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간다

경제적 안정과 사회적 지위, 그 밖의 많은 걸 갖고 있는 중년의 지식인과, 어떤 것도 내 것으로 확정짓지 못한 불안한 청춘. 미아 한센-러브의 <다가오는 것들>(2016)과 노아 바움백의 <프란시스 하>(2012)에서 두 주인공 여성의 처지는 파리와 뉴욕만큼, 어쩌면 그보다 더 멀다. 하지만 삶의 곤경은 때와 장소, 사람을 가리지 않고 무시로 찾아오기 마련. 그럴 때 온전히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기 위해 삶의 항상성, 균형감 확보에 고군분투하는 치열함으로 두 여성은 하나의 지점에서 만난다.

“새로운 사람이 생겼어.” 25년 동안 두 아이 키우며 결혼생활을 함께 했던 남편 하인츠(앙드레 마르콩)는 “그 사람이랑 살 거야”, 단호하게 말했다. 덕분에 나탈리(이자벨 위페르)의 일상의 평화는 충분히 훼손됐는데, 그마저 부족했던지 또 하나의 이별이 더해진다. 낮밤을 불문하고 지속적인 보호와 돌봄을 요청했던 신경 쇠약의 엄마(에디뜨 스꼽)가 영원히 딸의 곁을 떠난 것. 여름마다 아이들과 추억을 만들던 브르타뉴 해변의 별장을 마지막으로 찾고, 철학 교사였던 부부가 함께 채웠던 빼곡한 책장 반이 비어버린 공허를 감당하는 것, 늙고 뚱뚱해서 아무도 돌보려 하지 않는 엄마의 고양이 판도라를 알레르기에도 불구하고 맡아야 하는 일이 그녀에게 남았다.

나탈리에게 ‘다가오는 것들’(영화의 영어 제목 ‘Things to come’) 혹은 희미하게 형체를 드러내며 그녀를 기다리는 ‘미래’(불어 제목 ‘L’avenir’)는 친절하지도 상냥하지도 않다. 철학을 발견하도록 학생들을 돕는 데 헌신했던 교사로서의 역사와 정체성은 연금개혁 반대 시위로 교문을 가로막은 어린 학생들의 힐난과, 시대적 추세와 수익을 명분으로 한 교과서 집필진 퇴진으로 흔들린다. 신망 있는 철학 저자로 성장한 고등학교 제자 파비앵(로만 코린카)마저 ‘한때 공산주의자였던 68세대’ 스승에 대해 ‘참여 지식인을 자처하는 보수적 중산층 엘리트’라고 공격한다. 그러니 한때 자신의 것이었고 나탈리 자체였던 혁명적 급진성조차 이미 자신의 몫이 아님을 인정할 밖에.

나탈리는 어디 갈 때마다 무거운 판도라를 들고 다닌다. 아름답지만 짧았던 모델로서의 시간을 떠나보내지 못하고 평생 결핍과 상실에 잠식된 엄마를 피로감 속에서도 돌봤듯, 고양이 알레르기에도 불구하고 판도라를 챙긴다. 아무도 데려가려하지 않는 늙은 검은 고양이에 대해 나탈리는 ‘영화와는 달리 현실에서 여자가 쓸모없어지는 나이 40살’을 훌쩍 넘어 수시로 눈물 흘리고 어깨를 들썩이는 자신과 동병상련의 느낌을 갖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파비앵의 산골 대안 공동체를 찾아간 날, 엄마와 10년 사는 동안 거세당했을 줄 알았던 야생본능을 단 하루 만에 회복한 판도라는 생쥐를 물고 당당히 귀환한다.

판도라처럼 야생본능은 없지만, 나탈리에게는 책이 있다. 지하철에서도 바람 부는 산등성에서도 어디에서도 책을 읽는 나탈리는 책과의 동행, 철학적 사유와 함께 살아왔고 여전히 그 덕분에 모든 ‘다가오는 것들’과 함께 그녀 자신으로 살아간다. 가슴 떨리는 희열과 묵직한 각성, 숭고한 감흥을 안겨주었던 루소, 아도르노, 솔제니친, 호르크하이머, 부버와의 만남은 현재진행형이자 또 다른 ‘다가오는 것들’이 될 것이며, 『급진적인 패배자』, 『행복론』, 『팡세』,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어려운 자유』와 함께 하는 ‘미래’는 그녀의 충만한 상태를 지속시켜 줄 것이다.

