버스 A300 공군1호기가 중국과의 외교관계 수립을 위해 대한민국 대표단을 싣고 성남의 서울공항을 이륙해 베이징(北京)을 향해 날아올랐습니다. 기내에는 노태우 대통령과 이상옥 외무장관을 비롯한 정부대표단, 50여명의 재벌급 기업인들, 60여명의 기자들이 함께 타고 있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우리나라와 외교 관계가 없던 중국은 ‘죽(竹)의 장막’이라 일컬으며 한국인들에게는 갈 수없는 공산주의국가, 즉 ‘금단의 땅’이었습니다. 대통령은 물론 외교관들, 경제인들, 수행기자들이 모두 설레 임을 감추지 못한 채 상기되어있었습니다. 비행기는 2시간 만에 베이징의 서우두(首都)국제공항에 도착했습니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건립된 지 43년 만에 처음 입국하는 한국인들을 중국 외교부 관리들이 맞이했습니다.

베이징의 상징인 텐안먼(天安門) 광장에는 여기 저기 태극기가 내걸려 있었고 시민들이 호기심으로 그것을 바라보는 모습이 눈에 띄었습니다.

한국과 중국은 이미 한해 전 서울과 베이징에 무역 대표부를 설치해 영사기능을 일부 수행하며 새로운 교류를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1991년 9월 17일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 이후 1·2차 한중외무장관 회담을 개최했고 그와 같은 노력의 결과로 1992년 8월 24일 이상옥 외무장관과 중국의 첸지천(錢基琛) 외교부장은 베이징 영빈관에서 한중선린협력우호관계에 합의했습니다. 그 주요 내용은 상호불가침, 상호내정불간섭, 중국의 유일합법정부로 중화인민공화국 승인, 한반도 통일문제의 자주적 해결원칙 등으로 6개항의 외교 관계 수립에 관한 공동 성명’을 교환했고 마지막 절차로 노대통령의 방중 정상회담이 성사 된 것입니다.

노태우 대통령은 도착 이튿날인 28일부터 중국의 지도자들과 역사적인 회담을 갖고 양국 간의 현안에 관해 논의했습니다. 먼저 양상쿤(楊尙昆) 국가주석과 정상회담을 가진 것을 비롯해 장쩌민(江澤民) 공산당총서기, 이펑(李鵬) 국무원 총리 등 중국 정부 지도자들과의 회담에서 변화하는 국제정세와 양국 간의 현안, 그리고 향후의 우호 증진에 관해 폭 넓게 의견을 교환했습니다.

한중정상회담 이후 한국과 중국의 관계는 다양한 분야에서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비약적으로 발전했습니다. 1992년 양국의 교역 규모는 63억8000만 달러에서 20년 뒤인 2012년 2206억 2000만 달러로 35배 증가했으며, 1000만 명이 넘는 인적 교류가 이루어지며 중국에 한류열풍(韓流熱風)을 불러일으켰습니다.

13억 중국 대륙은 무한한 시장으로 한국인들을 맞이했으며 한국의 상권역시 중국관광객의 쇼핑센터가 되었습니다. 한국의 기업들은 중국에 공장을 짓고 상품을 생산했으며 우리 젊은이들은 미국에 맞먹는 유학지로 중국을 선택해 몰려갔고 한국의 대학들 역시 각종 특혜를 내세워 중국 학생들을 불러들였습니다.

인구 2200만의 수도 베이징시는 독일차 대신 현대자동차의 소나타가 시 지정 공식 택시가 돼 거리를 뒤덮었습니다. 중국의 명승지 마다엔 한국의 단체관광객들이 줄을 잇고 있으며 한국의 영화, 드라마가 중국인들을 매혹시키고 있습니다.

