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에예스의 ≪제3신분이란 무엇인가≫ 읽기 (1)

인류 역사에서, 1789년 삼부회 소집과 민중의 바스티유 감옥 습격으로부터 시작하여 1799년 나폴레옹의 쿠데타와 1804년 그의 황제 등극으로 종결된 프랑스 대혁명보다 극적인 역사는 없습니다.

프랑스 대혁명은 계급적, 역사적으로 보면 같은 배를 탄 루이 16세와 귀족간의 권력다툼으로 시작됩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비열한 타툼 속에서 자신들이 의도한 목적을 이루기는커녕, 대혁명의 와중에 민중들에게 죽임을 당하고 땅을 빼앗기고 저택에서 쫓겨났습니다. 그리고 외국의 간섭과 전쟁, 경제적 궁핍과 생필품 품귀, 개혁의 지지부진, 각처에서의 왕당파의 반란 등으로 민중들의 분노가 폭발하여 수많은 입헌군주파, 온건공화파들이 숙청․암살되고 종국에 유명한 로베스피에르(Maximilien Robespierre, 1758∼1794)의 공포정치(1793. 6∼1794. 7)가 시행되게 됩니다. 사실 누구도 프랑스에서의 처음의 잔잔하였던 개혁의 흐름이 이렇도록 급진적․폭력적으로 요동칠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하였습니다.

프랑스 대혁명의 놀라운 반전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1794년 7월 온건파들이 연합하여 쿠데타를 일으켜(테르미도르 반동) 로베스피에르 일파를 숙청하고 5인의 총재체제(총재정부)를 수립하게 됩니다. 그러나 총재정부는 정국을 주도하지 못하고 반대파의 반란(이러한 반란 중에는 인류 최초로 공산주의 혁명을 도모하였던 바뵈프 등 평등주의자들의 음모도 있었습니다)도 효과적으로 진압하지 못하여 실패하고, 1799년 11월 외국과의 전쟁 과정에서 국민적 인기를 얻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Napoléon Bonaparte, 1769∼1821)가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브뤼메르 쿠테타) 3인의 통령체제(통령정부)를 수립하고, 이후 1804년 황제로 등극하여 제1제정(1804∼1814)을 성립하게 됩니다. 이로써 자유와 민주주의를 향하여 출발하였던 프랑스 대혁명은 역설적이게도 쿠데타와 독재로 끝을 맺었습니다.

프랑스 대혁명은 너무나 극적입니다. 집권세력의 권력다툼과 개혁시도→ 민중의 바스티유 감옥 습격과 같은 혁명을 개시하는 획기적 사건 발생→ 온건파의 정치주도 → 개혁의 실패와 민중들의 급진화 → 급진파의 집권 → 민중들의 혁명에 대한 환멸과 반혁명 분위기의 고조 → 反혁명 쿠데타 → 독재로의 귀결로 진행된 것처럼, 프랑스 대혁명은 혁명에서 가능한 모든 단계를 거쳤고, 국왕 처형․암살․집단 처형 등 각각의 단계마다 그 자신의 성격을 최대한 표출하였고, 단계별 진화마다 명백한 단절과 획기적 도약이 존재한다는 점에서, 그것은 진정으로 모든 혁명의 이념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프랑스 대혁명의 상징과도 같은, 1789년 7월 14일 민중들의 바스티유 감옥 습격 사건.

프랑스 대혁명은 ‘어떤’ 혁명일까?

마치 서서히 끓어오르다가 어느 순간 급격히 임계점까지 치솟고 그리고 갑자기 최악의 나락으로 떨어진 것 같은 이러한 프랑스 대혁명은 과연 ‘어떤’ 혁명이었을까요? 프랑스 대혁명을 포함하여 17-8세기에 있었던 영국의 청교도․명예혁명과 미국독립전쟁은 대표적인 3대 근대 시민혁명입니다. 이들 근대 시민혁명을 전통적으로 우파는 ‘자유주의’ 혁명이라고 불러왔고, 좌파는 이를 ‘부르주아’ 혁명이라고 불러왔습니다. 그러나 현대의 수정주의자들은 이러한 전통적 해석에 의문을 제기합니다. 