“애들은 독립했고, 남편도, 엄마도 떠났지. 나는 자유를 되찾은 거야. 한 번도 겪지 못했던 온전한 자유. 놀라운 일이야. 이건 낙원이잖아!” 책과 함께 한 오랜 시간이 있어 나탈리는 풍요로운 삶의 대지에 안정적으로 착지하는 경이로운 삶의 균형감을 허락받는다. 품에 안은 어린 손주의 따스한 체온을 느낄 때, 나탈리에게 상처 주었지만 대신 판도라를 입양한 파비앵의 바람처럼 ‘깊은 평화’(도노반의 노래 ‘Deep Peace’)는 그녀에게 이미 있다. ‘개탄할 상태’에서도 ‘진정한 선을, 그것을 따르기를 온전히 바라는 마음’(파스칼, 『팡세』)은 ‘관능적 쾌락을 보충하고 대체하는 진정한 위안을 주는 가상적 만족’(루소, 『신 엘로이즈』)으로 오늘도 충만하다.

 

욕 브루클린의 반더빌트 거리 682번지에 살고 있는 프란시스(그레타 거윅)는 출판사 직원인 룸메이트 소피(믹키 섬너)와 함께 “세계를 접수할 거야!” 호언장담하는 27살의 무용수. 하지만 무용단 견습 단원으로 대역 처지를 면치 못하면서 아이들 발레 수업으로 버는 푼돈으로 근근이 버티던 중, 당장 길바닥에 나앉게 될 처지가 된다. 함께 지내자는 남친의 제안을 거부하고 아예 헤어져버리기로 한 날, 소피가 다른 집으로 나가겠다고 선언한 것. 혼자 힘으로는 방 한 칸 구할 수 없는 프란시스의 동가식서가숙, 지상의 방 한 칸을 찾아 헤매는 고단한 여정이 시작된다.

차이나타운의 근사한 아파트에서 예술 활동에 정진하는 누구처럼 부자인 부모에게서 태어나지 않았으니, 발레단의 주역으로 늘 무대에 서는 재능도 타고나지 못했으니 무엇 하나 확실하지도, 분명하게 갖고 있지도 못한 때를 프란시스는 지나고 있다. “제 직업이요? 설명하기 힘들어요. 진짜 하고 싶은 일이긴 한데, 진짜로 하고 있진 않거든요.” 모호하기만 한 그의 말이나, “어떻게 지내니?” 질문에 늘 “잘 지내요” 큰소리치는 허세는 프란시스가 번번이 자신을 빗겨가는 행운에 맞서는 생존본능이다. 덕분에 프란시스는 종종 허황된 거짓말을 일삼는 민폐녀의 처지가 된다.

프란시스는 차이나타운의 캐서린가 2번지에서 캘리포니아 새크라멘토의 카멜리아 거리 214번지로, 다시 뉴욕 포킵시의 사서함 59968로 떠돌아다니다가 뉴욕 워싱턴 하이츠의 오듀본 거리 97번지에 가까스로 정착한다. 더 이상 춤을 추지 않는 대신 무용수들의 동작을 기획하고 구상하는 안무가로서 첫 발을 내딛게 된 그녀는 ‘프란시스다운 작품’을 무대에 올려 격려의 박수를 받는다. 이대로 감동적 작품으로 명성을 높이는 유명 안무가가 될지, 혹은 ‘사무직으로 늙어가는 옛날 무용수’가 될지는 여전히 모르는 채로.

