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회찬의 죽음을 보고

 

ㅡ군자는 도로 모이고, 소인은
이로 뭉친다. 돈으로 정치를
하는 나라. 노회찬의 죽음에서
우리는 무엇을 생각해야할까.
날씨는 연일 푹푹 찝니다.―

 

 

원외지구당 위원장 시절이던 2016년 불법 정치자금 4000만원을 받은 것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양심적 가책을 못 이기고 아파트에서 투신해 목숨을 끊은 정의당 노회찬의원의 죽음은 혼탁하기만 한 우리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받아서는 안 되는 돈을 받은 것은 분명한 위법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국민들이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며 수만 명의 시민이 빈소에 줄을 선 것은 평소 그가 국민들을 위해 어떤 자세로 행동하고 어떤 삶을 살았는가를 보여준 증표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조문객들은 남녀노소, 진보와 보수의 구분이 없었습니다. 진보정당에 몸담아 때로는 과격하게 날을 세우고 얼굴을 붉혔지만 많은 보수인사들이 빈소를 찾아 예를 표했고 진심으로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했습니다. 그가 국회에서 토론을 할 때나 방송에 출연해서나 거친 말 대신 촌철살인(寸鐵殺人)의 은유와 해학으로 상대의 폐부를 찌르며 웃음을 자아내게 한 여유 있어 보이는 정치적 제스처와 겸손한 처신이 그들을 빈소로 오게 한 것이 아닌가 여겨집니다.

빈소에는 특히 사회적 약자들이 많이 찾았습니다. 허약한 몸을 이끌고 찾아온 노인도 있었고 청소 노동을 하는 비정규직 여성노동자들, 양심적 병역거부 자, 나이어린 학생, 젊은이들, 그리고 보통시민들과 같은 사회적인 약자들이 많았다고 언론들은 전하고 있습니다.

그는 지난 2004년 17대 총선 당시 한 토론회에서 “한나라당·민주당 의원님들, 그동안 수고하셨습니다. 이제 퇴장하십시오. 이제 저희가 만들어 가겠습니다. 50년 동안 같은 판에다 삼겹살 구워먹으면 고기가 시꺼메집니다. 판을 갈 때가 왔습니다”라며 정치 혁신을 유머러스하게 주장 했습니다. 평범하지만 평범하지 않은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게 바로 노회찬이었고 그러한 부드러움이 바로 그의 무기였습니다.

정치와 돈은 불가분의 관계입니다. 정치를 하려면 먼저 돈이 있어야합니다. 정치에서 돈은 곧 필수불가결의 젖줄입니다. 그러나 그 돈은 때로는 꿀 같은 젖이 되기도 하지만 사람을 잡는 독이 되기도 합니다. 민주정치의 본산인 유럽에서야 이념에 따라 사람이 모여 정치를 하지만 민주주의 역사가 짧고 금권정치로 길들여진 우리나라는 이해에 따라 모이고 흩어지다 보니 돈이야 말로 없어서는 안 될 정치의 필수 조건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2000여 년 전 공자가 “군자는 도(道)로 모이고 소인은 이(利)로 뭉친다”고 말한 선견지명이 놀랍기만 합니다. 돈으로 사람을 사고 돈으로 표를 얻는 현실에서 돈이야 말로 정치인의 생살여탈권을 쥔 절대적인 존재인 것입니다.

하지만 과거 우리 정치에도 곧고 깨끗하고 청렴하게 소신껏 산 사람들은 있었습니다. 이종근 의원. 1923년 생. 육사 8기생으로 1961년 5·16쿠데타에 가담했고 예비역 준장으로 6, 7, 9, 10, 13, 14대 등 6선 의원을 역임한 인물입니다.

천성이 워낙 강직하고 소탈해 국회의원이 되고서도 날마다 옷은 그 옷이, 그 옷이었고 신발은 언제나 해진구두를 신고 다니면서 점심은 거의 매일 측근 한 두 사람과 함께 무교동 설렁탕집에서 해결하는 게 일과였습니다. 국회의원 신분으로 서울 변두리 친지의 집에 하숙을 정해놓고 태평로 국회로 등원을 하곤 했습니다. 부인은 남편이 국회의원이 됐음에도 아랑곳없이 시골 초가집을 지키며 머리에 수건을 두르고 여느 촌부(村婦)들처럼 날마다 밭에 나가 직접 농사를 지었습니다.

