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무총리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
난산 끝에 가결됐습니다.
복잡한 정치의 속사정을
보여 준 드문 사례. 
역사에 남는 총리로 일하세요―

 

조선조 세종 때 영의정(領議政)을 18년이나 역임한 황희(黃喜)는 재상 중의 명재상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습니다. 영의정이란 정일품의 품계로 조선시대 의정부의 으뜸 벼슬로서 임금을 보좌해 정사를 총괄하던 자리입니다.

흔히 오늘 날의 국무총리를 왕조시대의 영의정(領議政)에 빗대 일인지하만인지상(一人之下萬人之上)이라고 칭합니다. 위로는 임금 한 사람이 있을 뿐이요, 아래에 만백성(萬百姓)이 있다 함입니다. 물론 지금 국무총리가 옛날 영의정의 권위에 비할 바는 못 되겠지만 대통령 유고시에 직을 넘겨받는 것으로도 국무총리라는 자리의 중요함은 충분히 이해된다고 하겠습니다.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 의해 살해당했을 때 최규하 국무총리가 직을 승계 받아 대통령이 되었던 일이 그것을 증명합니다.

정권이 바뀌어 윤석열 대통령이 한덕수 전 국무총리를 새 국무총리 후보자로 지명하자 국회 임명동의를 놓고 한동안 정치권이 시끄러웠습니다. 한덕수 후보야 2007년 노무현 정권시절 한차례 국무총리를 역임한 바 있으니 문제될 것은 없을 것 같았지만 그 사이 전관예우로 로펌(대형변호사사무소)에서 특별고문이란 명목으로 4년 동안 20억을 받은 사실이 밝혀져 논란이 된 것입니다. 법을 어긴 것은 아닐지라도 국민 정서상 받아들이기 어려웠습니다.

황희는 1392년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자 새 왕조 설립에 부정적인 70여명의 다른 고려 유신(遺臣)들과 개성 두문동(杜門洞)에 들어 가 외부와 담을 쌓고 고려 왕조에 대한 지조를 지켰습니다. 하지만 결국 이성계의 끈질긴 권유로 두문동에서 나와 관직에 들어갔습니다.

황희는 스물한 살 때 이미 진사의 벼슬에 올라 있었습니다. 그가 어느 날 들길을 지나다 잠시 쉬게 되었습니다. 그때 농부가 밭에서 소를 몰고 있는 것을 본 황희는 큰 소리로 말을 걸었습니다. “여보시오. 그 소 두 마리 중에서 어느 소가 더 일을 잘하오?” 그러자 농부는 황희에게 다가와 옷소매를 잡아당겨 소들이 보이지 않는 곳으로 데리고 가더니 귀엣말로 답하였습니다. “누렁소가 검은 소보다는 일을 더 잘 합니다.” “아, 그렇구려. 그런데 그게 무슨 큰 비밀이라고 여기까지 와서 귓속말을 하는 거요.” “모르는 말씀 하지 마시오. 말 못하는 짐승이라도 자기를 비교해 흉을 보면 기분이 상하게 되는 것 아니겠소.” 농부의 말을 들은 황희는 금방 깨달았습니다. 비록 소들이 사람의 말을 알아듣지는 못 한다 해도 열심히 일을 하고 있는데 어느 소를 일을 잘한다, 못한다, 하고 평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뜻이었습니다. 황희는 느낀바 있어 그로부터 관직을 사양하고 더욱 겸손하게 처신했습니다.

어느 때 세종 임금이 평복을 입고 황희 정승의 집을 예고 없이 방문했습니다. 그런데 일국의 정승이 방안에 멍석을 깔고 있을 뿐 아니라 먹던 밥상은 누런 보리밥과 된장, 고추밖에 없는 것이 아닌가. 세종이 그의 청빈한 삶을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고 일화는 후세에 전해졌습니다.

그는 태종의 각별한 신임을 받았습니다. 태종은 황희를 공신(功臣)으로 각별히 대접하면서 하루라도 보지 못하면 반드시 불렀고, 좌우를 떠나지 못하게 할 정도로 특별히 그를 신임했습니다. 양녕대군의 세자 폐위를 반대해 잠시 직을 떠나게 했으나 바로 다시 불러들였을 정도였습니다.

