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6·25를 생각함

―민족역사상 대 재앙이 된
동족상잔의 6·25전쟁.
통일은 요원한 채 휴전 69년,
오늘도 갈등과 대립은 
계속됩니다―

올 6월은 우리 민족역사상 최대 비극이 된 6·25전쟁이 일어 난지 72주년이 되는 달입니다. 1950년, 그가 누구이던 그 해에 태어나 아직 살아 있다면 올해 일흔 두 살의 나이가되었을 것입니다. 아득한 옛 이야기가 되었지만 당시의 살벌했던 기억은 만화경처럼 생생합니다.

6월 25일 새벽 4시 소련제 야크전투기와 242대의 T34탱크를 앞세운 북한 인민군이 38도선을 넘어 남쪽으로 공격을 개시해 옴으로서 동족상잔의 전쟁은 시작되었습니다.

탱크와 장갑차도 없이 정찰용 경비행기와 국민성금으로 해외에서 구입한 훈련용 소형비행기 10대에 몇 대의 화포, 칼빈 총과 M1소총이 주 무기였던 우리국군은 총탄마저 충분하지 못한데다 그나마 15일간 전투를 할 수 있는 보급품이 전부였습니다. 2년 전 정부는 수립됐으나 이념 간 대립이 심해 사회가 혼란했고 마침 주말을 맞아 장병들이 외박을 나간 데다 북한이 남침하리라고는 상상조차 못했기에 처음부터 싸움은 상대가 될 수 없었습니다.

그날은 마침 일요일이었고 장병들은 전 날 절반이 주말외출을 나가 단꿈에 빠져있던 시간이었습니다. 그때마다 작은 충돌은 있었으나 전쟁이 터지리라고는 상상조차 해보지 않았기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대로 된 중무기도 없이 빈약한 무기뿐이던 국군은 물밀 듯이 밀려오는 인민군에 제대로 한번 맞서 보지도 못하고 후퇴를 거듭했습니다. 말이 후퇴이지 소총을 거꾸로 메고 피난민과 함께 남으로 내려가던 풀죽은 국군의 모습은 패주병(敗走兵), 바로 그것 이었습니다.

전쟁이 일어난 지 사흘째 되던 27일 인민군은 이미 서울 동북쪽 미아리고개까지 다다라 수도 서울함락이 촌각을 다투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때 KBS라디오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특별 담화가 발표되었습니다. “지금 국군이 반격 중이니 국민 여러분은 안심하시오.” 대통령의 담화에 국민들은 안도했지만 사실 이대통령은 인민군 남침 보고를 받고는 측근들과 함께 특별 열차편으로 재빨리 서울을 떠나 대전으로 내려가 피신해 있으면서 국민들에게 서울에 있는 것처럼 녹음방송을 했던 것입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한 밤중 한강에 단 하나 뿐인 인도교를 폭파한 것입니다. 다리를 건너 던 수 십대의 자동차와 500여명의 시민들이 순식간에 강물로 떨어져 목숨을 잃는 날벼락을 맞았습니다. 당시 서울시 인구는 180만 명. 봇짐을 싸 집을 나서던 시민들은 강을 건널 수가 없게 돼 피난을 포기해야 했습니다. 결국 국군은 제대로 전투다운 전투 한번 못 해보고 피난민과 함께 남쪽으로 패주하기에 바빴습니다.

긴급 소집된 유엔안보리는 북한을 침략자로 규정하고 일본에 주둔해 있던 미군을 급거 파병해 오산 근처에 1차 방어선을 쳤지만, 속수무책 밀려났고 대전에서는 미24사단장 딘 소장이 인민군에 생포되는 어이없는 일마저 일어났습니다.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온 인민군은 7월 말 낙동강에 최후 방어선을 친 유엔군과 국군에 막혀 진격을 멈추었으나 전라남북도까지 모두 수중에 넣은 상황에서 이제 남은 것은 대구, 포항, 경주, 부산뿐이었습니다. 국운이 풍전등화(風前燈火)의 위기에 처한 것입니다.

