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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규대사(靈圭大師) 전장기적비(戰場紀蹟碑)
황경수 | 승인 2020.04.06 08:51

공원당 방향에서 중앙공원으로 들어간 곳의 왼쪽으로 보이는 것이 ‘영규대사전장기적비(靈圭大師戰場紀蹟碑)’이다. 이 비석은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남문로 115번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2015년 4월 17일 청주시 향토유적 제45호로 지정되었다.


영규대사(靈圭大師, ?~1592)는 임진왜란(壬辰倭亂) 때에 청주성을 탈환하고 최초의 승리를 거둔 승군(僧軍)을 이끌었던 인물이다. 이 비석은 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1974년에 세운 기적비(紀蹟碑)이다.

전장기적비는 높이 224㎝, 폭 82㎝, 두께 39㎝의 오석(烏石)의 비신(碑身)을 세우고 철제 보호 난간을 둘렀다. 비신(碑身)에는‘의승장기허당영규대사전장기적비(義僧將騎虛堂靈圭大師戰場紀蹟碑)’라고쓰여 있다. 비문은 정인보(鄭寅普)가짓고, 김응현(金膺顯)이 전자체로 쓴 글씨가 있다.

비문(碑文)의 내용은 영규대사가 임진왜란 때 800여 명의 승병을 모집하여 조헌의 의군(義軍)과 1592년 8월 1일 청주성 탈환 작전을 벌여 8월 2일에 성공하였고 그 뒤 지금의 충청남도(忠淸南道) 금산전투(錦山戰鬪)를 지휘하다가 현장에서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는 것이다.

영규대사(靈圭大師) 전장기적비(戰場紀蹟碑) 옆에는 또 다른 세 개의 비석이 세워져 있는데 ‘청주조헌전장기적비’,  ‘민양공황천당박춘무선생전장기적비’, ‘목사서공유민정간선정비’가 그것이다.

*영규대사(靈圭大師, ?~1592)는 조선 선조 때의 승려, 승병장이다. 본관은 밀양(密陽), 호는 기허(騎虛)이다. 충청남도 공주 출신이다.
계룡산(鷄龍山) 갑사(甲寺)에 들어가 출가하고, 뒤에 휴정(休靜)의 문하에서 법을 깨우쳐 제자가 되었다. 충청남도(忠淸南道) 공주(公州) 청련암(靑蓮庵)에 있으면서 선장(禪杖)을 가지고 무예를 익히기를 즐겼다고 한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분을 이기지 못하여 3일 동안을 통곡하고 스스로 승장이 되었다.

의승(義僧) 수백 명을 규합하여 관군과 더불어 청주성의 왜적을 쳤다. 관군은 패하여 달아났으나 그가 이끄는 승병이 분전하여 마침내 8월초 청주성을 수복하였다. 이어 의병장 조헌(趙憲)이 전라도로 향하는 고바야가와[小早川隆景]의 일본군을 공격하고자 할 때, 그는 관군과의 연합작전을 위하여 이를 늦추자고 하였다.

그러나 조헌이 듣지 않자 그는 조헌을 혼자서 죽게 할 수는 없다고 하면서 함께 금산 전투에 참가하였다. 그리하여 조헌이 이끄는 의사와 영규가 거느린 승군은 1592년 8월 18일 금산 전투에서 최후의 한사람까지 싸워 일본군의 호남 침공을 저지하였다.

서울을 버리고 의주까지 피난갔던 선조는 청주성 승전의 소식을 듣고, 영규에게 당상의 벼슬과 옷을 하사하였다. 그러나 영규는 임금이 내린 상사(賞賜)가 도착하기 전에 금산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뒤 승병이 일어난 것은 그가 최초로서 전국 곳곳에서 승병이 궐기하는 도화선이 되었다. 금산의 종용사(從容祠)에 제향되었으며, 뒤에 법도(法徒) 대인(大仁) 등이 금산 남쪽 진락산(進樂山) 기슭에 그의 영정을 안치한 진영각(眞影閣)과 비를 세웠다.
≪청주대 교수 겸 청주학연구원 책임연구위원≫

황경수  hksu200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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