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을 생각하며>

 자유부인과 즐거운 사라

 

-마광수는 절규합니다.
 "위선이 없는 대한민국, 
 그 나라를 보고 싶다"고.
 또 사람들은 말합니다.
 "사회가 그를 죽였다"고-

 

6·25 전쟁 휴전 이듬해인 1954년 아직 화약 냄새가 가시지 않은 시기에 때 아닌 ‘춤바람 파동’이 온 사회를 풍미(風靡)했습니다. 한 신문에 연재되던 소설 ‘자유부인’이 선풍을 일으키면서 장안을 온통 쑥덕공론 장으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대학교수의 부인으로 평범하게 살아가던 한 가정주부가 어느 날 동창회 모임에 나갔다가 자유로운 삶을 사는 친구들을 만나면서 자신과는 다른 세상을 사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녀는 양품점에 취직을 하고 집 근처에 사는 남편의 제자로부터 춤을 배우면서 이성에 눈을 뜹니다.

그리고 유부남을 만나 댄스홀에 드나들면서 점점 친밀해지고 아슬아슬하게 가정 파탄의 위기에 이르지만 남편의 아량과 이해로 자신의 탈선을 뉘우치고 다시 가정으로 돌아간다는 것이 소설의 줄거리입니다.  

1954년 1월 1일부터 8월 6일까지 215회에 걸쳐 서울신문에 연재됐던 이 소설은 신문 부수를 늘리는데 크게 기여했을 만큼 인기가 높았고 연재가 끝나 책이 출간되자 출판사상 처음으로 14만 부가 팔려 단박에 베스트셀러가 됩니다. 책이 나오고 순식간에 인기가 폭발하자 당국은 이내 미풍양속을 해친다며 금서(禁書)로 규정해 판매를 금지시킵니다.

‘자유부인’ 열풍이 사회에 파장을 일으키자 법학자인 황산덕 서울대 교수는 “정비석은 문화의 적이요, 중공군 2개 사단, 50만 명에 필적하는 적”이라고 비난하는 글을 신문에 썼고 대학교수단과 여성단체가 들고 일어나 “나라를 망친다”고 성명을 발표하는 등 여론이 들끓었습니다.

사회적 논란이 커지자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이승만 대통령은 특무대(지금의 보안사)에 명을 내려 직접 조사를 지시했고 조사관들은 “김일성의 지시로 남한을 음란 퇴폐하게 만들어 적화를 기도한 것 아니냐”고 추궁합니다. 이 사건은 워낙 파장이 커져 미국과 일본, 북한에까지 전해져 신문에 대서특필되기도 했습니다.

‘자유부인’은 1956년에 영화로도 나와 서울에서만 11만 관객을 동원해 엄청난 대박을 터뜨립니다. 당시로서는 상상할 수 없던 숫자였습니다. 영화는 논란을 일으킨 작품답게 소설과 마찬가지로 비난을 받아야 했고 결국 마지막 키스신이 문제가 돼 상영금지 처분을 받습니다. 키스신이라고 해봤자, 서로 상체를 맞잡은 남녀가 얼굴을 대는 척하는 모습을 뒤에서 찍은 싱거운 장면뿐이었고 베드신이 나오는 것도 아닌, 요즘 영화에 비하면 영화도 아닌 신파극 수준의 그저 그런 내용이었습니다. 지금 시각으로 본다면 따분하기까지 한 어설픈 연출이었지만 당시로서는 대담하게 ‘불륜’이라는 금기를 소재로 했다는 그것만으로도 순진한 부부들의 가슴을 뛰게 했고 호기심을 자극하는데 적중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원작자인 정비석은 친북행위자라고 잡혀 들어가 영화 개봉을 보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 영화는 사회에 던진 충격이 컸던 작품이라고 해서 현재 등록문화재 347호로 등재돼 문광부 산하 한국필름보관소에 소장돼 있습니다. 그야말로 지난 시절 우리 사회를 웃긴 아이러니입니다.

당시 ‘자유부인’이 사회에 쇼크를 일으킨 것은 정숙해야 할 가정주부, 그것도 근엄한 대학교수의 아내가 불륜의 주인공으로 설정되고 미국에서 갓 들어온 ‘댄스’라는 말초신경적인 신체접촉을, 그것도 가까이해서는 절대 안 될 남편의 제자를 등장시킨 점등이 사회에 충격을 주었던 것입니다.  

평론가들은 “봉건적 질서와 전통적 가치가 팽배해 있던 당시 미국 문화의 유입에 따른 전후 한국 사회의 과도기적 혼란상을 잘 드러낸 작품”이라고 평합니다. 그것은 구시대의 안개가 걷히기 시작하던 1950년대 대한민국 현대사의 해프닝이었던 것입니다.