실제 자유주의 이념이나 부르주아 계급이 근대 시민혁명을 만들어냈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입니다. 물론 로크나 애덤 스미스에서 보듯 자유주의적 관념은 혁명 이전에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유주의적 이념은 극소수의 엘리트에 국한된 것이었을 뿐, 사회의 절대다수는 아직도 봉건적 관념에 묻혀 있었고, 또한 혁명을 주도한 엘리트 중에 자유주의 이념으로 철저히 무장하고 의식적으로 행동한 자들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이들 근대 시민혁명은모두 각국이 산업혁명을 겪기 이전에 있었던 것으로 부르주아가 하나의 계급으로서 등장하기 이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혁명의 주도세력은 부르주아가 아니라 근대적 지식인, 개화한 귀족과 성직자, 소상인, 수공업자, 자영농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수정주의자들도 혁명이 자유주의와 자본주의(부르주아 계급의 형성)를 가져왔다는 점에는 동의합니다. 즉 자유주의와 부르주아가 혁명을 만들어낸 것은 아니지만, 역으로 혁명의 과정이 자유주의 이념의 발전과 확산을 가져왔고, 혁명의 결과가 경제적 자유․시장체제․산업화를 촉진하여 부르주아 계급을 만들어냈다는 것입니다. 근대 시민혁명은 ‘결과적으로’ 자유주의 혁명이고 부르주아 혁명이었습니다.

자유주의와 부르주아가 혁명을 의식적․체계적으로 의욕하지도 시작하지도 주도하지도 한계지우지도 않았음에도, 혁명 과정에서 수많은 변수가 개입되고 수많은 반전이 있었고 수많은 대안이 가능하였음에도, 혁명이 종국에 자유주의적이고 부르주아적인 것으로 귀결되었다는 것 또는 근대 시민혁명에서 모두 자유주의와 부르주아가 종국에 혁명의 과실을 탈취하였다는 것은 어쩌면 역사의 간지(奸智)로만 치부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의 간지를 이해하고 있었거나 아니면 그것을 훨씬 넘어 스스로 적극적으로 의욕하고 현실에서 도모한 자가 있기도 합니다. 인류 역사 최고의 반전 연속의 드라마 같았던 프랑스 대혁명에서 그러한 인물을 꼽으라면, 필자는 프랑스의 성직자이자 혁명선동가이자 정치철학자이자 정치행정가였던 시에예스(Emmanuel-Joseph Sieyès, 1748∼1836)가 바로 그에 해당된다고 할 것입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프랑스 대혁명의 시작과 끝에서 동시에 만나는 유일한 주연 배우가 바로 그라는 사실입니다. 그는 비록 프랑스 대혁명의 드라마에서 루이 18세, 라파예트, 로베스피에르나 나폴레옹과 같은 큰 비중을 갖고 등장하는 배우가 아니고 우리에게는 지극히 생소한 인물지만, 그는 혁명을 시작하는 도화선에 불을 붙이고 혁명을 순서대로 이끌기도 하고 심지어 혁명을 손수 마무리 짓기까지 한 역사적 중요 인물입니다. 먼저 그의 이런 역사적 행보를 보시죠

프랑스 대혁명을 시작하고 종결지은 자, 시에예스

1789년부터 시작하는 프랑스 대혁명은 전제군주였던 루이 16세의 삼부회 소집부터 시작합니다. 외국과의 전쟁으로 재정이 고갈되자 그는 귀족계급에 도움을 요청합니다. 그러나 귀족계급은 관직매매, 면세 등의 자신들의 각종 특권을 양보하려고 하기는커녕 이를 빌미로 자신들의 지위와 권한을 더욱 강화하려고 하였습니다. 궁지에 몰린 루이 16세는 궁여지책으로 평민들에게 호소하여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고자, 1788년 7월 고위 성직자(제1신분), 귀족(제2신분), 평민(제3신분) 대표자들로 이루어진 삼부회를 소집할 것을 명하였습니다. 삼부회는 전통 있는 중세 신분제의회였지만, 1614년 이래 한번도 소집된 적이 없는, 명목상으로만 존재하던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삼부회 소집은 그 소집 전부터 대표 선출과 구성 방식을 둘러싸고 전국적 분란을 낳게 되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1789년 5월 삼부회가 소집되었지만, 그러나 삼부회내 제3신분 대표자들은 바로 자신들만이 프랑스 국민의 진정한 대표임 즉 제3신분 회의가 곧 ‘국민의회’라고 선언하였고, 이후 성직자와 귀족도 마지못하여 이에 참여하면서 국민의회는 새로운 헌법 제정을 위한 ‘제헌의회’로 바뀌게 됩니다. 홉스식의 무제약적인 전제군주제에서 로크적인 입헌군주제로 이행을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나 순조롭게 진행될 것 같았던 이와 같은 프랑스의 정치개혁은 같은 해 7월 14일 민중들이 전제정의 상징인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면서 민중이 참여하는 광범위한 사회개혁(인권선언 채택․봉건제 폐지 등)으로 진화하게 되고, 앞서 이야기 한대로 군주의 배신(프랑스를 탈출하여 외국의 도움을 받아 전제권력을 회복하려던 국왕일가가 도주 중 체포됨), 외국의 간섭과 전쟁, 왕당파와 귀족들의 반란, 경제적 궁핍과 생필품 품귀 등으로 급진화 과정을 겪고 반전을 거듭하게 됩니다.

