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계서원(菊溪書院)은 충북 청주시 청원구 내수읍 비중리 164-4에 위치하고 있다. 1701년(숙종27)에 창건될 때에는 내수읍 국동리 국동마을에 세워졌으나, 1871년(고종8)에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서원 철폐령으로 인해 헐어서 없어졌다.

그러나 1960년 변경복의 후손들이 초계 변씨의 세거지인 현재의 자리에 다시 세웠고, 1972년에 낡고 헌 것을 수리하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

국계서원은 청주의 사족(士族)들이 송시열의 유지를 받들어 창건한 것이며, 박증영(朴增榮), 변경복(卞景福), 이덕수(李德洙) 3명을 모셨고, 이후 이수언(李秀彦)을 추가하여 지금은 4인을 제향하고 있다.

서원의 구조를 살펴보면 정면 3칸과 측면 1칸에 분합문을 달고 마루방에 쌍문을 달았다.

‘국계사(菊溪祠)’라는 편액을 걸고 그 앞에는 ‘사현문(四賢門)’이라 편액한 솟을대문을 세우고 담장을 두른 형태다.

서원의 앞에는 정면 4칸, 측면 1칸 반의 홑처마 팔작지붕 목조 기와집으로 된 강당을 세웠는데 오른쪽 쌍문 위에는 ‘모현재(慕賢齋)라는 현판을 걸었고, 사각기둥에 ‘국계서원(菊溪書院)’이라는 편액을 세로로 걸었다.

서원은 조선 중기 이후 학문을 연구하고, 선현제향(先賢祭享)을 위하여 사림들에 설립된 사설 교육기관으로 학문의 전당으로서 인재를 키우는 동시에 향촌 자치운영기구의 역할을 담당했다.

그러나 점차 그 수가 늘어나고 지방 양반들의 이익집단화 된 경향을 보이면서 흥선대원군은 ‘서원철폐’라는 극단의 처방을 내리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서원의 역사보다는 서원에서 보여준 선비들의 고결한 정신이다.

대부분의 서원들이 그렇듯 소박하고 검약하게 세워 겉에서 보면 초라하게 보일 정도이지만 그곳의 선비들은 전혀 개의치 않는다. 다소 질박해 보이는 국계서원. 그 앞에서 후손들이 보아야 할 것은 그 안에서 학문을 연구하고 인재를 양성하던 그들의 높은 정신일 것이다.

 

*박증영(朴增榮, 1464~1493)은 조선 전기의 학자·문신이다. 본관은 밀양(密陽)이고, 자는 희인(希仁)이며, 호는 눌재(訥齋)이다.
규정공(糾正公) 박현(朴鉉)의 8세손으로, 눌재공파의 파조(派祖)에 해당되는 인물이다. 증조할아버지 박절문(朴切門), 할아버지 박중손(朴仲孫), 아버지 박미(朴楣), 아들 박훈(朴薰, 1484~1540)이다. 1483년(성종14) 식년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으며, 1486년의 중시(重試)에서 을과(乙科) 2위로 급제하여 호당(湖堂)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1488년 예빈시직장으로 있을 때 허종(許琮)을 따라 명나라 사신 규봉(圭峰), 동월(董越)을 의주(義州)의 의순관(義順館)에서 맞이하였는데 동월이 그의 시문과 필법을 보고, 시문은 두보(杜甫, 712~770)와 같고, 필법은 조맹부(趙孟頫)와 비슷하다며 놀라워 하였고, 우아한 성품과 단정함을 기려서 ‘희인(希仁)’이라 이름하였다.
명나라의 부사 왕창(王敞)도 시에는 호연(浩然)의 기상이 있고, 글씨는 당나라 현종간의 천보서법(天寶書法)을 계승하였으며, 원나라 제일의 서예가인 조맹부의 서체를 잘 쓴다고 감탄하였다. 성품이 강직하고 씩씩한 기질이 있었고, 매우 청렴하여 사람들이 존경하였으며, 성종(成宗)이 그를 깊이 사랑하여 용을 아로새긴 벼루[용연(龍硯)]을 하사하였다.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로 재직 중 부친상을 당했는데, 여막에서 병을 얻어 29세의 나이에 죽었다.
묘소는 당시 경기도 남양주군 미금읍 호평동에 있었으나, 현재는 충북 청주시 흥덕구 옥산면 신촌리 대산(大山)에 있다. 저술한 것으로는 ≪눌재유고(訥齋遺稿)≫가 있다.

*박훈(朴薰, 1484∼1540)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형지(馨之), 호는 강수(江叟)이다. 좌찬성(左贊成) 박중손(朴仲孫)의 증손, 할아버지는 대사간(大司諫) 박미(朴楣), 아버지는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 박증영(朴增榮)이다. 어머니는 현감 박영달(朴英達)의 딸이다.
1504년(연산군10)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1506년 의영고주부(義盈庫主簿)를 거쳐, 보은현감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어진 이를 임금 곁에 두지 않고 외직으로 내보내는 것은 잘못이라는 여론에 따라 사헌부감찰로 바뀌었다가 공조좌랑을 거쳐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에 올랐다. 1519년(중종14)에 현량과(賢良科)에 병과로 급제하고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사간원사간(司諫院司諫) 등을 거쳐 동부승지(同副承旨)에까지 올라 ‘국기(國器)’라는 명성을 들었다.
그러나 기묘사화 때 조광조(趙光祖) 등과 함께 화를 입어 성주에 유배되었다. 이후 의주로 옮겨졌다가, 13년 뒤에 안악으로 옮겨졌다. 3년 뒤인 1533년에 유배 생활에서 풀려나 고향인 청주에 은거하였다. 청주(淸州) 신항서원(莘巷書院)에 제향되었으며, 시호는 문도(文度)이다. 저서로는 ≪강수유고(江搜遺稿)≫ 2권 2책이 전한다.
박훈(朴薰)은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상주 노릇을 너무 슬프게 하다 병을 얻어 일생을 마쳤다. 효심뿐 아니라 성품과 자질이 순수하고 덕행과 기량이 자연히 이루어져 행동에 지조가 굳고 법도가 있었다. 또 마음에 있지 않아도 관대하고 화합하는 넓은 마음과 깊은 생각도 갖추었다.

*이수언(李秀彦, 1636~1697)은 조선 후기의 문신, 학자이다. 본관은 한산(韓山)이며, 자는 미숙(美淑), 호는 농계(聾溪)·취몽헌(醉夢軒)이다. 관찰사 이동직(李東稷)의 아들이며, 이색(李穡, 1328~1396)의 후손이다.
1660년(현종1)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다. 1669년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예문관의 벼슬을 거쳐 정언·지평을 역임하였다. 1681년(숙종7) 응교를 거쳐 경상도관찰사로 특진된 뒤 승지·대사간·대사헌 등을 지냈으며, 1694년 갑술옥사로 풀려나와 형조판서에 올랐다. 이어 대사헌으로 오도일(吳道一)을 탄핵하다가 전라도관찰사로 좌천되었으며, 다시 내직에 임명되었으나 벼슬을 사직하고 고향인 청주에 내려갔다. 그 뒤 예조판서를 비롯하여 판윤·참찬·지중추부사 등의 벼슬로 조정에서 여러 번 불렀으나 뜻을 굽히지 않고 끝내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시호는 정간(正簡)이다. 묘소는 충북 청주시 상당구 미원면 쌍이리 산37-13번지에 위치해 있다.
≪청주대학교 교수 겸 지역가치창출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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