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과의 불화...예술로 자활하다

​인류 역사에서 두드러진 성취를 이루었거나 인상적인 족적을 남긴 이들은 그들의 삶을 일관된 맥락에서 서사화하고자 하는 전기영화적 상상력을 자극한다. 문제는 그 영화적 상상력이 주로 남성을 선호한다는 것이고, 이는 시정돼야 할 성별 불균형으로 이어진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프랑스의 화가 세라핀 루이(1864~1942)의 생애를 그린 마르탱 프로보스트의 <세라핀>(2008)과, 미국 시인 에밀리 디킨슨(1830~1886)의 삶을 다룬 테렌스 데이비스의 <조용한 열정>(2015)은 전기영화의 성별 불균형을 해소하는 주목할 만한 영화적 실례이다. 두 작품은 우리가 알지 못했던 치열한 생존투쟁, 우리가 외면했던 숭고한 정체성 탐색이라는 영화적 작업이 여성이라는 미답의 영역으로 향해야 한다는 당위를 효과적으로 환기시킨다.

르탱 프로보스트의 영화 <세라핀>은 10분이 다 돼서야 나이 든 주인공 여성이 세라핀(욜랑드 모로)임을 관객에게 알려준다. 모두가 잠든 어두운 밤, 혼자 물속을 헤매며 수초를 걷어올리던 여자, 종소리에 바쁘게 성당으로 뛰어가 성호를 긋던 여자, 열심히 초원을 가로질러 높은 나뭇가지에 걸터앉아 저 멀리 내다보던 여자, 맨발로 다니던 여자. 1914년, 파리에서 북동쪽으로 40km 떨어진 녹음 우거진 전원 마을 상리스에서 이집 저집, 가게들을 다니며 청소와 식사수발, 기타 잡일로 연명하는 그녀의 이름이다. 그녀는 곧잘 수상한 짓을 한다. 개울에서 진흙을 퍼담거나, 일하는 양고기 가게에서 양의 핏물을 몰래 병에 담는다. 그리고 성당으로 달려가 양촛물을 몰래 그 병에 붓는다. 물론 먼저 성호를 긋고, 가기 전 "이 정도는 용서해주시겠죠?"의 뜻을 담은 듯한 미소를 성모 마리아에게 보내는 것도 잊지 않는다.​

화난 사람처럼 성큼성큼 걷는 그녀, 커다란 나무 밑에서 한동안 앉아있기를 즐기는 그녀가 화가라는 사실은 영화가 시작된 지 20분이 다 돼서야 알 수 있다. 진흙과 양의 핏물 등은 물감 살 돈조차 궁한 가난한 가정부의 그림에 독특한 질감을 부여했던 것이다. 방세가 두 달 치나 밀렸는데도 흰색물감을 사느라 번 돈을 다 쓰지만 "땔감이나 사", "충고하겠는데 시간 낭비 말아. 이 그림 별 볼 일 없어"라는 비아냥만 듣던 그녀가 세상에 발견되는 것은 영화 시작되고 37분쯤 지나서다. 일주일에 세 번씩 찾아 식사 시중과 방 청소 등을 맡던 손님 빌헬름 우데(1874~1947, 울리히 터커)는 독일의 저명한 미술사가이며 평론가, 수집가였다. 우연히 세라핀의 그림을 본 그는 피카소, 브라크, 로랑생 등을 최초로 주목했듯 세라핀의 천재적 재능을 알아본다.

세라핀은 종종 하늘을 올려다보며 미소 짓는다. 화폭을 채우는 영감과 삶의 축복이 내려오는 저 높은 곳 어딘가에 붓을 잡으라고 계시한 천사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을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맡은 일에 충실하면 냄비 속에서도 주님을 만날 수 있다"는 지극함으로 성모 마리아상을 모신 좁은 방에서 열심히 그림을 그린다. 하지만 그보다 조금 일찍 빌헬름 우데에 의해 발견된 앙리 루소(1844~1910)가 누렸던 현실의 영광은 세라핀에게 허락되지 않았다. 파리에서의 전시회를 약속했던 우데는 독일군 진격이 임박해지자 루소의 그림만을 챙겨 황급히 상리스를 떠난다. "청소로 세월 다 보내느라고 천부적 재능을 썩힐 셈이에요?" 다그쳤던 그는 "포기 말아요, 빛을 볼 날이 올 겁니다"라는 말만 남긴다. 그리고 극심한 궁핍과 고통의 시간이 지나는 동안, 세라핀은 더욱 그림 그리기에 매진한다.​