1789년 8월 26일, 프랑스 인권선언문.

성직자 시에예스, 혁명을 선동하다

혁명은 소위 ‘팜플렛 전쟁’으로부터 시작된다고 합니다. 구체제의 모순이 극에 달하고 혁명의 분위기가 무르익으면서, 구체제의 부당함을 날카롭게 규탄하고 새로운 질서의 당위성을 명쾌하게 옹호하고 그것을 위한 혁명을 선동하는 지적․정치적 엘리트들의 정치적 소책자나 팜플렛이 난무하게 되고, 그중 어떠한 것은 혁명을 촉발하는 도화선의 역할을 하고 혁명 이후에도 새로운 체제와 질서를 수립하는데 중요한 지침서가 되기도 합니다. 이러한 소책자와 팜플렛은 지금의 인터넷이나 SNS와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프랑스 대혁명보다 10여년전 쯤에 일어나고, 프랑스 대혁명의 발발에도 중대한 영향을 미친(프랑스는 숙적이었던 영국에 대항하여 아메리카 식민지를 도왔는데, 이는 왕실 재정고갈의 주요 원인이 됩니다) 미국 독립전쟁에서 그러한 지대한 역할을 수행한 소책자는 페인(Thomas Paine, 1737∼1809)의 ≪상식 Common Sense≫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미국 독립전쟁에 직접 참전하였을 뿐만 아니라 프랑스 혁명의회의 의원이 되어 프랑스 혁명과정에도 참여한, 근대의 대표적인 2대 혁명에 직접 참여한 역사상 보기 드문 인물입니다. 페인은 아메리카가 독립을 선언하기 4개월 전인 1776년 1월 출간한 ≪상식≫에서 세습군주제와 식민지체제는 어느 모로 보나 비합리적이며, 일반인의 입장에서 보아도 아메리카의 독립과 공화제 수립이 보다 이성에 부합한다며, ‘혁명은 곧 상식’이라는 그 자체로 ‘혁명적’이라고 할 정도로 충격적인 그러나 누구라도 부정키 어려운 공식을 내놓았습니다. 

프랑스 대혁명과정에서 그러한 ≪상식≫과 같은 역할을 한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시에예스의 ≪제3신분이란 무엇인가 Qu'est-ce que le tiers état?≫입니다. 루이 16세가 혁명의 시발점이 된 삼부회 소집을 공포하자, 그동안 봉건적․신분적 질서에 의하여 핍박을 받던 제3신분의 불만의 소리가 봇물처럼 터져 나왔습니다. 1789년 1월 당시 성직자였던 시에예스는 ≪제3신분이란 무엇인가≫를 출간하였는데, 이는 당시에 출판된 이러한 불만의 소리를 담은 문건 중 가장 유명한 것이 되었습니다. 혁명을 선동하는 모든 대표적 소책자나 팜플렛들은 단순 명쾌하다는 것이 특징입니다. 구체제의 썩은 폐부를 단칼에 쳐내고 새로운 질서를 위한 깃발을 선명하게 올리되, 그 칼과 깃발은 누가 보아도 쉽게 이해하고 동조할 만큼 지극히 상식적이어야 합니다. 페인의 ≪상식≫처럼 말입니다. 시에예스의 ≪제3신분이란 무엇인가≫가 프랑스에서 바로 그러하였습니다.

토마스 페인의 <<상식>>.

시에예스가 말하는 프랑스의 ‘상식’은

혁명전 프랑스 인구 2,500만중 귀족계급은 2-30만, 성직자는 10만 정도였는데, 이들 2% 정도의 계급이 전 프랑스의 사회적․경제적 특권을 장악하고, 정치적 권력을 독점하여 왔습니다. 반면 실질적으로 사회경제적으로 전 프랑스를 떠받치고 있는 제3신분인 평민들은 아무런 정치적 권리를 갖지 못한 채, 귀족의 특권과 봉건 지주․교회의 전횡에 핍박을 받아왔습니다.