서울 서대문구 신촌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고 노회찬 정의당 원내대표의 빈소에 주인 없는 구두가 놓여 있다. / NEWSIS

1960년대 말 그가 의원신분으로 어렵게 생활한다는 사정을 보고받은 박정희대통령이 이의원을 청와대로 불러 “국회의원이 하숙을 하다니, 먹고, 잘 집은 있어야지…”라면서 300만원을 주었습니다. 이의원은 동대문 근처에 270만원을 주고 18평짜리 국민주택을 마련했습니다. 그리고 며칠 뒤 청와대에 들어가 감사 인사와 함께 남은 돈 30만원을 탁자에 내 놓았습니다. 박대통령은 “이 사람, 이게 뭐요?”하고 어이가 없어 껄껄 웃으며 “사람, 순진하기는…”하고 봉투를 되 돌려주었습니다.

그의 결벽증에 가까운 생활 태도를 높이 산 박대통령의 신임으로 선거 때마다 당내 일부 실력자들이 견제를 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번 당선이 됐고 전두환 5공 정권에서도 여러 차례 뒷조사를 당했으면서도 아무런 약점도 잡힐 것이 없어 13, 14대 의원에 이르기까지 6선의 경력을 쌓았습니다.

그는 국회 농림위원장, 교체위원장, 윤리위원장, 신민주공화당 부총재 등 중책을 역임하였으나 일체의 ‘뒷돈’은 받지 않았습니다. 하물며 명절 때 유관기관에서 가져온 선물도 되가져가게 하는 결벽증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그에게는 ‘간디’, ‘대꼬챙이’라는 별명이 따라 붙었고 태국의 유명한 청백리 ‘잠롱’이 그의 별칭으로 불리기도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돈 없으면 정치 못한다고들 하지만 이의원이야말로 돈 없이도 정치를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준 우리 정치사의 드믄 사례였습니다. 이의원은 80세 되던 2003년 고향인 충주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노회찬의원의 죽음을 보면서 왜 아쉬움이 없겠습니까. 애시 당초 양심적인 정치를 하려고 마음 먹었다면 형편이 좀 어려워도 돈을 받지 않았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또 한때의 실수로 돈을 받았더라도  “사실 이래, 저래 해서 돈을 받았습니다. 법의 심판을 달게 받고 죄 값을 치르겠습니다. 잘못했습니다,” 이실직고하고 내발로 걸어서 교도소에 들어가 형을 살았더라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것입니다. 극단적인 선택으로 자신을 죽이고 살아있는 많은 이들의 가슴에 실망과 상처를 준 것이 과연 옳았는지,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빈소에 조문객이 많았다하여 그의 죽음이 의로운 것은 아닙니다.

지지자들 가운데는 “그까짓 돈 4000만원이 뭐냐!”고 하는 이들이 있지만 그것은 잘 못된 생각입니다. 4000만원이 아니고 400만원이라도 불법으로 받았다면 잘 못된 것이고 수억 원을 받은 사람이 원내에 수두룩 하다해도 노회찬, 그가 돈을 받은 것은 잘못된 일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그냥 있으면 입이 근질거려 좀이 쑤시는 어떤 사람은 “자살을 미화하는 사회는 정상이 아니다”라며 예의 욕먹을 소리를 하고 “자살은 가족과 사회에 대한 죄”라고 악담을 늘어놓는 어느 당대변인도 있습니다. 그러나 누가 뭐라든 그는 잘 살았습니다. 비록 ‘미완의 정치인’으로 불귀의 객이 되었지만 '인간 노회찬'은 잘 살았습니다. 그것이 옳건, 그르건 그는 자신을 던짐으로써 그것을 보여주었습니다. 현장에 있는 사람들은 노회찬의원의 죽음을 통해 모름지기 정치인의 삶과 철학이 어떠해야 하는 가를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호사유피(虎死留皮) 인사유명(人死留名)이라고 했습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입니다. 죽어서 무엇을 남기던 그것은 살아있는 자, 개개인의 몫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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