1927년, 상리스 인근의 샹티이에 새로 정착한 우데는 죽었을 거라 짐작했던 세라핀과 재회한다. 그리고 감탄을 금치 못한다. 나무판자에나 그림 그리던 세라핀이 손색없는 화가, 감히 대가라 불러도 될 그림을 그린다는 사실에, 무엇보다도 고흐처럼 시대를 앞서간다는 점에 놀란다. 오직 그림에만 몰두할 수 있도록 물질적 지원을 약속한 우데의 후원에 힘입어 세라핀의 예술적 천재는 더욱 만개한다. 대형 화폭에 펼쳐지는 그녀의 그림 속 화려한 색채의 나무와 풀잎, 꽃봉오리들은 살아있는 듯 꿈틀거린다. 종교적 헌신, 자연과의 소통으로 버텨온 침묵과 고독의 삶 전체 에너지가 터져나올 듯 강렬하게, 때로는 소름 끼치게 보는 이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하지만 야심차게 전시회를 준비하던 세라핀은 다시 좌절한다. 대공황의 어둠이 몰려오던 때였다. 작품을 완성할 때마다 기쁨의 목소리로 부르던 세라핀의 성가는 더 이상 들리지 않고 알 수 없는 중얼거림만 내뱉는다. 우데가 다시 세라핀을 찾은 것은 1935년 클레르몽 정신병원. 드디어 전시회를 열고 세라핀의 작품을 팔았지만 그 소식을 전하지 못한 채 발걸음을 돌린다. 한번도 미술교육을 받지 않았지만 자생적인 예술적 영감을 표출하는 이른바 소박파(Naive Art)의 대표 화가, 혹은 '상리스의 세라핀'으로 불린 그녀의 첫 개인전은 1945년 파리에서 열렸다. 클레로몽 정신병원에서 아무도 지켜보는 이 없이 그녀가 숨진 지 3년 뒤였다.

 

밀리 디킨슨(에나 벨/신시아 닉슨)의 자리는 원래 거기였다. 홀리오크 학교에서 2학기가 끝났을 때, 크리스천이 돼 구원받고자 하거나 구원받기를 희망하는 학생들을 분류했던 왼편과 오른편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은 혼자만의, 가운뎃자리. 결국 집으로 돌아온 후 심방을 온 목사가 가족들에게 모두 무릎을 꿇고 기도하도록 했을 때 혼자 꼿꼿이 앉아 끝내 눈을 감지 않고 정면을 응시하며 버틴 정중앙의 자리. 학교 교장의 말대로 "비난 속에 불타는 지옥에 갈", "거룩하신 하나님께 맞선 죄인"으로 호명되며 그녀는 "넌, 가망이 없다"의 진단을 받는다. 하지만 '깨닫지도 못한 죄를 회개'하기를 거부한 그녀는 "내 영혼은 나의 것"이라고 힘주어 말한다.

생전에 10편 미만의 시를 발표한 19세기 미국 시인 에밀리 디킨슨의 시는 사후 1천7백여편이 발견됐다. 미국 시에 깊이와 성찰성을 부여함으로써 에드거 앨런 포, 월트 휘트먼과 함께 미국 시의 특징을 형성했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태어나고 자랐던 메사추세츠 주의 애머스트 집 밖으로는 거의 나가지 않은 고립과 폐쇄의 삶을 살았던 은둔자, '과격한 개인주의자'였다. 영국의 테렌스 데이비스 감독이 만든 <조용한 열정>은 '소중한 영혼의 독립성'을 지키기 위한 그녀의 평생에 걸친 사투를 나직하게 펼친다. 드라마틱한 성장의 서사도, 놀랄 만한 반전의 이벤트도 준비하지 않는 시인의 전기영화를 보기 위해서는, 시를 읽기 위해 그러한 것처럼 잠시 숨을 고르는 시간의 멈춤이 필요하다.

베르메르의 회화를 보는 듯한 정지의 순간을 수시로 선사하는 영화지만, <조용한 열정>이 그려내는 19세기 후반의 세상은 특히나 예술적 천재를 지닌, 삶에 치열하고자 하는 여성에게 가혹하다. 에밀리는 종교와 가부장제라는 이중의 억압 속에서 세상과 정면으로 맞부딪치는 것-끝내 장렬한 패배로 마무리될-의 무의미를 일찌감치 간파한다. 여성 시인의 섬세한 감수성과 지적인 통찰력을 두고 "무조건 독자의 동정심에 호소하는 비참한 문학"이라는 악담이 논평의 이름으로 버젓이 실리는 세상 자체를 어찌할 수는 없다. 하지만 평생 뜨개질을 하거나 빵을 구우면서, 아이들을 돌보며 사는 여성의 삶으로부터 스스로를 배제시키는 것은 그녀의 선택지에 있었다. ​