시에예스는 먼저 평민들인 제3신분이란 어떠한 존재인가 묻습니다. 그는 제3신분은 프랑스 사회를 유지하는 생산 활동을 담당하며, 공통의 법률의 지배를 받으며 공통의 지위와 권리를 갖기에 온전한 프랑스 국민 전부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에 반하여 귀족 계급은 사회경제적으로 악성 종양적인 존재이며, 공통의 법률에서 벗어나고 불평등한 특권을 가진 존재이므로 오히려 프랑스 국민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선언합니다. 그의 이러한 놀라운 역설은 그동안 자신들을 신에 의하여 특별히 선택받은 자들로 인식하여 오던 귀족 계급을 전율케 하기에 충분한 것이었습니다.

(개인의 생산 활동을 농업, 수공업, 상업과 유통업, 기타의 학문 예술 활동이나 가사 노동으로 구분한 후) 이러한 것들이 사회를 유지하는 활동들이다. 그러면 누가 이러한 활동들을 뒷받침하는가? 제3신분이다. 또한 공적 작용은 군사, 법률, 종교, 행정으로 구별할 수 있는데, 이러한 영역에서 제3신분이 20분의 19를 차지하고 있고, 특권 신분이 종사하기를 꺼리는 매우 힘들고 고된 모든 역무를 제3신분이 담당하고 있다.

국민이란 무엇인가? 동일한 입법부에 의해 대표되며, 공통의 법률 하에서 살아가는 구성원들의 집단이다……특권과 면제에 의해서 귀족 신분은 공통의 질서, 공통의 법률에서 벗어나 있는 것이다……따라서 제3신분은 전체 국민에 속하는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으며, 제3신분이 아닌 것은 모두 전체 국민으로 간주될 수 없다. 제3신분이란 무엇인가? 모든 것이다……어떤 방법에 의해서건 법률에 의해 특권을 부여받은 자는 모두 공통의 질서에 속하지 않으며, 공통법의 예외가 되며, 결과적으로 제3신분에 속하지 않는다. 공통법과 공통의 대표야말로 하나의 국민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시에예스는 이러한 전제를 바탕으로 제3신분만이 프랑스 국민 전체이므로 정치적인 모든 것을 요구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다만 당면한 문제인 삼부회 선출․구성과 연관 지어 제3신분의 최소한의 요구사항을 정리합니다. 1) 제3신분의 대표자들은 진정 제3신분에 속하는 시민 중에서만 선출되어야 하고(본래 제3신분의 대표자는 제3신분 출신자중에서 선출되어야 하나, 하급 귀족이 제3신분의 대표자로 선출되고 행세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2) 제3신분의 대표자들의 수가 다른 2개 신분의 대표자들의 전체 수와 같아야 하고(본래 신분별 할당된 수는 1/3씩이었습니다) 3) 삼부회에서는 신분별로가 아닌 개인별로 투표가 이루어져야 한다(본래 신분별로 1표의 권리가 있었기에, 제3신분에게 원초적으로 불리하였습니다)고 주장합니다.

시에예스의 <<제3신분이란 무엇인가>>.

시에예스, 혁명 이후를 말하다

그리고 나서 그는 향후 소집될 삼부회에서 제3신분 대표자들은 그 본래의 합당한 지위와 권리(앞서 보듯 그는 제3신분은 프랑스 국민 전체이므로 정치적인 모든 것을 요구할 수 있다고 주장)를 획득하기 위하여 무엇을 해야 하는가 서술하고 있습니다. 그는 향후 삼부회가 소집되면, 전체 국민의 진정한 대표인 제3신분 대표자들만 별도로 회합하여 국민의회임을 선언하고, 새로운 헌법을 제정하고 새로운 질서를 수립하기 위한 절차를 이행하여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제3신분은 별로도 회합해야 한다. 그리하여 제3신분은 귀족 및 성직자와는 결코 합의하지 않을 것이고, 신분별이건 개인별이건 그들과 함께 투표하지 않을 것이다……제3신분은 (삼부회가 아닌 별도의) 국민의회를 구성할 것이다……삼부회에서 제3신분원이 전국적으로 특별 대표를 소집할 수 있는 자격을 확고히 갖추리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따라서 프랑스 헌법 가안을 시민 전체에게 공시하는 것은 특히 그의 권한에 속하는 일이다. 제3신분원은 여러 신분으로 구성된 삼부회는 잘못 구성된 기관이며, 국민적 작용을 수행하기에는 적합하지 않다는 점을 크게 비난할 것이다. 또한 입법기관의 구성 방식을 명백한 법률에 의해서 결정하기 위한 특별 권력을 특별 대표에게 부여할 필요성을 제시할 것이다. 그때까지 제3신분은……아무 것도 확정적으로 결정하지 않을 것이며, 3개의 신분을 분할하는 거대한 소송을 국민이 심판하기를 기다릴 것이다. 시인하건대, 이러한 것이 가장 완전하고 가장 관대한 행보이며, 결과적으로 제3신분의 존엄에 가장 부합하는 것이다.