1992년 9월 28일 중국을 방문한 노태우 대통령(우)이 양상쿤 국가주석의 안내로 중국군 의장대를 사열하고 있다. / 자료사진
1992년 9월 28일 중국을 방문한 노태우 대통령(우)이 양상쿤 국가주석의 안내로 중국군 의장대를 사열하고 있다. / 자료사진

그럼 우리나라는 어떤가. 지금 재래시장이나 슈퍼마켓에 가 보면 진열상품의 태반이 중국제품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의류, 식품 등 생필품은 90%가 중국산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입니다. 심지어 고급 레스토랑, 일반음식점의 이쑤시개마저 중국산이 점령하고 있는 것이 현재 우리 사회의 모습입니다. 그뿐인가. 곧 맞이할 추석 명절의 제사상은 그동안 그랬듯이 중국산이 차지할 것입니다. 한때 종주국 논란을 빚은 김치는 어떤가. 국내 음식점 김치의 70%이상이 중국 수입품이라면 종주국 자랑이 낯 뜨겁지 아니한가. 오늘날 한국인들의 생활에 있어 중국의 영향력은 아무리 과장한다 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중국의 생활 문화는 과거 조선시대를 뛰어 넘을 정도로 이 나라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올해는 1992년 한국과 중국이 외교를 맺은 지 3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학계·경제계 등 각계에서는 수교30년을 되돌아보는 각종 세미나 등을 열어 토론을 벌이고 있습니다. 얻은 것은 무엇이고, 잃은 것은 무엇인가에 대해 논쟁들이 한창입니다.

그런데 한중관계의 발전에는 전제가 있습니다. 바로 미국입니다. 지금 한국은 미국의 ‘칩4’가입 요구로 딜레마에 빠져있습니다. ‘칩(Chip)’이란 반도체를 의미하고, 4는 미국, 한국, 일본, 대만, 네 나라를 의미하는 것으로 미국바이든 대통령이 제안한 4개국 반도체 동맹을 말합니다. 문제는 이 동맹이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미국을 위한 협의체라는 점입니다. 당연히 중국이 반발을 합니다. 한국이 난처한 것은 우리 반도체의 68%를 중국이 수입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끊으라고 합니다. 미국의 요구에 응할 경우 중국과의 관계가 끊어지니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것이 한국의 입장입니다. 진퇴유곡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안보는 미국, 경제는 중국’이라고 말합니다. 논리인즉슨 그럴듯해 보입니다. 안보 따로, 경제 따로…,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안보가 경제’이고, ‘경제가 안보’인 국제 정치에서 나 편리한 대로 내 잇속만 챙긴다?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중국 속담에 ‘30년 하동(河東), 30년 하서(河西)’라는 말이 있습니다. 세월이 흘러 황하의 물줄기가 바뀌어 동쪽이 서쪽으로 변한다는 뜻으로 시간이 지남에 따라 끊임없는 변화와 부침(浮沈)이 있음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한중관계도 지난 30년간 많은 변곡점을 지나왔습니다. 마찬가지로 앞으로도 더욱 많은 도전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을 극복하고 더욱 발전시키는 것은 오로지 두 나라의 정치 지도자와 국민들의 의지에 달려 있다고 하겠습니다. 빛나는 30년이 될지, 어두운 30년이 될지 윤석열 정부에 기대를 걸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우리나라의 무역 형태를 보면 과거 미국과 일본에 의존하던 것이 이제는 미국과 일본을 합쳐도 중국을 따라가지 못하는 현실입니다. 우리나라의 처지가 난감해진 것만은 분명합니다.

중국은 저 지난 해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사태로 한국에 보복을 가했었습니다. 중국관광객의 한국 출국을 제한하자 서울의 심장인 명동이 ‘유령의 거리’가 되었습니다. 이제 다시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미국의 칩4에 한국이 가입하지 않으면 이번에는 미국이 또 압박을 가해 올 것은 불을 보듯 뻔합니다.

지금 우리 한국은 미국과 중국이라는 거대한 두 괴물 사이에 낀 꼴이 되어 있습니다. 고래싸움에 새우 등터진다는 말이 바로 오늘 우리가 처한 현실이 아닐까 싶습니다. 1950년대 유행했던 노랫말이 생각납니다. “사랑을 따르자니 스승이 울고, 스승을 따르자니 사랑이 운다.”

저작권자 © 충청미디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