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풍추상

―“남을 대함에는 봄바람처럼,
자신에게는 가을서리처럼.”
공직자가 가져야 할 덕목입니다.
400년 전의 경구를 가슴에
새기면 좋겠습니다―

 

중국 명나라 말기 문인 홍자성(洪自誠·1573~1619)이 지은 ‘菜根譚’(채근담)은 사람이 살아가는 도리를 일깨워 주는 인생지침서로 후세에 많은 영향을 끼쳐오고 있는 명저입니다.

유교를 근본으로 도교, 불교를 넘나드는 주옥같은 경구(警句)들은 기존의 무거운 유교서적들에 비해 이해가 쉬워 유대인들의 지혜서인 탈무드처럼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고 있습니다. 전편 222조, 후편 135조로 구성되어 있는 이 책은 원만한 인간관계와 자연에 대한 즐거움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채근담(菜根譚)’이란 말은 송(宋)나라 왕신민(汪信民)이 지은 ‘소학(小學)’의 ‘인상능교채근즉백사가성(人常能咬菜根卽百事可成)’에서 따온 글자로 “나물 잎사귀나 뿌리를 씹어 먹듯 그 지혜를 알면 백가지 일을 다 이룰 수 있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채근담’이 이 땅에 처음 들어 온 것은 1917년 만해(萬海) 한용운 스님에 의해서입니다. 스님은 “비록 작은 책자이기는 하지만 드믄 걸작으로 반드시 세상 사람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킬 것”이라며 일독을 권한 것이 시작입니다.

청와대의 인사 개편에 따라 비서실장 중책을 맡은 노영민실장이 취임 일성으로 ‘춘풍추상’을 말해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노실장은 “대통령께서 비서실마다 ‘春風秋霜’이라고 쓴 액자를 걸게 했다”면서 “모든 것이 부족하지만 경청하는 자세로 최선을 다 하겠다”는 결연한 각오를 보였습니다.

‘춘풍추상’이란 바로 채근담에 나오는 말로 대인춘풍(待人春風) 지기추상(持己秋霜)을 줄인 글입니다. 즉 “남을 대할 때는 봄바람처럼 부드럽게 하고 자신을 지킴에는 가을서리처럼 엄격 하게하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글은 참여정부시절 ‘시대의 양심’이었던 신영복선생이 노무현 대통령에게 붓글씨를 써서 선물한 것인데 문재인 대통령이 특별히 찾아 각 비서실마다 걸어 놓게 한 것입니다. 자신을 보좌하는 비서관들에게 공(公)과 사(私) 몸가짐을 잘 관리하라는 의미 있는 메시지 였던 것입니다.

또 문 대통령의 관저에는 봉하마을의 노무현 전 대통령 묘역 비석 받침판에 적힌 고 신영복 선생의 글귀가 걸려 있다고 합니다.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입니다–라는 글귀가 적힌 액자입니다.

‘春風秋霜’. 봄바람, 가을서리를 뜻하는 채근담의 명구. 세계문자서예협회 회장 운곡 김동연선생이 충청미디어에 보내온 일필휘지.

문 대통령은 청와대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공직자로서 뿐만 아니라, 한 인간으로 살아가면서 이보다 더 훌륭한 좌우명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공직자가 공직에 있는 동안 이런 자세만 지킨다면 실수할 일이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문 대통령은 또 “공직자가 다른 사람을 대할 때는 봄바람 같이 해야 하지만, 업무 성격에 따라 남을 대할 때에도 추상과 같이 해야 할 경우가 있다”면서 “검찰, 감사원 등이 그렇고 청와대도 마찬가지”라며 “남들에게 추상과 같이 하려면 자신에게는 몇 배나 더 추상과 같이 해야 하며, 추상을 넘어서 한겨울 고드름처럼 자신을 대해야 한다”고 당부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청와대 직원들에 의한 이런 저런 불미한 일이 연거푸 일어나는 것을 보면서 대통령의 심기가 오죽 불편 할까, 미루어 짐작이 되고도 남습니다.

그런데 이 ‘대인춘풍 지기추상’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생전 좌우명이기도 했다고 합니다. 사범학교 출신이라서 붓글 솜씨가 좋았던 박대통령은 생전 이 글귀를 좋아해 신년휘호로 즐겨 쓰곤 했다는 것입니다. 독재자로 몹시 권위적이고 엄격하기만 해 보이던 박대통령이 ‘부드러운 봄바람’을 이야기 한 그런 면이 있었다하니, 전혀 의외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처럼 자신에게 철저했던 분이 마지막에 보여준 아름답지 못한 그런 모습을 생각하면 “허, 허, 참으로 딱하다”는 생각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사람의 속마음이란 알고도 모르는 것이라고 하더니, 그 말이 꼭 그 짝이 아닌가 싶어 안쓰럽습니다.

새로 청와대의 수장이 된 노영민 비서실장은 세 번이나 국회의원을 역임하고 주중국대사를 지낸 정계 중진으로 이제 본격적인 시험대에 올랐습니다. 1977년 연세대 2학년 때 유신반대운동을 벌이다 긴급조치 9호위반으로 제적, 구속됐고 입학 14년 만에 대학을 졸업한 경력을 갖고 있습니다.

시민운동가 출신 시인으로 ‘바람 지나간 자리에 꽃이 핀다,’ ‘싯다르타에서 빌게이츠까지’ 등 몇 권의 책을 냈을 만큼 필력이 뛰어납니다. 시집 강매라는 비난을 받은 일이 있지만 성격이 곧다는 주위의 평을 듣고 있습니다. 노실장은 이제 전임자인 임종석실장이 당했던 야당의 거센 정치공세와도 맞서야 하는 피할 수 없는 상황에 처했습니다. 그가 현실의 위중함을 잘 알고 말했듯 ‘춘풍추상’의 정치력이 어떻게 발휘될지, 궁금합니다.

‘대인춘풍 지기추상’의 교훈은 청와대가 아니더라도 공직자, 아니 모든 국민이 가슴속에 새긴다면 우리 사회가 훨씬 더 좋아지지 않을까, 생각을 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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