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무엇으로 사느냐고 묻는다면...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 질문했던 톨스토이의 탐구는 살아가는 모든 이들의 화두이다. 어떻게 살아야 인간인가, 인간다움의 존엄함을 잃지 않은 채 어떻게 살 수 있을까... 이어지는 질문 앞에서 늘 답은 묘연하다. 많은 이들이 바라 마지않는 모든 것들을 가진 이들조차 번번이 삶의 곤경 앞에서 무기력하게 항복하고 마는 현실을 생각할 때 더욱 그렇다. 지구 정반대 편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 루시 워커의 <웨이스트 랜드>(2010)와 이승문의 <땐뽀걸즈>(2016)를 보면서 이 골치 아픈 문제를 풀 수도 있지 않을까, 더불어 예술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까지 덤으로 얻으면서 말이다.

라질 태생으로 뉴욕에서 활동하는 현대 미술가이자 사진작가 빅 무니즈는 ‘브라질의 피카소’로 불린다. 설탕과 다이아몬드, 실, 초콜릿 시럽 등 고정관념을 깨는 일상적 소재를 통해 대담하고 재기발랄한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배타적이고 제한적인 순수 예술의 영역에서 벗어나 예술과 사회적 과제의 결합을 추구하는 그는 2008년 리우데자네이로로 향한다. 매일 7천 톤의 쓰레기가 버려지는 세계 최대 쓰레기 매립지 자르딤 그라마초. 마약 밀매단이 지배하는 빈민가에 둘러싸여 있고, 사회에서 거부당한 사람들이 모여드는 위험한 곳이다. 그곳에서 재활용 쓰레기를 모아 먹고 사는 카타도르(스페인어로 ‘벌꿀을 채취하는 사람’)의 초상사진을 찍기로 한다.

영국 출신의 다큐멘터리 감독 루시 워커가 작업한 <웨이스트 랜드>는 “예술이 사람을 바꾸는 경험을 선사하고 싶다”는 빅 무니즈의 예술가적 비전을 동력으로 한다. 그런데 “그들에게 소중한 것을 초상화 작업을 하면서 찾아주고 싶다”는 그의 의지는 분명 일상의 가치와 의미를 스스로 발굴하거나 능동적으로 기획할 수 없는 이들의 예술적 무능력 혹은 배제를 전제하는 것이다. 또한 “그들이 어떤 이미지를 보여주고 싶은지 궁금하다”는 말에서도 자신이 선택한 인물들을 대상으로 탐구하고 모색하려는 호기심이 드러난다. 이는 그가 줄곧 비판해온, ‘다른 사람들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끔찍한 계급차별’로부터 그조차 자유롭지 못하다는 혐의를 조심스레 불러일으킨다.

그렇다면 이 프로젝트와 영화는 마치 메시아처럼 찾아온, 외부자의 방문을 계기로 한 타율적 성장 및 각성의 서사로 귀결될 수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빅 무니즈 자신도 품었을 이러한 우려는 거대한 산 같은 쓰레기 더미, 자르딤 그라마초에서 카타도르들을 만나는 순간 자연스레 해소된다. 환하게 부서지는 밝은 미소의 이지스와, “우린 미래를 생각해야 해요” 힘주어 말하던, 마키아벨리와 니체를 좋아하는 그라마초의 지식인 줌비, “마음을 담아 열심히 일한다면 많은 걸 이룰 수 있다”는 카타도르 협회 대표 티앙, 코파카바나에서 몸 파는 것보다 더 흥미롭고 정직하며 고귀한 일을 하고 있다는 마그나 등은 엉망으로 꼬인 삶마저 거뜬히 이겨내는 열정으로 그 스스로를 아름답고도 존엄한 피사체로 우뚝 세운다.

멀리선 작업에 찌든 일개미들처럼 보이지만 카메라 렌즈 속에서 ‘자부심을 갖고 전문적으로 일하는 사람들‘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카타도르들은 자신들을 먹여 살렸지만 또한 외면하고 싶기도 했던 쓰레기 하치장에서 재활용품을 챙겨와 거대한 설치미술 작업에 참가한다. 자크 루이 다비드의 <마라의 죽음>을 티앙이 재연한 작품에서 배경은 슬리퍼, 깡통, 부서진 의자, 생수병 등 온갖 쓰레기들로 가득 차며, 밀레의 <씨 뿌리는 농부>를 재연한 줌비는 풍요로운 쓰레기 밭을 일군다. ’쓰레기통에서 피어난 꽃’, 쓰레기 아트Junk Art의 아름다움을 과시하는 자신들의 사진 작품 앞에서 모델이자 창작자였던 카타도르들은 감동에 몸을 떤다. “가끔은 스스로를 하찮게 여기지만 세상은 우리를 아름답다고 하죠.” 30년 전 그라마초에서 인생을 시작했던 이르마의 눈에서도 눈물이 흐른다.

