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합니다...사랑합니다...”

옹이 박힌 손이 얼굴 가까이만 와도 진저리를 쳤다. 그 손으로 속 고쟁이를 열심히 더듬어 사탕 한 알 입안에 넣어주거나 잔뜩 구겨진 지폐 한 장 손에 쥐어줄 때도 괜스레 심술 맞게 굴었다. 잔소리 대마왕인 누구처럼 공부해라, 치워라 닦달하지도 않았던 할머니에게 우린 왜 그렇게 못되게 굴었을까. 그리 못되게 굴었으면서 또 왜 그리 그리워할까. 이정향의 2002년 작품인 <집으로...>와 이소현의 2015년도 다큐멘터리 <할머니의 먼 집>은 할머니와 함께 했던 시간을 담는다. 그 짧았던 여름날은 쑥스러운 반성문으로, 짧지 않았던 마지막 날들은 애절한 러브레터로 완성된다.

“인사 드려. 외할머니셔.” “그게 뭔데?” 외할머니(김을분)를 소개하는 엄마의 말에 상우(유승호)는 심통을 부린다. 분명 오는 동안 할머니에 대한 설명을 엄마로부터 들었으니 그새 잊어버렸을 리는 없다. 하지만 상우의 심통 맞은 반응을 배운 데 없고 버르장머리 없는 어린 것의 철부지 소행으로만 생각할 수도 없다. 무려 일곱 살 먹는 동안 단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던 할머니 아닌가. 어쩜 열아홉에 대처로 나왔다는 엄마는 할머니가 계시다는 말조차 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그러니 외할머니라는 사람, 그 낯선 ‘그게’ 대체 뭐란 말인가.

할머니의 얼굴은 일곱 살짜리 상우나, 민소매 원피스가 잘 어울리는 젊은 엄마의 피부와는 전혀 다르다. 받아쓰기하던 종이를 마구 구겨놓은 듯 이리저리 주름이 가득한데, 검은 얼룩 같은 것마저 군데군데 있다. 허리가 반으로 접혀 걸음걸이도 불편한데 가뜩이나 말도 하지 못한다. 더욱이 사방을 둘러봐도 파란 하늘, 초록색 산과 풀 뿐, 텔레비전도 피자도 없고 게임기 배터리도 살 수 없는 이 낯설고 재미없는 곳에 달랑 떨어진 처지. 무서워서 밤에 혼자 변소도 갈 수 없고, 장에 가려고 나섰다가도 길을 잃고 만다. 엄마랑 살면서도 늘 혼자 지내버릇했던 상우가 집에 보내달라고 울고 떼쓰기를 포기하는 대신 할 수 있는 건 그러니 할머니 괴롭히기밖에 없다.

이정향의 <집으로...>에서 일곱 살 어린 상우는 나름 평온했던 77살 할머니의 삶의 공간을 마구 휘젓는 낯선 침입자, 무례한 폭군이 된다. 벌레 한 마리에도 자지러지는 서울 소년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가혹한 생활의 변화에 따른 스트레스는 온전히 할머니 몫이 된다. 평생 간직해온 은비녀를 뽑히고, 살뜰하게 써왔던 요강이 박살나고, 없는 형편에 씨암탉 사오느라고 비에 젖은 온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려 와도 싫은 내색 하나 없이 손주의 응석과 고약한 행패를 다 받아준다. 큰 나무처럼 묵묵한 수긍과 너른 벌판 같은 관용의 몸짓은 수선스럽지도 않다. 평생 그러했던 것처럼, 그저 받아주고 품어주는 것이다.

받는 이의 몰염치를 부끄럽게 돌아보게 하는 그 모성애적 헌신이 있어 상우는 게임기와 켄터키 치킨의 세계로부터 미친 소와 백숙의 세상에 비로소 발을 내딛는다. 입가에 검은 소스를 묻히며 혼자 맛나게 자장면을 먹은 상우 눈에도 뒤늦게야 물만 들이켰던 할머니의 허기가 들어온다. 손주 간식을 위해 먼 길을 타박타박 걸어오는 할머니의 짐을 선뜻 받아드리고 세월의 손때 묻은 보자기 안에 내일 먹자고 남겨둔 초코파이 하나 몰래 넣어두는 잔머리를 쓰기도 한다. 여전히 짧게 자른 앞머리를 탓하며 울고, 촌스러운 운동화를 내팽개치기는 해도 고장 난 게임기와 함께 곱게 담은 천 원짜리 지폐 두 장을 들고 엉엉 울만큼 어린아이다운 시간이 그렇게 지나간다.