 20일 한국에 온 바이든 미대통령과 윤석열 대통령이 수원 삼성전자에서 처음 만나 인사를 나누고 있다./ NEWSIS
 20일 한국에 온 바이든 미대통령과 윤석열 대통령이 수원 삼성전자에서 처음 만나 인사를 나누고 있다./ NEWSIS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어느 날 두 여종이 큰 소리로 말다툼을 했습니다. 황희는 한 여종을 불러 자초지종을 듣고는 “네 말이 옳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다른 여종이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였습니다. 황희는 “네 말도 옳다”라고 하였습니다. 그 때 곁에 있던 부인이 “이 말이 옳으면, 저 말은 틀린 것이지, 이 말도 옳고, 저 말도 옳다면 누구 말이 맞는 것이요?”하고 끼어들었습니다. 이번에는 “그렇지, 부인 말도 옳소”하고 같은 말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사람은 항상 상대방의 잘못은 눈여겨보면서 자신의 잘못은 보지 못하는 법이 아니겠소.”라며 껄껄 웃었습니다.

황희의 셋째 아들 황수신은 자주 기생들과 어울리며 부모 속을 썩였습니다. 황희는 그때마다 야단을 쳐 꾸짖었으나 아들은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황희는 “네가 아버지의 말을 듣지 않으니 앞으로는 손님의 예로 대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리고 아들이 밖에서 돌아오자 관복차림으로 대문까지 나가 큰 소리로 예를 갖춰 정중히 맞았습니다. 아들이 놀라 엎드려 황당해 하니 “나는 그동안 너를 아들로 대했는데, 너는 나를 아비로 여기지 않았다. 그래서 너를 손님으로 대하려 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이일이 있은 뒤부터 아들은 기방출입을 끊고 바른생활로 돌아갔습니다.

청백리의 대명사로 여겨지는 명재상 황희는 사실 청렴함과는 거리가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태종에게 신임을 얻어 세종 대에 이르도록 18년을 영의정 자리에 있었지만 그에게는 타의추종을 불허하는 능력이 있었으니 바로 ‘조정능력’이었습니다.

왕의 개혁정책이 현실에 제대로 뿌리 내릴 수 있도록 내용을 조정했고, 신하들 간의 이견을 조율해 가며 합의를 이끌어 내는 탁월한 정치적 능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황희에 대해서 긍정적 평가와 함께 부정적 비판이 함께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는 성품이 원만하고 타인을 공격하지 않았습니다. 또 대대로 관료가문이라 넉넉한 재산이 있었으므로 축재를 하지 않아 백성들의 칭송도 들었습니다.

그러나 황희는 어느 지방수령의 아들이 중앙의 벼슬자리를 부탁하자 “벼슬을 주는 대신 땅을 바치라”고 요구합니다. 땅과 벼슬을 교환하자는 거래라는 사대부들의 비난이 있었고, 황희의 비리사건을 포착한 사헌부는 즉시 조정공론으로 확대하여 그를 탄핵했습니다. 그러나 황희에 대한 세종의 믿음은 변함이 없어 처벌이 불가능 했습니다. 사헌부와 사간원의 탄핵이 심해지자 세종은 임시방편으로 황희를 잠시 벼슬자리에서 물러나게 했다가 다시 영의정 부사로 불러 들였습니다. 세종은 과거 황희가 자신이 형님인 양녕 대신 세자가 되는 것을 반대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그의 인품을 높이 사 오랜 세월 중용했던 것입니다. 황희는 1452년 8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세종대왕이 재임 중 많은 업적을 남기고 치세를 빛낸 것은 황희와 같은 출중한 인물을 중용한 결과임은 역사가 증명하고 있습니다.

국회는 20일 밤 본회의에서 한덕수 국무총리 임명 동의안을 가결했습니다. 애당초 더불어민주당은 한 후보를 부적격인물로 단정했으나 자칫 출범부터 윤석열 정부의 발목을 잡는다는 6·1지방선거에서 민심의 역풍을 우려해 고심 끝에 동의를 해준 것입니다. 정치의 복잡한 원리를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민주당은 지혜로운 선택을 했습니다. 이제 한 총리는 과거의 경륜을 거울삼아 어느 것이 진정 국가와 국민을 위하 는 길인가를 심사숙고해 정무에 임해야 할 것입니다.

미국의 바이든 대통령이 20일 한국에 왔습니다. 윤석열 대통령은 취임 열흘 만에 지상최고의 손님을 맞았습니다. 국제외교 데뷔치고는 큰 손님이 아닐 수 없습니다. 두말할 것도 없이 미국은 한국으로서는 가장 든든한 우방이요, 동맹입니다. 아모 쪼록 깊이 있는 논의로 두 나라 관계가 더욱 돈독해져 두 나라가 함께 윈·윈 하는 성과를 내 주기를 기대해 마지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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