그러니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새벽 3시부터 동 틀 때까지 홀로 깨어 시를 쓰는 시간과, 평생 의지하며 살아갈 동생 비니(로즈 윌리엄스/제니퍼 엘) 등 가족들의 사랑뿐. 더 이상 줄일 수 없는 최소의 간결함으로 삶을 정돈한 그는 은둔을 선택함으로써 세상과의 불화를 공식화하고 이를 삶의 방식으로 천명한다. 영국 빅토리아 시대 가부장 중심의 억압적인 문화에 맞섰던 여성 작가들, 조지 엘리엇과 에밀리 브론테, 샤를롯 브론테 자매들에게 강한 연대의식을 가졌던 그녀는 보수적 가부장이되, 자녀들 정신적 영혼의 자유에 관한 한 관대했고 더불어 경제적 부 또한 확보됐던 아버지 에드워드(키스 캐러딘)의 집으로 자신의 거주 및 활동 범위를 제한하는 구금 혹은 유폐를 스스로 단행한다.

"난 아무도 아니에요. 당신은 누군가요. 당신도 아무도 아닌가요. 그럼 우린 같은 처지네요. 말하진 말아요. 사람들이 알면 쫓아낼테니. 누군가가 된다는 건 너무 우울해요. 개구리처럼 사생활이 없거든요. 종일 늪을 향해 제 이름을 외쳐대니..." '소리 내 싸우는 용감함'보다 '내면에서 싸우는 슬픔의 기병대의 용감함'으로 살아온 에밀리 디킨슨의 삶은 매우 '조용'했으나 격렬한 '열정'으로 추동되는 것이었다. 시(詩)라는 넓은 세상, 거친 영혼의 대지에서 소신과 고결함(integrity)을 갈망했던 시인은 온 몸을 파고드는 극심한 고통에 결국 길지 않은, 그렇다고 아주 짧지만도 않은 삶을 내어준다. 사랑하는 많은 이들을 떠나보냈던 이별의 고통, 점차 추악해지는 세상에 대한 안타까움으로, '영원의 두 갈림길에 다다른 여정'은 그렇게 끝이 났다.

랑스의 화가 세라핀 루이와 미국의 시인 에밀리 디킨슨의 삶을 그린 두 편의 영화 <세라핀>과 <조용한 열정>은 영화가 다른 예술 장르와의 만남으로 성장해온 예술이며, 다른 예술의 아름다움을 보다 많은 이들에게 쉽게 전할 수 있는 매체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직접 증명해낸다. 살아 숨쉬는 듯한 세라핀의 그림 속 이파리, 꽃송이들은 ​화폭과 영화 스크린마저 뚫고 나와 보는 이의 몸을 휘감을 것 같다. 체온을 나누는 누군가도, 경제적 여유도 허락받지 못한 삶이었지만 천상의 소리를 좇아 화폭에 스스로를 담은 세라핀 루이의 작품들은 <세라핀>을 보는 시간을 잠시 미술관의 그것으로 바꾼다. 때로 영화 스크린이 대가의 캔버스로 작동한다는 예술적 쓰임을 과시하는 것이다.

에밀리 디킨슨의 시들은 <조용한 열정>의 화면 좌우에 사뿐히, 혹은 꽃잎 떨어지듯 후두둑, 자리잡는다. 에밀리 디킨슨의 각성 혹은 상념을 이끄는 어떤 사건의 전후로 제시되는 이 장면들에서 신시아 닉슨의 목소리로 낭송되는 그의 시들은 영화를 설명하는 '영상시집'이라는 표현을 수긍하게 만든다. 시를 위한 멈춤의 시간, 시적 사유를 위한 서사의 중단, 시적 감흥을 위해 충실하게 기능하는 이미지적 공헌이 돋보이는 장면들은 그 자체로 시인 에밀리 디킨슨의 작품세계와 그녀 삶의 서사를 완성하는 중요한 고리들로 영화적 밀도를 높인다. 세라핀 루이의 예술가적 열정, 고결함을 위한 에밀리 디킨슨의 분투와 공감하는 '그림을 위한 영화', '시를 위한 영화'는 그렇게 만들어진다.

1차 세계대전과 미국 남북전쟁이라는 현실의 광포함을 뼈저리게 느끼며 신체적, 정신적 고통을 곁에 두었던 두 예술가는 종교적 헌신과 종교로부터의 자유를 각각 택했다. 세라핀이 삶을 옭죄는 경제적 궁핍과 사회적 소외를 자연과의 합일로 해소하고자 했다면, 에밀리 디킨슨은 가족과 집이라는 최소의 공간 속에서 해방을 모색했다. 여성 예술가에 관한 전기영화적 성과로서 두 편의 영화는 남성과의 로맨스로 환원되거나, 예술가-여성의 전형성에 포박되지 않는 한 개인의 삶을 강렬하게 그린다. 세라핀 루이와 에밀리 디킨슨은 폭력의 시간, 불화하는 세상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통과하며 오로지 예술로써 자신을 증명하고 결국 자신을 살아낸 단독자적 인간으로 각인된다. /영화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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