그나마 미 공군의 제공권 장악으로 소강상태에 들어간 가운데 영국 캐나다 호주 등 유엔참전 16개국의 병력이 속속 도착하고 9월 15일 유엔군 사령관 맥아더장군의 지휘아래 261척의 군함이 대규모 인천 상륙작전을 감행하면서 전세는 반전돼 급기야 9월 28일 서울을 탈환하게 됩니다.

보급로가 끊긴데다 퇴각로 까지 막힌 인민군은 유엔군과 국군의 공세로 전 전선에서 후퇴를 거듭합니다. 이번에는 유엔군과 국군의 총반격이 이어졌고 38선을 넘어 10월 19일 평양에 입성합니다. 국군이 26일 북·중국경인 압록강에 다다라 만세를 외치는 그때 강 건너에서 물밀 듯이 중공군이 압록강을 건너오는 것이 아닌가. 유엔군과 국군의 진격은 거기까지였습니다.

당시 중공군은 자그마치 28만 명. ‘인해전술(人海戰術)’로 새카맣게 밀려오는 중공군의 총 공세에 유엔군과 국군은 다시 지옥 길과 다름없는 혹한 속 후퇴를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1951년 1월 4일, 유엔군과 국군은 이날 또 한 번 서울을 내 주고 수원까지 빼앗깁니다. 소위 ‘1·4후퇴’였습니다. 다시 전국의 도로는 피난민 행렬로 아비규환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제공권을 장악하고 화력을 집중시킨 유엔군과 국군의 반격으로 다시 서울을 되찾았고 지금의 휴전선까지 밀고 올라가 일진일퇴를 거듭하다가 급기야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을 체결함으로써 피비린내 나던 전쟁은 포성을 멈추었습니다. 3년 1개월 2일 만이었습니다.

1950년 9월 15일 7만 5000명의 병력과 261척의 함정이 동원된 인천상륙작전에서 맥아더 장군(가운데)이 참모들과 육지에 오르고 있다. / 민족문화대백과
1950년 9월 15일 7만 5000명의 병력과 261척의 함정이 동원된 인천상륙작전에서 맥아더 장군(가운데)이 참모들과 육지에 오르고 있다. / 민족문화대백과

 

6·25전쟁은 너무나 큰 상흔을 남겼습니다. ‘위키백과’에 따르면 한국은 군인 전사 14만9천명, 민간인 사망 37만4천600명, 부상·실종 등 총 189만 8천480명의 사상자를 냈고 미군은 3만7천명이 전사했으며 부상, 실종도 9만6천명이 나 되었습니다.

북한도 군인 전사 29만4천명, 민간인 사망 40만6천명 등 70만 명이 목숨을 잃었고 총 332만 명의 사상자를 냈습니다. 중공군도 전사11만6천명, 부상자도 21만 명이나 되었습니다. 또 남쪽에서만 20만 명의 전쟁미망인과 10만 명의 전쟁고아, 1000만 명의 이산가족을 낳았습니다. 그리고 남과 북 모두 국토는 폐허가 되었습니다.

 

6·25전쟁은 핵무기를 제외한 살상무기가 총 동원된 전쟁이었습니다. 전쟁 중 미군은 폭탄 46만톤, 네이팜탄 3만2천400톤, 로켓탄 31만4천발, 연막로켓탄 5만6천발, 기관총탄 1억7000만발을 쏟아 부었습니다. 이 엄청난 폭탄은 1914년부터 4년 동안 치러진 제1차 세계대전 때 전 세계에서 사용한 것과 맞먹는 양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어이없는 것은 휴전협정 조인식에는 미국과 중국, 북한 대표만이 참석을 해 조인을 했고 정작 당사국인 우리 대한민국은 제외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유는 당시 이승만대통령이 북진통일이라는 주장을 고집하며 끝까지 휴전을 반대해 미국이 한국을 제외시켰기 때문입니다.

6·25, 그때 총을 들고 싸웠던 이들은 대부분 세상을 떠났거나 살아있다 해도 지금 90이 넘은 노쇠한 노인들이 되어 있습니다.

