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을 생각하며>

노블레스 오블리주

 

 -지도층의 사회봉사는
   유렵의 보편적인 문화.
    지난시절 우리나라에도
   '최부자집' 미담이 있었는데
   오늘 현실은 어떻습니까-

 

올해 나이 91세인 영국의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1952년 즉위(卽位)한 이래 올해까지 65년을 재위중입니다. 영국 왕실 역사상 최장수를 기록 중인 여왕은 많은 일화를 갖고 있지만 2차 세계대전 때 여군으로 입대해 참전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전쟁 막바지였던 1944년 18세의 엘리자베스 공주는 아버지 조지 6세에게 “전쟁에 직접 참가해 기여하고 싶다”고 간청을 합니다. 여성 국방군(WAT)의 중위로 군 생활을 시작한 공주는 적십자 구호트럭을 운전하며 다른 병사들과 다름없이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궁정에서 그림을 그리고 악기를 연주하던 손으로 공주가 흙바닥에 앉아 트럭 바퀴를 갈아 끼우고 엔진을 수리하는 빛바랜 흑백사진은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영국 왕실이 전쟁을 통해 국가에 봉사해 온 역사는 전통이 돼 왔을 만큼 오래되었습니다. 엘리자베스 여왕의 아버지인 조지 6세는 젊은 시절 해군으로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전공을 세웠고 남편 필립공 또한 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습니다. 장남 찰스 왕세자 역시 해군 장교로, 둘째 앤드루 왕자는 1982년 포틀랜드 전쟁 때 헬기 조종사로, 셋째 에드워드는 해병대 장교로 전쟁터에 나갔습니다. 또 손자인 월리엄은 공군 헬기 조종사로, 그의 동생 해리왕자 또한 2007년 아프간에 파병되어 전투소대장으로 근무했습니다. 

오늘날 군주제에 관해 일부 비판론이 없는 건 아니지만 엘리자베스 여왕이 영국 국민들로부터 과거와 다름없는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는 것은 그와 같은 왕실 구성원들의 국가에 대한 봉사와 희생, 즉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이 인정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560년 전통의 영국 최고 명문 이튼 칼리지의 본관 건물 벽에 1·2차 세계대전에서 전사한 이 학교 출신 1905명의 이름을 새겨놓은 것 또한 영국인들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보여주는 상징물입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란 프랑스어로 ‘고귀한 신분(귀족)’이라는 노블레스와 ‘책임이 있다’는 오블리주가 합해진 말인데 1808년 프랑스 정치가 피에르 마르크가 처음 사용한 것으로 ‘높은 사회적 신분에 상응하는 도덕적 의무’를 뜻합니다. 뉴에이스 영한사전에는 “높은 신분에 따르는 정신적 의무”라고 설명하고 있고 민중서림의 불한사전에는 “양반은 양반답게 처신해야한다”로 풀어쓰고 있습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역사는 멀리 2000년 전 로마시대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 로마에서는 병역의무를 실천하지 않은 사람은 호민관이나 집정관등의 고위공직자가 될 수 없었습니다. ‘로마인 이야기’의 저자 시오노 나나미는 “로마제국의 위대한 문화를 지탱해 준 힘은 바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도덕과 철학”이라고 적고 있습니다. 유럽의 모든 선진국에서는 상류층의 국가에 대한 봉사나 헌신은 보편화되어있는 일반적인 현상이요, 문화입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군복을 입은 18세의 엘리자베스 공주가 병영에서 밝게 웃고 있다. /Google

그들의 후손인 미국인들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도 유럽인들을 능가합니다. 마이크로소프트의 빌게이츠,  페이스 북 창업자 마크 저커버그, 투자의 천재 워렌 버핏 등 오늘날 미국의 세계적 부호들이 앞 다퉈 수십, 수백 조의 재산을 아낌없이 사회에 내놓고 있는 것은 바로 그들 조상들의 고귀한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입니다. 늦게 알려진 이야기이지만 1950년 한국전쟁 당시 미국의 참전 용사들 중 142명의 병사가 미군 장성들의 아들이었다는 사실은 새삼 우리를 놀라게 합니다. 

그런가 하면 중국의 최고 권력자 마오쩌둥(毛澤東)의 장남 마오안잉(毛岸英)이 한국전쟁에 참전해 북한에서 전사한 사실 또한 6·25 비사 중의 하나입니다. 

과거 역사를 돌아보면 우리나라에도 사회를 위해 봉사한 훌륭한 인물이나 가문들이 많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경주 최부자집’ 일화입니다. “100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는 가훈에 따라 이를 실천한 최씨 일족의 선행은 그 사례를 쉽게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훌륭합니다. 

