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서산에 서서

―저무는 한해의 마지막 달,
모두가 차분한 마음으로
뒤를 돌아봐야 하겠습니다.
잘한 것은 과연 무엇이고
잘못한 것은 또 무엇이었는지―

 

흐르는 강물이 뒤를 돌아 볼 수 있으랴. 분류(奔流)처럼 앞만 보고 달려왔습니다. 형체가 있을까만 이제 며칠 뒤면 2018년은 영원히 역사 속으로 사라집니다. 빛바랜 벽에 덩그러니 매달려 있는 한 장의 남은 달력은 또 한해가 저물었음을 실감나게 합니다.

올해도 참으로 다사다난했습니다. 글 쓰는 이들이 매년 연말이면 한약에 감초 넣듯 쓰는 표현이지만 사실이 그랬습니다. 올림픽 같은 국가적인 큰 행사도 있었고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도 세 차례나 열려 통일을 갈망하는 국민들을 들뜨게 했습니다.

도지사·시장 군수를 뽑는 지방 선거도 별 탈 없이 치렀지만 ‘미투(Me Too·나도 당했다)’라는 전대미문의 여성운동이 회오리바람이 되어 온 사회를 휩쓸며 일파만파 파문을 일으켰습니다. 우후죽순처럼 날마다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크고 작은 불행한 사건·사고들이 그때마다 국민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좋은 일도 없지 않았지만 좋지 않은 일들이 훨씬 더 많았지 않았나 싶은 한해였습니다.

2월 9일 평창에서 열린 제23회 동계올림픽은 우리나라의 국력을 그대로 보여준 빅 이벤트였습니다. 전 세계 92개국 2920명의 사상 최대 선수단이 출전해 15개 종목에 걸쳐 경쟁을 벌인 평창동계올림픽은 대한민국의 저력을 만 유감없이 보여준 설원의 큰 잔치였습니다.

평창 올림픽의 하이라이트는 경기가 아니라 ‘남북선수단’이었습니다. 푸른색 한반도가 그려진 백색 코리아기를 같이 들고 남과 북의 선수들이 함께 경기장에 입장하던 모습은 한민족의 가슴을 뜨겁게 했습니다. 전 세계인에게 남북통일의 당위성을 다시 일깨워준 명장면으로 자랑 좀 한다 해도 지나침이 없겠습니다.

동시에 평창올림픽은 평화의 중요성을 보여준 화해의 출발이었습니다. 불과 한 달 전만해도 미국의 최신예전폭기들이 먹구름처럼 동해 상공을 뒤덮어 곧 전쟁이 터질 것만 같던 일촉즉발의 위기상황이었기에 평창올림픽을 계기로 조성된 평화무드는 예상 밖의 큰 반전이었습니다.

명목상이라고는 하지만 국가원수인 김영남 최고회의 상임위원장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동생인 실세 김여정이 북한대표단을 이끌고 오고, 삼지연예술단 공연, 태권도 팀 시범공연 등은 대회를 빛나게 했음은 물론 남쪽 국민들에게 한 핏줄이라는 동질성을 보여준 멋진 연출이었습니다.

1월29일 서지현검사의 jtbc 폭로로 시작된 성폭력, 성희롱고발, 세칭 ‘미투운동’은 우리 사회에 감춰져 있던 민낯을 여지없이 보여준 일대 사회운동이었습니다.

회오리바람이 순식간에 걷잡을 수 없는 토네이도가 되어 대권 물망의 현직 도지사가 자리에서 미끄러지고 원로 시인, 연극계의 대부, 군 장성, 대학 교수, 각 급 학교 교사, 심지어 종교계의 성직자들마저 피해여성들의 경쟁적인 폭로로 수난을 당했습니다.

“남자는 하늘, 여자는 땅”이라는 남존여비의 고리타분한 유교 문화적 관념 에서 비롯된 부조리의 단면이었지만 남녀평등이라는 선진시대의 가치관을 새로 정립해야한다는 필요성을 절감하게 한 계기가 된 것이 분명합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방남 설이 파다한 가운데 청와대 사랑채 앞에 설치된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대형 그림 작품. /NEWSIS

6월 13일 치러진 전국동시지방선거는 이미 ‘기울어진 운동장’이라는 예측은 있었지만 자유한국당 등 야당이 참패를 당한 치욕의 한판이었습니다. 전국 17개 시·도지사 가운데 14개 지역을 더불어 민주당이 휩쓸었고 단 두 곳, 그것도 보수의 심장이라는 대구, 경북에서만 어렵사리 명맥을 유지했으니 그동안 자유한국당에 대한 국민의 불신이 얼마나 컸던가를 여실히 보여주었습니다.