마교수는 전시회를 열만큼 그림도 잘 그렸습니다. 글이 그러하듯 그림 역시 직설적이고 해학적인 터치로 사람들을 즐겁게 해 주었습니다. /Newsis

문단의 고독한 이단자(異端者) 마광수 전연세대 교수가 자택 베란다에서 목을 매 자살했다는 소식은 그의 지나온 행적을 아는 모든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마광수는 1951년생으로 연세대 국문과를 수석입학, 수석 졸업하고 전 학년 장학생을 놓치지 않으면서 윤동주 시인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한 것만으로도 그의 천재성은 여지없이 입증됩니다. 청록파 시인 박두진의 추천으로 문단에 등단하고 28세에 홍익대 교수로, 32세부터는 연세대 교수로 승승장구합니다. 그러나 마 교수는 1991년에 발표한 소설 ‘즐거운 사라’를 계기로 자신의 인생에 치명적인 족쇄를 차게 됩니다.

그를 나락으로 끌어내린 소설 ‘즐거운 사라’는 성에 대해 보수적인 한국 사회에서, 프리섹스를 추구하는 자유로운 여대생 사라가 여러 유형의 남성들과 온갖 섹스를 맘껏 즐기며 쾌락을 추구한다는 내용입니다. 이 작품이 파란을 일으키며 논란이 돼 사회문제가 되자 마 교수는 강의 중에 학생들이 보는 앞에서 경찰에 연행되는 수모를 당합니다.

검찰은 1992년 10월 ‘즐거운 사라’를 음란물로 규정해 기소했고 재판부는 1심에서 “사회의 건전한 도덕성과 성(性) 질서를 문란케 한다”며 징역 8월에 집행유예 2년형을 선고합니다. 대법원 또한 1995년 “작가가 주장하는 성 논의의 해방과 인간의 자아확립이라는 전체적인 주제를 고려한다고 하더라도 음란한 문서로 해당된다”고 유죄를 확정합니다. 제자들이 “마광수는 옳다”는 탄원서를 내 항의하고 “마 교수를 인도와도 바꾸지 않겠다”는 플래카드를 교정에 내 걸어 응원했지만 학교 역시 사법부의 판단을 핑계로 면직처분을 내립니다.

마 교수는 ‘표현의 자유’를 주장하며 강력히 항의했지만 허사였고 세간의 인식 또한 소수계층을 제외하곤 그의 편이 아니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마광수는 교수직에서 해임을 당했다 어렵사리 다시 복직하지만 또 해임을 당하는 수난을 거듭합니다. 그런 와중에 교수사회와 문단에서 조차 ‘왕따’를 당하고 설 자리조차 잃은 데다 경제력마저 어려워지고 우울증까지 앓게 되면서 그의 인생은 점점 지쳐갑니다.

천재들이 흔히 그러하듯 마광수 역시 남이 뭐라 하던 타인을 의식하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고집스럽게 썼습니다. 그는 또 자신이 직접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소설 ‘돌아온 사라’를 내고 “높으신 분들, 하느님 찾는 분들, 엘리트님들이 낮에는 근엄한 목소리로 마광수 죽여라 해놓고 밤에는 룸살롱에 간다”며 사회의 이중성과 위선을 질타하면서 “나는 쾌락설로 한국문화를 잠에서 깨운 작가로 기억되고 싶다”는 말로 목소리를 높입니다.

마광수, 그는 솔직한 사람입니다. 자기가 보고 느끼고 체험하고 상상했던 일을 솔직하게 직설로 표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남들이 캄캄한 방에서 온갖 행위를 벌이고 다음 날 아침이면 시침을 떼고 근엄한 인격자로 돌아가는 것을 거부하고 인간이 할 수 있는 그 일들을 적나라하게 표현한 것이 죄라면 죄였습니다. 그에게는 사회윤리도, 도덕도 모두가 양(羊)의 탈을 쓴 위선일 뿐이었습니다. 그는 “죽기 전에 대한민국이 솔직해지는 것을 보고 싶다”며 우리 사회의 허위의식과 이중성을 질타했습니다.

자유민주사회란 다양한 의견과 주장이 있는 게 정상입니다. 표현의 자유는 헌법에도 보장된 민주주의의 기본이요, 개인의 고유한 권리입니다. 1992년 마 교수를 단죄한 재판관은 “10년 뒤에 웃음거리가 되더라도 법에 따라 판결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자유부인’이든 ‘즐거운 사라’이든 한 시대를 뒤흔들었던 그 어떤 일이라 해도 세월이 흐르고 보면 부처님 손바닥에서 재주를 부린 손오공의 그것과 무엇이 다를까, 생각을 해봅니다. 결국은 한 시대의 ‘코미디’일 뿐인데.

마 교수의 부음에 어떤 이들은 “도대체 예술과 외설의 경계가 어디냐?”며 “편협한 우리 사회가 한 천재를 죽였다”고 탄식하고 또 어떤 이는 “마광수야 말로 시대의 희생자”라고 뒤늦은 안타까움을 표합니다.

누군가, “반 발짝만 앞서가야지, 많이 앞서가면 돌을 맞는다”고 했습니다. 한데 마광수는 너무 앞서 갔습니다.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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