이제 상우는 긴 팔 긴 청바지 차림으로 버스를 타고 다시 엄마와 서울로 간다. 눈 나쁜 할머니를 위해 있는 대로 실도 꿰놓았지만 올 때처럼 심통 맞기는 매한가지여서, 차창을 두드리는 할머니를 외면한다. 그리고는 버스가 떠난 뒤에야 뒤쪽으로 뛰어가 가슴에 원을 그리며 미안하다고 말한다. 글도 모르는 할머니가 혹시 아프거나 자신이 보고 싶어질 때 보내라고 ‘아프다’와 ‘보고십다’ 그림엽서도 몇 장 그려드렸건만, ‘미안하다’는 말 한 마디를 끝내 하지 못한 상우를 태운 버스가 먼지를 일으키며 멀어져간다. 미안하다는 말을 제대로, 늦지 않게 하기에는 아직 많이 어리던 그때, 상우는 겨우 일곱 살이었다.

 

안 사정으로 외할머니 손에서 자란 이소현 감독은 무서우면 할머니(박삼순)를 가장 먼저 찾던 아이였다. 할머니가 해주는 옛날이야기를 정말 좋아하던 아이는 자라서 공부를 하느라, 취직자리를 찾느라 할머니를 점점 찾지 않게 됐다. 그러다가 아흔 셋의 할머니가 자살을 시도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장례비용으로 쓰라고 전 재산 30만원을 곱게 화장대 위에 올려놓으시고 수면제를 먹었던 할머니가 자신을 떠나지 못하도록 지키기 위해 그는 그해, 2013년 여름 순천으로 내려간다. 그리고 영화를 찍기로 한다. 영화제에서 상영된다면, 할머니의 삶의 아름다움을 많은 관객들이 보고 박수를 치고, 할머니께서 그 모습을 보신다면 할머니가 다시는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겠지, 생각했다.

“할머니, 왜 죽을라 그랬어?” 선풍기 튼 마루에서 할머니와 낮잠을 즐기고, 고장 난 시계 대신 새 시계를 사 드리기도 하고, 같이 아이스크림도 사 먹는 시간이 얼마쯤 지났을 때 문득 감독은 할머니에게 묻는다. “아이 성가신께.” 여전히 총기 좋고 피부도 고운데, 깔끔하고 부지런하신 할머니는 그렇게 말한다. “나이가 이러고 많은께 죽어야지. 다 죽어부렀는디...나이가 아흔 셋이나 먹었당께. 모두, 이모랑 엄마랑, 울 어미는 어째 안 죽는고 그럴 것이여...참말로 올해는 꼭 죽어야쓴디...” 그렇지만 외할머니가 세상에서 가장 좋았다는 손녀는 아직 그럴 때가 안됐다. “그러지 말고 나랑 같이 오래 살아야지. 할머니, 내가 영화 열심히 찍을 테니까 보고 돌아가셔. 그 전에 돌아가시면 안돼.”

하지만 누구도 피해가지 못할 죽음의 그림자는 어김없이 닥친다. 위암 수술 받고 요양하며 할머니와 함께 살던 큰 외숙, 박삼순 할머니의 큰아들이 갑작스런 사고로 세상을 뜬다. 이렇다 할 극적 사건 없이 찍히고 마무리될 것처럼 보였던 다큐멘터리 제작이 본격적인 궤도에 들어서게 된 것도 이 때부터였다. “이 집 가서 손주 키우고, 저 집 가서 손주 봐주고, 평생 좋은 일만 하며 살았다”는 박삼순 할머니의 삶에 가장 큰 위기국면이 닥쳐온 것이다. 일흔 초반에 훌쩍 떠나버린 큰아들의 빈자리를 황망해하며 할머니는 막걸리를 들이켠다. 암수술 후에도 소주를 끊지 못했던 아들을 생각하며, 그토록 좋아하던 술을 대신 마시며 그리움을 달래던 아흔 넷의 노모는 결국 알콜 중독에 이른다.

