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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진을 정벌하고 9성(九城)을 쌓은 ‘윤관(尹瓘) 영정(影幀)’황경수 교수의 청주인물 이야기
황경수 | 승인 2019.01.07 09:29

충북 유형문화재 제160호(1987. 3. 31.)인 윤관(尹瓘) 영정(影幀)은 충북 청주시 청원구 북이면 용계내추로 413-8번지에 있다.

윤관(尹瓘) 영정 중 문관상(文官像) 1폭은 관복 차림으로 호랑이 가죽으로 덮여 있는 의자에 앉아 있는 전신교의좌상(全身交椅坐像)은 가로 65cm, 세로 110cm로 되어 있다.

무관상(武官像) 1폭은 갑옷을 입고 활을 들고 있는 전신입상(全身立像)으로 가로 75cm, 세로 170cm이며, 1980년 민복진(閔福鎭)이 그린 것이다.

원래 함경북도 북청군 소재의 파평 윤씨(坡平尹氏)의 사당인 만뢰사(萬賴祠)에 봉안하고 있었으나 두 영정을 형체를 그대로 그려 1902년에 이곳으로 가져와 문숙영당(文肅影堂)에 모시고 있다.

윤관(尹瓘, ?∼1111년)은 고려 예종 때의 학자이며 장군이며, 자는 동현(同玄), 본관은 파평(坡平)이다. 문종(文宗) 때 과거에 급제하여 습유(拾遺)·보궐(補闕)을 지냈다. 1087년(선종4) 합문지후(閤門祗候)로서 출추사(出推使)가 되어 광주(廣州)·충주·청주를 시찰하였다.

1095년(숙종1) 좌사낭중(左司郎中)으로 형부시랑임의(任懿)와 함께 요나라에 파견되어 숙종(肅宗)의 즉위를 알렸다. 윤관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는 1104년(숙종9) 2월 동북면행영도통(東北面行營都統)이 되어 여진정벌의 임무를 맡을 때부터 1111년(예종6) 죽을 때까지의 약 7년간이다.

숙종은 무력으로 여진 정벌을 결심하고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 임간(林幹)에게 평정하도록 했으나 오히려 여진에게 크게 패하였다.

이때 윤관이 왕명을 받고 여진에 대한 북벌의 길에 오르게 되었다. 조정에 전승 보고를 올리고 탈환한 각지에 장수를 보내 국토를 획정하고 9성을 축조하였다.

새로 성을 구축한 곳은 함주(咸州)에 이주민 1,948가구, 영주(英州)에 성곽 950칸과 이주민 1,238가구, 웅주(雄州)에 성곽 992칸과 이주민 1,436가구, 복주(福州)에 성곽 774칸과 이주민 680가구, 길주(吉州)에 성곽 670칸과 이주민 680가구, 공험진(公嶮鎭)에 이주민 532가구였다. 이 6성 외에 이듬해에는 숭녕(崇寧)·통태(通泰)·진양(眞陽)의 3성을 더 쌓아 이른바 윤관의 9성 설치가 완결되었다.

1109년(예종4) 7월 3일 회의를 열고 9성 환부를 결의해 7월 18일부터 9성 철수가 시작되었다. 윤관이 장병들과 더불어 생명을 걸고 경략했던 9성 일대의 땅이 다시 여진에게 환부된 것이다. 윤관의 처벌을 주장했던 재상·대간(臺諫)들을 물리치며 비호한 예종의 덕으로 1110년 다시 수태보 문하시중 판병부사 상주국 감수국사(守太保門下侍中判兵部事上柱國監修國史)가 내려졌으나 사의를 표하였다.

1130년(인종8) 예종의 묘정(廟廷)에 배향되었으며, 묘는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사적 제323호)에 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었으나 1130년(인종8) 수릉(綏陵)의 휘(諱)를 피하여 문숙(文肅)으로 고쳤다.

≪황경수, 청주대학교 교수 겸 청주학연구원 책임연구위원≫

황경수  hksu200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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