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하, 상소문입니다

―왕조시대 상소문을 본뜬
현대판 상소문 시무 7조.
“가슴속이 뻥 뚫렸다”는 사람들과 
“별것 아니라”는 사람들로
인터넷이 뜨겁습니다―

“塵人(진인) 조은산이 시무 7조를 주청하는 상소문을 올리니 삼가 굽어 살펴 주시옵소서.” 지난 27일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문재인 대통령에게 올리는 글’이 올라와 파문을 일으키며 인터넷을 달구고 있습니다.

지난시절 왕조시대의 상소문 형식을 본뜬 글은 첫날 하루 만에 답변 기준선인 20만 명을 훌쩍 뛰어 넘어 사흘 만에 40만을 육박하는 동의를 얻었고 이내 시중의 뜨거운 이슈가 되어 가타부타 논쟁이 가열되고 있습니다. 원고지 70장 분량, 1만4000여자에 달하는 장문의 글은 실제 우국충정의 신하가 기울어 가는 나라 임금에게 올리는 상소문을 보는 듯 해 가슴이 찡해지기도 합니다.

시무(時務)란 ‘지금 중요하게 다루어야 할 시급한 일’을 뜻하는 옛말로 그 유래는 멀리 신라시대로 올라갑니다. 시무의 첫 시작은 9세기 통일신라시대의 대학자인 최치원(崔致遠)이 894년 진성여왕에게 ‘시무 10여조’를 제시한 것이 효시입니다. 신라의 근간이었던 골품제로 인해 누적된 폐해가 곳곳에서 터져 나오고 있는 상황에서 여왕은 최치원의 상소, 시무책을 받아들이고 그를 높이 사 6두품인 그의 직책을 최고 관작인 아찬(阿飡)으로 올려줍니다.

하지만 여왕을 둘러싼 중앙 귀족의 반발로 상소는 실행되지 못했고 뒤이어 효공왕이 즉위하자 벼슬에서 물러나 전국 각지를 떠돌았습니다. 삼국사기 열전에는 최치원이 시무책을 올린 사실이 기록돼 있을 뿐 그 내용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시무의 내용이 전해진 것은 고려 때부터입니다. 981년 즉위한 성종은 이듬 해 개혁세력과 지방세력 간 불화가 끊이지 않는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5품 이상 관료들에게 조정 현안에 대한 의견을 청합니다. 당시 인사와 행정의 중책을 맡고 있던 최승로(崔承老)는 시무 28조를 써서 올립니다.

그중 일곱 가지가 불교에 관련된 내용으로 “신라 말기 불경과 불상은 모두 금과 은을 사용하여 사치가 도를 넘었고, 마침내 나라가 망했다”며 “광종은 불교의 인과응보설에 현혹되어 백성의 고혈을 짜내어 불사(佛事)를 많이 일으켰다”고 지적합니다. 그가 바친 시무 상소는 대부분 수용되어 고려의 정치 제도 등 국정 운영의 기조가 되었습니다.

최승로가 이상으로 여긴 치세(治世)는 군주가 정치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정치의 주체가 되어야 하되 신권과의 대화를 통한 긴밀한 협조가 이루어져야하며 아울러 어느 한쪽의 독주도 상호 견제할 수 있는 안정된 정치 형태였습니다.

최승로의 시무 28조에는 당시에도 골치였던지 부동산이 주요 의제로 등장합니다. “예기(禮記)에 이르기를 천자의 집은 9척이고 제후의 집은 7척이라 하였거늘, 근래에는 사람들이 재력만 있으면 모두 집짓는 일을 우선으로 하고 있어 경쟁하듯 큰 집을 지어 제도를 위반해 폐단이 매우 많다”며 “가옥의 제도를 정하고 이를 준수하게 하며 이미 지어졌으나 규정을 위반한 것은 헐어 버리게 하여 후대에 경계하도록 하자”고 주장합니다.

그로부터 시무는 다양한 형태로 발전합니다. 1196년 무신(武臣)이었던 최충헌(崔忠獻)은 명종에게 ‘봉사십조(封事十條)라는 이름으로 폐정의 시정을 촉구하기도 하고, 조선에 들어 와서는 1574년 율곡(栗谷) 이이가 선조에게 ‘만언봉사(萬言封事)’를 올려 정사의 문제점과 대안을 조목조목 기록했습니다.