경주 최씨 가문의 12대, 300년에 걸친 이 이야기는 우리 민족의 자랑스러운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표상입니다. 조선 선조 때 사람 최진립(1568~1636)은 무신(武臣)으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공을 세우고 여러 관직을 두루 거친 인물로 그 이후 12대 최준에 이르기까지 대대손손 부를 일구고 가꿔 1970년대가 되도록 끊임없이 사회에 적선(積善)을 해왔습니다. 

최진립에서 시작된 ‘최부자집’의 선행은 손자인 3대 최국선 대에서 본격적으로 행해집니다. 최국선은 “재물은 거름과 같습니다. 재물을 나누면 세상을 이롭게 하지만 움켜쥐면 썩습니다”라는 어느 스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은 바 있어 어려운 이들을 위한 나눔을 실천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최국선은 1671년 현종 때 흉년이 들어 농민들이 빌려간 장리(長利) 쌀을 갚지 못하자 아들 최의기를 불러 담보 문서를 갖고 오게 해 모두 불태워 버리는가 하면 보리가 여물지 않은 늦은 봄 보릿고개에 주민들에게 곡식을 나누어주고  배고픈 걸인들에게는 죽을 쑤어 먹이곤 했습니다. 최국선은 더 나아가 소작 수입의 3분의 1은 아예 따로 떼어 빈민구제에 썼습니다. 

최부자집에는 대대로 전해 온 여섯 항의 가훈(家訓)이 있었습니다. 그 내용은 ①“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은 하지 말라”하였으니 과거에 합격해 양반 신분은 유지하되 관직이나 정치에는 나서지 말라 함이요. ②“재산은 만석 이상 늘리지 마라.” 한해 소작료 수입을 1만 석으로 미리 정해 그 이상의 것은 농민들에게 돌려주라는 것이고 ③“흉년에는 재산을 늘리지 마라.” 남들의 어려움을 틈타 내 이익을 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④“과객을 후하게 접대하라”하였으니 사랑채를 개방하고 길 가는 나그네를 배불리 먹여 후히 대접해 보내라는 것이었습니다. ⑤“사방 100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흉년이 들면 배고픈 이들에게 죽을 쑤어 먹이고 곳간 벽에 구멍을 뚫어 양식이 떨어진 이들이 밖에서 쌀을 퍼가게 했으며 빚진 이들의 차용증을 불태워 없앴습니다. ⑥며느리들은 시집와 “3년 동안 무명옷만 입어라”하였고 은비녀 이상의 패물을 가져 오지 못 하게 함으로써  겸손과 근검절약을 가르치고 실천했습니다. 

‘최부자집’의 아름다운 이야기는 조선시대를 거쳐 일제 식민지, 굴곡진 현대로 전해져 오면서 오늘 혼탁한 이 사회에 경종이 되고 있습니다. 

그럼 지금 우리 사회는 어떠할까. 사회지도층은 지도층 다운 제 역할을 하고 있을까. 그들은 국가에 대한 도덕적 의무는 제대로 이행하고 있으며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국민적 도리는 다  하고 있는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정권이 바뀌고 새 정부가 들어섰으니 이제 또 한 차례 ‘검증 태풍’이 불 것입니다. 국무총리를 비롯해 고위공직에 발탁되는 인물들이 국회의 인사검증을 받아야 합니다. 과연 이번에는 또 어떤, 어떤 인물이 검증의 중심에 서고 공세의 대상이 될지, 궁금합니다.

우리 사회는 이상하게도 잘 나간다 싶은 사람이면 어김없이 약점을 숨기고 있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부동산 투기, 위장전입, 불법증여, 탈세, 병역면제, 이중국적, 논문 표절, 과거 전력 등 추문에 얽매이지 않은 사람이 드믈 기만 하니 왜, 그럴까 참으로 의아스럽습니다.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 있느냐”는 반론도 있긴 하지만 국가의 중책을 맡을 사람이라면 먼저 도덕성이나 청렴성은 기본으로 갖춰야 할 최소한의 덕목입니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가 않으니 국민들이 실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재벌들 또한 예외가 아닙니다. 대통령 한 말씀에 쪼르르 몰려가 줄을 서고 수십억, 수백억을 푼돈 쓰듯 진상하는 권력 앞의 그 비루한 모습을 보면서 실망스럽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나라가 잘 되고 국민이 살기 좋은 나라가 되려면 먼저 지도층이 깨끗해야 합니다. 상탁하부정(上濁下不淨), 윗물이  더러운데 아랫물이 깨끗할 수 없습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생각하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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