휴전이 된지 69년 만에 다시 맞은 6월, 남과 북은 그동안 몇 차례 정상회담이라는 ‘깜짝 쇼’로 국민들을 설레게 하고는 다시 갈등을 빚는 행태를 되풀이 해 오고 있습니다.

늦었지만 확실히 해둘 말이 있습니다. 우리 역사에는 몽진(蒙塵)이란 부끄러운 역사가 여러 차례 있었습니다.

몽진이란 임금이 먼지를 뒤집어쓰고 줄행랑을 친다는 뜻이니 전쟁이 벌어진 이후 일국의 군주가 제 나라를 버리고 이웃나라로 도망치는 것을 의미합니다. 임금이 궁궐을 버리고 도주하는 것 역시 몽진이라 합니다. 다른 말로 파천(播遷)이라고도 합니다. 뜻이 뜻이니 만큼 싸우다 중과부적으로 세 불리해 후퇴 했다기보다 싸워 보지도 않고 무조건 도망부터 친다는 뜻이 매우 강합니다.

그러한 몽진은 나당(羅唐)연합군에 쫓긴 백제 말 의자왕 때도 있었고 고려 말 공민왕, 임진왜란 때 왜군에 쫓긴 선조가 평양, 의주로 도망갈 때도 그랬고 한말(韓末), 고종이 야음을 틈타 러시아 대사관으로 몸을 피한 아관파천(俄館播遷)도 그랬습니다. 선조가 궁을 떠나 임진강을 건널 때 백성들은 임금에게 돌을 던지며 야유를 한 것은 역사에 그대로 기록돼 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이 일제치하 독립운동으로 피땀을 흘리고도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하는 것은 바로 그러한 실수 때문임은 물론입니다.

또 짚고 넘어가야 할 말이 있습니다. 정상회담에서 전쟁에 관한 책임 소재를 왜, 거론하지 못 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전쟁 발발의 책임에 대한 사과는 아니더라도 유감 표시든, 무엇이든 얘기가 있었어야 합니다. 그 전쟁으로 남과 북에서 수백만의 국민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누가 일으킨 전쟁입니까. 그런데 말 한마디 없이 구렁이 담 넘어가듯 어물어물 넘어왔지 않습니까. 뒤에 밝혀진 일이지만 북한 에서는 6·25전쟁을 ‘남조선 해방전쟁’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해방? 글쎄 입니다.

이 땅에 다시 전쟁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전쟁은 모두가 공멸하는 최후의 선택입니다. 앞으로의 전쟁은 더욱 그렇습니다. 역사를 두려워해야 합니다.

전쟁 교과서인 손자병법(孫子兵法)에 보면 ‘성을 공격해서 이기는 것은 하지하(下之下)요, 상지상(上之上)은 싸우지 않는 것’이라고 합니다. 싸우면 이긴다할지라도 피해를 볼 수밖에 없고 싸우지 않고 외교로 푸는 것이 최상이라는 것입니다.

빨치산의 지리산 투쟁기를 다룬 이태의 소설 ‘남부군’ 끝자락에 보면 빨치산 총수 이현상을 사살한 경찰서장이 그의 유골을 섬진강에 뿌리면서 내뱉던 넋두리가 나옵니다. “저기 저, 들녘에서 일하는 농부들이 자본주의가 무엇인지, 공산주의가 무엇인지, 어떻게 알겠는가.”

6·25는 우리 민족 최대의 참극(慘劇)이었습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렇게 목숨을 걸고 싸운 것입니까. 긴 세월이 흘렀지만 피비린내 나던 당시의 처절했던 광경이 지금도 트라우마가 되어 기억을 어지럽힙니다.

6·25전쟁을 경험하지 못한 전후세대인 윤석열 대통령은 후보 시절 북한의 도발에 대한 대처를 묻는 질문에 “선제공격을 하겠다”고 거침없이 말했습니다. 선제공격? 어쩐지 믿음직하기보다 불안합니다. 확언컨대 전쟁은 안 됩니다. 이기든 지든 전쟁은 안 됩니다. 불안한 평화라도 전쟁보다는 낫습니다. 6·25 72주년을 맞는 소회는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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