‘삼부회에서의 신분 대립 → 제3신분 대표자들만의 별도 회합 → 국민의회 선포 → 제헌의회 소집 → 새로운 헌법과 질서 수립’ 이라는 이러한 시예에스의 주장은, 앞서 보듯 이후 프랑스 대혁명 초기에 실제 그대로 실현되었습니다.

그는 미래를 예견하기에만 만족하지 않습니다. 그 스스로 말한 미래를 직접 만들기에 나섭니다. 우선 그는 삼부회 소집 이후 혁명 선동가에서 정치인으로 변신합니다. 삼부회에서 제3신분의 대표자중 한명으로 선출(그는 성직자였지만 평민출신이기에 제3신분 대표가 될 수 있었습니다)된 그는, 제3신분 대표들만의 국민의회 구성을 주도하고, 역사적으로 유명한 인권선언 초안을 작성하고, 국민의회 의장으로 활동하기도 하고, 법학에 대한 조예가 깊어(그는 헌법학계에서 ‘헌법학의 아버지’로 평가받고 있을 정도입니다) 새로운 헌법과 각종 법령 제정에도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자신의 계급적․이념적 보수성으로 인하여, 이후 혁명이 보통선거권 도입․사회경제적 개혁조치 등으로 확대되고 급진화 되면서, 그는 정치권력의 핵심에서 점점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특히 로베스피에르 등 급진파가 집권한 기간 동안에는 그 스스로 ‘나는 살고 있었다(J'ai vécu)’라고 표현할 정도로, 침묵과 외유로 일관하는 등 철저히 보신주의적 행보로 목숨을 보전하였습니다. 심지어 그는 공포정치 기간중 反종교 정서가 강해지자 성직자 지위를 스스로 버리기까지 하였습니다.

시에예스, 혁명을 끝내다

그런 그에게 테르미도르 반동은 또 다른 기회가 되었습니다. 그는 총재정부하에서 5인 총재중 1명으로 그리고 하원격인 500인 위원회 의장으로 활동하기도 하였고, 새로운 보수적 헌법에 제정에 관여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총재정부의 무능력과 의회내 권력대립에 회의를 느낀 그는 막강한 권력을 위한 새로운 헌법을 모색하며 이를 위한 쿠데타를 이끌 인물을 물색합니다. 그러한 목적을 수행할 자로 그에 의하여 간택된 자가 바로 나폴레옹입니다. 그는 나폴레옹을 부추겨 1799년 11월 쿠데타(브뤼메르 쿠데타)를 성공시킨 후 나폴레옹과 함께 3인의 통령중 1명이 되고, 이후 그 공으로 독재자(황제)가 된 나폴레옹으로부터 백작의 지위와 상원 의원의 지위를 하사 받았습니다.

이렇듯, 프랑스 대혁명은 그의 ≪제3신분이란 무엇인가≫로부터 시작하여 그가 도모한 브뤼메르 쿠데타로 끝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 혁명 선동가에서 군사쿠데타 주모자로의 그의 현란한 정치적 변신은 자유와 민주주의를 향하여 출발하였다가 쿠데타와 독재로 끝을 맺은 프랑스 대혁명을 몸소 체현한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놀라운 전향 혹은 변신을 단지 그의 신념의 박약함이나 기회주의적 성향의 발로로만 치부될 수는 없습니다. 현란한 변신의 중심에는 오히려 그 자신의 확고부동한 정치철학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그의 정치철학은 근대 정치엘리트들에게 공통된 정치와 혁명에 대한 생각이기도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근대정치의 의미를 제대로 사유한 정치철학자였고 실제 현실에서 그 근대정치를 제대로 디자인한 정치행정가였습니다. 그는 ‘결과적으로’ 자유주의적이고 부르주아적인 프랑스 대혁명의 간지(奸智)를 의욕하고 도모하고 실천한 자였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가 상상하고 제도화하였던 근대정치는 과연 어떠한 것이었을까요? 그에 대한 단초도 바로 ≪제3신분이란 무엇인가≫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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