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량사법의 흑역사

 

―졸지에 '빨갱이'가 된 사람들.
사법부는 사회정의의 보루인데
역사에 기록된 숱한 '사법살인'
검은 법복의 신성한 권위는
오늘 과연 어디에 있습니까―

 

김금수 씨. 올해 75세. 나이는 어쩔 수 없어 머리는 백발에 가깝지만 눈빛은 여전히 젊은이처럼 빛나고 있습니다. 그는 요즘 하늘을 날 것 같은 기분으로 날마다 아침을 맞고 있습니다. 43년이라는 기나긴 세월동안 자신을 옭아매고 억눌러 온 억울한 멍에를 벗어났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그것은 악몽이었습니다. 1974년 9월 10일, 갑자기 들이닥친 낯선 사람들, 영문도 모르고 그들에게 끌려 간 것이 고난의 시작이었습니다. 며칠 전 서울 장충동 국립극장에서 거행된 광복절 경축식에서 박정희 대통령부인 육영수여사가 재일 조총련소속 동포청년 문세광에 의해 저격을 받고 숨진 지 얼마 뒤 일입니다.

당시 그는 충청북도 단양에서 의욕적인 취재활동을 벌이던 정의감 강한 신문기자였고 아울러 시민단체를 맡아 지역사회를 위해 활약하던 잘 나가는 젊은이였습니다. 그런데 그게 문제였습니다. 평소 언론과 시민운동을 탐탁지 않게 여기던 경찰이 그에게 덫을 놓았던 것입니다. 육여사의 사망으로 온통 사회가 초상집이 되다시피 한 상황에 퇴근 뒤 가족들과 둘러앉아 박대통령과 육여사에 대한 비판적인 얘기를 나눈 것이 화근이었습니다.

경찰은 나이 어린 가사도우미를 사주(使嗾)해 가족들 간의 대화내용을 부풀려 사건을 꿰맞췄습니다. 연행된 김씨는 공포분위기 속에서 온갖 가혹행위를 당해야 했습니다. “저격범 문세광은 김일성의 지령을 받은 공산주의자인데 그 가 저지른 행동을 잘했다고 말했으니 공산주의자가 아닌가”라는 것이 경찰의 억지혐의였습니다. 말하자면 찬양 고무죄였습니다. 상습적인 덮어씌우기요, 조작이었습니다. 불과 며칠사이 김씨는 평소 상상할 수도 없던 공산주의자, ‘빨갱이’가 되어버렸습니다.

“산천초목이 떤다”던 서슬 퍼런 유신치하, 누구도 사건의 잘잘못에 대해 가타부타 입을 열지 못하고 쉬쉬했습니다. 시인으로 교사였던 부인은 사직 처리되었고 어린 두 아들과 화목하기만 하던 가정은 갑자기 불행의 늪에 빠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김씨는 긴급조치 9호 및 반공법위반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고 3년 징역, 자격정지 3년형을 선고 받았습니다. 결국 대법원까지 가는 법정 투쟁 끝에 2년으로 감형이 돼 1975년 9월 26일부터 1977년 9월 26일까지 꼬박 2년을 교도소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놀라운 것은 함께 복역 중인 수형자 가운데는 별것 아닌 말 몇 마디로 꼬투리를 잡혀 억울하게 옥살이를 하고 있는 이들이 한둘이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옥고를 치르고 출옥한 김씨는 당시 반독재 민주화 투쟁을 벌이던 김영삼 통일민주당총재의 발탁으로 민주화운동에 참여해 당의 중책을 맡기도 했고 과거 재직했던 신문사에 경영책임자로 복귀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뒤를 따라다니는 반공법 위반이라는 ‘전과’는 그를 괴롭혔습니다.

김씨는 2017년 10월 재심을 신청했고 지난 6월 27일 청주지법 형사2부(윤성묵부장판사)는 원심을 파기하고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43년이라는 기나긴 세월, 그를 옥죄었던 ‘빨갱이’라는 ‘주홍글씨’를 벗어 던지는 역사적인 순간이었습니다.

재판부는 “김씨의 발언은 사적 공간인 자택에서 부인과 함께 나눈 대화이고 그 내용 또한 박 대통령 등에 대한 불만을 표시한 것일 뿐, 반국가단체의 대통령 저격행위 자체를 찬양한 것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고 밝히고 “그 발언이 국가의 존립과 안전을 위태롭게 하거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실질적 해악을 미칠 구체적이고 명백한 위험성이 있다고 인정하기 부족해 이 부분 공소사실은 범죄로 되지 않는 경우에 해당한다”고 무죄를 판시한 것입니다.