“누군가를 도울 방법을 찾는 제가 교만하게 느껴졌어요. 누가 누굴 도와요. 작업으로 도움 받은 건 그들이 아니라 저였죠.” 모든 것이 끝난 뒤 이루어진 빅 무니즈의 인터뷰 장면은 쓰레기 하치장에서 피어났던 꽃이 아름다웠던 진정한 이유를 잘 말해준다. 예술적 재현의 주체와 대상이 경계를 없애고 서로에게 열정을 전이시켰던 창작의 과정은 빅 무니즈에게도, 카타도르들에게도 의미 있는 삶의 시간으로 남았다. 누군가는 그곳을 떠나고 누군가는 다시 돌아온다. 이런저런 부침 속에도 삶을 이어가기 위해 끈질기게 버티는 시간들이 있다면 그 곳이 어디든, 세상의 끝으로 내몰린 냄새나는 곳이어도, 누구에게나 당당히 밝힐 수 있는 삶의 터전이 되는 것이다.

 

 

제여자상업고등학교 체육 과목을 맡으면서 댄스 스포츠반을 이끌고 있는 이규호 교사에게는 빅 무니즈의 야심찬 기획 같은 건 없다. 그는 그저 학교에 맘 붙이지 못하고 떠다니는 것 같은 아이들이 안타까웠고, 그들의 발이 학교라는 대지를 꿋꿋이 딛고 설 수 있도록 하는 어떤 핑계나 명분 같은 게 필요하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그것이 춤이었다. 음악에 맞춰 몸을 놀리는 것, 정해진 리듬과 규칙에 따라 내 몸을 이리저리 통제하는 것, 그 체험은 분명 즐거운 것이지 않은가. 그렇다면 어쩔 수 없이 나오지만 정말이지 나오고 싶지 않은 학교마저도 즐겁게 다닐 수 있지 않겠는가 생각했다.

단순해 보이지만 한국의 교육현실을 생각할 때 차라리 원대하다고도 할 수 있을 이규호 교사의 계획은 적중했다. 수업시간에 아이스크림을 먹고, 성냥개비에 불 붙여 그을린 자국으로 눈썹을 올리거나, 담요 깔끔하게 깔고 숙면을 취하던, 불성실하고 무기력하고 낙오병처럼 보이는 나른한 실업계 여고생들은 더 이상 없다. 차차차와 삼바의 음악이 흐르는 방과 후 체육관에서 초롱초롱한 눈으로 동작을 반복하며, 세상 다 가진 것처럼 까르르 웃음을 터뜨리며 열심히 스텝을 밟는 춤꾼들로 변신한다. 학교에서 제일 많이 웃는 시간, 엄청 힘들지만 엄청 재미있어서 결석도 지각도 좀처럼 하지 않고 열심히 학교를 오게 만드는 시간인 것이다.

텔레비전 다큐로 기획되고 먼저 방송됐지만 내용을 보충해 극장영화로 개봉한 이승문의 <땐뽀걸즈>에서 먼저 눈길을 끄는 건 학생들에게 삼겹살을 구워 먹이고, 중국음식과 피자, 치킨을 사다 먹이며 귀갓길에 천 원짜리 지폐를 차비로 건네는 이규호 교사의 무조건적 지지와 격려의 태도이다. 땐뽀반 학생들은 저렇게까지 해도 되나 싶을 만큼 스스럼없이 이교사에게 말을 걸고 스킨십을 한다. 제멋대로인 막내딸을 그저 사랑으로 거두는 아빠와 같은 시선이 고파서, 어려운 가정환경을 뒤늦게 알고서 “그런 것도 모르고 춤추자고 해서 미안하네...아이고 참, 마음 아프네” 말해주는 따스함이 고마워서 땐뽀반 아이들은 힘들어도, 알바하느라 빠듯한 시간을 내면서도 스텝을 밟고 턴을 한다.