이소현의 <할머니의 먼 집>을 보는 것은 결코 흔쾌하거나 즐거운 것이 될 수 없다. “얼른 돌아가셔야지”, “저승으로 시집 갈란다”, 죽음이 삶과 뒤섞이는 말들은 들어도 들어도 친숙해지기 어렵다. 늙고 쇠약해져 걸핏하면 넘어지고 부딪쳐 여기저기 피가 나거나 검붉은 딱지가 앉은 노인의 육체를 바라보는 것도 힘겹다. 살아계시거나, 돌아가셨거나 간에 부모님,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했던 시간을 떠올릴 수밖에 없으니 대부분 철부지 응석받이 불효자였던 이들은 손수건 없이 영화를 보는 것도 불가능하다. 어둠 속 혼자 지내는 노모, 혹은 할머니를 요양병원에 모시는 문제를 놓고 벌어지는 가족회의 장면은 누구도 예외를 장담할 수 없는 현실이자 미래이기에 보기에 버겁다.

<할머니의 먼 집>에서 박삼순 할머니의 삶은 평범했다. 마지막 날들 또한 그러했다. 쇠약해진 몸을 겨우 가누며 죽어가는 화분에 물을 주며 “살려나, 죽을려나” 노심초사하고, 생전 안 피던 마당의 들꽃을 보며 하느님이 아들 대신 보내준 선물이려나 설렌다. 세상에서 할머니를 가장 사랑하는 손녀의 카메라 렌즈에 담긴 그 모습은 아름답고 숭고하다. 보잘 것 없고 무기력하고 무의미한 날들이 아닌, 하루하루 반짝이는 햇살처럼 생기와 의미가 충만한 날들로 박삼순 할머니의 마지막은 기록된다. 힘들었던 겨울을 잘 보내고 모처럼 기운을 되찾은 아흔 다섯의 봄날, 구경나온 할머니는 말한다. “구경 잘했다. 어디 먼 데 구경 온 놈 맹이로...징그럽게 좋다. 참말로...”

국영화가 소란스럽고 떠들썩하게 21세기를 열던 그때, 조용하게 많은 이들의 눈시울을 적신 <집으로...>는 뒤늦게 철든 손주가 과거를 회상하며 쓴 쑥스러운 반성문이었다. 너무 어려서 그랬다고, 그때는 어쩔 수 없었다고 변명할 때마다 더욱 화끈거리는 얼굴로, 깊어지는 죄책감으로 반성문은 작성된다. 그 모든 행패와 포악을 다 거두었던 ‘어머니의 이름으로’, 말없이 주기만 하는 나무의 헌신은 어김없이 부끄러움과 죄책감을 불러일으킨다. 말없이 바라보아주고, 모르는 새 따스하게 쓰다듬어주던 거친 손이 있어 비로소 성장의 대지로 진입할 수 있었던 고마움이 그 이면에 있다.

그렇다고 해도 발언권을 빼앗긴 무기력한 피해자와 철없어 더욱 맹렬했던 포악스런 가해자의 구도 속에서 놓쳐버린 화해의 순간이 아쉽지 않을 수 없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할머니에게 보내는 절절한 러브레터, <할머니의 먼 집>이 더욱 반가운 건 그 때문이다. 아흔 다섯의 박삼순 할머니는 환갑 넘은 큰 딸은 몰라봐도 손녀 이름에는 반응을 보인다. 세상에 둘도 없는 절친, 박삼순 할머니와 이소현 손녀는 서로에 대한 애정으로 쇠약해진 노년의 날들을 함께 건넌다. 일곱 살 상우처럼 부러 떼를 쓰거나 맘에도 없는 행패를 부리지 않는 어른으로 이소현 감독은 곱게 한복 차려입은 할머니와 사진을 찍고, 알콜을 청하는 할머니의 속을 헤아려 함께 막걸리를 마시고 불콰해진 얼굴로 한낮의 무료를 견딘다.

대신 일곱 살 어린 아이 눈에는 보이지 않던 노년의 민낯이 다 자란 손녀의 시선에는 고스란히 드러난다. 사랑을 나누어 자라게 했던 자식들에게조차 짐이 되는 노년, 견뎌내기 고통스럽고 번거로운 노년의 삶의 무게는 카메라를 통해 낱낱이 클로즈업된다. 어떨 때는 보기 힘들고, 많은 경우 보아 넘기기 불편해서 외면하고 싶은, 많은 이들에게 짐이 되는 삶이 거기 있다. 하지만 할머니를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손녀의 눈에 마지막 나날들은 결코 숭고함을 잃지 않는다. 죽음과 나란히 등을 맞댄 할머니의 삶은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살아있음의 시간에 놓여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존중받아야 할 가치와 의미로 손녀의 카메라에 기록된다. “할머니 얼굴, 참 예쁘네요.” <집으로...>가 제때 하지 못했던 사랑의 말은 <할머니의 먼 집>에서 늦지 않게, 또박또박 전달된다. /영화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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