참으로 감개무량했습니다. 재판이 끝나고 법정을 나서던 김씨는 눈시울을 붉히며 “나라가 민주화된 것을 이제야 비로소 실감한다”면서 “다시는 이런 일로 ‘빨갱이’누명을 쓰는 억울한 사람이 없어야한다”고 감회를 밝혔습니다.

우리 현대사를 돌아보면 1945년 남북이 분단돼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로 대립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억울한 죽음을 당하거나 고초를 겪은 일이 부지기수입니다. 때로는 정부를 비판했다는 이유로, 때로는 말실수 때문에, 때로는 정치적 견해가 다르다 하여 그 보복으로 억울한 희생을 당한 것입니다.

1975년 4월 9일 사형확정 18시간 만에 형이 집행된 민청학련 희생자들. 그들은 2007년 무죄를 선고 받았다. / NEWSIS

항일 독립운동가이면서 초대 농림부장관으로, 국회부의장을 역임한 진보당의 조봉암(1899~1559)선생은 1956년 치러진 3대 대통령 선거에서 자유당의 이승만 후보와 맞섰다가 의외로 표가 많이 나오자 위협을 느낀 이승만에 의해 ‘간첩’이라는 모함을 당해 1959년 7월 31일 서대문 형무소에서 사형을 당합니다.

그가 주장한건 ‘평화통일.’ 이승만의 ‘북진통일’에 반대했다는 것이 죄목이었으니 전형적인 정치보복이요, ‘사법살인’이었던 것입니다.

2011년 1월 20일 대법원은 재심에서 대법관 13명 전원합의로 원심을 파기하고 무죄를 선고함으로써 52년 만에 억울한 누명을 벗겨 줬습니다. 또 서울중앙지법은 모두 24억5700만원을 유족에게 지급하라고 판결했습니다. 1950년대 대표적 사법살인의 오명이 벗겨진 것입니다.

1960년 4·19혁명 뒤 혁신성향 일간지 민족일보를 창간했던 조용수(1930~1961)씨는 조총련의 자금을 받아 신문사를 세웠다는 혐의를 받습니다. 신문이 선풍을 일으키며 지식층 및 학생들에게 큰 호응을 얻자 쿠데타에 성공한 군부는“재일조총련의 자금을 받아 신문을 창간해 북한을 찬양하고 고무했다”는 혐의를 씌워 조 씨에게 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선고하고 1961년 12월 21일 형을 집행합니다. 그의 나이 31세. 당시 세간에서는 박정희의 희생양이라는 여론이 공공연히 나돌았습니다. 2008년 1월16일 서울 중앙지법 형사 합의 22부는 47년 만에 무죄를 선고했고 2011년 1월 13일 29억원을 유족에게 배상하라”고 판결했습니다.

1974년 4월3일 중앙정보부는 대학생, 종교인, 재야인사 등으로 구성된 전국민주청년총연맹을 적발했다고 발표합니다. 소위 ‘민청학련 사건.’ 이 사건으로 1204명이 영장 없이 잡혀갔고 180여명이 민중봉기를 통해 정부를 전복하고 남한에 공산정권을 수립하려했다는 혐의로 구속됩니다.

유신체제에 반대하는 세력을 뿌리 뽑기 위한 대 탄압이었습니다. 결국 이 사건으로 도예종, 여정남 등 8명이 사형, 7명이 무기징역, 12명이 징역 20년, 6명이 징역 15년을 선고 받았습니다. 사형이 선고된 8명은 형이 확정된 지 18시간만인 이튿날 새벽 기습적으로 처형을 당했습니다. 전대미문의 반인륜적인 사법살인이었습니다. 이 나라 사법사상 가장 수치스러운 재판으로 기록된 사건입니다.

대법원은 그로부터 34년이 지난 2009년 9월 민청학련 관련자들에게 “내란죄로 인정할 증거가 없다”며 무죄를 선고했고 서울중앙지법은 사형을 당한 8명의 희생자 유족들에게 국가가 총 245억원을 배상하라고 판결을 내립니다. 시국사건 국가 배상액으론 사상 최고액이었습니다.

이 모든 사건들은 독재정권 치하에서 자행됐다는 점과 북한정권과 연계시켜 단죄했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요즘 대법원이 박근혜 정권시절 청와대에 줄을 대고 이런 저런 해서는 안 될 로비를 했다하여 모양이 우습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검찰의 수사까지 받는다는 소식에는 아연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찌하여 사법부가 이 지경이 되었는지, 참으로 딱합니다. 사법부야 말로 사회정의의 보루요, 국민의 마지막 희망이어야 합니다.

국민이 입법부를 욕하고 행정부를 불신해도 사법부를 신뢰하는 것은 검은 법복(法服)의 신성한 권위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법부가 권력의 하수인이 되어 제 본분을 잊는 것은 국민의 불행, 국가의 불행입니다. 그야말로 민망함의 극치입니다.

저작권자 © 충청미디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