그러면 이번 조은산씨가 청와대에 올린 시무 7조의 내용은 무엇일까. 그 첫 번째 1조는 세금을 감하시옵소서이고 2조는 감성보다 이성을 중히 여기시어 정책을 펼치시옵소서. 3조는 명분보다 실리를 중히 여기시어 외교에 임하시옵소서. 4조, 인간의 욕구를 인정하시옵소서. 5조, 신하를 가려 쓰시옵소서. 6조, 헌법의 가치를 지키시옵소서. 7조, 스스로 먼저 일신(一新)하시옵소서 등입니다. 청원의 내용은 아파트 등 부동산 파동에서 온 경제의 어려움을 핵심으로 거기서 파생된 국정 전반에 대한 실정을 비판하는 것으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조씨의 글이 공개되자 인터넷에는 긍정, 부정, 찬반으로 갈려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다. 평소 문대통령에 비판적인 사람들은 “고구마 같은 세상, 뻥 뚫어줬다”면서 “메마른 대지에 단비 같은 글, 구구절절 맞는 말, 보기만 해도 속이 시원하다”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고 반면 문대통령에 호의적인 사람들은 떨떠름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며 “삐딱하게 비비 꼰 것 말고 뭐가 있느냐”고 대단치 않게 여기는 눈치들입니다.

왕조시대의 상소를 방불 하는 시무 7조로 관심을 끌고 있는 청와대. 과연 문대통령은 어떤 답변을 내 놓을 것인지, 결과가 궁금하다. / Newspim

아무튼 시무 7조는 풍자가 사라진 시대에 새롭게 등장한 방식이라는 분석이 있습니다. “개그맨이나 문인도 쉽사리 정치를 풍자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전통 시무양식을 활용한 격조 높은 시무 7조가 탄생했다”고 반기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역사학자들 중에는 이름마저 가명을 쓰는 사람의 말장난을 감히 어디다 최승로에 비교하느냐며 역정을 내기도 합니다.

어떻든 시무 7조 현상은 부동산 폭등과 경제 정책에 대한 불만, 청와대와 정부 여당의 일방 독주 등에 대한 분노와 피로감이 쌓이고 쌓였다가 한꺼번에 분출된 것으로 보입니다. 왕조시대 상소문 형식을 빌린 이 청원은 예리한 비유와 풍자를 담아 새로운 패턴으로 대중의 지지와 공감을 끌어낸 것은 분명합니다.

조씨는 일곱 가지 청원을 다 쓴 뒤 다시 뼈아픈 충고도 잊지 않았습니다. “폐하의 적(敵)은 백성이 아닌 나라를 해치는 이념의 잔재와 백성을 탐하는 과거의 유령이며 또한 복수에 눈이 멀고 간신에게 혼을 빼앗겨 적군과 아군을 구분 못하는 폐하, 그 자신이 옵니다.” 그리고 이어집니다.

“갈등과 분열의 정치를 끝내겠다는 폐하의 취임사를 소인은 우러러 기억하며 폐하께서 말씀하신 촛불의 힘은 무궁하고 무결하며 그 끝을 알 수 없사옵니다”라면서 “부디 일신하시어 갈등과 분열의 정치를 비로소 끝내 주사옵고 백성의 일기 안에 상생하시며 역사의 기록 안에 영생하시옵소서”라고 대미(大尾)를 장식했습니다.

그럼 문대통령을 조목조목 비판한 시무 7조 상소문’을 쓴 사람은 누구인가. 알려지기로는 두 아이의 아버지인 평범한 39세 가장으로 과거 노무현 대통령 지지자였다고 합니다. 그의 아호가 티끌을 뜻하는 진인(塵人)이라한 것을 보면 보통 사람은 아닌 듯싶고 조은산이란 이름도 가명이라고 합니다.

상소문이 큰 파장을 일으키자 조씨는 자신의 블로그에 “얕고 설익은 지식을 바탕으로 미천한 자가 써내려간 미천한 글이 이토록 큰 관심을 받는다”면서 “능력에 비추어 너무도 과한 찬사와 관심을 받아 두렵다”고 썼습니다. 그리고 “제가 지지하지 않는 정권을 향한 비판에 그치는 것이 아닌, 제가 지지하는 정권의 옳고 그름을 따지며 쓴 소리를 퍼부어 잘 되길 바라는 것이 제 꿈”이라고 밝혔다고 합니다.

청와대 국민청원은 20만 명 이상 동의하는 경우 청와대 관계자가 30일 이내에 공식답변을 하게 되어있습니다. 인터넷에서는 “문대통령이 직접 답변을 해야한다”는 요구가 올라 오고 있습니다.

시무 7조는 31일 오전 9시 현재 39만 3000명이 동의했습니다.

과연 국민적 관심사항이 된 시무7조에 대해 청와대가 어떤 답변을 내 놓을지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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