기초 단체장인 시장·군수 역시 전국 226개 지역 중 더불어 민주당 151, 자유한국당 53, 민주평화당 5, 무소속 17이었고 서울의 경우 25개 구청장 가운데 24개 지역을 더불어 민주당이 석권했습니다.

평소에는 아무 힘도 없어 보이는 민초(民草)들, 그러나 잡초 같은 그들이 일어서면 무서운 태풍이 된다는 것을 알지 못한 결과였습니다. 야당 쪽을 변호하자면 4·19가 왜 일어났고 6월 항쟁이, 그리고 촛불혁명이 어째서 일어났던 가를 잊은 게 원인이었습니다. 여야를 막론하고 그가 누구든 정치를 하는 이들은 시대의 흐름을 읽는 밝은 지혜가 필요합니다.

4월 27일 문재인대통령이 판문점 경계선에서 김정은 위원장을 맞아 손을 잡는 장면은 문자 그대로 감동이었습니다. 2007년 10월 2일 노무현대통령이 육로로 분단선을 넘을 때의 역사적인 순간, 그리고 2000년 6월 13일 김대중 대통령이 평양 순안공항에 내려 북한 인민들의 환호 속에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손을 잡고 포옹하던 그 순간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다시 5월 26일 판문각에서의 2차 정상회담을 거쳐 9월 18일 평양에서의 3차 정상회담으로 이어지면서 남북한이 피차 상대에 대한 신뢰를 쌓았고 백두산 천지에 올라 함께 잡은 손을 높이 치켜들 때는 전율마저 느껴졌든 게 솔직한 심정입니다. 금강산에서 이산가족이 다시 상봉하고, 기관총을 걸어 놨던 최전방 GP를 동시에 철거하고 남북의 도로를 새로 뚫고 남북기술진이 함께 철도를 공동 조사하고 한강 하구의 수로를 함께 살피는 등 평화무드는 점차 두터워지고 있습니다.

올해 남북관계는 큰 진전을 이루었습니다. 먼저 전쟁의 공포가 사라졌다는 것이 첫 번째 발전이고 남북이 상호 화해를 위한 신뢰를 보이고 있다는 점이 그 두 번째 입니다. 북·미관계 등 돌발 변수가 없지 않겠지만 남과 북이 현재의 분위기를 이어간다면 통일이라는 큰 목표 달성도 불가능하지만은 않다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시기가 언제냐”이긴 하지만.

3월 22일 이명박 전 대통령이 뇌물수수 및 횡령 등의 혐의로 구속된 것도 올해의 주요 뉴스가 아닐 수 없습니다. 개인의 불행을 넘어 전직 대통령이 두 사람씩이나 영어(囹圄)의 몸이 돼 있다는 사실은 국가적 수치이기도 합니다.

사법농단사건도 올해의 이슈였습니다. 삼권분립의 민주국가에서 사법부의 장인 대법원장이 대통령과 은밀히 내통하면서 사법질서를 훼손한 사건은 어떤 구실로 변명을 한다 해도 수긍 할 수 없는 중대 범죄입니다. 정의수호의 최후 보루인 사법부가 이 지경이 돼있을진대 국민이 어떻게 사법부를 신뢰할 수 있을까, 슬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죽했으면 현직 대법원장에게 화염병을 투척하는 불상사까지 일어났겠습니까.

올해도 우리 사회는 너무 많은 범죄, 사건 사고를 겪었습니다. 세계제일의 인터넷, 스마트폰을 자랑하는 나라에서 보이스피싱이 무서워 국민들이 전화 받기를 꺼릴 정도이니 “우~리나라 좋은~나라”라고 노래할 분위기는 아닙니다.

파리 목숨처럼 생명을 경시하는 살인범죄, 천륜을 거스르는 흉악범죄가 잇따르고 묻지 마 폭력, 일부이긴 하겠지만 가정에서의 폭력 또한 비일비재 일상사가 되고 있으니 이것들 또한 반드시 막아야 될 악폐의 하나입니다. 전국 각지에서 날마다 일어나는 사건, 사고는 조금만 더 관심을 갖고 살피면 예방이 가능한 일들입니다.

이제 저무는 한해의 언덕에서 성찰의 시간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개인이든, 조직이든, 사회이든, 국가이든, 잘한 것은 무엇이고 잘 못한 것은 무엇인지, 차분히 반성하고 성찰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얻은 것은 무엇이고, 잃은 것은 무엇인지, 실없는 말 몇 마디로 남의 가슴에 상처를 주지는 않았는지, 나의 이기심을 위해 남의 희생을 강요하지는 않았는지, 곰곰이 생각해 봐야 한다는 말입니다.

지난여름은 어지간히 무덥더니 이번 겨울도 출발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설상가상(雪上加霜) KTX가 탈선하는 사고마저 또 일어나니 제발 정부는 국민들 놀라게 하는 일 좀 없게 해줘야 하겠습니다. 정신 차려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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