<땐뽀걸즈>의 카메라는 종종 하늘로 올라가 여기저기 크레인들이 솟아 있고 컨테이너들이 늘어서있는 부두를 내려다본다. 혹은 자전거를 타고 직장으로 향하는 많은 노동자들 무리를 가만히 지켜본다. 거제 조선소 구조조정이라는 매몰찬 바람이 휩쓰는 그곳에서 찾아오는 손님을 감당 못해 딸의 도움을 청했던 누군가의 아버지는 앞치마 두른 채로 멍하니 텔레비전만 보는 시간이 늘었다. 또 누군가의 아버지는 요리사 자격증을 따기 위해 서울 학원으로 올라가고, 누군가는 언제 퇴원할지 모르는 엄마 대신 어린 동생들을 거두기도 한다. 알바가 끝난 새벽 2시 반에 귀가한 누군가는 그나마 학교도 가지 못하는 동생과 살아갈 방도를 심각하게 고민하기도 한다.

땐뽀반의 춤추기는 이처럼 자신들을 둘러싼 퇴락과 배제, 소외의 환경에 맞선다. 서툴기에 더욱 맹렬한 상승과 도약, 생명의 에너지로 만연한 우울, 하강의 기운과 충돌하는 것이다. 길 가면서도 스텝을 밟고, 모자란 부분을 어떻게든 채우려 애쓰는 땐뽀반의 춤을 보며 종종 울컥하게 되는 것은 바로 그 충돌이 빚어내는 어떤 감흥 때문이다. 사실 청주에서 열린 전국 상업경진대회에서 얻은 성과도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닐 수 있다. 하지만 당장 한 발자국조차 내딛지 못할 만큼 다리에 힘이 풀려본 사람이라면 안다. 아무리 작은 무대에서라도 웃음을 잃지 않고 스텝을 밟는 것이 얼마나 아름답고 대견한지. 그러니 미안하고도 감사한 마음으로 이들의 춤을 계속 응원하게 되는 것이다.

콜릿 시럽, 설탕 등으로 그려낸 빈민의 초상으로 현대 작가의 반열에 올랐다는 빅 무니즈의 그라마초 프로젝트에 찬사만 뒤따른 것은 아니다. 카타도르에게 헛된 희망을 심어준 것이 아니냐는 비판의 목소리도 있었던 것. “단 2분 만이라도 원래의 자리에서 벗어나 다른 세상과 사람들을 볼 수 있다면 모든 것이 바뀐다”는 신념으로 자신의 작업을 설명하는 빅 무니즈는 이렇게 답한다. “다시 돌아와 쓰레기를 줍게 된대도 어쨌든 이들의 삶은 이제 달라졌다. 그 다음 선택은 그들의 몫이다.” 조선소에 취직하거나 돈 버는 데 쓰일 것도 아닌 차차차, 삼바를 가르치는 이규호 교사도 말한다. 웃으면서 가르칠 수 있고, 춤추면서 학교 재미있게 다니는 아이들이 있다. 그러면 충분하지 않은가.

예술 작품이 아니라 창작과정 전체를 더 중요시하며, 그 과정에서 만나는 모든 인간과 대상을 예술 작품의 범위 속으로 끌어들이는 빅 무니즈의 예술적 비전은, 성과 우선의 교육현장에서 온전한 수평적 소통을 바탕으로 ‘함께 함’의 즐거움과 가치를 끌어내는 이규호 교사의 교육관과 조응한다. “애들 잘 가르쳐서 사람 되게 만들어 가지고 졸업시켜 주는 게 의무”라는 그는 전국의 동아리들이 실력을 겨루는 무대에서 내려온 학생들의 떨림과 아쉬움을 달랜다. “한 마음 한 뜻이 됐다. 그러면 됐다. 그 다음, 잘했다 아이가?”라는 그의 말에는 한 줌의 거짓도, 한 뼘의 과장도 들어있지 않다.

<땐뽀걸즈>에서 미운 오리새끼는 백조로 변신하지 않고, <웨이스트 랜드>의 사람들 대부분도 원래의 자리로 돌아온다. 삶의 모든 곤경을 해소하는 성공 신화에 대한 영화적 기대가 취소된 자리에서 다만 하찮고도 작은 성취가 주는 온전한 기쁨을 만날 뿐이다. 시간에 쫓겨 가며 열심히 스텝을 밟던 시간, 열렬한 박수를 이끌어냈던 그 시간의 경험으로 많은 것이 바뀌었다. 비참하거나 강퍅한 삶에 맞닿은 예술이 만들어내는 강력한 힘을 체험한 그라마초의 카타도르들에게 모든 것은 그 이전과 같지 않다. 잘 하는 게 아닌데도 열심히 하라고 봐주는 사람이 있어 무언가를 해냈던 뿌듯함을 기억하는 한 땐뽀반 친구들에게도 인생은 충분히 살아볼 만한 것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영화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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