시계제로의 현재에서 불투명한 미래를 향해가는 만만찮은 여정에서 프란시스는 개별적 존재로서 자신의 독자성을 인정받는 온전한 독립을 위해 고군분투한다. 남자친구와의 관계에도 적극적이지 않았던 프란시스는 하우스 메이트였던 남성들과 친밀한 인간관계를 유지하면서도 성적인 관계 형성의 의지를 보이지 않는다. 혹은 ‘섹스 안 하는 레즈비언 커플’인 소피와의 우정과 사랑의 줄타기에서조차 로맨스를 자신에게 주어진 선택지로 받아들이지 않는 태도를 보인다. 로맨스의 지평 혹은 성애적 결합으로서의 결혼제도 저편에서 오로지 자기 자신으로 직립하는 것에만 몰두한다.

175센티미터의 키와 중성적 매력의 그레타 거윅이 그리는 ‘갈대처럼 마르지도, 백합처럼 청초하지도 않은’(그레타 거윅의 인터뷰) 20대 후반 여성의 초상은 여전히 불안정하며, 항상성을 위협하는 현실의 취약성에 고스란히 노출돼있다. 그런 점에서 ‘프란시스 할러웨이’라는 이름이 다 들어가지 못한 채 중간에 꺾인 아파트 우편함의 이름 ‘프란시스 하’는 이중적이다. 자신을 온전히 세상에 드러내지 못하는 불안한 정체성의 현재를 환기하는 동시에, 언젠가 ‘할러웨이’라는 이름이 온전히 펼쳐질 미래를 향한 의지를 북돋는 희망을 제시하는 것이다.

은 체구에도 태산 같은 존재감을 과시하는 프랑스 여배우 이자벨 위페르가 연기하는 나탈리는 자존감을 훼손하고 삶에 대한 믿음을 위협하는 온갖 불행과 불운 앞에서도 의연하고 품위 있다. 책과 함께 하는 중년 여성의 미장센은 그 어떤 성적 매력에도 뒤지지 않을 숭고한 아름다움을 과시한다. 철학적 사유의 단단함으로 온전히 자신을 방어하고 구축하는 지적인 여성의 인상적인 여정을 함께 하는 체험 또한 관객으로 하여금 미답의 경지를 답사하는 듯한 만족을 안겨준다. 이자벨 위페르 필모그래피를 한층 풍요롭게 한 미아 한센-러브의 <다가오는 것들>은 여성 재현의 한 지평을 새롭게, 인상적으로 개척한 흥미로운 성과로도 오래 기억될 것이다.

뉴욕의 밤거리를 겅중겅중 뛰거나 텀블링하면서 온 몸으로 ‘프란시스다움’을 발산하는 그레타 거윅의 존재감 또한 창백한 아름다움이거나 요란한 성적 어필 속에서 고갈돼가던 여성 캐릭터에 대한 상상력을 제대로 부활시킨다. 1960년대 누벨바그의 시대를 연상시키는 고즈넉한 흑백 화면 속 고전하는 청춘의 초상이 우울에 잠식되거나 비관의 포로가 되지 않는 약동하는 생기는 그레타 거윅이라는 배우의 현존으로부터 나온다. 그로 인해 온갖 자명한 불투명성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어도 우리만 아는 세계’를 만들기 위한 프란시스의 분투에 대한 성원은 미래로 나아가는 뭇 청춘들에 대한 낙관 어린 지지로 이어진다.

전혀 다른 외양과 연기 스타일에도 불구하고 <다가오는 것들>과 <프란시스 하>에서 두 배우들의 존재감은 걷고, 달리거나 산을 오르는 등 다양한 움직임에 몰두할 때, 그리고 버스와 지하철을 타고 이동하는 과정 속에 놓였을 때 가장 인상적으로 빛난다. 공원에서 짧은 점심을 즐기는 뉴욕의 프란시스가 펼치는 자유분방한 몸놀림과, 나탈리의 고즈넉한 감상과 풍경에 대한 완상이 삶의 예찬이 되는 것은 어딘가를 향하는 그녀들의 지치지 않는 걷기에서 비롯된다. 제 자리에 멈춰서 우울과 피로의 노예가 되기를 거부하고 늘 어딘가로 발자국을 내딛는 이들의 충만한 의지가 있어 존재의 활력과 품위가 빛난다. /영화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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